비행운飛行雲
김형진
발코니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일없이 하늘을 본다. 너그럽게 펼쳐진 하늘이 시원하다. 아직 초봄인데도 하늘은 연청색으로 높이 떠 있다. 내리쬐는 햇볕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쳐다보는 하늘. 문득 그 넓게 펼쳐진 공간에 무엇인가 써보고 싶어진다. 앙금처럼 가라앉은 생각들을 떠올려 두서없이 끼적거려보고도 싶고, 누구에게든 긴긴 편지를 써보고도 싶고, 아니면 나 자신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낙서를 아무렇게나 갈겨보고도 싶고….
허공엔 새 한 마리 날아가지 않고, 하늘엔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다. 비어 있는 것이 주는 무료감無聊感이 눈꺼풀에 달라붙는다. 눈꺼풀이 차츰 무거워지더니 내려앉기 시작한다. 눈두덩에 힘을 주어 버티려 해도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다가 봄볕의 따뜻함에 몸을 맡기고 만다.
얼마쯤이나 졸았을까. 바람결이 제법 살랑살랑 얼굴을 스친다 눈을 드니 앞 동 옥상 위로 하얀 구름 한 덩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여름철에나 봄직한 뭉게구름이다. 소년 시절 앞산 위에 떠 있는 뭉게구름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새하얀 색이면서도 눈부시지 않은 색감과 앉으면 푹신하게 몸을 감쌀 듯해서 좋았다. 올라타면 손오공처럼 내달릴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이사해 처음 얼마 동안은 발바닥이 간질간질해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어쩌다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일어 견디기 어려웠다. 오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 않을 법도 한데 아직도 발코니 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가 겁난다. 구름 타고 내달리는 손오공의 환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린 지 오래다. 의자에 앉아 구름을 올려다보며 자질구레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구름은 어느새 떠올라 허공에 머물러 있다. 얼핏 보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떠올라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신기하다. 세월의 흐름을 한 순간도 감지하지 못하는데도 성장하고, 늙고, 시드는 현상이 저와 같을까.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봄날 한낮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내 몸도 흐름 속에 내맡겨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구름은 차츰 얇아져 속도를 낸다. 아까보다 더 높이 떠올라 동쪽으로 옮아가고 있다. 얇아진 만큼 중량감이 줄어서일까. 흐르는 게 눈이 잡힐 듯하다. 뭉게구름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흩어진 구름조각들이 속도감을 더한다. 저 속도로 흐른다면 얼마지 않아 동쪽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말 것 같다.
초등학교 적 운동회 때마다 연필 한 자루를 타보지 못했다. 백 미터 달리기에서는 한 번도 등수 안에 들어보지 못했고, 줄다리기에서는 있는 힘을 다했는데도 내 편이 질질 끌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겁을 내다 그르치고, 힘이 달려 놓치고만 꿈들. 가슴 속에 흩어져 기억조차 희미한 꿈들이 구름조각들과 함께 흐른다.
서가 있는 방에 들어가 책 한 권을 찾아 들고 다시 발코니에 나와 앉는다. 봄이 선사한 좋은 볕과 밝은 빛을 허비하기 미안해서다. 이제 구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활하게 펼쳐진 아득한 푸름이 가슴에 사무친다. 허허로움이 가슴에 가득찬다.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 본 적도, 위험을 무릅써 본 적도 없이 살아온, 그래서 무엇 하난 이루어놓지 못한 삶 아닌가. 내 몸이 검불처럼 떠오를 것만 같다. 저 아득한 푸름 속에 빨려들어 흔적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아 눈길을 거둔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드니 흐릿한 눈길에 하늘 한가운데를 가르며 남쪽으로 벋어가는 하얀 구름 한 줄기가 잡힌다. 비행운이다. 경쾌하게 벋어가는 비행운에 아득하던 정신이 번쩍 든다.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데 날아가는 흔적은 선명하다. 눈으로 비행운을 좇는다. 하늘 한가운데를 올곧게 그어가는 선이 아름답다. 높푸르기만 하던 하늘이 차츰 선명한 봄빛으로 물들어 간다. 지금이 삼월 하순, 저 봄빛이 땅으로 내려와 메마른 나뭇가지에 속잎을 틔우겠지, 가슴에 사무치던 허망함도 간데없다. 왼쪽 가슴에서 뛰노는 맥박이 귀에 들리 듯 두렷하다. 나무의자에 기대앉은 몸이 편안하다.
조금 후, 나무의자에서 일어서 안타까운 눈으로 앞 동 옥상을 넘어가는 비행운의 머리를 좇는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다. 머리를 잃은 꼬리마저 시나브로 바람에 흩어지고 있다. 흘러가는 세월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