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8. 03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997년과 2002년 대선을 복기(復棋)했다면 JP(김종필)를 우선 떠올렸을 것 같다.
# 대선을 두 달 앞둔 1997년 10월 중순.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사무처 핵심 당료들은 이회창 후보의 구기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대선 판세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후보의 지지율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물론, 당내 경선에서 패한 뒤 탈당해 출마한 이인제 후보에게도 밀려나 있을 때였다.
그는 석 달 전 신한국당 후보로 확정됐으나 당내경선 주자였던 ‘9룡’들 중 이인제·박찬종 경선 후보가 탈당하는 등 적잖은 상처를 입은 채 대선행보에 나섰다.
대세론을 탔던 그의 지지율은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까지 터지면서 급락하기 시작했고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당료는 이 후보에게 충청권 맹주 JP와의 연대로 이 지역 지지세를 확산, 지지율 반전에 나설 것을 호소했으나 일축 당했다.
이 후보는 JP와 연대할 경우 수도권에서 고전하게 될 것이란 점 등을 거론하며 선거에 별로 도움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JP가 연대의 조건으로 내건 내각제 개헌문제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으며 DJ(김대중), 이인제 후보와의 3자대결로 가도 이길 수 있다는 판단도 했을 법하다.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시대 청산’을 대선 이슈로 부각시켰다는 측면에서도 JP와의 연대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왼쪽부터)가 1997년 5월 8일 서울 정동극장에서 있었던 어버이날 기념 연극을 관람하기에 앞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사진=조선일보DB
그러나 당시 대선결과로 보면 이 후보의 판세 분석이 옳았다고 하기 어렵다.
이 후보가 총 득표에서 DJ에게 39만표 뒤졌는데 충청권에선 41만표나 적었던 것이다.
JP는 당시 이 지역에서 정치적 맹주라 할 정도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
그는 한국 정당사에서 처음으로 이곳을 기반으로 한 정당(자민련)을 1995년 창당, 1년 만에 제 2야당으로 자리매김시켰던 주역이기도 했다. 1996년 총선에서 충청권을 거의 석권하고 영남권과 강원권에서도 다수 의원들을 당선시킴으로써 원내 50석을 차지했던 것.
JP는 DJ와 손잡게 됐다. 신한국당 당료들이 이 후보에게 호소한 지 열흘 후 DJ는 JP의 청구동 자택을 심야 방문, 내각제를 고리로 한 후보단일화 협상을 타결지었다. 선거일을 두 달정도 남겨둔 때였다.
JP와 자민련은 이 후보·신한국당보다 앞서 DJ·국민회의와 연대문제를 논의했으나 내각제 개헌 문제로 진통을 거듭, 성사여부가 불투명했었다.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에 합류했던 JP로선 국민회의보다는 신한국당에 더욱 쏠려있기도 했다. DJ와 후보단일화를 타결짓기 직전까지도 이 후보 측에 내각제 수용 가능성을 타진했을 정도였다.
DJP 연대 성사로 DJ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자 이 후보와 신한국당 측은 위기감을 느꼈다. 통합민주당의 조순 대표와 전격적으로 합당을 선언,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고 막판 세불리기에 적극 나섰던 것.
이 후보는 선거전 막판 ‘YS, 이인제 지원설’ 폭로를 계기로 이인제 후보 지지표가 빠지기 시작, DJ와 접전양상으로 치닫기도 했으나 충청권 열세를 만회하기는 어려웠고 결국 졌다.
▲ 1997년 8월 3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장애인협회 창립 1주년 행사에 참석한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왼쪽)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내빈실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사진=조선일보DB
# 5년 후 대선 땐 이회창 후보도 맘을 고쳐먹었다. JP와의 대선 연대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
1998년 DJ 정부 출범 직후부터 지속됐던 이회창 대세론은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에서 노무현 후보가 선출되면서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아들의 병역문제까지 재부각됐고 ‘며느리 원정출산 의혹’과 ‘가회동 자택 호화빌라’ 파문까지 터졌다.
게다가 노 후보의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으로 이 지역에서 이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다. 1997년 대선의 악몽에 시달렸을 법한 상황이었다.
때문인듯 충청권에 대한 세 확산에 적극 나섰다. JP에 이은 충청권 2인자로 꼽혔던 김용환 의원과 강창희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을 시작으로 자민련 의원들 영입에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JP와의 연대추진 움직임도 병행했다. 한나라당 사무처 당료들도 이 후보 자택을 다시 찾아 JP와의 연대 필요성을 호소했으며 이 후보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간의 단일화 움직임이 본격화된 10월 하순부터는 민주당 의원들까지 영입하기 위해 나섰고 일정 수준 성과도 냈다.
▲ 2018년 6월 24일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김종필 전 총리의 빈소를 찾은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조문을 마치고 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사진=조선일보DB
그러나 JP와의 연대는 또 무산됐다. 자민련 탈당 중진들을 중심으로 당내 반발이 거세지자 이 후보가 뜻을 접었던 것. 대선결과 이 후보는 충청권에서 26만표를 뒤졌는데, 이는 전국 표차의 절반이나 됐다.
결국 DJ와의 대선에선 이 후보 자신이 JP 측의 거듭된 연대제안에도 불구, 거부했고 노무현 후보와의 대선에선 연대 쪽으로 기울었으나 JP에 맞섰던 당내 자민련 출신 의원들의 반발에 밀려 성사시키지 못한 셈이 됐다.
JP는 이후 노무현·이회창 후보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대선 중립을 고수했으나 이 후보 측에 대해선 자민련 의원들을 빼내간 데 따른 불편한 심기를 표출함으로써 충청권 표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처럼 두차례 대선에서 보수진영은 끝내 갈라섰고, 그래서 졌던 것이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진통을 거듭하고 있는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합당문제가 떠올려지는 건 왜일까... ‘JP와 이회창’의 전철을 되밟기엔 나라상황이 너무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봉대 / 정치 칼럼니스트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