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완 -
ㅡ형제들이여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바라노니 천상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자는 믿지 말라. 그리하여 나의 황홀한 몰락이 시작되었노라ㅡ
집 앞 놀이터를 떠나던 날,
나는 차창너머로 손을 흔드는 순이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나는 순이와 지낸 날들은 찢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날 산책길에서 진창에 빠져 채찍을 맞으며 허우적대던 말을 보면서 내가 물어뜯은
이 세상은 텅 빈 달팽이 등껍질 속으로 난 미로 같은 놀이터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마침내 순이에게 이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 그리고 이 곳, 자유로운 영혼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몰락의 도시는 새벽 어시장의 생선 비린내처럼 신선하였다. 은폐된 죽음속에 진화한 삶이 반복되는 이곳에서 나는 엄밀한 고증과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천형처럼 나를 옥죄던 가죽옷을 벗어던지고 드디어 우리가 그 장난감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늘 갖고 싶어 했던 그것이 되었다. 신비스런 원시종교 교주의 이름 같기도, 도심 속에 외딴 포장마차의 이름 같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들로부터 위버맨쉬, 짜라투스트라라고 불리었다.
시련의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고 어머니의 대지는 만물의 생명을 길러내고, 겨우내 무쇠처럼 머리를 짓누르던 하늘은 새 생명의 탄생으로 빛나는 나의 도시에는 고귀한 자도, 비천한 자도, 저주받은 자도 호흡이 있든 없든 새싹이 돋듯이 참을 수 없는 생의 의지로 넘치고 하루하루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푸른 나뭇가지들처럼 끝없이 다채로웠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좌판을 깔고 어떤 물건을 만들어 팔든 사든 금지된 것이 없는 이곳에는 어김없이 아침이 오면 눈뜨는 감각들처럼 날마다 마르지 않고 샘솟는 욕망들이 넘치는 물건들로 가득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정글 속을 더듬듯이 철지난 상품이 사라진 자리에는 유행에 맞는 신상품이 출시되었고 팔리지 않는 물건은 있어도 쓸모없는 물건은 없는 이곳으로 머지않아 북쪽의 도시로부터 죽음과 갈등을 가득 싣고 한 무리의 장사꾼들이 올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그들의 몫일 뿐 나는 날마다 시장바닥의 수레바퀴속 다람쥐처럼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몰락의 언덕위로 비천한 자들이 던지는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리며 걸어가던 저주받은 자와 마주친 후 나의 영혼은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마른 땅에 돋아난 연한 풀같이 볼품없는 그는 이 신성한 대지에 죽은 아버지를 몰래 묻으려다가 발각되어 해골이라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등위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짜라투스트라,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의 피 묻은 손안의 손금처럼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 수 천만 년 전 어두운 숲속의 나무둥지에서 내려오던 너의 털복숭이 손을 잡아준 것도 나였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짜라투스트라, 애초에 비천한 자, 노예들에게는 나약한 신은 필요가 없었고 오로지 초인을 원했다. 네가 쇠망치로 내리쳐 깨부순 것은 그들이 만든 교활한 신이 아니라, 네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혼자 걸어가다 만난 그 음울한 용(龍)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노예들은 신을 벗고 맨발로 마구마구 달리고 싶었다 이 땅위로, 어린아이처럼 춤추며 그 때마다 호되게 맞았다 진창에 빠지지 말라고
마지막 혼줄이 끊기기 전에 짜라투스트라는 이 편지를 끝맺기로 했다.
첫 사랑 순이에게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는 운명을 사랑한다고 혼자 끌어안고 울다가
정신줄을 놓지 말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남기고
짜라투스트라는 텅 빈 동굴같이 황홀한 그의 몰락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