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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강해 (4)
마지막 권면 (기사대봉)
벧전 4:7~11
I. 서론
매년 이맘때가 되면, 오늘이 여러분을 마지막으로 본다는 생각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물론, 몇 개월 후에 다시 만나겠지만,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오늘 설교하기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4가지 권면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기사대봉”이라고 기억하면 좋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사에게 대봉 가지고 오라고 해라”라고 외웠습니다. 각자 편하게 외워보시기 바랍니다. “기사대봉”은 “기도하라, 사랑하라, 대접하라, 봉사하라”입니다. 어디를 가시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시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시든,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시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네 가지를 잘 기억하고 실천하신다면, 제가 오늘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으니, 제가 조금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보면, “기도하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신하라”는 말의 원 뜻은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정신을 차리라”고 강조했을까요? 그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잠에 취해서, 기도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로 황제의 박해를 앞에 두고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박해의 상황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정신을 차리지 않고, 주문을 외우듯이 기계적으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수신하는 신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방인 출신이어서, 그들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마 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러니까, 당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면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헬라어 ‘바탈로게오(battalogeo)’는 본문에만 등장하는 아주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과 어원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방인들이 자기들 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바-바-바-바-바’한다고, 그들을 ‘barbarian(이방인,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바탈로게오’도 ‘바-바-바-바-바’하는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기도할 때, 멀리해야 할 것은 반복이 아니라 헛된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끈질기게 매달리는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아무 생각 없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태도를 나무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절).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기계적인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생각하라. 그러면 생각은 다른 곳에 보내놓고 입으로만 옹알거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써서 너희가 하는 말을 생각할 것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정신을 차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저희 부부가 탬파에 다녀왔습니다. 영주권 신청 허락서가 승인이 된 후, 지난 화요일에 변호사님으로부터 몇 가지 서류가 필요하다는 이메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족 각 개인당, 기본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혼인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틀란타에 있는 영사관을 가자니,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화요일에 이메일을 받고 난 다음, 혹시나 아틀란타 영사관이 플로리다쪽으로 순회 업무를 보러 오는 지 알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템파에 순회 영사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요? 변호사님은 왜 지난 주 화요일에 이메일을 저에게 보냈을까요? 그리고, 아틀란타 영사관은 왜 지난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템파로 와서 영사 업무를 봤을까요? 웹사이트를 통해서, 아틀란타 영사관 순회 계획을 보니, 올해 상반기에 플로리다를 딱 한 번 오는데, 그 날이 바로 지난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기 전에 저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심을 인식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2. 둘째,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뜨겁게”라는 단어입니다. 언뜻 보기에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은 “열정적으로 로맨틱하게 사랑하라”는 의미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뜨겁게”는 헬라어로 “에크테네스(ektenes)”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이곳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이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에크테네스’의 어원은 “에크테이노(ekteino)”인데, 그 뜻은 “뻗다, 쭉 펴다”입니다. 영어로, “stretch out”입니다. 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여기서 나오는 단어, “내밀다”는 단어가 “에크테이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손을 뻗어서) 그에게 대시며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사람들 곁에 올 수 없었고, 아무도 그 사람을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어서 그에게 대시며, 그를 치료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나병환자의 아픈 육신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까지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광경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손을 뻗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가 손을 뻗어 사랑해야 할 대상은 허다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손을 뻗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손을 뻗어서 그들의 죄를 덮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베드로전서를 쓸 수 있는 이유도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 그의 허물을 엎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esco)가 제자들과 함께 40일동안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한 명이 맛있는 수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수프를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차가운 시선으로 말입니다.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제자를 꾸짖어 주기를 바라며 스승인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수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서 쳐다보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수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금식하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위대한 성인인 이유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식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은 우리도 우리의 손을 뻗어,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셋째,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21세기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서로 대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손님이 밥을 굶거나 잠잘 곳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미국에는 맛있는 식당과 깨끗한 호텔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말 중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또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목마름”입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2시간 안에 갈증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갈증을 느끼더라도 1시간 후면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오페라 공연을 보다가도 1시간 30분 후면, 중간 쉬는 시간에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더라도, 2시간 후면, ‘rest area’의 자판기에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목이 타 들어는 목마름을 거의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접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본 영상 중에 “바울로부터”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최종상 선교사님과 배우 차인표씨가 나와서, 바울의 선교지를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바울의 선교 여행을 설명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전도하기 위해서 타우르스 산맥에 놓인 세바스테 길(Via Sebaste)을 이용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곳은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이고, 산맥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말을 탈 수도 없었습니다. 그 험한 산맥을 몇 일 몇 주 동안 넘으면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편안한 잠자리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도시에 와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여관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깨끗하고 안전한 시설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처럼 선교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도들이 가정을 오픈 해서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선교 사역에 직접 동참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서로 대접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는 아직 교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대접한다는 의미 속에는 가정을 오픈 해서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현재, 예일대학교 미술박물관에 가면, 세계 최초의 교회당 유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가 약 AD 230년경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당 최초의 유적이니까,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 된 313년 이전에는 거의 모든 교회가 가정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배 처소를 위해서, 아무래도 큰 집을 가진 성도가 자신의 가정을 오픈 했을 것이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조금 더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정에서 모였을 때, 예배하러 오는 성도들, 그리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새신자들을 잘 대접해서 그들로부터 원망을 듣지 않도록 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리의 복음이 다른 것 때문에 막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대접을 잘 하는 분인 줄 압니다. 앞으로도 손님 대접을 계속 잘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더욱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을 해 보면, 당시 사회 배경에서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한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 부담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AD64년부터 약 200년 동안,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갔을 것이고,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하는 성도들은 박해에 대한 큰 부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집으로 오는 성도들을 대접한다는 것은 큰 믿음의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봉사하다”는 단어는 “섬기다”는 단어와 똑 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디아코네오: diakoneo) 그러니까,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은 “서로 섬기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강조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1) 첫째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 성도들에게 나눠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gift”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섬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버트 클린턴(Robert Clinton) 교수님은 재능을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창의적 재능입니다. 이것은 예술적 능력인데, 이런 사람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드라마 같은 분야에서 탁월합니다. 보통 음악가나 미술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둘째, 인식하는 재능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능력인데, 이런 사람은 사고력, 분석력, 그리고 해석력이 탁월합니다. 보통 학자나 교수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셋째, 육체적 재능입니다. 이런 사람은 운동을 잘하고, 체력이 남보다 탁월합니다. 보통 운동 선수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넷째, 관계적 재능입니다. 이런 사람은 리더십이 탁월한데, 의사소통을 잘하고, 감화력과 영향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잘 이끕니다. 보통 국가나 사회의 리더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분야에 탁월한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창의적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인식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육체적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관계적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은사를 발견하는 방법이 4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은사란, 자신이 잘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더 가진 것,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가면, 한 소리 듣겠지만, 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 아내가 아침에 미국교회에서 반주하고, 오후에는 한국교회에서 반주를 합니다. 피아노는 제 아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고,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재능은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아내에게 피아노는 은사임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잘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옳은 것입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사를 사용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봉사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2) 둘째,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비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 25:14~19, 21, 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 주인은 자신이 그 동안 청지기에게 맡겨두었던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심판을 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잘 사용했기 때문에, 똑 같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주인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이 비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사용해서 서로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11절을 읽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여기서, 누가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봉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강조한 것은 말씀을 전하든지, 봉사하든지, 우리의 것을 가지고 섬긴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섬긴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재 남자 골퍼 세계 1위이자, 최근에 열린 마스터스 골프 대회에서 우승한 스코티 셰플러가 우승 소감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I have been given a gift of this talent, and I use it for God’s glory. That’s pretty much it. So when I’m out there, I try to compete to the best of my abilities.” “제가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