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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5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9. 초품 중 마하살타(摩訶薩埵)를 풀이함
【經】 마하살타(摩訶薩埵)
【論】 무엇을 마하살타라 하는가?
【답】
마하(摩訶)1)는
대(大)라 하며,
살타(薩埵))2)는
중생(衆生) 혹은 용심(勇心)이라 한다.
이 사람은 마음으로 능히 큰 일을 이루되 물러서거나 돌아서지 않는다.
크게 용맹스러운 마음인 까닭에 마하살타라 한다.
또한 마하살타란,
많은 중생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우두머리이므로 마하살타라 한다.
또한 많은 중생들 가운데서 대자대비를 일으켜 대승을 이룩하고
능히 대도(大道)를 행하여 가장 큰 경지[大處]를 얻는 까닭에 마하살타라 한다.
또한 위대한 사람의
모습[大人相]을 성취하는 까닭에 마하살타라 한다.
마하살타의 모습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부처님 한 사람만이 가장 으뜸이니
삼계의 부모이자 일체지이시네.
아무도 그와 같을 이 없기에
비할 바 없는 세존께 머리 숙입니다.
범부는 오로지 자기의 이익 위해 행하고
갚음을 바래 재물로써 베푸나
부처님은 크게 인자하시어 그런 일 없으시니
원수나 친한 이나[怨親憎愛] 평등하게 이익 주신다.
또한 반드시 법을 설해 능히 모든 중생 및 자기의
큰 사견(邪見)ㆍ큰 애착과 교만ㆍ큰 아만 등 모든 번뇌를 깨뜨리는 까닭에 마하살타라 한다.
또한 중생들은 큰 바다와 같아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없으니,
명철한 지혜를 지닌 계산가[算師]가 한량없는 세월 동안 계산하여도 다할 수가 없다.
마치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3)에게 말씀하시기를
“비유하건대 시방 일체세계와 허공의 경계를 합해 하나의 물[水]로 삼고,
무량 무수의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한 올의 머리카락을 가져오게 해서 한 방울씩 묻혀 가게하며,
다시 무앙수(無央數)4)의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한 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와서 한 방울씩을 묻혀 가게 한다고 하자.
이와 같이 해서 그 큰 물이 남김없이 모두 없어진다 해도 중생은 여전히 다하지 않는다” 하셨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무량하고 무변해서 셀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지만,
모두 구제하여 고뇌를 떠나 무위안온(無爲安穩)의 즐거움 가운데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큰 마음이 있어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까닭에 마하살타라 하는 것이다.
또한 『불가사의경(不可思議經)』5)에서 구사나(漚舍那) 우바이가 수달나(須達那)6)보살에게 말하기를
“보살마하살들은 한 사람을 제도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지 않으며,
또한 둘, 셋 내지 열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며,
백ㆍ천ㆍ만 내지 십만ㆍ백만ㆍ일억ㆍ십억ㆍ백억ㆍ천억ㆍ억억의 중생들을 위해서도 아니다.
아유타(阿由他) 억의 중생들을 위해서 발심하지 않고, 나유타(那由他) 억의 중생들을 위해서도 아니며,
아야타(阿耶他)의 중생들을 위해서도 아니다. 빈바라(頻婆羅)7)도 아니며, 가가라(歌歌羅)8)도 아니며,
아가라(阿歌羅)도 아니며, 파바라(簸婆羅)9)도 아니며, 마바라(摩波羅)도 아니며, 바타(波陀)도 아니며, 다바(多婆)도 아니며,
비바가(鞞婆呵)도 아니며, 포마(怖摩)도 아니며, 염마(念摩)10)도 아니며, 아바가(阿婆迦)도 아니며, 마가바(摩伽婆)도 아니며,
비라가(毘羅伽)11)도 아리며, 승가마(僧伽摩)12)도 아니며, 비살라(毘薩羅)도 아니며, 위염바(謂閻婆)도 아니며, 비사가(鞞闍迦)13)도 아니며, 비로가(鞞盧呵)14)도 아니며, 비발제(鞞跋帝)15)도 아니며, 비가다(鞞伽多)16)도 아니며,
도라(兜羅)17)도 아니다.아바라나(阿婆羅那)도 아니며, 타바라(他婆羅)도 아니며, 비바야바(鞞婆耶婆)18)도 아니며,
먁사(藐寫)도 아니며, 둔나야사(鈍那耶寫)도 아니며, 혜바라(𨢘婆羅)도 아니며, 비바라(鞞婆羅)도 아니며,
보차다(菩遮多)19)도 아니며, 아발가타(阿跋伽陀)20)도 아니며, 비시타(鞞施他)21)도 아니며, 니바라(泥婆羅)22)도 아니다.
혜리부타(𨢘犂浮陀)23)도 아니며, 파마타야(波摩陀夜)도 아니며, 비초바(比初婆)24)도 아니며, 아리부타(阿犂浮陀)도 아니며,
아리살사(阿犂薩寫)도 아니며, 혜운가(𨢘云迦)25)도 아니며, 도간다(度于多)26)도 아니며, 가루나(呵樓那)27)도 아니며,
마루타(摩樓陀)28)도 아니며, 차야(叉夜)29)도 아니며, 오라다(烏羅多)30)도 아니며, 말수야마(末殊夜摩)도 아리며,
삼마타(三摩陀)31)도 아니며, 비마타(毘摩陀)도 아니다.
파마타(波摩陀)32)도 아니며, 아만타라(阿滿陀羅)33)도 아니며, 바만다라(婆滿多羅)34)도 아니며, 마다라(摩多羅)도 아니며,
혜도말다라(𨢘兜末多羅)도 아니며, 비마다라(鞞摩多羅)도 아니며, 파라다라(波羅多羅)도 아니며, 시바다라(尸婆多羅)35)도 아니며, 혜라(𨢘羅)36)도 아니며, 위라(爲羅)37)도 아니며, 제라(提羅)38)도 아니며, 지라(枝羅)39)도 아니며, 시라(翅羅)40)도 아니다.
니라(尼羅)41)도 아니며, 사라(斯羅)42)도 아니며, 파라(波羅)43)도 아니며, 미라(彌羅)44)도 아니며, 바라라(婆羅羅)도 아니며,
미루(迷樓)45)도 아니며, 기로(企盧)46)도 아니며, 마사라(摩闍羅)도 아니며, 삼모라(三牟羅)도 아니며, 아바야(阿婆夜)도 아니며, 검마라(劍摩羅)47)도 아니며, 마마라(摩摩羅)도 아니며, 아달다(阿達多)48)도 아니며, 혜루(𨢘樓)49)도 아니다.
비루바(鞞樓婆)50)도 아니며, 가라발(迦羅跋)도 아니며, 가바발(呵婆跋)도 아니며, 비바발(鞞婆跋)도 아니며, 바바(婆婆)51)도
아니며, 아라바(阿羅婆)도 아니며, 사라바라(娑羅婆羅)도 아니며, 미라부라(迷羅浮羅)도 아니며, 마차라(摩遮羅)도 아니며,
타마라(陀摩羅)52)도 아니며, 파마타(波摩陀)도 아니며, 니가마(尼伽摩)53)도 아니며, 아발다(阿跋多)도 아니다.
니제사(泥提舍)54)도 아니며, 아차야(阿叉夜)55)도 아니며, 삼부타(三浮陀)56)도 아니며, 바마마(婆摩摩)도 아니며, 아바타(阿婆陀)도 아니며, 구파라(漚波羅)57)도 아니며, 파두마(波頭摩)58)도 아니며, 승거(僧佉)59)도 아니며, 가제(伽提)60)도 아니며, 구파가마(漚波伽摩)도 아니며, 아승기(阿僧祇)도 아니며, 아승기에 아승기61)도 아니며, 무량도 아니며, 무량에 무량62)도 아니다.
무변(無邊)도 아니며, 무변에 무변63)도 아니며, 무등(無等)도 아니며, 무등에 무등64)도 아니며, 무수(無數)도 아니며,
무수에 무수65)도 아니며, 불가계(不可計)도 아니며, 불가계에 불가계66)도 아니며, 불가사의(不可思議)도 아니며,
불가사의에 불가사의67)도 아니며, 불가설(不可說)도 아니며, 불가설에 불가설인 중생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한 국토의 미진수(微塵數)68)만큼의 중생을 위하여 발심한 것이 아니며,
둘ㆍ셋 나아가서는 십ㆍ백ㆍ천ㆍ만ㆍ억ㆍ천만억ㆍ아유타ㆍ나유타 내지
불가설에 불가설인 국토의 미진수만큼의 중생을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염부제의 미진수만큼의 중생을 위한 까닭도 아니며,
구타니ㆍ울다라ㆍ불바제의 미진수만큼의 중생을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천세계(小千世界)69)ㆍ중천세계(中千世界)70)ㆍ대천세계(大千世界)71)의 미진수만큼의 중생을 위하여 발심한 것도 아니며,
둘ㆍ셋 내지 십ㆍ백ㆍ천ㆍ만ㆍ억ㆍ아유타ㆍ나유타 내지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不可說不可說] 삼천대천세계의
미진수만큼의 중생을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부처님을 공양하고 모시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모시기 위해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한 국토의 미진수만큼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모시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계시는
미진수만큼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보시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불국토[佛土]를 정화하기 위해 발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수만큼의 불국토를 정화하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부처님의 법만을 받아 지니기 위해 발심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계시는 미진수만큼의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니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삼천대천세계에서만 불종자(佛種子)가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나 미진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서 불종자가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도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부처님의 서원을 분별해 알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계시는 미진수만큼의 부처님의 서원을 분별해 알기 위해서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불국토를 장엄하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수만큼의 불국토를 장엄하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한 부처님 회상(會上)의 제자들을 분별해 알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수 만큼의 부처님 회상의 제자들을 분별해 알기 위해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부처님의 법륜(法輪)을 받아 지니기 위해 발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수만큼의 부처님의 법륜을 받아 지니기 위하여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여러 마음을 알기 위하여서도 아니며, 한 사람의 여러 감관[根]을 알기 위해서도 아니며, 한 삼천대천세계의 여러 겁이 차례로 상속됨을 알기 위해서도 아니며, 한 사람의 모든 번뇌를 분별해 끊기 위해서 발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도저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수만큼의 사람들의 모든 번뇌를 분별하여 끊기 위해서 발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보살마하살들은 서원하기를 “온갖 시방의 중생을 모두 교화하리라. 온갖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모시리라.
온갖 시방의 모든 불국토를 정화하리라. 견고한 마음으로 온갖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니리라”고 하는 것이다.
온갖 불국토를 분별해 아는 까닭에, 온갖 부처님 회상의 제자들을 분별해 아는 까닭에, 모든 중생의 온갖 마음을 분별해 아는
까닭에, 온갖 중생이 모든 번뇌를 끊음을 아는 까닭에,
모든 중생의 모든 감관을 아는 까닭에 보살들은 발심해서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열 가지 문(門)을 으뜸으로 삼으며, 나아가 백ㆍ천ㆍ만ㆍ억ㆍ아승기의 문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도법의 문으로 삼는다.
보살이 알아야 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기에 이처럼 간략히 설명했다.
보살의 실다운 도는 모든 법에 다 들어가고 다 알게 되는 것이니, 지혜로써 알기 때문이며, 모든 불국토는 보살도(菩薩道)
가운데 장엄되기 때문이다.
구사나(漚舍那)가 다시 말했다.
“선남자여, 나의 서원이 이러하므로 세계가 생긴 이래로 모든 중생이 다 청정하고 모든 번뇌를 모두 끊으리라.”
수달나(須達那)가 물었다.
“이는 무슨 해탈입니까?”
구사나가 대답했다.
“이를 ‘근심 없고 안온한 표식[幢]’이라 합니다. 나는 이 한 해탈문만 알 뿐 보살들의 큰 마음이 마치 대해의 물과 같아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능히 받아지님을 알지 못합니다. 보살들은 마음이 요동치 않아 수미산 같고, 보살들은 약왕(藥王)과 같아서 능히 온갖 번뇌를 제하고, 보살들은 해와 같아서 능히 온갖 어두움을 제거하고, 보살들은 땅과 같아서 능히 모든 중생을 감싸고, 보살들은 바람과 같아서 능히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보살들은 불과 같아서 온갖 외도 및 모든 번뇌를 태우고, 보살들은 구름과 같아서 법의 비[法雨]를 내리고, 보살들은 달과 같아서 복덕의 광명으로 능히 모든 것을 비추고, 보살들은 제석환인과 같아서 능히 모든 중생을 수호합니다. 이러한 보살의 길[道法]은 깊고 깊거늘 내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은 대원을 일으켜서 큰 일을 이루고자 하고 큰 곳[大處]에 이르고자 하기 때문에 마하살타라 한다.
또한 이 『반야바라밀다경』 가운데 마하살타의 모습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이러한 모습이 바로 마하살타의 모습이다. 사리불ㆍ수보리ㆍ부루나 등 큰 제자들이 각각 그 품에서 말씀하셨기에 그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하리라.
10. 초품 중 보살의 공덕을 풀이함
【經】 모두가 다라니(陀羅尼)72) 및 모든 삼매(三昧)73)를 얻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74)을 행하여 이미 등(等)과 인(忍)을 얻었다.
【論】 【문】 무슨 까닭에 이 세 가지 일로써 차례차례 보살마하살을 찬탄하는가?
【답】 보살들의 실다운 공덕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찬탄해야 할 일은 찬탄하고 믿어야 할 일은 믿어야 하나,
온갖 중생들이 믿기 어려운 매우 깊고 청정한 법으로써 보살을 찬탄하셨다.
또한 앞에서 보살마하살의 명호를 설명했지만 아직도 보살마하살이 되는 까닭을 말하지 못했는데,
모든 다라니와 삼매 및 인(忍) 등의 모든 공덕을 얻는 까닭에 일컬어 보살마하살이라 하는 것이다.
【문】 그 순서는 이미 알았지만 어째서 다라니라 하는가? 무엇을 다라니라 하는가?
【답】 다라니는 진나라에서는 능지(能持)라 하며, 혹은 능차(能遮)라 하기도 한다. 능지라 함은 갖가지 착한 법을 모으고
능히 지니어 흩어지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마치 빈틈없는[完] 그릇에 물을 담으면 새지 않는 것과 같다.
능차라 함은
착하지 못한[不善根]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싫어하고 능히 막아 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나쁜 죄를 지으려 하면 막아서[持]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다라니라고 한다.
이 다라니는 마음과 상응하기도 하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도 하며,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며,
무색(無色)이어서 볼 수 없으며,
대상이 없으며[無對],
한 계[持]75)이고 한 입(入)76)이고
한 음섭[一陰攝]이며,
9지지(智知)77)이며거란본 주에는 제진지(除盡智)라고 하였다.,
한 의식으로 알며[一識識
]거란본 주에는 일의식(一意識)이라고 하였다., 아비담법(阿毘曇法)이다.
다라니의 뜻은 이와 같다.
또한 다라니를 얻은 보살은 온갖 들은 법을 기억력에 의하여 잘 간직하여 잃지 않는다.
또한 이 다라니의 법은 항상 보살을 뒤쫓나니, 마치 한낮의 학질병과 같다.
이 다라니가 보살을 여의지 않음은 마치 귀신이 붙은 것 같으며,
이 다라니가 항상 보살을 따름은 마치 선(善)ㆍ불선(不善)의 율의와 같다.
또한 이 다라니는 보살을 잘 보호하여 두 경지[地]78)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나니,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이 구덩이에 빠지려 하거든 보호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보살은 다라니의 힘을 얻었으므로 온갖 마왕(魔王)79)이나 마민(魔民)이나 마인(魔人)이 능히 흔들지 못하고
깨뜨리지 못하고 이기지 못하나니, 마치 수미산을 예사 사람이 입으로 불어서는 끄덕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 이 다라니에는 몇 종류가 있는가?
【답】 이 다라니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문지(聞持)다라니라 한다.
이 다라니를 얻은 이는 온갖 이야기와 모든 법을 귀에 스치기만 하면 모두 잃지 않는다. 이것이 문지다라니이다.
또한 분별지(分別知)다라니가 있으니, 이 다라니를 얻은 이는 모든 중생과 모든 법의 크고 작음과 좋고 나쁨을
분별해서 남김없이 안다. 이런 게송이 있다.
모든 코끼리ㆍ말ㆍ금 따위와
나무ㆍ돌ㆍ옷가지들과
남자와 여자와 그리고 물은
갖가지로 모두가 똑같지 않다.
모든 물건들 이름은 하나이나
귀하고 천한 이치는 다르니
이 총지를 얻는다면
모두를 분별해 알 수 있다.
또한 입음성(入音聲)다라니가 있으니, 이 다라니를 얻으면 온갖 소리를 들어도 좋아하거나 성내지 않는다. 만약에 모든 중생들이 항하의 모래수 만큼 오랜 겁 동안 욕을 하고 매도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증오하거나 원한을 품는 일이 없는 것이다.
【문】 보살은 모든 누(漏)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항하의 모래수 만큼 많은 겁 동안에 이러한 거친 일[惡]을 참는가?
【답】 내가 먼저 말하기를 “이 다라니의 힘을 얻는 까닭에 능히 그렇게 된다” 하지 않았던가?
또한 이 보살은 비록 모든 누가 다하지는 못했으나 큰 지혜와 예리한 감관으로 능히 사유해,
성내는 마음을 제해 버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에 귀[耳根]가 소리 곁으로 가지 않거늘 욕하는 소리가 어디에 붙으랴.
또한 매도하는 소리를 들어도 못들은 채 곧장 지나가나니, 만약에 분별치 않는다면 누가 성을 낼 것인가.”
범부들의 마음은 나[吾我]에 집착되어서 시비를 분별하고는 성내고 억울해 한다.
또한 만일 어떤 사람이 말이란 좇아 일어나고 좇아 사라져서 앞과 뒤가 함께하지 않는 줄 알면 곧 성낼 일이 없어진다.
또한 모든 법이 안으로 주체가 없음을 안다면 누가 꾸짖고 누가 성을 내겠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지방말[異語]을 들었을 때에 자기네 말은 좋게 여기고 다른 말은 나쁘게 여기거나 좋고 나쁨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비록 꾸짖는다 해도 성내지 않게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이나 소리에 정해진 것이 없는 줄 알면 성내거나 기뻐할 일이 없게 된다. 마치 친하고 사랑하는 이가 꾸짖으면 비록 꾸짖어도 원통하지 않지만, 친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이가 꾸짖으면 듣자마자 성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비바람을 만나면 집으로 들어가거나 우산을 들고, 땅에 가시가 있으면 가죽신을 신고, 날씨가 크게 추우면 불을 피우고,
더울 때에는 물을 구하나니, 이러한 모든 환란에 다만 막는 법만을 구할지언정 성내지 않는다.
꾸짖거나 욕하는 이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하니, 오직 자비로써
모든 악(惡)을 그치게 할지언정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그 성품이 모두 공한 줄 안다.
가령 어떤 이가 성내고 꾸짖거나 혹은 때리거나 혹은 해치려 하더라도 꿈같고 환[化]같이 여기나니,
성내는 이가 누구이며, 꾸짖는 이가 누구이겠는가.
또한 어떤 사람을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겁 동안 중생들이 찬탄하고, 의복ㆍ음식ㆍ와구ㆍ의약과
영락 등으로 공양하더라도, 법인을 얻은 보살80)이라면 그 마음이 흔들리거나 기뻐하거나 집착되지 않는다.
【문】 이미 보살이 성내지 않는 갖가지 인연은 알았다.
그렇다면 진실로 공덕을 찬탄함을 알지 못한 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답】 갖가지 공양과 공경이 모두가 무상한 줄 아는 것이다. 지금은 까닭이 있어서 와서 찬탄하고 공양하지만
나중에 다른 인연이 있으면 다시 성내거나 때리거나 혹은 해하려 할 것이기에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공덕과 지혜가 있는 까닭에 찾아 와서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이는 공덕을 찬탄하기 위함이지 나를 찬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겠는가.’
또한 이 사람이 스스로의 과보를 구하는 까닭에 내가 만든 인연에 대해서 공양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곡식을 심고 물을 대고 다듬는다고 해서 땅이 기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이 나에게 공양할 때, 내가 기꺼이 받는다면 나의 복덕은 엷어지고
다른 이의 복덕 역시 적어진다. 그러므로 기뻐하지 않는다.
또한 보살은 온갖 법이 꿈같고 메아리 같은 줄로 관찰한다.
그러니 찬탄하는 이가 누구이며, 기뻐하는 이가 누구이겠는가.
나는 삼계 안에서 해탈을 얻지 못했고, 모든 누가 다하지 못했고,
불도도 얻지 못했거늘 어떻게 찬탄을 얻었다 해서 기뻐하겠는가.
만일 기뻐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부처님 한 사람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일체의 공덕이 이미 모두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갖가지로 찬탄 받고 공양 받는다 해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않나니,
이러한 모습을 입음성(入音聲)다라니라 한다.
또한 적멸(寂滅)다라니ㆍ
무변선(無邊旋)다라니ㆍ
수지관(隨地觀)다라니ㆍ
위덕(威德)다라니ㆍ
화엄(華嚴)다라니ㆍ
음정(音淨)다라니ㆍ
허공장(虛空藏)다라니ㆍ
해장(海藏)다라니ㆍ
분별제법지(分別諸法地)다라니ㆍ
명제법의(明諸法義)다라니가 있다.
이러한 다라니문이 간략히 말해서 5백 개가 있으며,
자세히 설명하자면 한량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두 다라니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삼매라 함은 세 가지 삼매이니,
공(空)ㆍ
무작(無作)ㆍ
무상(無相)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5음(陰)81)이 나 없고
내 것 없음을 관찰하면 이를 공이라 일컫는다.
이러한 공삼매(空三昧)82)에 머물러서 뒷세상을 위하여
3독(毒)83)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를 무작이라 일컬으며,
열 가지 모습의 법인 5진(塵)과
남ㆍ녀ㆍ생ㆍ주ㆍ멸을 여읨에연하는 까닭에 무상이라 일컫는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삼매 가운데 머물러서 모든 법의 실상(實相), 즉 필경공(畢竟空)을 아나니,
이를 공삼매라 한다. 이러한 공을 알고 나면 곧 무작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무작이겠는가?
모든 법이 공하거나 혹은 불공이거나 혹은 있거나 혹은 없음 등을 보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구(法句)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있음[有]을 보면 곧 두려워하고
없음[無]을 보아도 두려워하니
그러므로 유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무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작삼매이다.
어떤 것이 무상삼매(無相三昧)84)인가? 온갖 법은 형상이 없으니,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이를 무상삼매라 한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언어의 길이 이미 끊겼고
심행(心行)도 사라졌도다.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그대로가 열반의 모습이다.
또한 18공(空)을
공삼매85)라 하고,
갖가지단주(丹注)에는 5도(道)에서의
생유(生有)ㆍ사유(死有)ㆍ중유(中有)의 업이라 하였다.
유(有)에서
구하는 마음 없는 것을 무작삼매라 하고,
온갖 형상이 파괴되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무상삼매라 한다.
【문】 갖가지 선정(禪定)의 법이 있거늘 어찌하여 이 세 가지 삼매만을 일컫는가?
【답】 이 세 가지 삼매 가운데 행하는 사유는 열반에 가깝기 때문이니, 사람의 마음을 들뜨거나 위축시키지도 않으며
평등하게 해주어 요동치 않게 한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삼매만을 일컫는다.
다른 선정에서는 애착[愛]이 많아지기거나 혹은 교만이 많아지거나 혹은 사견이 많아지기도 하지만,
이 세 가지 삼매의 으뜸가는 진실한 뜻은 실로 예리해서 능히 열반의 문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여러 선정법 가운데서 이 세 가지 선정법을 해탈문으로 삼으며,
또한 3삼매(三昧)86)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삼매가 진실한 삼매인 까닭에 다른 선정 역시 선정[定]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네 가지 근본선(根本禪)87)을 제외한
미도지(未到地)88)에서 유정지(有頂地)89)에 이르기까지를 정(定)이라 하고, 또한 삼매라고도 한다.
비선(非禪)의 네 선정[四禪]90)도 정(定)이라고도 하고
선(禪)이라고도 하고 삼매(三昧)라고도 한다.
그 밖의 다른 선정들도 정이라 하고 삼매라 하니,
이른바 4무량(無量)ㆍ
4변(辯)ㆍ
6통(通)91)ㆍ
8배사(背捨)92)ㆍ
8승처(勝處)93)ㆍ
9차제정(次第定)94)ㆍ
10일체처(一切處)95) 등의 선정법들이 그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삼매의 법에는 23종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65종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5백 종이 있다” 한다.
하지만 마하연은 가장 위대한 까닭에 한량없는 삼매가 있다.
이른바 두루 법성을 장엄하는 삼매[遍法性莊嚴三昧]와
능히 일체삼세법을 비추는 삼매[能照一切三世法三昧]와
법성의 끝[底]을 분별치 않고 관찰하는 삼매[不分別知觀法性底三昧]와
끝없는 불법에 드는 삼매[入無底佛法三昧]와
허공과 같이 끝없고 가없이 비추는 삼매[如虛空無底無邊照三昧]와
여래의 힘으로 관찰을 행하는 삼매[如來力行觀三昧]와
부처님의 무외장엄으로 빙그레 웃는 삼매[佛無畏莊嚴力嚬呻三昧]와
법성의 문이 선장(旋藏)하는 삼매[法性門旋藏三昧]와
일체세계가 장애 없이 장엄되어 달에까지 두루 차는 삼매[一切世界無礙莊嚴遍月三昧]와
법의 운광(雲光)을 두루 장엄하는 삼매[遍莊嚴法雲光三昧]이니,
보살은 이처럼 한량없는 삼매들을 얻는다.
또한 『반야바라밀경』의 「마하연의품(摩訶衍義品)」에서는 약설하여 108 가지 삼매를 말하는데,
처음 수릉엄삼매로부터 허공과 같이 집착하지 않고 물들지 않는 삼매[虛空不著不染三昧]에 이르기까지이다.
자세히 말하면 무량 삼매가 있다고 했다.이런 까닭에 보살들은 모든 삼매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論】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삼매를 행한다.
【문】 전에는 말하기를 “보살들이 모든 삼매를 얻었다” 하더니,
어찌하여 다시 말하기를 “공ㆍ무상ㆍ무작삼매를 행한다” 하는가?
【답】 전에는 삼매의 이름만을 말했을 뿐 그 모습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 모습을 말하기 위하여
공ㆍ무상ㆍ무작의 삼매를 행한다 했다.
어떤 사람이 공ㆍ무상ㆍ무작의 삼매를 행하면 이는 실상(實相)삼매를 얻은 사람이라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계를 지니어 청정하다면
이를 진실한 비구라 부르고
능히 공을 잘 관찰한다면
이를 삼매를 얻었다 한다.
부지런히 정진을 쌓으면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부르고
만약에 열반을 얻었으면
이를 진실한 즐거움이라 한다.
【論】 이미 등(等)과 인(忍)을 얻었다.
【문】 무엇을 등이라 하며, 무엇을 인이라 하는가?
【답】 두 가지 등(等)이 있으니,
중생등(衆生等)과 법등(法等)이다.
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중생인(衆生忍)과 법인(法忍)이다.
무엇을 중생등이라 하는가?
곧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ㆍ평등한 생각ㆍ평등한 사랑ㆍ평등한 이익을 주는 것을 중생등이라 한다.
【문】 자비의 힘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생각할지언정 평등하게 관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보살은 진실한 도를 행하여 뒤바뀌지 않고 법의 모습 그대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 착한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 대인과 소인, 축생을 동일하게 보는가?
착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실로 착하지 못한 모습이 있고 착한 사람에게는 진실로 착한 모습이 있으며,
대인과 소인, 그리고 축생도 그러할 것이다.마치 소의 모습은 소에게 있고, 말의 모습은 말에게 있어서
소의 모습이 말 가운데 있지 않고 말의 모습이 소 가운데 있지 않는 것과 같으니, 말이 소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생들도 각기 제 모습을 지녔거늘 어찌 동일하게 평등이 관찰하고도 전도(顚倒)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 만일 착한 모습과 착하지 않은 모습이 진실이라면 보살은 응당 전도에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모습을 파괴하기 때문이다.모든 법은 진실로 착한 모습도 아니요 진실로 착하지 않은 모습도 아니며,
많은 모습도 아니요 적은 모습도 아니며, 인간도 아니요 축생도 아니며, 같음[一]도 아니요 다름[異]도 아니니,
그러므로 그대의 비난은 옳지 못하다.모든 법의 모습을 말씀한 게송에 이런 것이 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단절도 아니요 영원함도 아니며
같음도 아니요 다름도 아니며
감[去]도 아니요 옴[來]도 아니다.
인연으로 생긴 법은
모든 희론을 멸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나 이제 마땅히 말해야 하리.
또한 온갖 중생 가운데 갖가지 모습에 집착하지 않아
중생의 모습[衆生相]이나
비어 있는 모습[空相]이
동등한 것으로 다르지 않다고 이처럼 관찰함을 일컬어 중생등이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기에 대하여 마음이 평등해져서 걸림이 없다면
그는 곧장 물러서지 않는 경지[不退]에 들게 된다.
이것을 등과 인을 얻었다 하는데, 등과 인을 얻은 보살은 온갖 중생에게 성내지 않으며
그들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함과 같으니,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말소리는 메아리 같고
몸의 행위는 거울의 모습 같다 보니
이렇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인들 참지 못하랴.
이것을 중생의 등인이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법의 등과 인이라 하는가?
곧 착한 법과 착하지 못한 법, 유루의 법과 무루의 법,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 등 이와 같은 모든 법에 대해서
불이(不二)의 법문에 들고, 실다운 법상(法相)의 문에 든다. 이와 같이 든 뒤에 여기에서 모든 법의 실상에
깊이 들 때에 마음으로 확인[忍]하여 무쟁(無諍)ㆍ무애(無礙)에 든다면 이를 법의 등인이라 한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모든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생멸하지도 않으면서 생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생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미 해탈을 얻어단주(丹註)에 말하기를
‘삿된 소견을 여의게 되는 까닭에 해탈이라 한다’ 하였다.
공(空)과 비공(非空)단주에 말하기를
‘공에도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비(非)라 한다’ 하였다.
이라는 이러한 모든 희론을 버리고 없애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불법에 깊이 들어가서 마음에 걸림이 없으며,
흔들리거나 물러남이 없는 것을 무생인(無生忍)이라 한다. 이는 불도를 돕는 첫 문인 까닭에 ‘이미 등과 인을 얻었다’ 하는 것이다.
【經】 걸림 없는 다라니를 얻었다.
【論】 【문】 앞에서 이미 보살이 다라니를 얻었다 하였는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걸림 없는 다라니를 얻었다 하는가.
【답】 걸림 없는 다라니가 가장 크기 때문이니, 마치 모든 삼매 가운데서 삼매의 왕이 가장 크고,
모든 인간 가운데서 왕이 가장 크고, 모든 해탈 가운데서 걸림 없는 해탈이 가장 큰 것과 같다.
단주에 말하기를 ‘부처를 이루고 도를 얻을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 했다.
이와 같이 모든 다라니 가운데 걸림 없는 다라니가 가장 크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는 것이다.
또한 먼저는 보살들이 다라니를 얻었다고는 하였으나 이것이 어떤 다라니인지는 모른다.
작은 다라니가 있으니,
전륜성왕이나 선인 등이 얻는 문지다라니ㆍ
분별중생다라니ㆍ
귀명구호불사다라니(歸命救護不捨陀羅尼)가 그것이다.
이러한 작은 다라니는 다른 사람들도 얻지만 이 걸림 없는 다라니만은
외도ㆍ성문ㆍ벽지불ㆍ새로 배움에 든[新學] 보살들은 아무도 얻지 못하고,
오직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를 갖춘 대력(大力) 보살들만이 이 다라니를 얻는다.
그러므로 달리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보살들은 스스로를 이롭게 함은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단지 남에게 이득을 주고자 해서
끝없이 법을 설하고 교화하며 걸림 없는 다라니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항상 걸림 없는 다라니를 행한다.
【經】 모두가 5통(通)을 얻었다.
【論】 여의(如意)ㆍ천안(天眼)ㆍ천이(天耳)ㆍ타심지(他心智)ㆍ자식숙명(自識宿命)을 말한다.
무엇을 여의(如意)라고 하는가?
여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능도(能道)와 전변(轉變)과 성여의(聖如意)이다.
능도에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몸이 능히 날아다니되 새와 같아서 걸림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먼 곳을 가깝게 만들어 가지 않고도 도달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기에서 숨어서는 저기에서 나오는 것이요,
넷째는 깜빡할 사이에 능히 이르는 것이다.
전변이라 함은
큰 것을 작게 만들고 작은 것을 크게 만들며,
하나를 많게 만들고 많은 것을 하나로 만드는 등 갖가지 물건을 능히 바꾸어 놓는 것이다.
외도의 전변은 멀어도 7일을 지나지 못하는데 부처님이나 제자들의 전변은 자재로워서 멀고 가까움이 없다.
성여의라 함은
밖의 6진(塵)96)에 대해 사랑스럽지 못하고 부정한 물건을 관하여 정화시키고,
사랑스럽고 깨끗한 물건을 관하여 부정하게 만드니, 이 성여의는 부처님만이 가지신다.
이러한 여의통은 4여의족(如意足)을 닦음으로부터 생기며,
이 여의족통 등은 색의 반연인 까닭에 차례차례 생길지언정 일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천안통이라 함은
눈에 있어서 색계의 4대로 지어진 청정한 색(色)을 얻는 것이니, 이를 천안이라 한다.
천안으로 보이는 곳은 스스로의 경지[地] 및 아래 경지에 있는 6도(道) 중생들로서,
모든 사물의 멀고 가까움,
거칠고 미세함 등 모든 모양[色]을 비추어 보지 못함이 없다.
천안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과보에 따라 얻는 것이요,
둘째는 수행에 따라 얻는 것이다.
이 5신통 가운데 천안은 수행으로 얻을 뿐 과보로 얻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항상 갖가지 광명을 억념해서 얻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보살들은 무생법인의 힘을 얻는 까닭에 6도(道)에 속하지 않지만 다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법신으로써
시방에 현현한다. 삼계 가운데에서 아직 법신을 얻지 못한 보살은 혹은 닦아서 얻기도 하고 혹은 과보로 얻기도 한다.”
【문】 이 보살들의 공덕이 아라한이나 벽지불보다 수승하거늘 어찌하여 범부들과 함께하는 작은 공덕인
천안만을 찬탄하시고, 보살들의 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은 찬탄하시지 않는가?
【답】 하늘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거짓 이름의 하늘[假號天]이요,
둘째는 태어나는 하늘[生天]이요,
셋째는 청정한 하늘[淸淨天]이다.
전륜성왕과 그 밖의 대왕들은 거짓 하늘이라 하고,
사천왕(四天王)97)으로부터 유정천(有頂天)이 태어나는 곳을 태어나는 하늘이라 하고,
부처님ㆍ법신 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들을 청정한 하늘이라 한다.
이러한 청정한 하늘에서 닦아 얻는 하늘의 눈을 천안통이라 하다.
부처님의 법신과 보살의 청정한 하늘 눈은 일체의 욕망을 여읜 것으로,
5신통을 얻은 온갖 범부들은 얻지 못하는 바이며,
성문이나 벽지불들도 얻지 못하는 바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작은 아라한이 작게 부리는 마음은 일천세계를 보고
크게 부리는 마음은 이천세계를 보며, 큰 아라한이 작게 부리는 마음은
이천세계를 보고 크게 부리는 마음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보기 때문이다.
벽지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천안통이라 한다.
무엇을 천이통이라 하는가?
곧 귀에 있어서 색계의 4대로 지어진 청정한 색을 얻어 능히 일체의 소리,
즉 하늘의 소리, 인간의 소리, 3악도(惡道)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떻게 천이통을 얻는가?
수행하여 얻는다. 항상 갖가지 소리를 억념해 내니, 이것을 천이통이라 한다.
무엇을 숙명을 아는 신통[識宿命通]이라 하는가?
곧 전생일[本事]을 항상 억념하여 날ㆍ달ㆍ해로부터 태속의 일,
나아가 과거세 가운데 1세(世)ㆍ십 세ㆍ백 세, 천ㆍ만ㆍ억 세의 일을 아는 것이다.
큰 아라한이나 벽지불에 이르러서는
8만 대겁(大劫)의 일을 알고,
보살과 부처님들은
한량없는 겁의 일을 안다. 이를 숙명을 아는 신통이라 한다.
무엇을 타심을 아는 신통[知他心通]이라 하는가?
곧 다른 이의 마음에 때[垢]가 있는 것과 때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나고 머무르고 멸할 때 항상 억념하는 까닭에 얻는다.
또한 다른 이의 기뻐하는 모습ㆍ성내는 모습ㆍ두려운 모습을 관찰하고는 그 마음을 아나니,
이를 타심지의 첫 문호라 한다.5신통을 간략히 설명해 마친다.
【經】 말을 하면 반드시 믿어 지녔다.
【論】 하늘ㆍ인간ㆍ용ㆍ아수라 등과 모든 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을 믿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는 꾸밈말을 하지 않은 과보이기 때문이니, 꾸밈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여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아귀의 길에 빠지면
불꽃이 입으로부터 솟아서
사방을 향해 큰 소리를 외치니
이는 입으로 지은 허물의 과보라.
비록 아는 것이 많아서
대중 앞에 법을 설하여도
성실치 못한 업 때문에
사람들 아무도 믿으려 않는다.
만일에 지식을 넓히고
남의 믿음을 얻으려 하면
지극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꾸밈말을 하지 말아라.
【經】 다시는 게을러지는 일이 없었다.
【論】 게으름은 집에 있는 사람을 파괴하고, 재물과 복을 파괴하고,
출가인의 생천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부순다.
재가나 출가 모두의 명성을 무너뜨리니,
아무리 큰 실수나 큰 도적이라 해도 게으름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게으름은 착한 마음을 죽이고
어리석음은 지혜의 빛을 깨뜨리니
묘한 서원이 모두가 소멸하고
큰 과업 또한 이미 잃게 되리라.
그러므로 ‘다시는 게을러지는 일이 없었다’ 한 것이다.
【經】 이미 이양(利養)과 명예[名聞]를 버렸다.
【論】 이 이양이라는 것은 마치 도적과 같아서 공덕의 근본을 무너뜨린다.
마치 우박이 오곡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으니,
이양과 명문도 그와 같아서 공덕의 싹을 파괴하여 자라지 못하게 한다.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터럭 같은 노끈으로 사람의 팔을 묶으면 살이 패이고 뼈가 끊기듯이,
이양을 탐내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공덕의 근본을 끊어버린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전단 숲에 들어갔건만
그 잎새만을 따거나
7보98)의 동산에 들어갔건만
수정(水精)만을 갖듯이
불법에 들어온 사람이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이양을 구한다면
이런 무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불제자들이여,
감로의 맛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잡스런 독을 버리고
부지런히 열반의 즐거움 구하라.
마치 거친 우박과 비가
오곡을 상처 주듯이
이양과 공양에 집착한다면
부끄러움 아는 두타를 깨뜨리네.
금생에 선근을 불태우면
후세에는 지옥에 떨어지리니
마치 제바달다와 같은 이가
이양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듯이.
그러기에 말하기를 “이미 이양과 명예를 버렸다” 한 것이다.
【經】 법을 설하되 바라는 바가 없었다.
【論】 큰 자비와 연민으로 중생을 위해 설법할지언정 의식이나 명성이나
세력을 위해 설하지 않는 것이다. 크게 자비한 까닭이며,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무생법인을 얻은 까닭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많은 지식과 능한 말투와 지혜로써
모든 법을 잘 말하여 사람의 마음 움직여도
스스로가 법답게 행하고 바르지 않으면
헛 구름 마른 천둥에 비는 오지 않는 것 같다.
널리 배워 아는 것 많고 지혜 있어도
어눌한 말솜씨에 묘한 방편 없어서
가르침의 보장(寶藏)을 드러내지 못하면
우레도 없이 가랑비만 내리는 것과 같도다.
널리 배우지 못하고 지혜 없어서
설법도 못하고 좋은 행도 없으면
이 같은 낡은 법사에겐 부끄러움도 없나니
작은 구름에 우레도 비도 없는 것과 같다.
많은 지식과 넓은 지혜로 말이 능하며
묘하게 법을 설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고
법을 실천함에 마음은 바르고 두려움 없으면
큰 구름과 우레에 큰 비[洪雨]가 쏟아지는 것과 같다.
법의 대장이 법의 거울[法鏡] 들고서
불법의 지혜의 창고를 비추어 내고
지녀 외우고 널리 펴서 법의 방울 흔들면
바닷배가 모든 이를 건네주는 것과 같네.
꿀벌이 여러 맛을 모으듯이
부처님의 말과 뜻대로 설명하고서
부처님을 도와 법을 밝히고 중생을 제도하니
이러한 법사는 심히 만나기 어렵다.
【經】 깊은 법인을 건넜다.
【論】 무엇을 깊은 법이라 하는가?
곧 12인연(因緣)을 깊은 법이라 하나니,
부처님에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12인연의 법은 심히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하셨다.
또한 과거와 미래 세상에서 62종의 삿된 소견의 그물을 내는 일을 영원히 여의었으니, 이를 깊은 법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범부는 들은 바가 없어서 부처님을 찬탄하고자 하여도 찬탄할 바가 심히 적으니, 이른바 계행이 청정함을 찬탄하거나 혹은 모든 애욕을 여의었음을 찬탄하거나 혹은 이 심히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법을
찬탄한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하셨으니,
이에 대해서는 『범망경(梵網經)』99)에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또한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을 심히 깊은 법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는 동안에
여러 하늘이 찬탄하기를 “세존이시여, 이 법은 심히 깊습니다” 하니,
부처님께서는 “심히 깊은 법이라 함은,
공(空)이 곧 그러한 뜻이고
무작(無作)ㆍ
무상(無相)이 곧 그러한 뜻이니라” 하셨다.
또한 모든 법의 모습은 진실하여 파괴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니, 이것을 심히 깊은 법이란 한다.
또한 속마음[內心]으로 상상하는 지혜의 힘을 제거하고,
오직 집중된 마음[定心]으로 모든 법의 청정한 실상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마치 눈에 열기가 충만하면 노랗지 않은 것을 노랗다고 보는 것과 같으니,
마음으로 상상하는 지혜의 힘에 의하여 모든 법을 움직여서[轉] 본다면, 이를 얕은 법이라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눈이 청정하여 열기가 없으면 있는 그대로 노란 것을 노랗다고 보듯이,
이처럼 속마음으로 상상하는 지혜의 힘을 제거하고 지혜의 눈이 청정하면 모든 법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진짜 수정을 노란 물건 가운데 두면 곧 따라서 노란빛이 되고, 푸른빛ㆍ붉은빛ㆍ흰빛의 상대의 색을
좇아 변하듯이 마음도 그와 같아서 범부들은 속마음으로 상상하는 지혜의 힘 때문에 모든 법의 차별된 모습을 보게 된다
.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하여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며, 있음도 아니고 있음 아님도 아닌 줄로 알며,
이 법 가운데 깊이 들어가 움직이지 않고 걸림이 없다면 이를 ‘깊은 법인을 건넜다’ 한다.
‘건넜다[度]’고 함은
심히 깊은 법을 얻었음을 말한다.
또한 구족히 원만하여 걸림이 없게 되고 피안에
이르게 된 것을 일컬어 ‘건넜다’고 하는 것이다.
【經】 두려움 없는 힘을 얻었다.
【論】 모든 보살들은 네 가지 두려움 없는 힘을 성취한다.
【문】 보살은 아직 할 일을 끝내지 못했고, 아직 일체지를 얻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네 가지 두려움 없는 힘을 얻었다 하는가?
【답】 두려움 없음[無畏]에 두 가지가 있으니, 보살의 두려움 없음과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이다.
이 보살들은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은 아직 얻지 못했으나 보살의 두려움 없음을 얻었으므로 두려움 없는 힘을 얻었다 한다.
【문】 어떤 것이 보살의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인가?
【답】 첫째는 일체를 들으면 능히 지니는 까닭이며, 모든 다라니를 얻는 까닭이며,
항상 기억하여 잊지 않는 까닭에 대중 가운데에서 법을 설하되 두려워함이 없다.
둘째는 모든 중생의 욕망과 해탈의 인연과 감관의 예리하고 둔함을 알고서 그 마땅함에
따라 설법하기 때문에 보살은 대중 가운데서 법을 설하되 두려움이 없다.
셋째는 어떤 이가 동ㆍ남ㆍ서ㆍ북이나 네 간방[四維]ㆍ상하에서 찾아와 따져 물어서 나로 하여금
법답게 대답하지 못하게 하는 자를 보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조금도 보지 않기 때문에 대중에서 설법하되 두려움이 없다.
넷째는 중생들의 질문을 듣고는 마땅함에 따라 법답게 대답하여 온갖 중생의 의혹을
교묘하게 끊어 주기 때문에 보살이 대중에서 설법하되 두려움이 없다.
【經】 모든 마사를 초월했다.
【論】 마(魔)100)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마(煩惱魔)요,
둘째는 음마(陰魔)요,
셋째는 사마(死魔)요,
넷째는 타화자재천자마(他化自在天子魔)이다.
이 보살들은 보살도를 얻는 까닭에 번뇌마를 깨뜨리고,
법신을 얻는 까닭에 음마를 깨뜨리고,
도(道)와 법성신(法性身)을 얻는 까닭에 사마를 깨뜨린다.
항상 한마음인 까닭에, 온갖 곳에 마음이 집착되지 않는 까닭에,
부동삼매에 드는 까닭에 타화자재천자마를 깨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마사를 초월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반야바라밀경』 「각마품(覺魔品)」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마업(魔業)과 마사를 말씀하셨는데,
이 마업과 마사를 이미 다 넘었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이미 마사를 초월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의 실상을 제외한 나머지 온갖 법을 모두 마(魔)라 한다.
곧 모든 번뇌ㆍ결사(結使)ㆍ욕(欲)ㆍ박(縛)ㆍ취(取)ㆍ전(纏)ㆍ음(陰)ㆍ계(界)ㆍ
입(入)ㆍ마왕(魔王)ㆍ마민(魔民)ㆍ마인(魔人)과 같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마라고 하는 것이다.
【문】 어디에서 욕ㆍ박 등의 모든 결사를 마라고 하였는가?
【답】 『잡법장경(雜法藏經)』101)에서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욕망은 그대의 첫째 군사요
근심은 그대의 둘째 군사요
기갈은 그대의 셋째 군사요
애정은 그대의 넷째 군사다.
수면은 그대의 다섯째 군사요
두려움은 그대의 여섯째 군사요
의혹은 그대의 일곱째 군사요
독을 품은 마음102)은 그대의 여덟째 군사다.
이양과 허망한 명예에 집착함은
그대의 아홉째 군사요
스스로 교만해져 남을 업신여김은
그대의 열째 군사이다.
그대의 군사가 이러하니
세상 사람들 모두와
그리고 온갖 하늘까지도
아무도 이를 부수지 못한다.
나는 지혜의 화살을 들고
선정과 지혜의 힘을 닦아
마치 흙병을 물에 던져버리듯
그대의 군사를 무찔러 깨뜨리리라.
한마음으로 지혜를 닦아
그로써 모두를 건너게 하리.
나의 제자들 정진하여서
지혜 닦기를 항상 생각하니
법다운 행을 수순한다면
반드시 열반에 이르리니
그대는 내쫓기고 싶지 않겠지만
그대가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리.
이때 마왕은 게송을 듣자
통곡하고 근심하며 사라졌다.
이 마왕의 사악한 무리들
역시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결사의 마(魔)라 하는 것이다.
【문】 어디에서 5중(衆)ㆍ18계(界)ㆍ12입(入)이 마(魔)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막구라산(莫拘羅山)에서 부처님께서 제자인 라타(羅陀)에게 말씀하시어
“색중(色衆)은 곧 마(魔)이며, 수ㆍ상ㆍ행ㆍ식 역시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셨다.
만약에 미래세에 색신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동처(動處)로 삼으며,
만약 무색신을 이루고자 해도 이것을 동처로 삼는다.
유상(有想)ㆍ
무상(無想)ㆍ
비유상(非有想)ㆍ
비무상(非無想)의 몸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일체동처(一切動處)로 삼는다.
움직임은 모두 마의 속박이며,
움직이지 않으면 속박되지 않아 악(惡)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중(衆)ㆍ계(界)ㆍ입(入)은 곧 마가 된다고 말하니,
자재천자마(自在天子魔)나 마민(魔民)ㆍ마인이 곧 마가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문】 무엇 때문에 마라 부르는가?
혜명(慧命)을 빼앗고 도법과 공덕과 선의 근본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마라고 부른다.
외도의 무리들은 이를 욕주(欲主)라고 부르며,
또한 화전(華箭) 혹은 5전(箭)[단본의 주에서는 5욕의 화살이라 한다.]이라 부르기도 하니,
갖가지 착한 일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에서는 마라(魔羅)라고 부르며, 그의 업과 그의 일을 마사(魔事)라고 한다.
어떠한 마사가 있는가? 이는 「각마품(覺魔品)」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또한 사람들이 세간에 떠돌면서 고통과 즐거움을 받는 것은 결과 사의 인연이고
마왕의 힘의 인연이니, 이러한 마를 모든 부처님의 원수이자 모든 성인들의 도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일체의 사람의 일을 부수고 열반을 기뻐하지도 않으니, 이를 마라고 한다.
이 마에 세 가지가 있다.
희롱으로 웃으면서 말하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삿되게 바라보는 이러한 것들은 애착으로부터 생기며,
결박하고 때리고 채찍질하고 고문하고
자르고 찢는 이러한 것들은 성냄으로부터 생기며,
몸을 태우거나 스스로 얼리거나 머리칼을 뽑거나 스스로 굶주리거나
불에 들어가거나 물[淵]에 들어가거나 바위에서 뛰어 내리는 이러한 것들은 우치로부터 생겨난다.
또한 커다란 과실과 부정함과 세간에 물드는 것은 모두 마사이고,
이로움을 증오하고 열반 및 열반의 도를 행[用]하지 않는 것 역시 마사이며,
큰 고통의 바다에 빠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이러한 한량없는 것들이 모두 마사인데,
이러한 것들을 이미 던져 버리는 이것을 모든 마사를 초월했다 하는 것이다.
【經】 일체의 업장(業障)에서 남김없이 해탈했다.
【論】 일체의 악업에서 벗어나는 이것을 ‘업장에서 해탈했다’ 한다.
【문】 세 가지 장(障),
즉 번뇌장(煩惱障)ㆍ
업장(業障)ㆍ
보장(報障)에서 어찌하여 두 가지는 버리고 업장만을 말하는가?
【답】 세 가지 장 가운데서 업의 힘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모든 업을 쌓아서 백ㆍ천ㆍ만 겁이 지나도록 잃거나 타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과보를 받을 때에도 없어지지 않나니, 이 모든 업은 능히 오래도록 머물다가
화합해서 과보를 낸다. 마치 곡식과 풀의 종자가 땅속에 있다가 시절을 만나면
자라나서 잃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는 일체지이신 모든 부처님들께서 가장 존중하시는 이치로서,
수미산왕조차 이 모든 업을 바꾸지 못하거늘 하물며 범부들이겠는가.
이런 게송이 있다.
생사의 윤회는 인간을 싣고
모든 번뇌와 결사는
큰 힘으로 자재하게 구르니,
누구도 멈출 수가 없다.
전생의 업으로 자기가 지은 것
바뀌어 갖가지 형태를 이루나니
업의 힘 가장 커서
세상에 견줄 이 없다.
전생의 업은 자재하여서
사람들이 과보를 받게 하나니
업의 힘 때문에 바퀴 돌아서
생사의 바다에 헤매게 된다.
큰 바닷물이 다 마르고
수미산의 땅이 다하더라도
전생의 인연인 업은
타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는다.
모든 업이 오랫동안 합쳐 모이면
지은 이가 스스로 따라가나니
마치 빚을 진 사람은
빚쟁이가 쫓기기 끊임이 없듯.
이 모든 업의 과보는
능히 바꿀 이도 없고
또한 피할 곳도 없으며
애걸하여 면할 수도 없다.
삼계 가운데 중생들은
이를 좇아 잠시도 여의지 못하니
마치 가리나찰(珂梨羅刹)과 같다고
그 업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람은 채워진 곳에 들지 않고
흐르는 물은 위로 가지 않으며
허공이 해를 입는 일 없듯이
업이 없음[無業]도 이와 같도다.
업은 한량없는 힘이 있으나
짓지 않는 이는 쫓기지 않으니
과보는 시절이 도래하기까지
없어지지도 잃지도 않는 것이라.
땅에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하늘에서 설산으로 들고
설산에서 바다로 들어가도
어디에서도 업은 떠나지 않는다.
항상 나를 뒤쫓아
잠시도 버리는 일 없어
곧장 도달해 망실하는 일 없으니
마치 유성이 달로 향함과 같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업장에서 남김없이 해탈했다’고 한 것이다.
【經】 인연의 법을 교묘하게 연설했다.
【論】 12인연생법(因緣生法)과 갖가지 법문을 능히 교묘하게 연설한 것이다.
번뇌와 업과 일[事]의 법이 차례로 전전해서 생겨나는 것을 12인연이라 한다.
이 가운데 무명(無明)ㆍ애(愛)ㆍ취(取)의 세 가지를 번뇌라 하고,
행(行)과 유(有) 두 가지를 업이라 한다.
나머지 일곱 가지는 본체의 일[體事]이 된다.
이 12인연에서 처음의 두 가지는
과거 세상에 속하고,
뒤의 두 가지는 미래의 세상에 속하며,
중간의 여덟 가지는 현재 세상에 속한다.
이것이 간략히 번뇌ㆍ업ㆍ고의 세 가지 일을 말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은 전전해서 서로 간에 인연이 되니,
이 번뇌는 업의 인연이요,
업은 고의 인연이 된다.
고는 고의 인연이고 번뇌의 인연이요,
번뇌는 업의 인연이요,
업은 고의 인연이요,
고는 고의 인연이 된다.
이것을 전전해서 서로 간에 인연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지난 세상의 온갖 번뇌를 무명이라 하는데,
이 무명으로부터 업이 생겨나서 능히 세계의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행이라 한다.
행으로부터 때 묻은 마음이 생겨나 최초의 몸의 원인이 되니,
마치 송아지가 어미를 알듯이 스스로 모양을 아는 까닭에 식(識)이라 한다.
이 식에서는
색이 없는 4음(陰)과 그것이 머무를 색(色)이 함께 생기나니, 이를 명색(名色)103)이라 한다.
이 명색에서 눈[眼] 등의 6정(情)이 생겨나니, 이를 6입(入)104)이라 한다.
정(情)과 진(塵)과 식(識)이 합하는 것을 촉(觸)이라 하고, 촉으로부터 수(受)105)가 생겨나고,
수에 대해 마음이 집착하는 것을 갈애라 하고, 갈애가 인연 때문에 구하는 것을 취라 한다.
취로부터 뒷세상의 인연인 업이 생기니 이를 유(有)라 하고, 유로부터 다시 뒷세상의 다섯 가지 쌓임[五衆]을 받으니
이를 생이라 한다. 생으로부터 다섯 가지 쌓임이 익어가고 무너지는 것을 노사(老死)라 한다. 노사는 근심ㆍ슬픔ㆍ통곡
등 갖가지 근심ㆍ걱정을 내어 뭇 고통이 어울려 모이게 된다.
만일 일심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보아 청정해지면 곧 무명이 다한다.
무명이 다하는 까닭에 행이 다하고 나아가서는 뭇 고통이 화합해서 집적되는 일이 모두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2인연의 모습이니, 이와 같이 해서 능히 방편을 써서 삿된 소견에 집착되지 않고 남에게
잘 연설해 주기 때문에 ‘교묘하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12인연을 관찰하여 법애(法愛)를 끊고 마음이 집착되지 않으며 실상을 알면 이것이 교묘함이다.
『반야바라밀경』 「불가진품(不可盡品)」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음은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다. 행도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고, 나아가서는
못 고통의 어울림도 허공 같아서 다할 수 없나니, 보살은 마땅히 이처럼 알아야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우치의 경계를 버리고 마땅히 들어갈 만한 곳이 없게 되니,
이 12연기를 관하는 자는 곧 도량에 앉아 살바야를 얻게 되느니라.”
【經】 아승기겁 이래 대서원을 일으켰다.
【論】 아승기란 뜻은 보살의 뜻을 풀이한 곳에서 이미 설명했거니와 겁의 뜻은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천리가 되는 돌산이 있는데, 장수천(長壽天)106)사람이 백년마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찾아와서는
한 번씩 스쳐서 그 큰 석산이 닳아 없어진다고 해도 겁은 아직 다하지 않는다.
사천리나 되는 큰 성 가운데 겨자씨를 가득 채워두고 장수천 사람이 백년이 지나면 한번씩 찾아와
겨자씨를 하나 가지고 가서 겨자씨가 다 없어진다고 해도 겁은 다하지 않는다.
보살은 이처럼 무수한 겁에 걸쳐 크고 바른 서원을 일으키어 중생을 건너게 하고 벗어나게 하니,
그러한 원을 대심요원(大心要願)이라 한다. 반드시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모든 결사를 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자 하니, 이것을 ‘서원[願]’이라 하는 것이다.
【經】 얼굴빛이 화열(和悅)하여 항상 먼저 인사하고 말하는 바가 거칠지 않았다.
【論】 성냄의 근본이 뽑혔기 때문이고, 질투를 제거했기 때문이며,
항상 큰 자ㆍ비ㆍ희ㆍ사를 닦기 때문이며, 네 종류의 삿된 말을 끊었기 때문에 얼굴빛이 평화롭고 즐거운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만약에 구걸하는 도인을 보거든
능히 네 가지로써 대접하고
처음 보아도 좋은 눈으로 대하며
반가이 맞아 공경하고 인사한다.
평상과 자리로 공양하여
바라는 바를 가득 채워 베풀라
보시하는 마음이 이러하다면
불도는 이미 손안에 있는 것 같으리.
만약에 입으로 짓는 네 가지 허물인
거짓말의 독과 이간질, 욕설, 꾸밈말
이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크고 아름다운 과보 얻으리.
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도를 구해 중생을 건지려 하여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버리니
마치 말에게 고삐가 있는 것과 같다.
【經】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음[無所畏]을 얻었다.
【論】 큰 위덕을 지닌 까닭이며, 견실한 공덕ㆍ지혜인 까닭이며,
최상의 변재다라니를 얻은 까닭에 대중 가운데에서 두려움 없음을 얻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안 마음에 지혜와 덕이 얇고도
밖으로 좋은 말만으로 꾸미면
마치 댓속이 비어있듯이
겉모양만 보임과 같네.
안 마음에 지혜와 덕 두텁고
밖으로 법다운 말로써 다듬으면
마치 묘한 금강과 같아서
안과 밖의 힘이 구족한 듯하네.
또한 두려움 없는 법을 성취하였으므로 단정하고 귀족으로서 큰 힘이 있으며,
지계ㆍ선정ㆍ지혜ㆍ말재주 등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으며,
그런 까닭에 대중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덕이 적고 지혜 없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이리가 사자를 본 것같이
숨어서 감히 나오지 못하리.
지혜가 크고 두려움이 없거든
마땅히 사자좌에 앉으라.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에
뭇 짐승이 모두 겁내는 듯하리.
한량없고 가없는 지혜와 복덕의 힘이 모여든 까닭에 두려움이 없으니, 이런 게송이 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악을 멸하고
조그마한 죄조차 없다면
이러한 큰 덕을 지닌 사람은
소원하여 채우지 못할 것 없네.
이러한 사람은 크게 지혜로워서
세계 가운데에서 괴로움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에게
생사와 열반은 하나가 되리.
또한 보살만이 얻는 두려움 없는 까닭이니,
『비나파나왕경(毘那婆那王經)』에서는 “보살만이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얻는다”고 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經】 헤아릴 수 없는 억겁 동안 법을 설했으니 교묘히 뛰어났다.
【論】 불방일(不放逸) 등의 모든 선근을 스스로 닦기를 좋아하는 이러한 보살들은 한 세상
혹은 둘ㆍ셋ㆍ네 세상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모든 공덕과 지혜를 모았던 것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중생을 위하여 큰 마음을 낸 이에게
공손치 않거나 교만을 낸다면
그 죄는 매우 커서 말할 수 없거늘
하물며 악심을 가하는 일이랴.
또한 이 보살은 셀 수 없고 한량없는 겁 동안에 몸을 닦고 계를 닦으며,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생멸의 속박을 풀고 거슬리고 순종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실상을 명료히 안다.
모든 법의 실상을 아는데 세 가지 이해가 있으니,
문해(聞解)ㆍ의해(義解)ㆍ득해(得解)이다. 갖가지로 법문을 연설하되 걸림이 없으며,
모두가 설법의 방편과 지혜바라밀을 얻으니,
이러한 보살들이 설하는 바는 성인의 말씀과 같아 모두 믿어 지녀야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지혜만 있고 많이 듣지 못하면
이는 실상을 알지 못하나니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은 있으되 보지 못함과 같도다.
들은 것 많건만 지혜 없다면
역시 실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니
마치 매우 밝은 가운데
등불까지 있으되 눈이 없음과 같다.
들은 것 많고 지혜도 예리하다면
그의 말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들은 것 없고 지혜도 없다면
이를 사람 중의 소라 부른다.
【문】 “무수한 억 겁 동안 교묘히 설법했다”고 말해도
좋거늘 어째서 또한 뛰어났다[出]고 하는가?
【답】 지혜 없는 사람이나 제자들에게 설법하기는 쉽거니와 지식이 많고 지혜가 날카로워
토론을 잘 하는 사람들에게 설법하기는 어렵다. 지혜가 적은 법사는 이런 경우에 물러나
움츠리거니와 많이 배우고 많이들은 이는 어려운 질문에도 담대하고 흔쾌해서 일체의
대중 가운데 큰 위덕이 있다.『천회경(天會經)』에 이런 게송이 있다.
얼굴과 눈과 치아의 광명이
대회(大會)에 두루 비치어
모두 하늘 광명을 무색케 하여
하나도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억겁 동안 법을 설했으니 교묘히 뛰어났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