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6/ 하나님은 가나안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왜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는가?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수 5:2~3)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길갈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가나안 전쟁을 준비한다. 그런데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내리신다. 그것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수 5:2)는 것이었다. 전쟁을 목전에 둔 전사들에게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전쟁을 포기하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은 남자들은 걷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군사들이 모두 할례를 받은 적진을 공격하면 백전백승이다. 그런 사례가 성경에도 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의 귀향길에 그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욕을 당한다. 그러자 오라비 레위와 시므온이 복수를 하려고 왕자 세겜에게 그 성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으면 누이를 주겠다고 말한다. 그들이 할례를 받자 두 사람은 칼을 차고 가서 남자들을 몰살한다. 그러므로 전쟁을 앞둔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전쟁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공격하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되겠는가? 그런데 왜 하나님은 여리고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을까?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수 5:4~7).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다. 할례 받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이 아니다. 그래서 심지어 심은 지 3년 되지 않은 과일은 먹지도 말라는 명령을 하면서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레 19:23)이라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언약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 당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던 할례가 출애굽 2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민수기 13장에 기록된 대로 가데스에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불평하고 반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여리고 정복을 앞두고 다시 할례를 실시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불평 그리고 반역의 현장이었다. 그런 그들이 광야를 지나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 초입에 이른 것이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요단강을 건넌 그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받으시겠다는 의미였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이 예식을 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속의 땅에서는 한 사람도 할례 없는 자"(수 5:7)가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화잇도 같은 맥락에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데스에서 반역한 이후 할례 의식이 중지된 것은 그 의식이 상징한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졌음을 이스라엘에게 계속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거절의 세월은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언약의 표를 회복하셨다. 광야에서 탄생한 백성 모두에게 다 할례 의식이 거행되었다(부조, 485).
'다시'라는 말은 좋은 말이다. 그것은 실수한 사람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희망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잠언은 의인을 가리켜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자"(잠 24:16)라고 말한다. 요나도 바다의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내가...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욘 2:4)고 하였다. 그것이 그의 회복의 출발점이었다. 사도 요한은 계시 중에 작은 두루마리를 먹고 "입에는 다나 배에는 심히 쓴"(계 10:10) 경험을 하자 천사가 그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계 10:11)는 말을 듣는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절정인 재림의 약속이 곧 “내가 다시 와서”(요 14:3)라는 예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이다.
할례 의식이 끝나자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수 5:9)고 하시며 그곳 지명을 '길'이라고 명명하였다. 길갈이란 말 자체가 '굴러가게 함' 혹은 '말아올림'이란 뜻이다. 여호와께서 이 의식이 끝난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수치가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길이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진(陳)이었고, 곧 가나안 정복의 본부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한 것이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군사적인 준비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