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ㅡ실크로드. 둔황(敦煌)ㅡ막고굴(莫高窟).
▲둔황(敦煌) 막고굴 입구
둔황(敦煌)은 한(漢) 나라 때 ‘모래의 마을이라는 사주(沙州)’로 불린 도시입니다.
‘둔후앙(敦煌)’은 고대어로 ‘성대하고 찬란하다’라는 뜻입니다.
기원 전 한 무제(汉 武帝)가 서역 경영에 나설 때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둔황에 불교가 번지기 시작 한 것은 후한(后汉) 중기 때입니다.
이후 중국인들과 중앙 아시아인들이 마찰 없이 잘 지내면서 타림 분지에 번지던 불교도 번창했으나,
5호 16국을 거치면서 이 일대는 여러 민족 간의 다툼과 전란으로 얼룩졌습니다.
이 전란의 시기에 불교의 철학은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아 구원을 향한
불교 동굴 사원의 개굴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서역을 드나들던 대상들을 지원하던 재력가들은 석굴 사원을 만들어 부처님께 봉헌하고 상인들,
순례자들, 여행자들은 험난한 타크라마간 사막(塔克拉玛干沙漠)의 위험을 물리치고 무사히 여행하기를
기도하기 위해 석굴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후 북위(北魏)가 들어서면서 둔황도 그 영향권에 들었고(439년), 불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왕조에 의해 중국의
3대 석굴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불교가 중국에 보급되는 초기였는데, 둔황은 그로 인해 서역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불교경전, 불화, 문서 들을 수용하여 보급하는 불교의 포교지였으며, 중국에서 인도로 향하는 구법승들의 출발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토번(吐蕃, 7세기 후반), 위구르 왕국(911년), 서하 왕국(1036년), 몽골족(1227년)의 지배를 받았으며,
몽골 시대 때 동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슬람이 들어와 활발히 전해졌다,
대부분의 이슬람 위구르 왕국들을 지배하던 차가타이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슬람교도로 넘쳐나게 됩니다.
그 이후 모처럼 한족 왕국인 명(明) 나라 때는 지아위구안(嘉峪关)의 성문을 닫고
폐쇄정책을 쓰는 바람에 장성 너머 둔황은 그다지 중요성을 띠지 못하게 됩니다.
실크로드가 개척되고 둔황은 서역(西域) 북로(北路)로 가던, 서역(西域) 남로(南路)로 가든 사막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쉴 수 있는 도시이며 전초 기지로서 각광받았습니다.
고대 중국의 국경 도시였기에 중국과 다른 나라가 만나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장안(長安)을 떠나사람들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장을 세운 후 기후, 적국의 상태 등을 파악한 후 남로나 북로로 갈지 결정하게 되었다,
또 서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중국의 첫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장을 연 관계로 진귀한 물건과 돈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모래의 마을’에서
‘성대하고 찬란한’ 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중국 최고의 전성기 때인 당(唐) 나라 때는 아침, 낮, 저녁 등 세 번이나 장이 설 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유명한 막고굴(莫高窟)도 이 시기에 많이 건립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야 할 당시의 상황으로, 인간의 두려움 등이 종교로 발전하였고,
그 여파로 이곳에 많은 종교 사원이 생겼습니다.
본래의 둔황은 지금의 도시에서 남서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지금 그곳은 전부 밭이고흙으로 된
잔해들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둔황은 청(淸) 나라 때인 약 250년 전(1,725년)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원본출처 / premium Chosun.com
▲간쑤성 지도 / 원본출처 / naver 지식백과
▲ 중국전도속 감숙성 위치도
◈막고굴(모가오쿠. 莫高窟)
다통(大同)의 윈강 석굴(云崗 石窟), 루오양(洛陽)의 용문 석굴(龍門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의 하나인 막고굴은 둔황하면 떠오르게 하는 석굴입니다.
밍사산(鸣沙山) 기슭에 있으며 동쪽 언덕을 따라 약 1,600m에 걸쳐서 5층의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만들어 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둔황 연구원 발표에 의하면 진(秦) 나라 때인
서기 366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원(元) 나라 때까지 약 1,000년에 걸쳐 만들어 졌으며,
1,000개 이상의 굴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답니다.
이는 14굴에서 발견 된 ‘이회양중수막고굴불감비(李懷讓重修莫高窟佛龕碑)’의
비문 내용을 근거로 알려진것입니다.
이는 당(唐) 나라(698년) 때 이회양(李懷讓)이 석굴을 수리하면서 세운 기념비라고 합니다. 비문의 내용은,
이 지역을 돌아다니던 낙준(樂樽)이라는 수도승이 명사산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한 굴을 열었으며,
그때가 전진(前秦) 시대인 366년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낙준이 열었다는 굴은 보존되지 않고, 지금의 굴들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둔황 연구원이 발표하기로는 현재 굴은 492개, 벽화는 약 45,000㎡,
불상은 약 1,400여 개가 발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동굴별로 제작 시기가 거의 다 밝혀졌는데, 232개는 당(唐) 나라 때, 98개는 송(宋)나라 때,
79개는 수(隨)나라 때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제작 시기에 따라 벽화의 나타나 있는 복장 등의 생활 모습 등이 달라서 시대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900년에 17굴에서 많은 경전과 문서들이 당시 도를 닦던 왕원록(王圓彔)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중요한 책과 경전, 자료 등은 외국인에게 팔고, 또 외국인들이 도굴해 가서 중요한 것은 거의 외국에 있다고 합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당시에 발견되었는데, 이도 역시 그때 팔려서 지금은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 있습니다. 17굴에서 많은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에 석굴 사원이 많이 지어진 이유는 인도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는 무척 덥다고 합니다.
그런데 석굴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석굴을 조성하게 되었고,
이것 때문에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는 석굴이 발달하였고,
이 영향으로 중국에도불교가 전파되면서 석굴 사원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 된 경로와 석굴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즉 인도의 아잔타, 엘로라 석굴-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중국의 키질 천불동-둔황의 막고굴루오양의 용문석굴-한국 경주의 석굴암이 불교 전파 시기와 100-200년의 차이를 보이면서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합니다.
막고굴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너무 방대하기에 이 정도 기본만 하겠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둔황(敦煌)을 상징하는 비파 타는 비천(飛天)상입니다.
▲둔황(敦煌)을 상징하는 비파 타는 비천(飛天)상입니다.
막고굴 가는 길에 있는 비천(飛天)상들입니다. 비천은 불교에서 천사를 이르는 말입니다.
본래는 옷을 입지 않은 천사였으나, 유교의 영향이 강한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옷을 입은
천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막고굴에 가면 비천을 그려 놓은 벽화가 많이 있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돈황석굴 북굴군
석굴군은 남쪽지구의 남굴과 북쪽지구의 북굴로 나눠진다. 남굴은 벽화와 불상들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석굴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돈황석굴 북굴군
▲돈황석굴 북굴군
▲돈황석굴 북굴군
▲영고굴
▲돈황석굴 막고굴
▲ 많이 본 사진이지요?
9층 누각으로 96굴입니다. 초당(初唐) 연재(延載) 2년인 695년에 짓기 시작하였으며,서하, 원, 청 시대에 개축하였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민국년간에 개축한 것입니다.안에는 34.5m의 대불이 있습니다.
▲돈황석굴 막고굴
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현[敦煌縣] 남동쪽 20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 소조불상(塑造佛像)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둔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막고굴을 대표하는 제96굴의 누각. 높이 34.5m의 북대불이 있다.
▲반탄비파도
궁중악사들의 연주장면 같은데 중앙의 여인이 비파를 왼쪽
어깨에 올리고 발을 들어올려 춤추듯 연주하고있는 인상적인 그림이다
▲막고굴 내부
석굴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석굴암처럼 화강암을 새긴 바위석굴이 아닌 사암층 동굴이다.
벽면에 바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목재로 뼈대를 만든 다음, 진흙과 갈대 잎을 섞은 흙으로 형체를만들고,
그 위에 벽토와 석회 같은 것으로 곱게 바른 다음, 수채화로 단청을 입혀 놓은 것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것과 달리 섬세한 곡선과 화려한 채색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제작되었지만
그 모양과 색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의 메마른 날씨 덕분이다.
▲비천도
▲벽화 비천상
불교가 인도로 부터 중국에 전래될때 비천상도 함께 전래되었는데 중국에 전래되면서
원래 괴물의모습에서 중국고유의 신선사상(도교)과 결부되면서 선녀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해 왔다.
상반신은 나신이고 하반신은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어서 신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표정은요염하며 손의 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러한 변천은 아마 페르시아 등 서역의 문화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음보살도 / 석가모니의 설법도 중 우측의 관음보살만을 확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