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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쟁 episode. 02
(누구 헬리콥터 살 사람 없습니까?)
-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
부패는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아무리 튼튼한 나라라도 부정부패를 방치하면 금방 추락하고 만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앉은 이유도 경제정책 실패도 있었지만, 바로 이 정치권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조기에 척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전했던 월남은 건국에서부터 패망 때까지 부패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부패는 끊이지 않았고, 그 주인공들도 최고 지도자에서부터 저 시골 마을 촌장에 이르기까지 부패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늘은 월남 공직자의 부패 중 굵직한 사건 몇 가지를 소개한다.
-국가 경찰권까지 팔아먹은 지도자-
월남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자질구레한 좀도둑은 물론 국가 경찰권까지 팔아먹은 거대한 부패도 있었다.
먼저 국가 경찰권을 팔아먹은 이야기부터 해보자. 이 이야기는 영국 기자 데니스 워너의 『印支 風雲 三十年』(백우근 역, 태양문화사)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다.
국가의 경찰권을 팔아먹은 사람은 그 부패 덩치에 걸맞게 바오다이 월남 초대 국가 원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1949년 3월 8일 파리협정에 따라 그해 6월,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바오다이를 월남 국가원수로 다시 돌려보냈다. 그는 이미 월맹 호찌민 군사재판이 사형선고를 내려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바오다이는 1954년 6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지원을 받고 등장한 고딘 디엠에게 정권을 넘겨주는데, 정권을 인계하기 직전 국가 경찰권을 레 반 비엔이라는 갱단 두목에게 넘기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 대가로 그가 받은 뇌물은 4천만 피아스타(당시 환율로 미화 1백 14만 달러)였다.
경찰권을 돈을 주고 산 갱단 두목 레 반 비엔은 그의 수하인 빈 수엔이 이끄는 정당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수행하게 해놓고 본인은 마약과 매춘 사업을 공공연히 했다.
비엔은 사이공 촐롱가에 있는 제일 큰 도박장, 사이공 시내에서 제일 큰 백화점과 1백여 개의 상점,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매음굴인 <거울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거대한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운영하는 매음굴 <거울의 집>은 사면을 거울로 장식한 수백 개의 방에 1천 2백여 명의 창녀들이 24시간 영업을 했다고 한다.
-창녀 1천 2백 명의 매음굴-
비엔이 사는 집도 갱단 두목답게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숙소 앞에는직경 20여 미터 되는 연못이 가로놓여 있었고, 그의 숙소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연못에 놓인 난간도 없는 좁은 나무다리를 통과해야만 했다. 다리 밑 연못에는 굶주린 두 마리의 악어가 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침실 입구에는 잘 길들어진 큰 표범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 놓은 채 매서운 눈으로 방문자를 감시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월남 수상이 된 고 딘 디엠은 비엔이 하는 짓 하나하나가 모두 눈엣가시였다. 디엠은 먼저 경찰권부터 확보하기 위해 경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빈 수엔의 정당을 해체해버렸다. 그러자 오른팔을 잃은 비엔이 노골적으로 반 디엠 운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 때 부터 현직 수상인 디엠과 거대 갱단 두목인 비엔간에 전투를 방불케 하는 공방이 시작되었다. 사이공 시내가 아수라장이 될 정도로 사흘 동안 밀고 당기던 공방은 결국 사단 병력과 탱크, 로켓포까지 동원한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비엔은 메콩강 삼각주 밀림으로 도망쳤고 그를 지키던 악어와 표범은군인에 의해 사살되었다.
-공개총살로도 못 막은 부패-
이번에는 구엔 카오 키의 회고록 『Twenty years and Twenty days』(월남 20년 패망 20일, 연희출판사, 홍인근 역)에 나타난 월남의 부정부패 이야기를 보자.
구엔 카오 키는 월남 군정 시절 수상을 지냈고 민정 때 부통령을 하다가 월남 패망하면서 미국으로 망명한 월남 최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미국에서 발간한 회고록에는 자기 자랑을 많이 늘어놓았는데, 그래도 재직 중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척결 의지를 갖고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그의 회고록 중 상당 부분이 부패를 성토하는 이야기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65년 겨울, 당시 철강업계의 대부라고 할 만한 중국계 거상 타뷘을 사이공 중앙시장 한복판에서 공개총살을 시켰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만 하루도 지나기 전이었다. 타뷘이 사형선고를 받은 죄명은 철강 암거래였다. 그가 재판을 받는 동안 정계 고위직 간부를 비롯해 재계의 수많은 사람이 구명 손길을 키에게 뻗쳤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사람들이 많이 보는 시장통에서 공개총살을 시켜버렸다. 그의 강력한 부패 척결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그가 손을 댄 곳은 쌀 암거래시장이었다. 쌀 시장 역시 중국계 상인 열서너 명이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이들의 농간으로 쌀값이 미친년 널뛰듯 오르락내리락했다. 값이 폭등해 원성이 높아지면 조금 내려줘서 인심을 진정시키고 그러다 잠잠해지면 또 큰 폭으로 올려 돈을 버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월남은 원래 쌀이 그렇게 많이 부족한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에서 원조로 들어오는 쌀의 양이 엄청난데다 2모작이 가능한 나라기 때문에 수급조절만 잘 되면 어느 정도 민생안정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쌀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국민 원성이 그치지 않자 키 수상이 직접 뒷조사를 해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상인들이 쌀 공급이 늘어나면 밤에 몰래 쌀을 사이공 강에다 갖다 내버려 양을 줄인다는 게 확인되었다.
다음날, 키 수상은 상인들을 모두 불러다 집합시켜 놓고 보는 데서 종이쪽지에 이름을 하나하나 써서 모자에 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일 당장 쌀을 충분히 시장에 풀어 값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여기 쪽지 중에서 아무나 하나 집어서 해당자를 공개총살 하겠다!”
철강 상인을 공개적으로 총살한 사실을 잘 아는 쌀 상인들은 그날 밤 바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쌀을 풀어 값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이런 방법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고 그는 실토하고 있다. 교묘한 농간에 폭등하는 쌀값은 끝까지 정부와 농민을 괴롭히는 부패의 하나였다.
-탱크와 헬리콥터도 밀매 가능-
쾅 둑 스님 분신자살 사건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AP 통신 기자 말콤브라운(Malcom Browne)이 쓴 『이것이 월남전이다 (심재훈 역, 정향사 간)라는 책을 보면 월남 현역군인 간부들의 부정부패도 둘째가라면 서러울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정부의 신뢰를 떨어트려 국민이 베트콩 편을 들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월남의 지방행정은 보통 대위나 소령이 책임지고 있었는데 정부가 국민에게 주는 혜택을 대부분 이들이 중간에서 가로채 갔다.
월남 군인이 싸움터에서 전사하면 정부에서는 그 유가족에게 조건 없이 1년 치 봉급(대략 400달러 정도)을 지급했다. 그런데 이 지급액이 그대로 유가족에게 지불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짜로 지급되는 관도 비싼 값을 받고, 장례비다, 행정수수료다, 기타 인건비다, 하면서 갖은 명목을 다 붙여 돈을 착취했다. 그 결과 유가족한테는 겨우 30% 정도만지급되었다. 그래도 가족은 어디 항의 한 번 할 수가 없었었다. 이들에게 밉보이면 베트콩으로 몰아 감옥에 처넣든지 아니면 총살을 해버리기때문이었다.
월남의 부패 중에 규모가 크기로는 단연 군수품 빼돌리기였다. 미국군수물자가 부두에 하역되는 순간부터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빠져나갔다. 맥주, 티브이, 오토바이, 타자기 등은 기본이고, 1967년 경우 한 해 동안 쌀이 50만 톤이 사라졌는가 하면, 시멘트 68 트럭 분 중에서 42트럭 분이 한꺼번에 도난당하기도 했다.
어떤 운전사는 간도 크게 컴퓨터 등 장물 250만달러 치를 대형 트럭에 싣고 사이공 시내를 유유히 돌아다니며 팔려다가 끝내 살 사람을 못 찾자 도로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긴 필자가 근무할 때도 퀴논 시내에 나가면 수류탄 소총 크레모아 등 무기류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군 중에서도 이런 시중에 나도는 무기를 사다가 적 한테서 노획한 무기라고 속여 훈장을 받으려는 병사들이 더러 있었다.
미국이 원조하는 비료 부정사건도 유명한 이야기다.
1974년 4월 미 상원에서 조사해 6월 말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월남에 원조하는 비료의 70%는 도착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몇 달 뒤 값이 서너 배 올라 농촌 지역에 띄엄띄엄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짓을 하는 조직의 실권자가 현직에 있는 티우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월남의 군수품 부정거래는 여자들 향수나 수류탄 같은 작은 물품에서부터 크게는 탱크나 헬리콥터까지 수요자를 찾아 나설 정도로 암거래가 성행했다고 하니 가히 부정부패의 양과 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국군의 부정부패-
그렇다면 한국군의 부정부패는 어떠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채명신 사령관은 어떤 범죄보다도 철저히 단속했던 모양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사소한 부정도 용서치 않고 영창을 보낸 뒤 귀국 조치했거나 군법에 회부하여 엄하게 처벌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주요지휘관급 부정부패 사례만 몇 가지 소개한다.
먼저 9사단 29연대 대대장 박00 중령이 66. 9월 파월된 이후 12월까지 4개월 동안 매월 지급되는 기밀비 중에 11불씩을 개인 착복했는가 하면, 노무자 임금 중에서 11월분과 12월분 2회에 걸쳐 33,000 피아스타를 횡령 착복하다가 징계처분을 받고 귀국 조치 됐다.
또 100 군수사령부 참모장 이** 대령이 참모 주00 중령 등과 결탁해 66년 10월부터 67년 1월까지 군수사령부에 하달되는 세탁비 및 영현비 중에서 1,928,750 피아스타와 1,030불을 횡령하여 분배 착복했다가 군법에 회부됐고, 수도사단 26연대 통신대 병장 정**은 67.1.19. 통신용 배터리 2상자 (384개)를 월남인에게 팔아먹으려다가 잡혀 영창에 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단 0연대 2대대장 중령 김00은 67년 피엑스 조달품인 맥주 320상자, 콜라 100상자, 담배 50 상자, 위스키 18상자를 몰래 빼돌려 월남 상인한테 팔아 1,829불을 착복한 혐의로 군법에 회부 됐다.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철저했던 채명신-
채명신 사령관은 그 당시 이미 세계적 영웅이었다. 국내 TV나 신문에서는 연일 그의 기사가 톱뉴스로 보도되었고, 외신들도 그의 월남전 공적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다 보니 채 사령관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서울 사령관의 집에는 명절 때마다 각계로부터 격려 차원의 많은 선물이 답지했다.
그때 받은 선물 리스트도 있었다. 사령관 부인 문정인 여사가 꼼꼼하게 기록한 그 리스트는 1967년 추석 때 받은 선물 내용으로 편지지 석 장 분량이었다.
편지지에는 보낸 사람 이름과 직위, 물품 종류와 수량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물품은 대부분 참기름, 설탕, 멸치, 과일, 등 가정에서 흔히 쓰는 식료품이 대부분이었는데 간혹 인삼, 녹용, 양장옷감, 양복기지 등 당시로는 제법 값나가는 물품도 있었다.
선물을 보낸 인사도 각계각층이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정치인, 경제인이 수두룩했고, 군부대 지휘관 이름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런 물품 처리에 채 사령관의 대답은 간단했다.
“집사람이 그렇게 리스트를 만들어 내게 보내주면 내가 보고 너무 비싸다 싶은 건 되돌려주게 하고 그렇지 않은 건 교회를 통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냈지.”
“전부 다 말입니까?"
"하하, 밀가루나 설탕 같은 건 조금 놔뒀다가 빵 구워 먹었어!”
노무현 정부 때 베트남 농 득 마잉 서기장이 한국을 방문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재계 총수들은 마잉 서기장과 대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성대한 환영 만찬도 베풀어주었다. 이유는 베트남이 중국과 맞먹는 투자대상국이기 때문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참전자로서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감회가 새로워진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베트남 전쟁터에서 싸웠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