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2023) 정지용문학상
어머니 범종소리 / 최동호
어린 시절 새벽마다 콩나물시루에서 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웃집에 셋방살이하던 아주머니가 외아들 공부시키려 콩나물
키우던 물방울 소리가 얇은 벽 너머에서 기도처럼 들려왔다.
새벽마다 어린 우리들 잠 깨울까 봐 조심스럽게 연탄불 가는
소리도 들렸다. 불을 꺼뜨리지 않고 단잠을 자게 지켜 주시던,
일어나기 싫어 모르는 척하고 듣고 있던 어머니의 소리였다.
콩나물 장수 홀어머니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머니 가시고 콩나물 물 내리는 새벽 소리가 지나가면
불덩어리에서 연탄재 떼어내던 그 정성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잠 자주 깨는 요즈음 그 나지막한 소리들이 옛 기억에서
살아나와, 산사의 새벽 범종 소리가 미약한 생명들을 보살피듯,
스산한 가슴속에 들어와 맴돌며 조용히 마음을 쓸어주고 간다.
제33회 정지용문학상
혼자의 넓이 /이문재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제32회 정지용문학상
목도장 /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제31회 정지용문학상
저녁이 올 때 / 문태준
내가 들어서는 여기는
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
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
나는 모래알, 잎새
나는 이제 구름, 애가(哀歌), 빗방울
산 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나무의 한 가지 한 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어요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 가며 날아 앉아요
새들이 날아가도록 허공은 왼쪽을 크게 비워 놓았어요
모두가
흐르는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쪽 하늘로 가는 돛배처럼
30회 정지용문학상
그손 /김광규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29회 정지용문학상
시계 / 김남조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 판 웃었다
그럴테지 그럴테지
그대는 속물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28회 정지용문학상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27회 정지용문학상
사랑 세 쪽 / 이근배
더듬이
말더듬이가 되고 싶어요
어머니
사랑 앞에서는
더더욱,
호박꽃
꿀을 따러 들어온
벌이 남기고 간
고 다디단 것
쪽!
대낮
꽁지가 붙은
잠자리 한 쌍
허공에 떠 있다
암컷 부르는
매미 울음 들끓는
대낮.
26회 정지용문학상
꽃·2 / 나태주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25회 정지용문학상
그리운 나무 /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24회 정지용문학상
옥상의 가을 /이상국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 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23회 정지용문학상
백제시 /문효치
가슴속에
매 한 마리 키우네
서늘한 기류 밖
푸른 별 하나 낚꿔챌
매 한 마리
숫돌에 부리를 갈아 날을 세우고
옹이를 찍어 발톱에 힘을 기르네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 하나 표적을 찾아
눈을 닦고 있는
매 한 마리 자라고 있네
22회 정지용문학상
발견의 기쁨 /이동순
누더기처럼
함석과 판자를 다닥다닥 기운
낡은 창고 벽으로 그 씨앗은 날려 왔을 것이다
거기서 더 이상 떠나가지 못하고
창고 벽에 부딪쳐
그 억새와 바랭이와
엉겅퀴는 대충 그곳에 마음 정하고 싹을 틔웠을 것이다
사람도 정처 없이
이렇게 이룬 터전 많았으리라
다른 곳은 풀이 없는데
창고 틈새에만 유난히 더부룩 돋았다
말이란 놈들이 그늘 찾아
창고 옆으로 왔다가 그 풀을 보고
맛있게 뜯어먹고 갔다
새 풀을 발견한 기쁨 참지 못하고
연신 발굽을 차며
히히힝 소리 질러댔다
21회 정지용문학상
바이올린 켜는 여자/도종환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 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20회 정지용문학상
마음 화상/ 김초혜
그대가
그림 속의 불에
손을 데었다 하면
나는 금세
3도 화상을 입는다
마음의 마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상을 입는다
19회 정지용문학상
아득한 성자/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18회 정지용문학상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17회 정지용문학상
세한도/유자효
뼈가 시리다
넋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도의 위리안치
찾는 사람 없으니
고여있고
흐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
원수 같은 사람이 그립다
누굴 미워라도 해야 살겠다
무얼 찾아 냈는지
까마귀 한쌍이 진종일 울어
금부도사 행차가 당도할지 모르겠다
삶은 어차피
한바탕 꿈이라고 치부해도
귓가에 스치는 금관조복의 쓸림 소리
아내의 보드라운 살결 내음새
아이들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끝내 잊히지 않는 지독한 형벌
무슨 겨울이 눈도 없는가
내일 없는 적소에
무릎 꿇고 앉으니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질긴 목숨의 끈
소나무는 추위에 더욱 푸르니
붓을 들어 허망한 꿈을 그린다
16회 정지용문학상
돌아가는 길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15회 정지용문학상
낙산사 가는길 3/ 유경환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14회 정지용문학상
백학봉(白鶴峰).1 /김지하
멀리서 보는
백학봉(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 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13회 정지용문학상
등신불 /김종철
등신불을 보았다.
살아서도 산 적 없고
죽어서도 죽은 적 없는 그를 만났다.
그가 없는 빈몸에
오늘은 떠돌이가 들어와
평생을 살아간다
12회 정지용문학상
하늘의 그물 / 정호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11회 정지용문학상
눈내리는 대숲 가에서 / 송수권
대들이 휘인다
휘이면서 소리한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사발 속에서
우듬지들은
흰 눈을 털면서 소리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어떤 대들은 맑은 가락을
地上에 그려내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눈뭉치들은 힘겹게
우듬지를 흘러내리는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삼베 옷 검은 두건을 들친
백제 젊은 修士(수사)들이
지나고
풋풋한 망아지떼
울음들이 찍혀 있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밤중 암수 무당들이
대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자락들이 보이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10회 정지용문학상
세한도 가는 길 /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더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領)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와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륵한 곷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9회 정지용문학상
白頭山 天池 /오탁번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해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따라 야린 볼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재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리 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꿏은 우례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서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름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8회 정지용문학상
마음의 고향.6 - 初雪 /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첨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노오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7회 정지용문학상
昇天 / 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에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 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企圖하지만
한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下山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다니면서
소리의 昇天을 이루지 못한 제 恨을 토해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6회 정지용문학상
큰 노래 / 이성선
큰 산이 큰 영혼을 기른다.
우주 속에
대붕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 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 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안에 있다
5회 정지용문학상
石榴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를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도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4회 정지용문학상
龜龍寺詩篇. 겨울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쪄겠느냐.
3회 정지용문학상
작은戀歌 /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녘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
2회 정지용문학상
해변(海邊)가의 무덤 / 김광균
꽃하나 풀 하나 없는 荒凉한 모래밭에
墓木도 없는 무덤 하나
바람에 불리우고 있다.
가난한 漁夫의 무덤 너머
파도는 아득한 곳에서 몰려와
허무한 자태로 바위에 부서진다.
언젠가는 초라한 木船을 타고
바다 멀리 저어가던 어부의 모습을
바다는 때때로 생각나기에
저렇게 서러운 소리를 내고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것일까
오랜세월에 절반은 무너진 채
어부의 무덤은 雜草가 우거지고
솔밭에서 떠오르는 갈매기 두어마리
그 위를 날고 있다.
갈매기는 생전에 바다를 달리던
어부의 所望을 대신하여
무덤가를 맴돌어 우짖고 있나 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르나
오랜 조상때부터 이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끝내는 한줌 흙이 되어 여기 누워 있다.
내 어느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이 黃土 무덤 위에 한잔 술을 뿌리니
해가 저물고 바다가 어두워 오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어부의 소망일랑
먼~ 바다 깊이잠들게 하라.
1회 정지용문학상
서한체(書翰體)/ 박두진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 하늘 높디 높은별들 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끊는 햇덩어리보다 더뜨겁게,
일어서고 주저 앉고 뒤집 히고 기어 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파도 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 해다오. 노래해다오.
꽃잎 보다 바람결 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 보다 더 맑디 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 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 홀 하 게 노 래 해 다 오 환 희 절 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