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십 년이 훨씬 넘은 세탁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드디어 멈춰 버리고 말랐다. 벌써부터 세탁이 개운하게 되지 않아서 은근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전부터 벼르던 드럼세탁기를 최신형으로 고르고 골랐다.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그것이 빨리 배달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세탁기를 세탁실에 놓으려고 하니 전에 있던 것보다 크기가 컸다. 설치기사가 잠시 난감해 하더니 다행히 이런 경우에는 벽돌 몇 장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당황해서 꼭 벽돌이어야만 되냐고 물었다. 탄탄한 플라스틱이나 나무로는 도저히 안 되는지 재차 물었다. 순간 재작년 이맘때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파트 외관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안면이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빨간 벽돌을 양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공사에 쓸 새로운 벽돌이었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아주머니를 불러 세워놓고 공공재산 운운했다. 그분은 꼭 필요해서 가져가는 것이니 같은 아파트 주민끼리 이런 것쯤은 못 본 척 하자고 했다. 그 당당함에 정말 화가 나서 지난여름 화단에서 희귀하고 예쁜 꽃을 뿌리째 모종삽으로 떠가는 것도 보았노라고 지나간 일까지 상기시켰다. 경비 아저씨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기어이 벽돌 두 장을 들고 갔다. 나의 오지랖 덕분에 다음날 관리소장은 입주민들에게 공공기물을 마음대로 가져가지 말라는 방송을 해야 했다.
그뿐이던가 당시 고등학생이던 딸아이가 학원에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축 중이던 동사무소 앞에 쌓여있는 벽돌을 자전거에 가득 싣고 가는 아주머니를 발견 했단다. 딸은 자전거 뒷 꽁무니를 붙잡고는 개인재산이 아니니까 가져가지 마시라고 했단다.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어떤 할아버지께서 학생 말이 맞긴 하지만 꼭 필요해서 가져가는 것 같으니 그냥 두라고 하셨단다.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며 칭찬을 하시면서 화가 난 딸아이를 달래주시던 그분은 알고 보니 우리와 같은 아파드에 사는 어른이셨다. 지금도 가끔 마주치면 넉넉한 미소를 보내 주신다. 어쨌든 모녀가 공공재산 지킴이로 유명세를 탔는데 당장 아쉽다고 해서 벽돌을 달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남에게 민폐 끼치는 행위는 정말 하기 싫었다.
한편으로는 각종 인터넷사이트를 샅샅이 뒤지고 전자제품 매장을 서너 군데나 돌아다니면서 발품을 판 시간이 아까웠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쏙 드는 드럼 세탁기를 놓치기 싫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해온 말들과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것을 포기하고 통돌이 세탁기를 써야하나 그야말로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설치기사가 벽돌이 견고하고 구하기도 쉽기 때문에 다른 대안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서 경비아저씨의 도움으로 벽돌 두 장을 구해왔다. 짐짓 모른 척 했다. 그런데 막상 세탁기를 설치하고 보니 크기가 딱 맞아 굳이 벽돌이 필요 없었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속으로 환호성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벽돌 두 장에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나름대로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원칙을 고수하며 사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같은 처지가 되고 보니 비로소 그 아주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어르신의 넉넉한 미소의 의미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벽돌 두 장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줄이야!
오늘 무심코 한 생각화 행동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메아리가 되어서 돌아올지를 모를 일이다. 아무리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지천명이라는 하늘의 뜻도 알 수 있다는 연륜이 되어서도 깨닫지 못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남의 허물에 너무 인색했다. 나의 경험만으로 고정관념을 가지고 남을 평가한 나를 발견한다. 상대방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해와 너그러움이 없었다. 남의 잘잘못에 인색하고 비판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다. 부디 나의 하루하루가 그런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오늘도 바람직한 어른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