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조(太祖) 왕자
목차
1. 태자(太子) 왕태(王泰)
2.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3. 증통국사(證通國師)
4. 대종(戴宗) 왕욱(王旭)
5. 안종(安宗) 왕욱(王郁)
6. 왕위군(王位君)
7. 인애군(仁愛君)
8. 원장태자(元莊太子)
9. 조이군(助伊君)
10. 수명태자(壽命太子)
11. 효목태자(孝穆太子) 왕의(王義)
12. 효은태자(孝隱太子)
13. 원녕태자(元寧太子)
14. 효성태자(孝成太子) 왕주림(王珠琳)
15. 효지태자(孝祗太子)
16. 태자 왕직(王稷)
17. 광주원군(廣州院君)
18. 효제태자(孝悌太子)
19. 효명태자(孝明太子)
20. 법등군(法登君)
21. 자리군(資利君)
22.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태조는 아들 스물 다섯을 두었다.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는 혜종을 낳았다. 신명왕태후(神明王太后) 유씨(劉氏)는 태자 왕태(王泰)·정종·광종·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증통국사(證通國師)를 낳았다.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는 대종(戴宗) 왕욱(王旭)을 낳았다.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는 안종(安宗) 왕욱(王郁)을 낳았다.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는 왕위군(王位君)·인애군(仁愛君)·원장태자(元莊太子)·조이군(助伊君)을 낳았다.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는 수명태자(壽命太子)를 낳았다.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는 효목태자(孝穆太子) 왕의(王義)와 효은태자(孝隱太子)를 낳았다. 숙목부인(肅穆夫人)은 원녕태자(元寧太子)를 낳았다.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는 효성태자(孝成太子) 왕주림(王珠琳)과 효지태자(孝祗太子)를 낳았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는 태자 왕직(王稷)을 낳았다.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는 효제태자(孝悌太子)·효명태자(孝明太子)·법등군(法登君)·자리군(資利君)을 낳았다.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는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을 낳았다.
○ 太祖二十五子. 莊和王后吳氏, 生惠宗. 神明王太后劉氏, 生太子泰·定宗·光宗·文元大王貞·證通國師. 神靜王太后皇甫氏, 生戴宗旭. 神成王太后金氏, 生安宗郁. 貞德王后柳氏, 生王位君·仁愛君·元莊太子·助伊君. 獻穆大夫人平氏, 生壽命太子. 東陽院夫人庾氏, 生孝穆太子義·孝隱太子. 肅穆夫人, 生元寧太子. 天安府院夫人林氏, 生孝成太子珠琳·孝祗太子. 興福院夫人洪氏, 生太子稷. 小廣州院夫人王氏, 生廣州院君. 聖茂夫人朴氏, 生孝悌太子·孝明太子·法登君·資利君. 義城府院夫人洪氏, 生義城府院大君.
1. 태자(太子) 왕태(王泰)
태자1) 왕태는 후손이 없었다.
○ 太子泰, 無嗣.
2.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문원대왕 왕정은 대왕으로 추증된 사유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은 광종의 딸인 아지(阿志)2)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어 기록에 그의 이름이 모두 빠져 있다
○ 文元大王貞, 史逸封贈之由. 子千秋殿君, 尙光宗女阿志, 君早卒, 史皆逸其名.
3. 증통국사(證通國師)
증통국사는 역사 기록에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 證通國師, 史逸其名.
4. 대종(戴宗) 왕욱(王旭)
대종 왕욱은 광종 20년(969)에 죽었으며, 아들이 효덕태자(孝德太子)·성종·경장태자(敬章太子)이다. 성종이 즉위한 후 그를 예성선경태왕(睿聖宣慶太王)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대종이라 하였으며 옛 무덤은 태릉(泰陵)이라 하고 태묘(太廟)에 부향(祔享)3)하였다. 목종 5년(1002) 화간(和簡)이란 시호를 덧붙였다. 현종 5년(1014) 공신(恭愼)이란 시호를 덧붙였고 18년에는 현헌(顯獻)이란 시호를 덧붙였다.
○ 戴宗旭, 光宗二十年卒. 子孝德太子·成宗·敬章太子. 成宗卽位, 追尊睿聖宣慶太王, 廟號戴宗, 卽故葬號泰陵, 祔享太廟. 穆宗五年, 加號和簡. 顯宗五年加恭愼, 十八年又加顯獻.
5. 안종(安宗) 왕욱(王郁)
안종 왕욱은 살던 집이 왕륜사(王輪寺)의 남쪽에 있었는데 경종의 비인 황보씨(皇甫氏)4)의 사저 근처였다. 경종이 죽자 그 비는 대궐을 나와 사저에 살았는데 왕욱과 사통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일이 발각되자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泗水縣 :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유배보내며, “숙부께서 대의를 범해 귀양가시니 몸가짐을 조심하여 애태우지 마시오.”라고 일렀다. 내시알자(內侍謁者) 고현(高玄)이 왕명으로 그를 압송하고 돌아가는 길에 왕욱은 이런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그대와 같은 날 서울을 떠났건만
그댄 먼저 돌아가고 나만 못 돌아가네.
여함(旅檻)5)에선 사슬에 매인 듯한 원숭이 신세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선 나는 듯 달려가는 말이 부럽기만 하네.
서울의 봄 그리는 마음은 꿈속에만 오가고
해변 고을 풍광에 눈물 옷깃에 가득하여라.
성주(聖主)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설마 어촌 갯가에서 평생 늙게 하시리오.
왕욱이 유배가 있을 때 황보씨는 해산하다가 죽었고, 성종은 유모를 뽑아 아이를 양육하게 하였다.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유모는 늘 그에게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곤 했다.
어느 날 성종이 아이를 불러서 보려고 했는데, 유모가 안고 들어가자 아이는 성종을 쳐다보며 아빠하고 불렀다. 또 성종의 무릎 위에 기어가 옷자락을 매만지며 다시 아빠라고 불렀다. 성종이 가엾이 여겨 눈물을 흘리며, “이 아이가 아비를 매우 그리워하는구나!”라 하고는 결국 아이를 사수현(泗水縣 :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보내어 왕욱에게 돌려주었다. 이 아이가 나중 현종이 되었다. 왕욱은 글을 잘 지었고 또 지리에도 정통하였다. 한번은 금 한 주머니를 현종에게 몰래 주면서 이렇게 일렀다.
“내가 죽거들랑 이 금을 술사(術師)6)에게 주어서 사수현에 있는 서낭당[城隍堂]7)의 남쪽 귀룡동(歸龍洞 :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와룡산일원)에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여라.”
성종 15년(996) 왕욱이 귀양지에서 죽으니 현종은 그의 말대로 장사지낼 때 엎어 묻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술사는, “무엇이 그다지도 바쁜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2월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왕위에 오르자 왕욱을 추증하여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였고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현종 8년(1017) 4월에는 건릉(乾陵)으로 이장하고 5월에는 헌경(憲景)이란 시호를 덧붙였다. 같은 왕 12년에는 효목을 효의(孝懿)로 고쳤으며 18년에는 성덕(聖德)이란 시호를 덧붙이고 뒤에 무릉(武陵)이라 호칭했다.
○ 安宗郁, 居第在王輪寺南, 與景宗妃皇甫氏私第近. 景宗薨, 妃出居其第, 郁遂烝有身. 事覺, 成宗流郁 泗水縣, 謂曰, “叔犯大義, 故流之, 愼勿焦心.” 命內侍謁者高玄押送, 玄還, 郁贈詩曰,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初流郁之日, 皇甫氏免身而卒, 成宗爲擇傅姆養其兒. 兒至二歲, 姆常誨之曰爺. 一日成宗召見, 姆抱以入, 兒仰視成宗, 呼云爺. 就膝上捫衣襟, 又再呼爺. 成宗憐之, 下淚曰, “此兒深慕父也!” 遂送泗水以歸郁. 是爲顯宗. 郁工文辭, 又精於地理. 嘗密遺顯宗金一囊曰, “我死, 以金贈術師, 令葬我縣城隍堂南歸龍洞, 必伏埋.” 成宗十五年, 郁卒于貶所, 顯宗如其言, 將葬請伏埋, 術師曰, “何大忙乎?” 明年二月, 顯宗還京, 及卽位, 追尊孝穆大王, 廟號安宗. 八年四月, 移葬乾陵, 五月, 加號憲景. 十二年, 改孝穆爲孝懿, 十八年, 加聖德, 後稱武陵.
6. 왕위군(王位君)
왕위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후손도 없다.
○ 王位君, 史逸其名, 無嗣.
7. 인애군(仁愛君)
인애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후손도 없다
○ 仁愛君, 史逸其名, 無嗣.
8. 원장태자(元莊太子)
원장태자는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아들인 흥방궁대군(興芳君大君)도 그 이름이 빠져 있다.
○ 元莊太子, 史逸其名. 子興芳宮大君, 亦逸其名.
9. 조이군(助伊君)
조이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후손도 없다.
○ 助伊君, 史逸其名, 無嗣.
10. 수명태자(壽命太子)
수명태자는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아들은 홍덕원군(弘德院君) 왕규(王圭)이다.
○ 壽命太子, 史逸其名. 子弘德院君圭.
11. 효목태자(孝穆太子) 왕의(王義)
효목태자 왕의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승려가 되었다
○ 孝穆太子義, 生一子, 出家.
12. 효은태자(孝隱太子)
효은태자는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으며 동양군(東陽君)이라고도 부른다. 성격이 포악하고 흉포한데다 소인배들과 사귀면서 반역8)의 뜻을 몰래 품자 광종이 그를 처형해버렸다. 왕림(王琳)·왕정(王禎) 두 아들을 두었는데 효은태자가 죽자 둘은 어린 탓으로 죽음은 면하고 도망쳐 민간에 숨어살면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갔다. 강조(康兆)가 정권을 잡자9) 임금에게 아뢰어 둘에게 작위를 주고 노비와 전장(田莊)도 지급했으며 종실 족보에 올려주었다. 왕림은 상서좌복야(尙書左伏射)를 지내다 죽었고, 왕정은 태자첨사(太子詹事)·상경거도위(上輕車都尉)를 지내다 현종 3년(1012)에 죽었으며 시호를 온결(溫潔)이라 하고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증되었다.
○ 孝隱太子, 史逸其名, 或稱東陽君. 性險戾, 交結群小, 潛懷異圖, 光宗賜死. 子琳·禎, 孝隱之死, 琳·禎以幼, 獲免逃竄, 糊口民間. 康兆用事, 奏授琳·禎爵, 給臧獲·田莊, 屬宗籍. 琳 尙書左僕射卒, 禎 太子詹事·上輕車都尉, 顯宗三年卒, 諡溫潔, 贈工部尙書.
13. 원녕태자(元寧太子)
원녕태자는 역사 기록에 그 이름이 빠져 있는데, 아들은 효당태자(孝當太子)이다.
○ 元寧太子, 史逸其名, 子孝當太子.
14. 효성태자(孝成太子) 왕주림(王珠琳)
효성태자 왕주림은 후손이 없었다.
○ 孝成太子琳珠, 無嗣.
15. 효지태자(孝祗太子)
효지태자는 사적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고 후손도 없었다.
○ 孝祗太子, 史逸其名, 無嗣.
16. 태자 왕직(王稷)
태자 왕직은 후손이 없었다.
○ 太子稷, 無嗣.
17. 광주원군(廣州院君)
광주원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다. 혜종 2년(945) 광주원군의 외조부인 왕규(王規)가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역모10)를 꾸미다가 처형당했으며 그도 역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 廣州院君, 史逸其名. 惠宗二年, 外舅王規, 欲立以爲王, 謀逆見誅, 君亦不知所終.
18. 효제태자(孝悌太子)
효제태자는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일찍 죽어 후손도 없다.
○ 孝悌太子, 史逸其名, 早卒無嗣.
19. 효명태자(孝明太子)
효명태자는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일찍 죽어 후손도 없다.
○ 孝明太子, 史逸其名, 早卒無嗣.
20. 법등군(法登君)
법등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일찍 죽어 후손도 없다.
○ 法登君, 史逸其名, 早卒無嗣.
21. 자리군(資利君)
자리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일찍 죽어 후손도 없다. 자리란 말은 나랏말로 막내아들을 말한다
○ 資利君, 史逸其名, 早卒無嗣. 資利, 方言季子.
22.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의성부원대군은 사적에 그 이름이 빠져 있고 후손도 없다.
○ 義城府院大君, 史逸其名, 無嗣.
각주
1 태자 : 원래 왕위를 계승하는 인물들의 칭호였으나 고려 초기에는 왕자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려 초기 태자의 칭호를 단순한 관작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고 국왕의 모든 아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였다고 파악되기도 하지만, 태자로 호칭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초기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호족통합의 일환으로 많은 호족의 딸들과 혼인하여 왕자들을 낳게 되자, 그 왕자들이 누구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태자로 불렀다. 그러다가 왕권이 안정되는 광종 때에는 왕자들을 태자라 부르지 않았다. 한편 고려 초기 왕자들의 칭호는 태자와 함께 대군(大君)·원군(院君)도 사용되었다.
김성준, 「종친부고」 『사학연구』 18, 1964.
변태섭, 『『고려사』의 연구』, 삼영사, 1982.
김기덕, 『고려시대봉작제연구』, 청년사, 1998.
2 아지(?~?) : 광종과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사이에 태어난 맏딸로,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千秋夫人]이 되었다. 『고려사』 권91, 열전4, 공주, 광종, 천추전부인전(千秋殿夫人傳) 참조.
3 부향 : 다른 이의 태묘(太廟)나 사당에 합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는 합제(合祭)를 말한다.
4 황보씨(?~992) : 대종(戴宗) 왕욱(王旭)의 딸로 경종 제4비가 된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 경종,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전(皇甫氏傳) 참조.
5 여함 : 우리에 갇힌 나그네 신세로, 안종(安宗) 왕욱(王郁)이 귀양 온 처지를 빗댄 것이다.
6 술사 : 천체의 운행과 자연의 변화양상을 살핀 다음 점을 쳐서 과거를 해석하고 길흉을 예측하는 점복 전문가를 말한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전한시대 말기를 거쳐 나타난 수술학(數術學)은 중국 초기 사상이 한대 유학과 결합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천지우주의 변화를 통하여 세계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학문이었다. 이런 수술학을 담당하던 전문가들이 술사였다. 이러한 중국의 경향은 고려 초기 유교적 지식인 최지몽(崔知夢)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천문과 복서(卜筮)에 정통하여 태조의 삼한 통일을 예언하였으며, 유성의 변화를 통해 변란의 기미를 혜종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술사 예방(藝方)이 천안(天安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부(府)를 설치하면 후백제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언하여 태조가 부를 두었다는 내용은 당시 수술학이 고려사회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최진묵, 『한대수술학연구—한대인의 천·지·인이해와 그 활용—』,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2.
7 서낭당 : 성황사(城隍祠)·성황신묘(城隍神廟)·성황신사(城隍神祠)라고도 하며,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을 봉안한 당우이다. 고목이나 돌무더기를 신으로 신앙하였으며, 해당 지역과 관련된 인물을 성황신으로 봉안하기도 하였다. 성황이란 국방상의 요충지에 축성하는 것이나 도성(都城)의 수호신인 성황신을 지칭하였으며, 성황신도 처음에 도시를 방어해 주는 신으로 신앙되다가 점차 지역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며 사후세계를 주관하는 신으로 인식되어 갔다. 중국에서는 북제(北齊)·당나라를 거쳐 송나라 때 보편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광종 때 유입되어 인종~의종 때 널리 퍼졌다. 고려조정에서는 각 지역에 성황신사를 설치하고 신의 칭호를 부여해 주었으며, 해당 지역의 수령과 향리들에게 관내의 성황신에게 제사를 관리하게 하고 그 비용을 충당하는 위전(位田)도 지급하는 등 국가적 제사로 운영하였다. 특히 외적의 격퇴나 정변의 진압 등 군사를 출정시킬 때 승리를 기원하거나 승첩에 보답하고, 이변이 있을 때 이를 제거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북제서(北齊書)』, 모용엄전(慕容儼傳)에는 “성 안에 우선 신사 한 곳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성황신이라고 하며 공적이든 사적이든 늘 기도한다(城中先有神祠一所 俗號城隍神 公私每有祈禱).”고 하였다. 고려시대 성황신사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63, 예지, 길례 소사, 잡사(雜祀) 참조.
김갑동, 「고려시대의 성황신앙과 지방통치」 『한국사연구』 74, 1991.
서영대, 「민속종교」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342~347쪽.
8 반역 : 효은태자(孝隱太子)세력이 서경(西京)세력과 연계하여 광종 7년(956)부터 단행된 개혁정치에 반발한 사실을 말한다. 광종 7년의 개혁정치에서는 정종(定宗)의 즉위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경·패서지역세력에 대한 숙청도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광종은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의 아들로 서경·패서세력과 연계되어 있던 효은태자를 제거하였다. 그러다가 서경 출신의 강조(康兆)가 목종 때 정권을 장악하면서 효은태자의 두 아들에게 관작과 노비 및 토지가 다시 내려졌다.
이태진, 「김치양난의 성격」 『한국사연구』 17, 1977.
9 잡자 : 목종 12년(1009) 2월 김치양(金致陽)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獻哀王太后] 황보씨(皇甫氏)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여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현종으로 옹립한 후 강조가 정권을 잡은 사실을 말한다. 강조의 정변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7, 반역, 강조전(康兆傳) 참조.
10 역모 : 혜종 2년(945) 왕규[王規·咸規]가 그의 외손자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일으킨 모반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왕규는 혜종의 장인으로 박술희(朴述熙)와 함께 혜종의 지지세력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그의 모반사건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왕규가 정치적 반대세력인 태자 왕요(王堯 : 정종)·왕소(王昭 : 광종)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혜종이 자신의 딸을 왕소와 결혼시키는 등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혜종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박술희와도 대립하게 되어 박술희를 제거하고 모반하였다는 견해(①)가 있으며, 다른 하나로는 왕규와 박술희가 혜종의 지지세력이었으므로 『고려사』의 서술이 정종·광종에 의해 왜곡된 내용이라 이해하고 왕규와 박술희가 정종과 왕식렴(王式廉)세력에게 제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②)도 있다. 왕규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 왕규전(王規傳) 참조.
① 김갑동, 「왕권의 확립과 호족」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② 백강녕, 「고려초 혜종과 정종의 왕위계승」 『진단학보』 82, 1996.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