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와 디즈니의 백설공주
헐리우드와 디즈니랜드는 오늘을 지배하는 문화용어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우리 세대들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잠시 둘러보고 갑시다.
1946년에 미국의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와 프랑스 총리 레몽 블룸 사이에 블룸-번스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 영화의 수입에 방해가 된 요소들을 제거한 내용이었다. 이로서 프랑스에는 1947년에 미국 영화가 337편이 방영된 반면에 프랑스 영화는 54편만 방영했다.
미국 대법원은 영화산업의 독점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영화사가 극장을 직접 운영하는 수직적 거래를 불법화 했다. 영화사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미국 정부도 영화 수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1940년 대에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는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Citizen Kane – 새로운 영화 기법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영화에 관심이 많으신 분께서 따로 공부하십시오)이다.
서부 영화 장르도 인기몰이를 했다. 대표적인 서부극 배우는 존 웨인이다. ‘역마차’가 유명하다. 이외에도 유명 배우는 거의가 서부극에 출연했다.
카사블랑카, 타킷 도쿄 등의 전쟁 영화는 미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제대 군인을 다루었다.
월터 디즈니(1901-1966)는 1937년에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최초로 90분 짜리 장편만화로 만들었다. 장편만화가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2000만 명이나 관람하는 대박을 터트렸다. 디즈니는 이 돈으로 캘리포니아 버뱅크에 땅을 매입하여 새 스투디오를 지었다. 여기서 장편영화 피노키오, 밤비, 판타지아를 쵤영했다.
1940년 2월에 개봉한 피노키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다음으로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제작비 260만 달러를 회수하지 못했다. 자금 압박을 받은 디즈니는 주식 공개로 돈을 모아 ‘판타지아’를 찍었으나. 역시 적자였다. 그러나 판타지아는 이후에 명작으로 평가받아서 디즈니가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밤비 등 이후의 영화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디즈니는 헐리우드 동향을 정기적으로 FBI에 보고한 스파이 활동도 했다. 디즈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미국에서 반공세력을 구축하여 미국이라는 거대한 가족의 분위기를 깨뜨렸다는 평도 들었다.
1947년에는 디즈니는 헐리우드 노동조합을 분쇄하고, 영화 신데렐라가 성공을 거둔, 행복한 해였다.
이후로 디즈니는 승승장구하여 미국의 세기로 발전한 미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첫댓글 영천에 갔을 때 우리를 초대해주신 최선생님은 영화 마니아로, 1000편 이상의 영화를 수집하여 소장한다고 들었습니다.
기회있으면 최선생님을 초대하여 영화 강의도 듣고, 영화도 한 편 쯤 감상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유명한 문학 작품을 영화로 만든 것을 보면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고급 영화라고 하더라도, 대중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중예술의 영역에 한 쪽 다리를 담그고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만큼 깊이를 줄 수가 없습니다.
영화 디즈니랜드 시리즈가 나왔을 때...
정말 환상적 이었습니다. 넋을 잃고 보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