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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문경새제
2024년 10월 19일(토요일)
산행코스 : 고사리주차장(09:50) - 제3관문(조령관) (10:30) - 제2관문(조곡관) (11:45) - 교귀정(12:10) - 제1관문(주흘관) (12:40) - 주차장(13:00)
산행거리 : 11km
고사리주차장
거대한 자연휴양림 표지석 좌측의 조령3관문으로 진행합니다.
휴양림
고사리 1300m, 삼관문 700m
포장길을 지나면 맨발로 걷기 좋은 흙길이 나옵니다.
제3관문이 가까워지면서 과거길 선비상이 보입니다.
연풍조령정
연풍조령정(延豊鳥嶺亭) 편액
부산에서 새재를 거쳐서 한양(서울)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중심에 연풍이 있다는 조형물입니다.
조령의 백두대간비
조령관(제3관문) 650m
경상북도 문경과 충북 괴산 청풍면의 경계이기도 합니다.
조령관(鳥嶺關)
제3관문 조령관을 통과하면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입니다. 급제를 꿈꿨던 선비처럼 영남에서 충청도로 고개를 넘었습니다. 조령관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세워져서 그런지 주흘관과 달리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남제3관(嶺南第三關)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숙종 34년 1708) 때 중창한 3관문은 고려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문루는 1907년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과 누각을 복원하였습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지붕입니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cm입니다.
제3관문은 험준한 조령산 능선과 마패봉 능선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습니다.
문경새재 성황당
사적 제147호인 주흘관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성황당은 여신을 모신 곳입니다. 성황당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제1관문의 축성과 비슷한 시기인 1700년경에 건립하고 1844년에 중수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옛날에는 고개마다 하나씩은 꼭 있었던 서낭당(선황당)이며, 가끔 기도드리는 분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먹고 살기 힘들 때 오며, 가며 소원을 빌던 곳으로써, 어머니들은 시집살이 고될 때 믿을 거라고는 자식과 서낭당의 신령님뿐이었으니, 시대가 현대화되기 전까지는 시골 마을마다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조령산(1,026m), 깃대봉(812m), 마패봉(925m), 부봉(917m), 영봉(1,106m), 주흥산(1,075m), 관봉(1,039m) 등의 고봉준령이 에워싸고 있으며 그 사이로 문경새재길이 있습니다.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 계곡으로 새재길이 지나가며 제3관문에서 제1관문까지는 약 6.5km이니 쉬엄쉬엄 내려갑니다.
해발고도 500m
제3관문을 넘으면 내리막길이 시작되며 현재의 새재길은 옛길 옆에 일제때 새로 개설한 도로입니다.
몇 십년전만 해도 자동차가 넘어다니던 도로였지만 지금은 걷기 좋은 길입니다.
이진터(475m)
동화원 0.9km, 제3관문 2.1km, 고사리주차장 4.1km, 제2관문 1.4km, 촬영장 4.1km, 제1관문 4.4km, 박물관 4.9km
이진터(二陣址)
임진년(壬辰年 1592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치고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면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부장등 부하등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이 조선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합니다.
귀틀집
주로 산악지방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물정자 모양이 되고 지방에 따라 방틀집,·목채집,·틀목집,·투막집 혹은 정한식(井韓式)집이라고 합니다. 주로 산간지역의 화전경작지 취락에 분포합니다.
바위굴
옛날 갑작스런 소나기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 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 임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새재아리랑 시비
해발고도 400m
영남제2관(嶺南第二關)
총 길이 10km인 문경새재는 외침에 대비하여 세개의 관문을 두었습니다.
새 관문 중 제2관문인 조곡관을 시작으로 1관문과 3관문이 세워졌습니다.
2관문인 조곡관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27년 1594년에 충주사람 수문장 신충원이 게릴라 전을 펼치기 위하여 이곳에 처음 쌓았던 성이었습니다. 새재 관문 중 제일 먼저 세원진 관문입니다.
그 후 숙종 34년(1708) 이 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이 재확인되어 조령산성을 쌓을때 신충원이 쌓은 옛 성을 보수하고 조동문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이 때 1관문 3관문도 함께 축성되었습니다.
현재의 2관문은 그 후 1907년 을미의병 때 화재로 폐허가 된 것을 문화재로 지정된 후 1978년에 누각과 석성을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이 때부터 2관문을 조동문에서 조곡관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 지붕입니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입니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입니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입니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조곡관(鳥谷關).
조선 숙종때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으나 소실되어 방치되던 것을 1978년 복원하면서 조곡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조곡관(鳥谷關)
두번째 관문인 조곡관을 만나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후 이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에 따라 1594년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응암 근처에 일자성을 축조했는데 이 성이 지금의 조곡관입니다. 조곡관은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먼저 설치되었지만 명칭 상으로는 제2관문이 됩니다.
새재계곡
조곡폭포가 나타납니다.
응암(매바우)폭포
산불됴심 표석 (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
용추폭포에서 500m쯤 가면 훈민정음으로 쓴 ‘산불됴심’ 표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표석의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입니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집니다.
현재 국내에 고오로 된 한굴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 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보호하려는 인식은 옛날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원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 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되며, 아들을 못낳은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꾸구리바위
용추폭포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꾸구리(잉어과에 속한 민물고기)바위가 나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합니다.
문경읍 상초리 초점(草岾) 교귀정(交龜亭) 부근에 세워진 김수근의 타루비는 비신(碑身) 높이 143㎝, 길이 55㎝, 두께 30㎝이고 비부(碑趺)는 높이 48㎝, 가로108㎝, 세로 84㎝이다. 팔작형이며 비개(碑蓋)는 비신과 함께 6.25의 총흔이 남아 비문도 일부가 훼손되어 있으나 이 비는 1855년(철종6) 9월에 안동부사로 재직시 주휼(周恤) 선정한 공로로 안동의 38방(坊)의 소민(小民)들이 세운 비입니다.
안동부사 김수근의 타루비(故安東府使上國正文公追思墮淚碑 고안동부사상국정문공추사타루비)
김수근의 본관은 안동이고, 정조22년(1798)에 출생하여 철종5년(1855)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는 회부이고 호는 계산초옹 계산초로 입니다. 순조28년(1828)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순조34년(18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부사 재임 기간은 1839년에서 1840년까지 였습니다.
비석은 1855년 안동부의 백성들이 세웠는데, 한국전쟁때 훼손 된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하나 시선을 끄는 비석은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가 있는데 비문의 앞쪽에‘고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휘수근추사타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諱洙根追思墮淚碑)’라고 새겨져 있고 중간쯤 2자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동인으로서 후손들도 안동에 세거(世居)해 살면서 왜 안동부사를 기리는 비를 안동에 세우지 않고 멀리 문경새재에 세웠을까? 이는 물론 사람이 많이 다니는 문경새재를 왕래하는 관리, 유생들에게 보여 귀감을 삼게 하려는 뜻도 있다고 하겠으나, 큰 이유는 딴 데 있었습니다. 안동지방에서는 퇴계 선생 사후에는 절대로 선정비를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용추폭포는 사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눈에 드라마의 장면이 떠오를 것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자기 부하들에게 최후를 맞이하며 했던 대사입니다.
용추(龍湫)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있는 교구정 맞은 편 개울 건너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자연암반을 다듬지 않은 채 ‘龍湫’라는 큰 글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가로로 새기고, 그 옆에 ‘己卯具志禎書’를 세로 방향으로 작게 새겼다. 구지정은 조선 숙종대 인물이므로 기묘년은 1699년(숙종 25년)으로 추정됩니다.
이곳 주변을 용추라 부르는데 자연 경관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1750년대 초반의 『해동지도』에 이곳이 소개되고, 퇴계 이황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경관을 시로 읊은 것으로 볼 때, 이전부터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용추폭포 주변 암벽에 `용추(龍湫)`라고 각자를 하여 놓았는데, 좌측에 己卯具志禎書(기묘구지정서)를 세로 방향으로 작게 새겼있습니다. 기묘년은 1699년(숙종 25년)으로 추정됩니다. 글씨를 새긴 사람은 조선 숙종대 인물 구지정(具志禎 1647~1713)으로 1666년(현종7년) 공주와 황주목사를 지냈습니다.
계곡에는 용추폭포가 있는데, 팔왕폭포라고도 부르는 이 폭포는 암반이 발달해 계곡미가 수려합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교귀정(交龜亭)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로 1470년경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1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1관문에서 1.89km, 제2관문 1.11km 남은 지점입니다.
교귀정 편액
光復後 乙卯夏 東蒝 (광복후 을묘(1975년) 하 동원)
경상도 감찰사 이취임식이 열리던 교구정 앞에 보면 볼수록 특이한 형태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일품입니다.
교귀정 표지석 뒷편 암벽에 현감 이인면의 애휼비와 선정비가 새겨져 있고,
이웃하여 경상감사 도임행차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현감 이인면의 애휼비 (縣監李侯寅冕愛恤碑)
1관문에서 교구정 가기 전 10여m 지점의 오른쪽 자연 암반에 이인면 선정비와 나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는 먼저 높이 128㎝, 너비 66㎝ 정도의 월두형 비모양을 조각한 다음 그 안을 높이 116㎝, 폭 46㎝, 깊이 1㎝ 정도로 오목하게 파내고 비문을 새겼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縣監李侯寅冕愛恤碑(현감 이인면의 애휼비)’이고 비문 왼쪽에 작은 글씨로 ‘己丑四月 門卒立(기축사월 문졸립)’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이 새겨진 연도는 1889년(고종 高宗 26)입니다.
비문 아래에는 주역 64괘 중 3괘가 새겨져 있습니다. 문경새재에 이인면과 관련된 비문은 모두 4개입니다.
이인면의 본과 호 등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현감 이인명의 선정비
문경새재 1관문과 2관문 사이 교귀정 옆터 암벽에 새겨진 문경현감 이인면의 선정비입니다
비의 높이는 약 130cm이며 너비는 45cm정도입니다.
마애비에는 縣監李侯寅冕善政碑(현감이후인면선정비)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건립시기는 기축년 1889년(고종26)입니다.
비석을 바라보며 우측에 작은 글씨로 마애비의 새긴년도를 음각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己丑三月 日 上草 (기축삼월 일 상초)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옆에 있는 애휼비보다 한달 가량 빠른 1889년(고종 26) 3월에 새겼습니다.
새재주막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선비들,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면서 쉬어 가던 주막입니다.
해발고도 300m
조령원터(鳥嶺院址)의 서쪽(계곡쪽) 문입니다.
문은 이곳 밖에 보이지 않는다. 굳이 어러개의 문을 낼 필요도 없을것 같습니다.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입니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처름 돌로 쌓은 조령원은 옛 관리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령원터의 넓이는 600평으로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의 담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지름틀 바위
`지름틀 바위`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과 유사하게 생겼다하여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지름틀 바위
1관문북쪽 600m 폭포동 암반위 좌측에 처마같이 돌출된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 ‘폭포동(瀑布洞)’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위 절벽에는 상주목사 이익저의 불망비(不忘碑)를 새겼습니다.
역시 조그만 안내표지판이 있어 알 수 있습니다.
주변 군데군데에서 암벽에 새긴 비석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녹음등이 우거졌을때는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애비는 비신의 형태만 나타내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는 개석, 대좌의 모양까지 조각하였습니다. 구름무늬가 있는 개석과 대좌에는 각각 복련문양을 새겼습니다. 비면의 중간이 약간 안으로 오목합니다. 전체높이는 215cm, 폭은 60~100cm입니다. 이익저의 상주목사 재임기간은 1702년(숙종28)부터 1703년(숙종29)까지 입니다. 방백과 불화하여 계미(1703)2월에 사임하였는데 귀가를 만류하는 주민들의 수가 수천에 달했다고 합니다.
목사(牧使) :고려, 조선시대 지방의 고을에 설치한 목을 관할하던 정3품의 지방 장관
비문의 내용은 ‘尙州牧使李侯益著善政後世不忘碑(상주목사이후익저선정후세불망비)’이고, 그 좌측에 ‘康熙四十一年 壬午八月 立(강희사십일년(숙종 28년) 임오팔월(1702년 8월) 입)’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상주목사의 선정비를 이곳 문경에 새긴 점이 특이합니다.
거대한 암벽지역이 폭포동이라는데, 이 암벽에 현감 구명규의 선정비와, 상주목사 이익저의 불망비를 바위 벽면에 각자하여 놓았습니다.
1관문 북쪽 600m 폭포동 암방 위 우측 바위 중간에 현감 구명규의 선정비(善政碑)를 새겼습니다.
이런 비와 볼 거리는 도로변에 안내 표지판이 있어 조금만 주의하면 알 수 있습니다.
현감 구명규의 청덕선정비(縣監具命奎 淸德善政碑)
문경현감 구명규(1693~1754)의 선정비입니다. 주흘관에서 북쪽으로 600m 떨어져 있는 암반 위 10m 위에 있는데, 길 위 높은 곳에 새겨져 있어 지나치기 쉽습니다. 구명규(具命奎) 의 본관은 능성이고, 자는 성오(性五)입니다. 1714년(숙종40)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을 지냈습니다. 구명규의 문경 현감 재임기간은 1724년(경종 4)부터 1725년(영조원년) 까지입니다.
현감(縣監) : 조선시대 외관직으로 현에 파견했던 종6품의 지방 수령
증광시(增廣試) : 조선시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시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조선시대 한성부를 관할했던 정2품의 관직
‘태조 왕건’을 촬영했던 KBS 세트장이 나옵니다. KBS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 세트장을 지은 건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송악산과 비슷해서였다고 합니다.
선정비군(善政碑群)
대다수 관찰사와 현감의 비석으로서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 불망비(不忘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타루비(墮淚碑), 애휼비(愛恤碑), 충렬비(忠烈碑), 청덕비(淸德碑), 거사비(去思碑) 등 이름도 다양한 비석들입니다. 총20여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송덕비는 관찰사, 부산, 부윤, 군수, 현령, 현감 등 지방관이나 그 지역에 이름을 남긴 사람의 공적을 칭찬하는 비입니다.
대부분 관찰사나 현감의 비석인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워야 했지만 백성들의 고혈로 세운 것이 많아 원성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적 제147호
문경새재 제1 관문 주흘관은 문경새재가 시작하는 곳이며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입니다.
왜군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축조했으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영남제1관(嶺南第一關)
문경새재 제1 관문 주흘관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경새재가 시작하는 곳에 있는 이곳은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입니다. 왜군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축조했으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문경새재 1관문인 주흘관은 한말 항일의병 때 일본군이 불 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복원하고 1966년에 보수를 하였습니다. 그 후 1973년에 폭과 높이를 각각 1m 증축하고 총구를 만들어 원형이 변형되었습니다.
주흘관의 누각은 정문 3칸,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는 팔각 지붕이며 통행에 필요한 홍예문의 높이는 3.6m, 폭 3.4m, 길리 5.4m 이며, 여기에 설치된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문의 두께는 11cm입니다.
부속 성벽의 폭과 높이는 각가 2~3m이고,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을 갖추고 있으며 길이는 동쪽이 500m, 서쪽이 400m 입니다.
주흘관
넓다란 평지에 돌로 쌓은 성문인 제1관문 주흘관의 웅장한 모습이 펼쳐집니다. 주흘관 양 옆으로 암봉이 두드러진 조령산(1025m),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1075m)과 어울려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물씬 풍깁니다. 주흘관 주변에는 하천이 흐르고 그 곁에 수천 명의 병사가 머물러도 좁지 않을 거 같은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잔디밭 끝에 성벽이 길게 자리한 모습도 멋있었지만, 성벽 곁을 둘러싼 험준한 산세가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습니다.
주흘관(主屹關)
주흘관 각자성석(刻字城石)
축성(築城)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합니다.
주흘관 동쪽, 서쪽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석은 현재 7곳이 확인되었고 있습니다.
성벽 동쪽 5m정도 떨어진 곳의 성벽 상 성돌에 康熙 辛丑 改築 別將 李寅成(강희 신축 개축 별장 이인성)
강희(康熙)는 청나라 황제인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의 연호로 강희제의 재위기간(1662~1722) 중 신축년 1721년(경종 원년)에 별장 이인성이 개축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아래쪽에는 석수의 우두머리인 都石手 宋成元 李永右 姜斗丁(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이라는 이름자도 있습니다.
성벽 동쪽 성벽 중하부 성돌에 乙亥季春 李南斗 全雍嚴 錢永牧 元福伊(을해계춘(을해년 음력3월) 이남두 전옹엄 전영목 원복이)
을해년이 어느 시기인지 확실하지 않고 1755년 (영조 英祖 51년), 1815년 (순조 純祖 15년), 1875년(고종 高宗 12년) 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동쪽 성벽 30m정도 떨어진 곳 성돌에 丙戌改築 別將 金順基 監官 朴聖浩 邑吏 錢顯澤 (병술개축 별장 김순기 감관 박성호 읍이 전현택) 병술년(고종 23년, 1886년)에 별장 김순기, 감관 박성호, 읍이 전현택이 개축하였다는 각자성석이 있습니다.
이 각자성석에서 한가지 알수 있는 것은 1880년 개축 당시 감역이었던 박성호(朴聖浩)가 이때는 감관으로 진급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동쪽 성벽 80m정도 되는 곳 아래 성돌에 別將 吳海琳 都廳 張萬維 戊辰三月 日(별장 오해림 도청 장만유 무진삼월 일)의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진년은 (영조 英祖 24년, 1748년) 이나 (순조 純祖 8년, 1808년)에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고, 음력3월에 별장 오해림 도청 장만유가 개축하였다는 각자성석이 있습니다.
주흘관 성벽 서쪽 10m정도 되는 곳 성돌 두개에 각자성석
光緖庚 辰改築 別將 申永植(광서경 진개축 별장 신영식)
監役 朴聖浩 色吏 李承海(감역 박성호 색리 이승해)
광서(光緖)는 청나라 황제인 덕종 광서제(德宗 光緖帝)의 연호로 광서제의 재위 기간(1875~1908) 중 경진년은 1880년(고종 高宗 17년)이기 때문에 이시기에 개축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구문(水口門)
성축도 비교적 온전하며 개울물이 흐르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수구문이 있습니다.
사과축제 기간이라 진입로 양쪽으로 사과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즐비하고 오미자도 곳곳에 보입니다.
옛길박물관
현감신길원충렬비(縣監申吉元忠烈碑)
옛길박물관 부근에 현감신길원 충렬비가 있습니다. 문경현감으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1592년 4월 27일 상주를 거쳐 문경으로 공격해오자, 그는 관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항거하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일본군 장수가 그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신길원 (申吉元,1548~1592)은 굴복하지 않고 꾸짖으며 항거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선생을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숙정 32년(1706)에 세웠습니다.
비신(碑身) 전면에는 해서(楷書)로 ‘縣監申侯吉元忠烈碑(현감신후길원충렬비)’라고 쓰고, 그 좌측에 ‘崇禎紀元後七十九年 丙戌三月 日立(숭정기원후 칠십구년 병술삼월 일립)’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숭정은 명나라 의종 숭정제(1628~1644년)가 사용한 연호입니다. 이후 청나라가 장악하여 청나라 연호를 사용합니다. 즉 숭정기원후 79년 병술년은 숭정 원년(1628년)부터 79년후 병술년 1706년(숙종 肅宗 32) 음력3월에 세웠습니다. 이면(裏面)에는 소자(小字)로 행장(行狀)을 기록하였습니다.
'신후(侯)길원'의 '후'는 공작, 후작…… 할 때 쓰는 작위의 명칭입니다. 후작은 충무'공'의 '공'보다 한 등급 낮습니다
이 비는 화강석으로 지대석(地臺石)과 비신(碑身), 비개(碑蓋)를 만들었습니다. 비부는 높이 23㎝, 가로 146㎝, 세로 86㎝이며 비신은 높이 190㎝, 폭 89㎝, 두께 27㎝이고 비개는 높이 77㎝, 가로 122㎝, 세로 63㎝입니다.
1706년 3월에 나라에서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니 비문은 선무랑 전수사간원 정언지제교(宣務郞前守司諫院正言知製敎)인 채팽윤이 지었으며 통훈대부전행성균관전적(通訓大夫前行成均館典籍)인 남도익이 글씨를 썼습니다. 이 비는 1981년 4월 25일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경읍 상리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던 것을 1976년에 문경 제1관문 안에 옮겼다가 1981년 현 위치에 옮겨 세웠습니다.
문경새재 옛길보존기념비 앞에서 오늘 일정을 마무리.
1978년 문경새재 도로포장 계획을 불허하는 동시에 새재 안에 차량통행을 금지시키고 일대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옛길을 보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