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의지(意志)는 단일(單一)하다.
각 시대마다 불경하고 망령된 자들이 있어서,
입에 거품 물며 버럭버럭 소리질러 이 교리를 반대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래 전에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주께서…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고 하신 말씀이 진리임을
그들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다윗은 사람들의 미친 짓을 간접적으로 꾸짖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부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항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정죄하는 권세가 그들에게 있다고
방자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한편,
다윗은 그들이 하늘을 향해 내뱉은 모독(冒瀆)은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방(誹謗)의 구름을 걷어치워
자신의 의(義)가 빛나도록 하신다고 짤막하게 경고한다.
우리의 믿음도,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위에 서 있고
세상을 이긴 것이기 때문에(요일 5:4),
높은 곳에 서서 이러한 비방의 구름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안에는 상반(相反)되는 두 의지(意志)가 있다고 주장하는
저들의 첫째 반론(反論)은 쉽게 해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공공연히 금지한 것을
그의 감추인 계획에 의하여 작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답변하기 전에,
나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싶다.
즉,
이런 트집잡기는 나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聖靈)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사람 욥의 입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으므로 그렇게 되었다"(욥 1:21)고
고백하게 하셨다.
욥은 도적들에게 약탈당했을 때,
자기에게 임한 불의한 행위와 악행이
하나님의 정당한 채찍임을 인식했다.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作定)하셨으므로
그들의 아버지에게 순종치 않았다(삼상 2:25).
다른 선지자도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흠(欠) 잡는 자들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안일(安逸)한 허용(許容)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미 하나님이 만사(萬事)의 창조자(創造者)라 불리우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했다.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한다(사 45:7)고 선언하시고,
자신의 시키심이 아니면 어떤 재앙도 일어나지 않는다(암 3:6)고 선언하신다.
청컨대, 하나님이 자원(自願)하여 심판을 행하시는지,
아니면 마지 못해 심판을 행하시는지
그들로 하여금 나에게 대답해 보게 하라.
그러나
모세가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떨어진 도끼에 우연히 맞아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살인자의 손에 넘겨졌다는 것이다(신 19:5; 참조, 출 21:13).
또한 누가에 따르면,
헤롯과 빌라도는 하나님의 권능과 계획에 의해 작정(作定)된
그것을 행하기 위해 공모(共謀)했다고 온 교회는 말한다(행 4:28).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구속(救贖)은 어디서 오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意志)는
스스로 모순(矛盾)을 내포한 것도 아니고
변(變)하거나
그가 뜻하신 것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假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의지(意志)가 그 안에서 하나이고
단일(單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양(多樣)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精神的) 무능(無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어떤 일의 발생을 뜻하시거나
뜻하지 않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부르심이
"감취었던 비밀(秘密)"(엡 3:9)이라고 말한 후,
이어서
"하나님의 각종(各種) 지혜(智慧)"(엡 3:10)5가
거기에 드러났다고 간단히 덧붙인다.
하나님의 지혜가 다양하게
(고대 번역자는 '여러 형태의'라고 번역했다) 나타난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의 아둔한 이해력으로 인해,
마치 하나님의 계획이 변하고
하나님에게 어떤 모순(矛盾)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 속에 어떤 변덕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금(禁)하신 것을
어떻게 이루기를 원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적(精神的) 무능(無能) 때문임을 상기하자.
동시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이라 불리는 것은 이유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흑암으로 덮여 있기 때문임을 숙고하자.
그러므로
모든 경건하고 온건한 사람은
어거스틴이 한 다음 말에 기꺼이 공감(共感)할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을 인간이 선한 뜻을 갖고 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착한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기를 원한다.
또한 하나님이 선(善)한 뜻을 가지고 뜻하신 것을
사람은 나쁜 뜻으로 원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악(惡)한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고,
하나님도 이를 원한다.
즉,
전자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고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도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전자의 효도(孝道)는
하나님의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는 후자의 불효(不孝)보다는
하나님의 선(善)한 뜻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고,
또한 그 뜻이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양자(兩者)가 뜻하는 목적(目的)에도 큰 차이(差異)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의 악한 뜻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올바른 뜻을 실현하시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말을 하기 조금 전에,
배반한 천사들과 모든 악한 자들이 변절함으로써
그들의 관점에서 보아 하나님이 원치 않던 일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의 전능(全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지(意志)를 거스려 행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의지가 그들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시 111:2)라고 감탄한다.
하나님이 뜻하시지 않고는 아무 일도,
심지어 그의 의지(意志)에 반(反)하는 일조차도 일어나지 않음은
놀랍고도 형언(形言)할 수 없는 방법(方法)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許諾)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 못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기꺼이 허락하신다.
또한
그는 전능(全能)하시기 때문에
악(惡)으로부터 선(善)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선하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許容)하지 않으실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강요 1권 18장 3(라틴어 최종판 직역, 생명의 말씀사, 문병호 옮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