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큰 스님과 나
광진구법회 정오 이철원
광덕 큰 스님과의 만남을 구구절절 기술하는 것은 자칫 정말 위대한 큰스님의 광영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까 하여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 저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큰 스님께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게 됐다.
큰 스님은 나에게는 앞길을 밝혀주신 자비하신 스승님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부처님 이상으로 믿고 따랐던 ‘갓 파더’였다. 일부 신도들로부터 ‘생불’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자애하신 큰 스님의 문하에서 제자를 자처하며 함께 했던 그 시절이 꿈같은 천국이었음을 이제 와서야 절감을 하게 된다.
내가 광덕 큰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6년 늦가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피곤하기만 한 군대생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쉬기 위해 들렸던 원주의 1군법당에서 군장병들에게 계를 주기 위해 수계법사로 오신 그 고명하시다는 광덕스님을 친전하는 영광을 안게 됐던 것이다.
나는 뭣도 모르고 수계를 받기 위해 도열한 군장병들 사이에 끼여 있었으며, 1군법사스님께서는“대단히 도력이 높으신 고명하신 스님이 수계를 주기 위해 친히 오셨으니 여러분은 기쁜 마음으로 계를 받으라”고 말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이날 나는 수계법사이신 광덕 스님을 보면서 두 번이나 크게 놀랐다. 첫 번째로 놀란 것은 스님께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도열해 앉아 있는 장병들의 등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오셔서는 군법당의 부처님 전에 나아가 절을 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러한 기묘한 절(삼배)은 처음이라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삼자락을 여미고 머리를 숙여서 절하시는 동작이 무슨 예술 공연을 보는 듯 했으며, 더구나 온 세상을 떠받치듯이 공손하게 머리위로 올리는 손동작은 지극정성의 절절함이 묻어 있는 듯 했다. 이렇게 진중하고 극진한, 그러면서도 춤을 추듯 날렵하기까지 한 이런 절 공양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날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스님께서 수계법어를 설하시기 위해 사자좌에 오르셔서 우리를 바라보셨을 때이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스님은 얼굴이 없었다. 스님의 얼굴을 분명 마주하고 있는데 그저 훤한 존안만 보일 뿐, 그 어떤 표정이나 인상이 한 점도 보이지가 않았다. 인상이 전혀 없는 그저 훤한 얼굴이라니, 이것은 마치 모든 것을 초탈한 그런 모습이 아닌가! 그야말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날 스님께서 수계법어를 설하시기는 하셨는데, 솔직히 무슨 얘기인지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본말이 전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그런 법어가 나에게 감명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날 광덕 큰 스님의 자태와 몸동작에서 이분이 ‘대각선인’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광덕스님만 찾아가면 나의 앞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에 광덕스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기로 결심을 굳게 하게 됐다.
군 생활하는 2년여의 시간동안 내내 광덕스님을 찾아가겠다는 그 꿈을 되새겼다. 그래서 불광지도 구독해 보았고, 그래서 광덕스님이 목요일마다 종로3가의 대각사에서 불광법회를 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1978년 10월쯤일 것이다. 나는 내가 근무했던 원주의 1군사령부 예하 후송병원에서 제대를 하게 됐다. 마침 제대하는 당일이 목요일이어서 나는 법회가 열리는 저녁시간에 맞추어 깨구리복(제대군인들의 향토복)을 입고 대각사로 스님을 찾아갔다. 마침 법회의 말미인 법등가족 모임시간이어서 나는 중앙에서 신도들과 환담을 하고 계신 광덕 스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스님! 1군법당에서 스님께 수계를 받은 정오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크게 소리치고 스님께 넙죽 절을 하였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형제님 잘 오셨습니다. 우리 함께 열심히 공부해 봅시다”라고 또박또박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스님과 대면하여 세 번째로 놀라게 된 사건이었다. 사실 나는 내가 스님께 넙죽 절하고 “제가 왔습니다”고 하면 스님께서는 “어 그래? 나의 문하에서 잘 수련을 좀 해보시게. 내가 신경을 써줌세.” 이렇게 말할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함께 열심히 공부를 해봅시다”고 하시니 참으로 실망스러운 말씀이었다. 게다가 ‘형제님’이라니 이건 여기가 뭐 교회인가?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스님께서는 “믿고 의지하고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은 불경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는 그 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대 후에 불광법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특히 나는 광덕스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졸졸졸 따라다니며 이런 저런 질문을 해대서 스님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심지어 화장실에 까지도 따라갔다. 그 어느 날, 난 나름대로는 심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여 스님께 질문을 던졌던 장소도 바로 화장실 안이었다.
“스님, 생노병사라고 하는데, 왜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또한 그 고통의 해결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는 화장실에까지 따라가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이병이군” 하시더니 뒤이어 “이병, 즉 네가 병이 났다는 말이야”라고 하셨다. 내가 마음에 병이 들어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라는 말로 이해를 했다.
스님은 이어서 “고통을 없애려거든 그 고통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 고통이라는 것도 사실은 실체가 없어서 그 고통 속으로 뛰어 들어가면 고통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위암이라는 신고를 극복하신 큰 스님의 말씀이라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스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스님의 행동을 구속하기 시작하자 원로 신도님들은 나를 극도로 경계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원로 신도님들께 불려가서 크게 혼이 났다. 갈매리 보현사에서 철야정진을 하고 스님과의 일문일답도 끝난 시간인데 원로 신도님들 대여섯 분이 나를 보현사 별채의 공방으로 불러들여 일시에 성토를 하셨던 것이다.
“자네처럼 모든 신도들이 스님을 졸졸 따라 다니면 어떻게 되겠나? 스님은 아무 일도가 할 수가 없어. 자네는 보살도도 모르나? 내가 뭔가 성취하고 싶어도 남들에게 먼저 양보하는 미덕이 보살도 아닌가. 앞으로는 자중하게.” 대층 이런 꾸지람을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스님 곁에 가지를 않았다.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 스님도 내가 갑자기 가까이 가지를 않자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스님은 멀리서라도 내가 눈에 띄면 그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시고 어떤 때는 손짓으로 “네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오시기도 했다.
4월 초파일을 앞두고 있는 어느 날인가 나는 잠실의 불광사를 들른 적이 있다. 마침 참배를 위해 보광당에 들어가 보니 보살님들이 보광당 안을 장식할 연등을 달지 못해 곤란해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자는 나 한사람뿐이어서 당연히 보광당 안의 연등을 다는 일을 보살님들을 도와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을 다 마치고 절을 막 나서려는데 거기 불광사 출입문 옆쪽으로 좀 떨어진 거리에 광덕스님이 서 계셨다. 만면에 예의 그 자애로운 미소를 띠시고 고개까지 끄덕이시며 손을 흔들어 나를 크게 아낀다는 그런 표시를 하시고 계셨다.
아마도 내가 연등을 혼자서 모두 달았다는 보고를 받으셨던 모양이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스님은 온몸으로 “참 고마운 일이다. 일손이 없어서 고생들하고 있는 차에 네가 와서 일을 도왔다 하니 감사한 일이구나” 이렇게 말하고 계신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자애로운 미소와 머리동작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처럼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던 광덕스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나는 몇시간인가를 엄청나게 울었다. 따스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불효를 저지른 불효자식 같은 심정이 되어 설움이 북받쳐 왔던 때문이다. 더구나 큰스님께서 인생의 노년에 불광사에서 주재하시지 못하고 범어사로 거처를 옮기시는 그 고난을 뻔히 지켜보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후회와 자책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나는 사랑을 받기만 했지 그 위대한 스승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후회막급이요, 죄송한 마음뿐이다.
이제라도 광덕스님을 현양하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요즈음 들어 부쩍 하게 된다. 광덕스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마하반야 바라밀’의 도리를 널리 현양할 수 있는 일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여기에 다짐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