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산길에서 불러보는 산야초, 그 정겨운 이름이여
기억과 추억 사이/발길 닿는 데로 여행
2008-07-22 21:41:17
야생화기행을 떠나는 길은 불볕 햇살로 달아오른 무더위로 가득했다. 하루종일 소나기를 퍼부었던 어제의 두터운 구름장은 정처없이 흩어지고 하늘이 금세 눈부시도록 맑게 개었다. 산야를 휘감고 있는 무더위는 국도를 따라 달려가는 내내 벗어지지 않았다. 한반도를 힘껏 내려누른 거대한 열대성 저기압의 압력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숨이 탁탁 막혔다. 대둔산 방향 국도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법계사 쪽으로 핸들을 꺾어 먼저 오산리에 있는 모 화백의 농가에 들렀다. 거기서 차를 마시고 나서 부근에 있는 산속으로 야생화 탐사를 떠날 참이었다. 황토를 처발라 지은 전형적인 농가 한 채와 그 앞에 딸린 마당은 내 어린 시절 궁벽진 고향집 풍경을 떠오르게 했다. 마당가를 빙 둘러 아기자기 피어난 꽃들하며 좁은 철망 속을 제 집인 듯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집오리들, 붉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유히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작은 연못속의 잉어들, 이 멋진 풍경을 마음속에 넣어두고 화실에서 마시는 쑥차 향은 오래도록 내 혀끝에서 맴돌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고 싶은 유토피아적인 삶이 바로 이런 것일까. 번잡한 도시 문명을 벗어나 자연과 함께 머물고 싶은 자연친화적인 삶이 내가 오랜동안 꿈꾸어 왔던 웰빙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부러움도 잠시, 그 화백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바랑산 자락 아래 계곡으로 오를 때는 한낮의 무더위가 절정에 오를 무렵이었다.
회원들이 나중에 도착할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 대둔산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랑산 자락 안골 계곡에 놓여진 마루천막을 정리하는 모습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눈이 시릴정도로 맑다
계곡 길에 들어찬 잡목들은 무더위에 지쳐 축축 늘어졌고 햇살의 열기에 녹아 후끈한 수액을 뿜어내느라 한창이었다. 그런 무더위 속을 뚫고 도착한 안골 계곡은 인적조차 없이 서늘하기만했다. 바깥세상에 덜 알려진 탓일까, 아니면 폭우라도 쏟아질 듯한 기세에 사람들이 미리 지레짐작 겁을 먹고 오지 않는 것일까. 마루 천막이 몇 개 놓여진 인적하나 없는 계곡은 오직 콸콸 흐르는 물소리와 무더위를 붙잡고 우는 매미소리뿐이었다. 작은 바위를 타고 넘어 세차게 굴러 떨어지는 계곡물은 어찌나 맑고 시원한지 죽어라고 목청을 뽑아대는 매미소리조차 서늘하게 만들었다. 자연 속에서 듣는 오케스트라가 바로 이런 것일까.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몰아친 소나기 소리도 이 오케스트라에 합류를 했다. 말발굽처럼 천막지붕을 우두두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먹는 밥맛은 내가 예전에 미처 경험하지 못한 또 하나의 낭만이었다. 정말 오랜동안 소나기가 힘차게 퍼부었나 싶었다. 눈 시리도록 맑았던 계곡물이 조금은 흙탕물빛을 띠고 있었다. 이제 저 산꼭대기에서부터 계곡물은 나무들을 차례로 뿌리 채 뽑아버리고 짙은 황토물이 되어 밀려 내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걱정이 앞섰다. 꼼짝없이 이 계곡에 갇히게 되는가 보다. 정글 같은 녹음에 둘러싸인 이 한 평짜리 천막이 일행의 다디단 잠자리가 되어줄지 모른다. 그런데도 아무런 동요없이 엄나무 껍질을 넣은 백숙은 부글부글 끊어 오르고, 누군가 지리산 깊은 산속에서 뜯어온 곰취가 풍성한 천연식단의 인기 품목이 되어갔다. 일행들 모두 곰취나물에 반해 있었다. 곰취를 맛나게 먹는 비결은 쌈이다. 손바닥만한 잎에 밥 한 숟가락과 삽겹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푹 찍어 바른 된장과 마늘, 김치를 섞어 쌈을 싸서 입안에 밀어 넣으면 곰취에 베어있는 씁쓰름한 향이 입안에 가득 차 오른다. 씹을수록 더 알싸하게 우러나는 향이 아마 곰취에 더욱 애착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곰취에 취해 밥을 먹는 동안 거짓말처럼 소나기는 멎어 버렸다. 소나기가 쏟아질 동안에 잠자고 있던 매미들도 다시 일제히 목청을 트기 시작했다.
냄비에 엄나무 껍질을 넣고 삼계탕 끓일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의 풍성한 식단이 된 곰취나물, 씹을수록 쌉쓰레한 맛이 난다
일행들이 모두 밥을 물리고 한가해졌을 즈음, 나는 일행 몇과 함께 계곡을 따라 산야초 탐사에 나섰다. 용케도 날이 갠 것은 하늘이 나에게 던져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비 그친 계곡을 따라 오르며 수풀 속에 숨어있는 산야초 냄새를 맡는 것도 한가한 시간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즐거움이리라. 마치 초등학교 시절 보물찾기를 하듯 마음이 쉴 새 없이 설레었다.
누구든 정이 들고 싶으면 스킨쉽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체도 몰랐던 산야초들이 친근하게 내 앞에 다가와 이름을 밝힌 것은 아마도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만진 나의 스킨쉽 때문이리라. 하찮은 식물을 안다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하찮음 속에도 닮고 싶은 것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산야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많은 산야초들은 알고 보면 제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미쳐 그 진실을 알지 못할 뿐, 산야초들의 여린 가슴에는 병들고 지친 인간들을 살릴 수 있는 오묘한 약효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걸로 보면 산야초를 하찮다고 하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법라다. 명색이 인간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더 하찮은 존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 분란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흑심 탓이리라. 그러고 보면 인간은 산야초 앞에 무릎을 꿇고 수 백 번 절을 해야 옳을 듯하다. 그런 경건한 자세로 산야초를 대한다면 산야초는 쉽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몸속에 내재한 모든 것들을 속 시원히 보여 줄 것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숲이 우거진 계곡 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계곡은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구름장으로 인해 어둑어둑하다. 그러나 그 답답한 공간 속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꼭꼭 숨어 있는 산야초를 찾아 일일이 호명을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구지뽕나무니. 누리장나무니, 초피나무 같은 멋스러운 이름들이 왜 그렇게 정겹게 다가오는 것일까.
점심 식사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는 회원들
대전 앉은 굿 설경 보유자인 송선자씨의 기도처
‘굳이 뽕나무인척 하면서 뽕나무 흉내를 내“서 이름이 붙었다는 구지뽕나무, 가을에 오디 같은 빨간 열매가 달리는데 뿌리로 술을 빚어 마시면 이명증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나무를 보면 원조가 최고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구지뽕나무 누에가 뽑은 실이 뽕나무 누에가 뽑은 실보다 더 실한 것을 보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나무 같아도 원조의 중요성만은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빨간 꽃받침에 에머렐드빛 꽃물이 들어 활짝 꽃을 피우는 누리장나무, 누린내를 풍겨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활짝 핀 꽃의 자태를 보면 여간 도발적이고 발칙한 것이 아니다. 꽃 속을 길게 삐져나온 수술은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뭇 사내를 꼬득이는 매혹적인 여인의 인조 눈썹을 닮았다. 지방에 따라 다양하게 불러지는 이름이나 슬픈 전설까지 숨쉬고 있는 것을 보면 누리장나무는 그렇게 시시한 존재는 아니다. 한 여인을 짝사랑하다 죽은 백정 아들의 무덤에서 자라났다는 누리장나무, 죽은 백정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라고 해서 그럴까. 그 고약한 누린내를 맡고 있으면 옛날에 죽은 백정아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구지뽕나무
초피나무
누리장 나무
천연 모기약 역할을 하는 초피나무도 신기하다. 잎을 따서 팔다리에 문지르면 몸살나게 달려들던 모기도 도망을 친다고 한다. 그 눅눅한 숲길에도 모기가 없는 것을 보면 초피나무 득을 단단히 본 것은 아닐까. 또한 초피나무 열매 껍질을 배게 속에 집어놓고 잠을 자면 두통이나 불면증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한번이라도 그 효과를 검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눈꺼풀을 내려누르는 불면증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일, 천연의 초피나무 열매껍질이 의사가 조제해준 약보다는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기 대문이다.
참나리꽃에 나비가 앉아 하늘거리며 날개짓을 하고 있는 모습
산야초 이름을 부르며 거의 500미터를 올라왔나보다. 푸른 채소들이 실하게 여물아가고 개 두 마리가 지키는 앉은 굿 설경 보유자 송선자씨의 낡은 기도처를 옆 눈으로 지나치며 더 깊이 계곡을 타고 올랐더니 드문드문 쌓아놓은 돌무더기들이 많이 눈이 띄었다. 한 눈에 봐도 이곳이 무당들의 기도처인 것이 분명하다. 흔적은 없지만 웬지 험험한 분위기가 그런 기분을 자아냈다. 그곳이 기도처라는 걸 알아차린 것은 귀청이 아프도록 세차게 흘러내렸던 계곡물이 점차 소리를 낮추고 힘이 없어질 때쯤 우리 앞에 떡 하니 나타난 집채만한 바위였다. 그 바위 아래 일렁이는 촛불이 불쑥불쑥 쌓아올린 돌무더기와 더불어 기도처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계곡길이 희미해진 걸 보면 어느 정도 계곡 끝까지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일행이 서둘러 하산할 마음을 굳힌 것은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차하면 소나기를 퍼부울 듯한 하늘의 시커먼 구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산을 할 때도 소나기는 쏟아지지 않았다. 선연하게 불타오르는 배롱나무 붉은 꽃불길조차 꺼뜨리지 못할 정도로 잠깐 잠깐씩 빗방울만 뿌려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