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쌉쌀한 칡국수는 메밀국수와는 또 다른 맛의 별미다. 칡 특유의 맛과 향이 입맛을 당기는 데다 소화도 잘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요즘에는 칡즙이 건강 음료로 주목받고 칡을 활용한 식품도 많아 참살이 음식으로 인기가 높다. 그렇지만 중장년 세대한테 칡은 군것질거리가 없던 시절 주전부리였을 뿐이고, 더 옛날에는 배고픔을 면하려고 마지못해 먹던 식품이다. 그런데 이런 칡으로 누가 국수를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우리나라 야산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칡이니 자연스럽게 칡뿌리를 이용해 국수도 뽑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을 것 같지만 칡을 음식으로 활용한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은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우리가 칡을 먹게 된 과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하게 들자 조정에서 가뭄 대책을 논의하는데 일본어 통역인 왜통사 윤인보, 윤인소 형제가 “일본인들은 칡뿌리와 고사리 뿌리를 먹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흉년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한다. 이 말을 그럴듯하게 여긴 세종이 윤인보를 경상도로, 윤인소를 전라도와 충청도로 내려보내 칡뿌리 캐 먹는 방법을 알리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흉년에 대비해 칡뿌리 식용법을 보급했지만 거부감이 심했는지 널리 퍼지지는 못한 모양이다. 성종 때 또다시 가뭄이 들자 이번에는 한명회가 다시 칡뿌리를 보급하자고 제안했다.
“왜인들은 칡을 많이 먹는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칡뿌리를 캐어 먹는 자가 있다고 하니 칡뿌리를 시험하여 먹을 만하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기근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이듬해 또 가뭄이 들자 이번에도 한명회가 칡뿌리 식용을 제안한다. 그사이 자신도 칡뿌리를 먹어본 모양이다.
“지금은 조선 팔도에 모두 가뭄이 들었는데 듣자 하니 왜인들이 칡뿌리를 먹는다고 하기에 시험 삼아 칡뿌리를 캐다가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가루로 만든 후 쌀 싸라기와 섞어 죽을 끓여 먹으니 배를 채울 만했습니다. 솔방울 역시 가루로 만들어 싸라기와 섞어서 먹으니 매우 좋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이 칡뿌리와 솔방울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좋다고 여겨지니 즉시 시험을 하자면서 즉각 실천에 옮겼다. 이때 한명회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만들어서 통 단위로 인구의 많고 적음과 음식이 있고 없음을 살펴서 양식을 나누어 주면 때맞춰 구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것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우리나라 지방행정의 기초가 되는 통반 조직의 기원이다. 우리나라 동 조직의 기초가 엉뚱하게 칡뿌리와 관계가 있다.
칡뿌리를 비상식량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이렇게 세종 때부터 시작돼 성종 무렵까지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칡뿌리와 곡식 싸라기를 섞어 죽을 쒀 먹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용법이 논의되다가 마침내 칡가루와 전분을 섞은 칡국수가 탄생한다.
칡국수는 한참 후인 숙종 때 기록에 보인다. 《산림경제》에 칡국수 만드는 법이 적혀 있는데 칡국수는 강원도 간성에서 나오는 칡가루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고, 녹두 녹말과 섞어서 국수를 만들면 갈증을 없애준다며 모래땅에서 나는 칡가루가 더욱 좋다고 했다. 칡가루의 품질을 따질 정도가 됐고 여름에 더위를 잊게 한다고 했으니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칡국수를 양식으로, 또 여름철 별미로 즐긴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 우리나라는 칡국수 만드는 법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모양이다. 당시 일본 기행문인 《해유록》에 “왜인은 칡가루를 잘 만든다면서 칡뿌리를 물에 담가 두들겨서 가루를 만들면 부드럽고 가늘며 깨끗한 가루가 만들어지는데 희고 맛이 달면서 성질이 차가워 국수를 만들면 훌륭하다고 했다. 하지만 (왜인들은) 녹두가루를 만드는 것은 우리처럼 정밀하지 못해서 해마다 대마도에서 에도에 바치는 것은 조선의 녹두가루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칡국수를 만들려면 칡가루와 녹말가루를 적당하게 섞어야 하는데 왜인들은 칡가루는 잘 만들지만 녹두 가루는 정밀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니, 두 가지를 제대로 섞어야 맛이 나는 칡국수는 조선 것이 맛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칡국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름철 별미로 꼽히는데 아마 칡의 성질도 한몫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초강목》에서 칡은 해독 작용을 하며 열을 내려주기 때문에 더위를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여름철 별미 국수 재료로 딱 어울리는 성질이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