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등점에 이른 정형시 판 깨기에 대한 분노
이경철
정해진 틀을 지킬 때라야 시조다
본란 〈내가 읽은 문제작·時調〉를 시조시인뿐 아니라 자유시인들도 꽤 많이 관심을 두고 읽고 있는 것 같다. ‘잘 읽었다’ ‘현대시론에 기대 볼지라도 시조가 그렇게 현대적이고 정련돼 있는 시인 줄 이제야 알았다. 좋은 시조를 참조하면 내 시 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인사를 자유시인들에게서도 심심찮게 받고 있으니.
그러다 최근 한 중진 시조시인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했다. 11/12월호에 실린 글 중 오승철 시인의 〈가을이 어쨌기에〉를 평하는 한 대목에서 우를 범한 것이 밝은 눈에 걸려 그만 잘못했다고 승복해야만 했다.
“음보의 정형률로 살펴보면 종장이 앞으로 나온 도치(倒置)의 형국이다. (중략) 시 자체적인 충분한 이유와 긴장과 울림을 갖고 시조 네 수를 자유시로 변주한 이 시에서 시조의 현대화, ‘자율적 정형시’의 최첨단을 보는 것 같아 눈이 확 틔었다. 무엇보다 다섯 장의 나눔과 길이를 감당할 만큼, 시조의 장과 연과 행 나눔을 자재로 바꾼 형태에 충분할 만큼 가을 정조와 그리움을 다면적으로, 선명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낸 이미지들이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평시조 세 수와 사설시조 한 수를 조합해 자유시같이 다섯 장(章)으로 나눈 비교적 긴 이 시를 끝까지 긴장되게 읽게 하기에 충분한 울림을 처음부터 주기 위해 종장을 초장으로 올렸다는 이 대목이 질타를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조가 초, 중, 종장의 순서를 무시해도 된단 말이냐. 그게 무슨 정형시냐.”라고.
백번 옳은 말씀이다. 시조는 정형시이고 정형시에는 정해진 틀, 룰이 있다. 자유시 쪽이 시조에서 그 압축과 운율을 배워가며 극서정시, 짧은 시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때, 그들의 시와 시조를 변별할 수 있는 것은 정해진 틀 아니겠는가. 나 역시 시조의 정형을 옹호해 온 자로서 무릎 꿇고 빌 수밖에 없었다. 빌면서도 내심 반가웠다. 시조의 정형이 현대화와 확장 명분으로 한없이 깨지고 있는 이때 그야말로 든든한 동지를 만난 것 같았다.
정형이란 고감도 외줄 위에서 펼치는 기량과 품새
생의 비알 이랑 이랑 유채색 꿈의 군락
고랑 고랑 몸을 휘어 부축하네, 군락의 꿈
밤비에
젖멍울 불렸나
이슬아침 옹알이여―송선영 〈산밭, 봄을 머금다〉 전문(《현대시학》 2012. 1)
연전 산골짝 고향을 찾았을 때 일이다. 길을 걸으며 친척 누님이 산비탈 도라지 밭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 좀 보아야. 참 이쁘지야.” 풀섶에 막 떨어진 별처럼 포르스름 빛나는 도라지꽃들이 예뻤다. 평생 산과 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 누님 말의 어감이 그 도라지꽃보다 더 예뻤던 기억이 아직 귀에 삼삼하다.
위 시를 보니 그때 그 어감이 다시 이랑져 온다. 봄을 머금고 막 몸을 풀고 있는 산비탈 밭뙈기 정경이 잡힐 듯하다. 갓 태어난 봄의 옹알이가 들리는 듯하다. 대뜸 “생의 비알”이란 힘겹고 무거운 화두를 던져놓고도 동시처럼 참 둥글고 예쁘게 받고 있는 시이다. 제목처럼 봄을 머금고 있는 산밭 정경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보다는 귀에 들리는 음성과 운율에 싣고 있는 시이다.
시조 단수를 5행 4연의 형태로 잡고 있다. 한 행 한 연으로 잡은 초장에서는 산밭의 ‘이랑’을 “유채색 꿈의 군락”으로 묘사하고 있다. 언 땅 녹아 황토색 선연해지는 밭이랑은 이내 밭작물들로 가지각색의 유채색 군락을 이룰 것이다. 현재가 아니라 곧 도래할 상황이기에 ‘꿈’이라 했을 것.
초장과 같은 형태를 취한 중장에서는 밭의 ‘고랑’을 “군락의 꿈”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랑들은 이내 서로 살을 부비며 부축하는 작물 군락의 세상이 될 터. 이 초장과 중장에서는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또 ‘꿈의 군락’과 ‘군락의 꿈’을 어순을 바꿔 반복시키며 반복에 의한 운율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이랑 이랑” “고랑 고랑”이 반복되며 운율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삼라만상의 자연스러운 생체리듬이랄 수 있는 이 운율에 더해, 이 시에서는 음상징(音象徵) 효과까지 노리고 있다. “생의 비알 이랑 이랑”으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주어는 ‘생의 비알’도 ‘이랑’도 아닌 것 같다. 반복되는 이응(ㅇ) 음과 그 동그란 형상이 주인인 듯 이 시를 지배하고 있다.
해서 2연으로 나뉜 종장 전반부에서 이응은 불려진 “젖멍울”로 형상화되고 후반부에서는 “이슬아침 옹알이”로 들리는 것 아니겠는가. 오는 봄을, 봄을 머금은 산밭의 정경을 이응으로 형상화, ‘음상화(音象化)’하고 있는 시이다.
로만 인가르덴의 역저《문학예술작품》에 따르면 시는 음향, 음색, 운율 등 음성형상들의 층과 이미지, 메타포, 상징 등의 의미단위체들의 층들이 중첩된 다성악적(多聲樂的) 구성체다. 의미단위체들의 층위를 중심으로 시의 주제가 드러나게 되는데 위 시에서는 음성형상들의 층위를 중심으로 주제를 환기시키려는 음상징 기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위 시는 의미를 배제하고 음향으로 서정적 경과를 얻으려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순수시에 가까운 시로 볼 수도 있다. 의미는 가급적 제거하고 음만으로 서정적 경과를 이루려는 순수시의 극단은 소통불능의 무의미시 함정에 빠져든 경우가 많다. 우리의 현대시사에서도 김춘수 시인의 〈처용단장 제2부〉 같은 시를 통해 이를 경험했기에 위 시에서는 의미를 소거하지 않고 있다.
“생의 비알”에서 이응의 음상징을 살리면서도 비탈 같은 생의 험난한 의미를 던지고 있지 않은가. 유성자음 이응이 동그랗고 예쁘게 서정적 경과를 이끌다 마침내 “생의 비알”은 “이슬아침 옹알이”라는 감탄을 노시인에게 자아내게 하지 않는가. 생의 비탈이 다름 아닌 매 순간 신생(新生)의 공간임을 이슬아침의 옹알이라는 탁월한 음상징으로 환기시키고 있지 않은가.
‘아침이슬’이라 하지 않고 ‘이슬아침’으로 시적 시공을 확장시키는 언어의 절차탁마, 축자적 의미를 고스란히 살리면서 음상징으로 삼라만상의 순리, 삶의 순수를 그대로 환기시키는 원로시인의 품과 기량이 돋보이는 시이다. 시조는 정형이란 외줄 위에서 한 치의 벗어남 없이 기량과 깊이를 한껏 드러내는 고감도의 긴장된 줄타기임을 작품 자체로 보여주고 있어 숙연해진다.
단정한 형태에 실린 순정의 결기
그믐달,
선지피 닿은
서늘한 입술 있어
짓이긴
핏물 머금고
첫눈을 기다린다
불그레 두근거리는
손톱 위의
봉숭아물.
―한분순 〈손톱에 달이 뜬다〉 전문(《유심》 2012. 1/2)
‘손톱’ ‘봉숭아물’ 그리고 ‘달’은 미당 시인이 특허라도 낸 것일까. 위 시를 읽으니 미당의 시 냄새가 와락 풍겨온다. 다시 읽으니 그런 시어 때문이 아니다. 그믐달의 결기에서 미당 시 〈동천(冬天)〉이 서늘하게 떠오른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는 절구가.
〈동천〉에서는 매서운 새도 감읍(感泣)시키는 귀기(鬼氣)가 떠오르는데 위 시에서는 순정이 떠오른다.
“환히 웃었지만/ 곁에 설/ 머슴애/ 있니?// 사위듯 피는 꼴이/ 제참에도/ 사뭇 수줍어//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먹빛/ 티로/ 남는다.” 두 수로 이뤄진 〈분꽃송(頌)〉 앞 수다. 한분순 시인의 좋은 시를 보면 위 시처럼 분꽃이나 사춘기 소녀의 얼굴이 연상되곤 한다. 삶도 얼굴도 시를 닮아감인가. 요즘 시인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위 시는 시조 단수 각 장을 세 행 한 연씩 세 연으로 구성한 단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손톱을 소재로 했으면서도 시의 공간은 그믐달이 뜬 우주이다. 시인의 손톱과 우주를 한마음으로 잇는 것은 그리움과 설렘의 사춘기적 순정이다.
초장은 손톱에 대한 세밀한 묘사. 손톱 아래 살과 맞닿은 하얀 부분과 위의 붉은 부분 색채를 대비하며 “서늘한 입술”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믐달”을 주어로 맨 앞에 올려놓아 그 “서늘한 입술”은 스러져가는 그믐달 자체에 대한 묘사로도 읽게 했다.
중장에서는 그 손톱, 그믐달에 시인의 심사가 겹쳐진다. 이제 가뭇없이 스러져가야 할 그믐달, 핏빛 잃은 손톱 속의 달이지만 아직 “짓이긴/ 핏물 머금고” 있다. 그러면서 새하얀 “첫눈을 기다린다”. 손톱의 선홍색과 그믐달의 백색의 대비에 칠순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경을 올려놓고 있음인가.
종장에서는 손톱에 들인 봉숭아물이 나온다. 선홍빛 손톱 색깔 이미지가 자연스레 봉숭아 꽃물빛을 불렀는지, 실제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인지 몰라도 이 종장의 주어는 “불그레 두근거리는”이다. 이 두근거림이 손톱과 시인과 저 하늘의 달을 역동적으로 잇고 있다. 두근거리는 불그레한 마음, 단심의 순정이 그리움과 설렘의 달, 손톱 속의 달을 다시 선홍빛으로 떠오르게 한다.
정형의 고답성을 타파하는 역동적이고 세련된 이미지
사랑의 전도사는
아무래도 허방 같다
철새를 따라 우는
강갈래 물소리거나
자는 별
눈을 비비는
손이 시린 바람이거나
어둠이 미끄러져
부서지는 새벽하늘
동강 난 옥가락지
그냥 넘는 그믐달이
통유리
겹창을 뚫고
잠든 꿈만 들쑤시는
―홍진기 〈가을을 걸터앉아〉 전문(《유심》 2012. 1/2)
한분순 시인의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홍진기 시인의 위 시에서도 순정으로서, “사랑의 전도사”로서의 “그믐달”이 나온다. 가을 그믐날 새벽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이내 마당에 나와 새벽하늘을 쳐다보며 사랑에 대해 되씹고 있는 시이다.
홍 시인은 시조 정형의 자수율과 음보율을 음전하게 따라 친숙한 운율을 낳으면서도 압축적이고 다층적인 공감각 이미지의 세련된 구사로 시조의 고답성을 타파하고 있다. 위 시 역시 ‘사랑의 전도사’나 ‘허방’ 같은 관념을 세련되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출해내고 있다.
두 수로 이뤄진 위 시는 앞 수 초장부터 “사랑의 전도사는/ 아무래도 허방 같다”며 주제를 진술하고 있다. 시적 시공(時空)도, 이미지의 구체화도 없는 날것의 관념으로 전혀 시적이지 않게. 허나 다음에 이어지는 이미지들이 허방인 사랑을 아주 심미적으로 구체화시키며 초장으로 다시 돌아와 대체 사랑이란 뭔가를 곰곰 따지게 한다.
중장에서는 “강갈래 물소리” 이미지가 제시된다. 강이 합쳐지며 자글자글 아우라지는 물소리가 아니라 갈라지며 내는 물소리, 그 소리가 “철새를 따라 우는” 소리로 제시된다. 정든 곳을 떠나고 헤어지며 우는 소리, 그래 사랑은 허방인 것인가.
중장이 청각적 이미지인 데 반해 종장은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 이미지로 “바람”이 제시된다. 바람 불어 새벽별이 반짝거리는 것을 “자는 별/ 눈을 비비는”이라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그 바람을 다시 “손이 시린”이라며 촉각적으로 묘사한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부비는 오감(五感) 중 어느 둘 이상이 합쳐진 공감각은 대상과 온몸으로 교감하는 육감적(肉感的)인 울림을 준다. 삼라만상과 너나없이 어우러지는 우주적 교감의 진정성을 준다. 이런 공감각에 의해 중장에서는 별과 바람과 시인이 한 몸으로 어우러진다. ‘시리게’ 어우러지며 늦가을 이별의 삽상한 기운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늦가을 시린 바람같이 사랑은 또 허방인 것인가.
앞 수에 드러나지 않던 시의 시간과 공간은 뒤 수 초장에 와 “새벽하늘”로 드러난다. 어둠 속에 희붐하게 터오는 하늘을 “어둠이 미끄러져/ 부서지는”이라 묘사한 세련되고 역동적인 감각이 신선하다.
중장에선 새벽하늘에 뜬 그믐달을 “동강 난 옥가락지”라고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동강 난 옥가락지는 그믐달의 정확한 시각적 묘사이면서도 또 ‘허방 같은 사랑의 전도사’의 아날로지일 것이다. 해서 “그냥 넘는”이란 체념 혹은 달관의 오기가 그믐달을 수식하며 종장을 예비하게 한다.
종장에서는 지금 이곳의 시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며 시인과 대상, 관념과 구체가 아주 역동적으로 만나고 있다. 가을 새벽 그믐달이 “통유리/ 겹창을 뚫고” 침실로 들어온다. 그런 그믐달은 시인의 “잠든 꿈만 들쑤”신다. 중장의 ‘그냥 넘는’에 비할 때 ‘뚫고’ ‘들쑤신다’라는 동사가 훨씬 역동적이다. 이 역동적 상상력에 의해 앞 수 초장의 ‘사랑의 전도사’라는 관념은 허방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구체로 되살아나게 된다. 시인의 삶과 사랑도 계절로 치면 그쯤에 이르렀을 늦가을 그믐 새벽 삽상한 심상과 그래도 저버릴 수 없는 순정의 결기가 아프게 들어오는 시이다.
가슴속에서 육화(肉化)된 이미지의 진정성
돌도 쪼고 다듬으니
살 붙고 화색 돌아
바람도 세월도 제 한 몸으로 올린
비워서 그득한 천년은 가슴에서 머리까지
석수장이 우렁우렁
망치 끝에서 울고 간 뒤
뼈에 새겨 아련한 은입사의 녹빛처럼
전생에 본 듯한 미소 그 아비가 두고 간
―양점숙 〈어떤 미소―서산 마애석불〉 전문(《아버지의 바다》 고요아침)
양점숙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아버지의 바다》를 펴냈다. 시인의 토양과 연륜에서 자연스레 터져나온 이미지들이 빛나는 시집이다. 머리로 재지 않고 가슴으로 우렁우렁 쪼고 다듬은 이미지들이 시와 시인의 진정성을 돋보이게 하는 시집이다.
두 수로 이뤄진 이 시조는 각각 초장, 중장을 한 연으로, 종장을 한 연으로 처리했다. 초장, 중장에서는 대상인 서산 마애석불을 묘사하다 종장에서는 대상을 그대로 시인 자신으로 육화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앞 수 초장에서는 돌에 쪼고 다듬은 마애석불을 육감적으로 묘사하다 중장에서는 그 살아 있는 듯한 육신에 걸린 시공으로 진전된다. 그러다 종장에 이르러 그 무한시공은 시인의 “가슴에서 머리까지” 그득하게 차오른다.
뒤 수 초장, 중장에서 마애석불은 석수장이 자신의 등신불처럼 묘사된다. 돌에 새긴 부처가 아니라 석수의 뼈에 새긴 부처로. 하여 “망치 끝에서 울고 간” 석수의 삶이“우렁우렁” 들리는 듯하다. 그 우렁우렁한 울음, 중생들의 천년 억겁 한 많은 삶이 종장에 와서는 “미소”가 된다.
“푹 곯은 화엄의 육신 눈물 다 받은 엄니 같은”이란 시 〈홍어〉의 종장에서처럼 양 시인은 잘 삭은 홍어를 “눈물 다 받은 엄니”로 육화하고 있다. 이같이 《아버지의 바다》에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 육친들이 많이 나온다. 익숙한 향토의 시적 대상들에 공경심을 갖고 구체적으로 육화한 이미지가 혈육의 어른으로 드러난 것이다. 해서 마애석불이든 홍어든 시적 대상들이 시인과 한 몸으로 육화되며 장엄한 “화엄의 육신”의 세상을 여는 것이다.
장쾌한 시상(詩想)인가, 판 깨기 놀음인가
저 지랄
발광의 불티
지천(地天)을 죄 싸지를 때,
방아깨비 한 마리가 팔공산을 냅다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허수아비
모자 위에.
긴 긴 뒷다릴랑 낙동강에 씻어내고 또 다른 다리 하나는 뜨는 달을 뜨게 하고……
천지간 통쾌한 입적,
불
들어간다,
만세!
―이종문 〈저녁놀 다비(茶毘)〉 전문(《유심》 2012. 1/2)
저녁놀 한번 장엄하게 지고 있다. 스님 한 분 통쾌하게 입적하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통 큰 시상(詩想)이다. 저녁놀과 한 소식한 듯한 스님의 다비가 주종(主從)을 분간할 수 없게 교직돼 있는 시이다.
총 12연으로 이뤄진 이 시는 시조 두 수를 각 장의 틀을 넘어 한 음절, 한 음보부터 초장, 중장 두 장까지를 한 행으로 자유롭게 잡고 있다. 앞, 뒤 수의 나눔도 없이 한 행을 한 연으로 처리한 시이다. 같은 지면에 신작시 특집으로 발표한 다른 네 편에서도 한 수를 한 행 한 연으로 잡으며 다섯 수까지 나가는 등 여래 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형태를 무시하고 죽 산문처럼 이어붙이면 운율과 함께 서사가 있는 좋은 산문시로 읽힐 시조들도 있다.
같이 발표한 다른 시들에 비해 짧게 짧게 행 나눔을 해서인가. 위 시는 장쾌한 이미지가 돋보이며 서정적으로 읽힌다. 연 나눔의 빈 공간이 이미지에 긴장을 주는 듯 나 대신 율격은 차단하는 형국이다.
앞 수에서는 지천으로 번지는 놀빛에서 방아깨비 형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팔공산 위에 방아깨비 다리처럼 번진 놀빛은 또 허수아비 모자 위에 앉은 실제 방아깨비와 겹쳐지기도 하고.
한 행으로 처리된 뒤 수 초장, 중장은 앞 수 노을의 방아깨비 다리를 형상화하면서 또 화장당하는 스님의 육신과 겹쳐지며 종장의 불 들어간다는 화입(火入)과 연결된다. 업 다 씻고 본래 왔던 적막에 드니 얼마나 통쾌할 것인가. 그러니 “만세!”다.
“몇 년간을 꼭두각시 신기루에 노닐다가/ 이제서야 바야흐로 환의 껍질 벗으시니/ 그 얼마나 기쁘시고 그 얼마나 상쾌하랴/ 봉래산을 오르신 듯 비할 데가 없으시리”. 다비식을 치르며 불을 집어넣을 때 하는 염불 한 대목이다. 상쾌, 통쾌한 위 시에서 언젠가 바닷가 산사에서 목도한 다비식의 그 염불이 그대로 떠오르다니. 장쾌한 사설조로 살아나는 “긴 긴 뒷다릴랑 낙동강에 씻어내고 또 다른 다리 하나는 뜨는 달을 뜨게 하고……”라는 잘 형상화된 절구가 “저 지랄// 발광의 불티”나 “만세!”로 희화화돼 버리다니. 아깝다, 가슴 절절 쪼은 부처가 아니라 머리로 디자인한 부처의 손바닥 안에 갇힌 형국의 형태로 보이니.
“관념의 등짐에 어쩔 수 없이 스케일이 있는 척 누려보는 우주가 아니라, 섞박지처럼 아삭아삭한 아니 좀 곰삭은 내가 나는 (중략) 능청과 너스레가 갈마들어 있다”고 같은 지면에 실린 이종문 시인에 대한 평 〈속한(俗漢)의 즐거운 판 깨기 시조놀음〉에서 유종인 시인은 밝혔다. 그러면서 판 깨기 시조놀음에 숨어서라도 박수를 치고 싶다 했다.
그러나 어쩌랴. 이종문 시인의 새뜻하고 장쾌해 보이는 시들에서 형태 확장의 집념이 또 다른 ‘관념의 등짐’이 되고 있으니. 음보만 시조의 외줄에 겨우 걸쳐놓고 노는 판 깨기 시조놀음에 엇박자라도 박수를 보내기 힘들 것이니.
-발췌: 격월간《유심》2012년 3,4월호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등과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등다수가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