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 부른다
이태선
1번 한우람 정다혜
2번 동사무소 앞 황매화
3번 경비실 옆 철쭉
4번 반 지하 방 창문 얼룩
폭우 그친 이튿날
북한산 밑 쌍문 1동 교실 반짝반짝
햇빛 선생님 출석 부른다
덥수룩한 어둑발이 쳐들어온다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 신을 벗어 턴다 소가 울지 않는다 옆집 도마질 소리 수돗가 펌프 소리
미지근한 수돗물 낮은 부뚜막 하수 냄새 외가의 쪽마루 고양이, 청승 맞게 울던 서울 냄새
멀미 노란 눈 속으로 고요히 골목 연탄 냄새
네
네
네
깊게 깊게 맑은
폭우 그친 다음 날
한우람 정다혜
뜸부기 소쩍새
세상 만물 대답한다
반짝 반짝
담벼락의 벽보도 내 마음의 얼룩도
----이태선, [출석 부른다]({애지}, 2006년 겨울호) 전문
피에르 부르디외가 그의 저서 {텔레비전에 대하여}에서 역설한 바가 있듯이, TV의 세계는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TV의 토론은 첫 번째로는 광고주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방송사의 사주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로는 언제, 어느 때나 국고의 지원과 검열자의 역할을 하는 사직당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 네 번째로는 절대적인 권한을 지닌 사회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로는 TV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다른 경쟁사보다 뒤떨어지지 않도록 흥미 위주의 재치 있는 발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광고제품의 과대포장과 그 상업성의 문제는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방송사의 사주의 사악한 탐욕과 그 비리의 문제도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TV 토론은 이러한 여러가지 제약과 그 한계 때문에, 때로는 서로간의 각본에 짜여진 가짜의 대립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념의 정반대 방향에서, 그 위선의 탈을 쓰고 사직당국의 정책을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TV의 세계는 위선과 기만의 세계이며, 이미 시사한 바가 있듯이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TV는 매우 사악하고 교활한 광고주들의 탐욕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악마가 만든 걸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 아이의 세계는 티없이 맑고 깨끗한 세계이지만, 어른의 세계는 더없이 추하고 더러운 세계가 된다. 어린 아이의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건강과 종의 미래가 약속되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쇠퇴와 종의 미래가 암담하게 된다. 어른은 어린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어린 아이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다. 동화의 세계는 티없이 맑고 순진무구한 세계이지만, 어른의 세계는 온갖 때묻은 생각과 사리사욕만이 넘쳐나게 된다. 어린 아이는 죄가 없는 존재이며, 어른은 죄가 많은 존재이다. 어린 아이는 꿈 많은 존재이고, 어른은 속된 욕망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다. 옛 세대가 가고 새 세대의 여명이 밝아와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지만, 그러나 모든 어른들은 두 주먹을 펴고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 아이는 그의 생존과 인간의 미래를 위하여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임무가 다 끝난 어른들은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 행위들을 통해서 쌓아둔 그 모든 것들을 다 남겨두고 떠나가야만 한다.
동화의 세계는 TV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티없이 맑고 순진무구한 세계이며,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천국으로 회자된다. 에덴동산이나 극락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상적인 천국이란 행복한 세계이며,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타인들과 다투거나 경쟁할 필요도 없고, 날이면 날마다 즐겁고 기쁜 일만이 생겨나게 된다. 씨앗을 뿌리거나 밭을 매지 않아도 사시사철 오곡백과가 저절로 열리고, 늘 푸른 초원에는 하얀 양떼들과 소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리고 하늘을 찌를듯한 숲에서는 아름다운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노동도 없고, 임금투쟁도 없고, 산업공해도 없다. 병원도 없고, 경찰서도 없고, 법원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어린 아이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 어린 아이들은 마치, 에덴동산에서처럼 선악의 세계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태선 시인은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고, 첫 시집 {눈사람이 눈사람이 되는 동안}에 이르기까지, ‘자연 속의 삶’과 ‘삶 속의 자연’을 상호 교차시켜 나가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물이 화해롭게 살아가는 세계를 모색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태선 시인의 [출석 부른다]라는 시는 동화적 상상력이 지배하고 있는 시이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물이 화해롭게 손을 잡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에 가까운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때는 황매화와 철쭉이 돋보이는 봄날이며, 한우람이와 정다혜가 뛰어놀고 있는 '폭우‘ 그친 어느 날이다. 맑고 푸른 하늘에서, 그토록 다정다감한 ’햇빛 선생님‘이 나타나서, 한우람이와 정다혜, 그리고 황매와와 철쭉 등이 지난 밤의 폭우 속에서도 무사한지 출석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폭우 그친 어느 봄날, 햇빛 선생님이 어린 아이들과 황매화 철쭉 등을 위해서 [출석 부른다]는 발상은 이태선 시인만의 새롭고 신선한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폭우‘가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폭우는 분노하는 물이며,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창조적 파괴를 감행한 물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유태인의 타락과 죄가 만발하는 세상을 참지 못하고, 사십주야를 밤낮 없이 ‘폭우’를 쏟아 보냈다. 천지창조 이후, ‘노아의 방주’만을 남겨둔 채, 그 모든 것을 재창조하고자 한 것이다. 물은 종(생명}의 탄생과 종의 성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의 죽음에 근본적인 관련이 있고, 일찍이 수성론자인 탈레스가 역설한 바가 있듯이, 이 세계의 근본물질은 물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데모크리토스의 말대로, 비록, 원자가 이 세계의 근본물질이라고 할지라도, 물은 모든 생명들의 최종심급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이 없으면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 움직일 수가 없고, 또, 그리고 영원히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수가 없다. 물이 맑고 깨끗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가 있지만, 물이 탁하고 더러우면 더럽고 추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삶이 가능하지만,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는 그 어떠한 삶도 가능하지가 않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비가 내리지만,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잔인한 폭우가 쏟아져 내리게 된다. 물은 생명의 물이며, 분노하는 물이다. 또한, 물은 정화의 물이며, 다시 모든 생명들을 탄생시키는 물이다. 따라서 [출석 부른다]에서의 물은 분노하는 물이며 정화하는 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폭우는 분노하는 물이며 폭우가 그친 뒤의 물은 정화하는 물이다. 물은 결코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거나 오염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이 오염되면 모든 생명들이 죽어가고, 그 물은 마침내 더욱 더 커다란 분노로써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물, 분노하는 물(오염된 물), 정화의 물, 또다시 모든 생명들을 탄생시키는 물----. 모든 생명들은 물에 의해서 태어나고 물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또, 그리고 그 물에 의해서 지옥과 천당으로 가게 된다.
이태선 시인의 [출석 부른다]는 모두 총 6연으로 되어 있는데, 제1연과 제2연은 현재의 시점이고, 제3연과 제4연은 과거의 시점이며, 그리고 제5연과 제6연은 다시 현재의 시점이다. 그 시점은 현재--오래된 과거(농촌생활)--가까운 과거(도시빈민생활)--현재로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는 “1번 한우람 정다혜/ 2번 동사무소 앞 황매화/ 3번 경비실 옆 철쭉/ 4번 반 지하 방 창문 얼룩”에서처럼, 어느 폭우 그친 날이며, 장소는 “북한산 밑 쌍문 1동 교실”이다. 표면상으로는 폭우 그친 어느 날 그토록 다정다감한 ‘햇빛 선생님’이 나타나서, ‘한우람’, ‘정다혜’, ‘철쭉’, ‘방 창문 얼룩’ 등이 지난 밤의 폭우 속에서도 무사한지, 출석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폭우는 창조적 파괴를 감행한 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폭우가 그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곧바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제4연의 “덥수룩한 어둑발이 쳐들어온다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 신을 벗어 턴다 소가 울지 않는다 옆집 도마질 소리 수돗가 펌프 소리”라는 시구는 가난하고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궁핍했던 농촌생활에서의 그것을 말하고, 제5연의 “미지근한 수돗물 낮은 부뚜막 하수 냄새 외가의 쪽마루 고양이, 청승 맞게 울던 서울 냄새/ 멀미 노란 눈 속으로 고요히 골목 연탄 냄새”라는 시구는 그 고향을 떠나와서 도시빈민으로 재편입된 자의 그 체험을 말한다. 뼈 빠지게 일을 해도 먹고 살 길이 아득하기만 했었던 아버지, 소울음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던 텅 빈 외양간----, 따라서 “옆집 도마질 소리”도 공허하게 들려오고, “수돗가의 펌프 소리”도 공허하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텁수룩한 어둑발이 쳐들어온다”라는 시구는 어둠의 자식들, 즉,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을 감싸안고 있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마루 끝에” 앉아서, 그토록 힘없이 신발을 털고 있는 아버지 역시도 그 민중의 계급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제5연은 그 정든 고향을 떠나와서 “미지끈한 수돗물”과 ‘낮은 부뚜막“과 ”하수냄새“ 속에서 도시빈민으로 재편입된 자의 삶을 말하고, 그 쓰라리고 아팠던 삶에서는 그 어떠한 꿈도 꿀 수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잃어버린 수돗물, 시큼털털하고 몹시 고약하기만 했던 하수도 냄새, 낮은 부뚜막, 외가의 쪽마루에서 고양이가 청승맞게 울던 서울 냄새,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처럼 멀미가 나고 노란 하늘의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만 했던 도시빈민의 달동네는 우리 인간들의 타락과 죄악이 만발한 세상임을 뜻한다고도 할 수가 있다. 물은 생명의 물이면서도 정화하는 물이다. 정화하는 물은 분노하는 물이며, 우리 인간들과 죄 많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다.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짓밟히고, 부자는 가난한 자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간다. 부자는 사회의 윤리의식을 부패시키고, 가난한 자는 이 세상의 생명의 근원인 물을 오염시킨다. 아니다, 부자도 이 세상의 생명의 근원인 물을 오염시키고, 가난한 자도 이 사회의 윤리의식을 부패시킨다. 부자들의 타락과 죄악도 만발하고, 가난한 자들의 타락과 죄악도 만발한다. 따라서 [출석 부른다]의 폭우는 이 세상의 타락과 부패를 참지 못해서, 그 정의의 칼날을 뽑아든 것이다. 물이 오염되면 모든 생명들이 죽어가고, 이 물은 마침내 폭우로써 그 분노를 드러내게 된다.
이태선의 [출석 부른다]의 시가 동화적 상상력의 소산임은 바로 이러한 역사 철학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이 되고, 햇빛은 그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생님이 된다. 하나님은 물로써 이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그리고, 햇빛 선생님은 예컨대, ‘한우람’, ‘정다혜’, ‘황매화’, ‘철쭉’, ‘방 창문 얼룩’ 등이 그 폭우 속에서도 무사한지 출석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악한 덧셈과 곱셈뿐인 어른도 없고, 온갖 중상모략으로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의 세계를 연출해낸 어른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은 “네/ 네/ 네/ 깊게 깊게 맑은/ 폭우 그친 다음 날/ 한우람 정다혜”라고 대답하고 있는 더없이 맑고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과 ‘뜸부기’, ‘소쩍새’, ‘황매화’, ‘철쭉’ 등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때의 “4번 반 지하 방 창문 얼룩”과 “담벼락의 벽보”와 그리고 “내 마음의 얼룩”이라는 이미지들은 더럽고 때 묻은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물에 의해서 “반짝 반짝” 씻겨진 어떤 것(어린 아이들)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4번 반 지하 방 창문 얼룩”과 “담벼락의 벽보”와 그리고 “내 마음의 얼룩”이라는 이미지들이, 폭우 그친 뒤, ‘햇빛 선생님’의 부름에 ‘반짝 반짝 대답한다’는 것은 매우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새 세상은 자연이 유치원이며, 그 유치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게 된다. 이때의 물은 정화의 물을 지나서, 이 세상의 만물들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생명의 물이 된다. 이태선의 [출석 부른다]라는 시는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이며, 물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인식이 가장 돋보이는 시이다. 그는 이 [출석 부른다]라는 시 한 편만으로도 제일급의 경지에 올라선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한국인들이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 ‘고급문화인’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정진하고, 또 정진해주기를 바란다.
----반경환 명시감상 1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