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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시대와 통하라
신학이, 인문학이 경계에 섰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에 회자되던 이야기가 아니듯이 인문학의 핵심부였던 신학 또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신학이 시대와 통해야 한다는 주장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남겨준 유산이지만 현실의 신학은 단지 주류 기독교를 지지하는 하부구조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평이 거세다. 요즘 들어 더욱 세차게 불고 있는 안티 기독교의 논의, 즉 ‘개독교’의 논의도 그 연장선상에 서 있다. 이에 대해 젊은 신학자들은 어떤 대안적인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시카고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한 젊은 신학자가 3년여에 걸쳐 써내려간 글들을 모은 것이다. 우리 시대 신학의 정체성과 신학자의 정체성, 더 나아가 신앙인의 정체성까지 근본적인 모색을 하며,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신학을 하려는 분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자는 신학이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고 사회 현상과 신학이 이반하는 현실을 넘어서려는 치열한 사유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사회 현상에 둥지를 틀고, 사회의 사건들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하나하나 해체해나가는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이 책에는 <시카고에서 띄우는 신학 노트>라는 가벼운 부제가 붙었다. 기실은 저자가 시카고에서 공부를 하는 3년여 동안 <제3시대> 웹진에 기고하는 형식으로 시대와 소통을 도모했던 단상들을 모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서는 우리 사회 전반 곳곳의 상처들을 돌아보는 날카로운 철학자의 눈과 안타까운 신학자의 심장이 들어 있다. 광화문광장에서 천안함까지, 온통 파헤쳐지는 4대강과 최근에 떠오른 팝캐스트 방송 <나꼼수>는 물론,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한 생각까지도. 그는 칸트와 헤겔, 프로이트와 니체, 라깡과 지젝, 하이데고와 데리다 등을 불러내며 우리 시대의 쟁점들의 마주선다.
특히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현대 철학의 다양한 발전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찰은, 저자의 학문적 관심을 잘 담아낸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따로 소개는 많이 되었어도, 현대 철학의 종교성에 대한 신학적 분석은 흔치 않은 현대 상황에서 이 책의 자리 매김은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보게 되는 신학과 시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이 잘 혼합되어 있는 현대 사회의 지적 지형학의 모습을 띤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근대, 탈근대, 혹은 포스트모던과 같은 용어는 개념으로 남아 있지 않고, 현 시대의 사건들을 통해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등의 예를 통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실질적인 도구가 된다. 그동안 신학적 용어들이 설명이 아니라 선언만 해주었던 많은 예들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신학을 어려운 학문이고 세상 문제와는 담 쌓은 이른바 게토에 파묻힌 신학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글들은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신학도 현실을 깊이 반영하는 재미있는 학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보일 것이다.
왜, 탈경계의 신학인가?
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신학은 시대를 전제하고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대처하고 응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탈경계의 신학’은 “신학, 시대와 통하라!”는 신학적 전제에 대한 현대적 각론 내지는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탈경계’라는 말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당대의식이기에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 질서는 20세기 말에 밀어닥친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과 함께 종말을 고했고, 바야흐로 현재의 세계는 자본의 전 지구화라는 보다 간교하고 유령과도 같은 지배 질서로 대체됐다. 유령과도 같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권력의 배후와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前)시대의 권력의 양태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와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개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의 첫 번째 강령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무역 장벽의 철폐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재화와 자본의 유통을 가로막는 국경의 해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전 영역에서의 개방과 해체를 의미하고 그 틈을 타고 유입되는 모든 낯선 것에 대한 열림과 환대가 이 시대의 미덕이고 윤리라 가르친다.
한국 또한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강력한 단일 민족문화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던 경계와 질서들이 해체되고 재편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십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요 근래는 동남아 일대에서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처녀들이 정착하여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2세들이 태어나면서 다문화 가정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다인종, 다문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다종교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는 우리에게 세계가 겪고 있는 변화와 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에 걸맞은 적극적 해명, 그리고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략과 리듬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경계와 차이와 다양성들에 대한 환대의 방식을 숙고케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우리 사회 속에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 대해서는 분노하라고 가르친다. ‘탈경계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시대를 향한 신학의 답변은 늘 어색했고 어눌했고 위험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언어를 고집하려 했다면 신학은 이미 예전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로마 교황청의 교권주의를 넘어 종교개혁을 감행한 마틴 루터, 히틀러의 광기와 맞섰던 고백교회와 본회퍼, 흑인 차별이라는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장벽을 돌파한 마틴 루터 킹 목사,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만 당하는 타자, 즉 민중을 신학의 전면으로 내세웠던 민중신학 등 세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의 장벽과 경계에 막혀 신음하던 시절, 신학은 늘 그렇게 위험한 상상과 무모한 도발을 감행해왔다. ‘탈경계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등장했던 자랑스러운 변혁지향적 전통을 지지하면서, 신학의 전통 주제인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다시 묻고 대답할 수 있을지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만 갇혀 있었던 신학의 외연이 확장되어 신학의 탈영토화(대중지향적, 현장지향적, 소수자지향적, 학제 간 연구)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발견과 그 과정에서 원활한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탈경계의 신학’은 21세기형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선전되는 ‘탈경계’, 즉 자본의 세계화라는 허울에는 대해서는 저항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경계이자 한계라고 생각하기에 그 저항은 때로는 냉정하고 결연하다. 그러므로,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에 대한 옹호와, ‘탈경계’에 대한 배반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이고 변증법적이다.
신학,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를 만나다 - 다시 쓰는 기독교 윤리
칸트의 후예답게 나치 치하의 독일인 들은 의무론적 윤리론에 충실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매진했을 뿐인데, 아이히만이라는 괴물을 탄생한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신학과 이후의 신학이 갈린다고 할 만큼, 신학적인 물음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한다. 서구 주체철학의 난맥이 현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인 것이었고, ‘진정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물음은 20세기 내내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서구 기독교 윤리의 전복을 꾀했던 니체의 철학은 푸코-들뢰즈로 이어지며 ‘자기 윤리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 안에 펴져 있던 총체적 난맥의 첫 단추를 주체 규명에서부터 찾았고, 이런 이유에서 ‘주체’ 대신 ‘자기’를 제안한다. ‘자기’라는 말은 기존의 철학에서 말해왔던 주체 개념과는 다른, 자기의 욕망(혹은 본색)이 더 충실히 반영된, 즉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기름이 빠진 주체라 할 수 있다. 비록 근대적 주체는 사망했지만, ‘자기’라는 이름이 부여된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 셈이다. 레비나스는 한 발 더 나아가 ‘타자의 윤리’를 통하여 기독교 윤리를 제1철학으로 회복시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현대 서구 철학사의 계보들을 따라가며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독교 윤리에 대해 고민한다. 곧 ‘자기의 윤리’를 넘어선 ‘타자의 윤리’에서 그 해답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의 차이, 세대 차이, 지역 차이, 계급 차이, 노선 차이 등 무수한 차이들이 자아내는 관계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엮여왔다. 그러나 그 차이를 하나로 엮었던 방식은 이제 그 기능적인 면에 있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새로운 얼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현대 사회의 복수적이고 산만한 관계 속에서 얽혀지는 새로운 통합 방식, 즉 일사불란한 통제가 아니라 타자들이 지닌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새로운 통합 방식을 추구해야 할 때다. 이는 인간들은 상호 간의 필요와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인격과 사회적 실존의 자리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여성은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다름이 존재 이유인바, 여성과 남성 그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인간성이 어떻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고,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주 노동자, 다문화 가정, 노숙자 들과 같이 나그네 된 사람들, 우리와 다른 신체장애자들과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변방에서 우짖는 목소리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전체성의 테두리에서 볼 때 동일성 안으로 포섭되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렀던 타자들이다. 하지만,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기독교 윤리의 새로운 보편성 안에서 이와 같은 소수자들의 위치는 레비나스식 ‘면대면(面對面)의 관계’뿐 아니라, 다양한 횡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 새롭게 획득되어야 한다.
기독교 윤리는 막힌 담을 허무는 기독교 신앙의 변혁적 원리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라는 자기 동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자기 동일적인 폐쇄성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리가 그것을 보증한다(본회퍼). 그것은 모든 낯선 것 중의 가장 낯선 존재으로서의 하나님이 전적으로 타자였던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을 한 인간을 통해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고난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존재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타자성을 옹호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혹은 예루살렘이 혹은 율법과 도그마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할 뿐 아니라, 새롭게 획득되는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자리로 우리를 내몬다. 그 자리란 자본의 논리가 유일한 삶의 원리가 되어버려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균질화된 세상이고, 그곳은 또한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온갖 이유로 차별과 배제와 폭력의 상황에 놓인 복수적 타자들이 떨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기독교 윤리는 다시 쓰여진다.
데리다, ‘천안함 사건’ 특별 기고를 하다
데리다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특별 기고를 했다고? 이미 죽은 데리다가 직접 글을 썼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학문하는 방법론 혹은 토대로 데리다의 해체론을 따르고 있다. 그 해체론의 방법론으로 우리 시대의 사건들 중, 이미 시효가 지난 듯, 잊혀진 일인 듯하지만 여전히 살아서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천안함 사건’으로 대표되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 즉 경계를 허무는, 시공을 넘나들며 사유하려는 저자의 창작물인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해체론적 방법으로 신학을 하는 것은 미국 진보 신학계의 일반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신학이 지나친 교리 논쟁과 법리 논쟁에만 몰두하여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상황과 이론에 대한 설명과 각주가 가득 차야 신학이라고 평가받는 풍조에 맞서, 구성신학은 개인의 내러티브를 기본으로 그것이 어떻게 다종의 · 다성의 목소리와 어울리며 ‘신학함(doing theology)’으로 모아져 가는지에 주목한다. 즉 구성신학은 엄한 교리적 잣대로 신학/앙을 단죄하는 근본주의 신학/앙을 향해 과도한 신학적 설명과 신학적 단죄를 그만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각각의 걸어온 경험과 역사와 신앙, 그리고 신학을 풀어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함께 대화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탈경계의 신학’은 지은이 나름의 구성신학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지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신학이 이 시대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에 대한 지은이 나름의 물음이자 고민인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최종적으로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서글픈 현실 속에서 교리 안에 갇혀버린 신학의 폐쇄성을 폭로하고, 물신에 취한 교회를 향해서는 시장 논리와의 의식적 결렬로 나설 것을 요구하며, 신학과 교회 전통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공격에 매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대화의 테이블로 나설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