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을이 더 풍성하다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5-12-25 16:35:02
가을이 한발짝 앞으로 바싹 다가와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나무에 붙어있던 잎새들이 하나둘 슬픔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담장밑이나 텃밭의 풀섶에 숨어 해맑게 울던 풀벌레의 목청도 더 욱 더 높아가고 있습니다.
손바닥처럼 크고 넓던 호박꽃잎도 어느새 져서 풋풋한 애호박 몇 개 맺어 놓았고, 벌레투성이 단감나무도 애기주먹만한 풋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습니다. 그리고 퉁퉁부운 다리를 곧추 세운 봉숭아들은 울룩불룩한 씨방을 터뜨릴 준비를 하며 꺽다리처럼 키가 큰 살구나무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단감나무의 벌레들이 옮겨붙었던 싸리나무도 이제 그 괴로움을 씻고 새 봄처럼 연한 잎새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눈에 띄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받침대없이 바닥을 기던 오이넝쿨은 말도 없이 시들어 버렸고, 분홍주머니 몇 개 꿰차고 있던 금낭화는 누가 뽑아갔는지 그 종적이 묘연합니다.
말하자면 이 텃밭의 모든 생명들도 경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독한 것들은 끝까지 버텨 살아남고 약한 것들은 일찌감치 꿈을 접습니다. 내 손바닥만한 만한 텃밭에서의 삶도 만만찮은데 하물며 모든 생명들이 다 모여있는 망망대해 세상이야말로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갈수록 경쟁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마른 사막과도 같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나마나 뻔합니다. 사기, 절도는 물론이고, 살인, 강도 행각이 끊이질 않습니다. 또한 기승을 더해가는 노동자들의 시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마에 빨간 띠를 묶고 권력을 향해 빈 주먹을 치켜 올리면서 철없는 아이들처럼 떼를 씁니다. 당근과 채찍도 소용없습니다. 달래고 때리기도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습니까. 얼마전 인천에 사는 한 여인이 세자녀와 함께 생목숨을 끊었고, 그 다음에는 재벌 한사람이 역시 금쪽같은 생목숨을 끊었습니다. 한 쪽은 쌀 한 톨 없는 사람이고, 한 쪽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사람입니다. 그러고보니 자살은 누구나 선택할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같습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늘 자살의 유혹을 견디며 살아가나 봅니다. 부유한 자는 더 높은 이상을 펼치지 못해 오는 좌절감에서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배고픔을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서 자살의 유혹을 받나 봅니다. 돌아보는 곳 모두 혼돈의 연속입니다. 발 딛고 사는 세상도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입니다. 그러니 한발 앞으로 바싹 다가선 가을을 누가 반가워 하겠습니까.
나는 단 하루만이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섭니다. 대문을 열고 거리를 나섭니다. 차도에 드문드문 도열해있던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크고 넙적한 잎새를 몇 장 떨어뜨립니다. 잎새들은 공기속으로 보이지 않는 파문을 그리며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굽니다.
가을이 오면 어차피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 모든 잎새들의 숙명입니다. 문득 슬픔이 밀려듭니다. 심심하면 쏟아져내리는 여름 장마비의 심술을 보면서 아직 준비되지 않는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하려니 괜히 두려움이 앞섭니다.
자, 이제 모두 허리를 펴고 저 멀리 아른대는 산길에 눈길을 돌려 보기 바랍니다. 앞 길만 보고 달려가던 속도를 줄이고 찬찬히 옆을 보십시요. 거기에는 분홍 빛 고운 잎새를 흔들며 가을이 엷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일 겁니다.
가을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절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은 나무를 보면 희망이 될 것이고, 하염없이 떨어지는 잎새를 보면 절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절망의 눈으로 앞을 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절망의 눈에는 항상 절망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절망의 눈을 감아 버리고 희망의 눈을 뜨십시요. 앞에 닥친 현실이 천근처럼 무겁고 괴로워도 희망의 눈을 뜨고 찬찬히 주변을 바라보십시요. 거기에는 꺼질듯한 숨소리로 한 입 가득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들풀들이 보일겁니다. 마치 희망을 기다리듯 하늘을 보고 있는 들풀들이 그 주변을 환히 밝혀 줍니다.
봐주는 이 없어도 홀로 꽃을 피어 희망을 품고 살다가 말없이 지는 들풀들이 사람들에게 한가지 교훈을 던져줍니다. 쪼들리고 힘들어도 희망을 갖고 살면 언젠가는 세상을 환히 밝히듯 꽃들이 희망처럼 활짝 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