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노씨(慶州盧氏)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禿同里.文洞.文山洞.고나미.古南)
안강노씨(安康盧氏)는 현세에 대개 경주노씨(慶州盧氏)로 일컫는다. 지리적으로 안강과 경주는 같은 뿌리이기 때문이며, 또 안강이 후대에 경주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안강(安康)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월성군(月城郡) 북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 초기(新羅初期)에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안강(安康)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흥해)에 예속시켰다가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경주(慶州)에 속하게 하였고, 1949년 강동면(江東面) 일부를 병합하여 안강읍(安康邑)으로 승격되었다.
안강노씨 족보에 따르면 도시조 노수(盧穗)는 본래 중국 탁현(涿縣) 범양현(范陽縣) 사람으로 벼슬은 한림학사와 대호군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에서 누대에 현달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자 당(唐) 덕종(德宗)이 이를 미워하였다. 정치가 어지럽고 환란이 일어날 조짐이 일자 노수는 아들 9형제와 함께 패수(浿水)를 건너 평안도 정주에 옮겼다가 다시 용강으로 이주하였다. 신라 조정에서는 노수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서 계림(鷄林)에서 종생토록 하였다 한다.
이후 노수(盧穗)의 여섯째 아들 노곤(盧坤)이 고려조에 입사(入仕)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우고 안강백(安康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곤(坤)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안강(安康)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상계(上系)가 실전(實戰)되고 소목(昭穆)을 밝힐 문헌(文獻)이 없어 안강백(安康伯) 곤(坤)의 후손으로 조선조(朝鮮朝)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한 노종선(盧綜善)과 목사(牧使)를 지낸 노희선(盧禧善)을 각각 1세조로 하여 계대(係代)하고 있다.
안강백의 후손들이 대대로 경주 지역에서 많이 살았으리라 추측되기는 하나 정확한 문적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계대(系代)를 소상히 밝힐 수가 없다. 다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전고대방(典故大方) 등 기록에 따르면 안강백 노곤(盧坤)의 후손에는 고려초(高麗初)에 대광정승(大光政丞)을 지낸 노강한盧(江漢)과 고려조 중엽에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낸 노인정(盧人景)은 안강노씨의 원조로 되어 있다.
노강한의 후손에는 형 노종선(盧從善)(검정공파:儉正公派)과 아우 노희선(盧禧善)(사간공파:司諫公派)을 기세조로 하는 세계(世系)와 노인경(盧仁景)의 후손 륜(倫)(동정공파:同正空派)을 기세조로 하는 파(派)가 안강, 경주노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주노씨의 선산(善山) 입향 경위를 살펴보면 노종선(盧從善)은 세조조와 성종조 때에 이원현감(利原縣監)과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낸 바 있으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려조 때의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굳은 충절과 높은 학덕을 추모하고, 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생의 깊은 충정을 흠모하여 그들이 남긴 고귀한 향취와 유풍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명현과 충의의 고장이며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선산 지방의 구미 성남촌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종선의 손자인 부장공(部將公) 노관(盧绾)은 다시 선산의 문동(文洞)으로 이주하였고, 6세손 노경필(盧景佖)은 다시 선산의 도개화림(桃開華林)으로, 노경임(盧景任)은 선산의 해평숭암(海平崇岩)으로, 노경좌(盧景佐)는 문경(聞慶)의 호계(虎溪)로 각각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은 이곳을 세거지지(世居之地)로 하여 오래도록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행정동명으로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및 도개면 화림리에는 관향을 경주로 일컫는 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독동리는 문동골, 고내미, 거물리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문동골은 원래 마을에서 글 잘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어 문동골 또는 문산(文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고내미는 본래 아홉 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졌다 하여 구남(九南)이라 하였고, 음운이 변하여 고내미 또는 고남(古南)이 되었다. 약 500년 전에 인천이씨가 정착하였다가 경주노씨가 번성하자 이거하였다. 조선시대 독동방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남리와 거물리를 통합하여 독동방이라 하였고, 이후 선산면에 통합되었다가 지금의 독동리가 된 것이다.
이 문중의 인물로는 조선 중엽의 문신으로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며, 지평, 삼척부사, 예조정랑, 성주목사 등을 역임한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 1569-1620)이 있고, 무반으로 시문집(詩文集)을 간행한 노계정(盧啓禎, 1695~1755)이 이름났다. 노계정의 자는 국휴(國休), 호는 죽월헌(竹月軒). 노경필(盧景佖)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노성빈(盧聖賓)이고, 1725년(영조 1)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732년 서추(西樞) 김취로(金取魯)의 천거에 의해 수문장이 되었다. 1734년 훈련주부·도총부도사를 지냈고, 이듬해 박천군수에 제수되었다. 1737년 위원군수를 역임하였고, 1739년 상주영장·선천방어사를 거쳐 어영천총에 임명되었다. 1742년 전라우수사와 어영별장을 거쳐 1743년 창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745년(영조 21) 곡산부사·강화중군·금위영천총·초산부사 등을 거쳐 1747년 이산부사를 역임하였으나, 1748년 순창으로 유배되었다. 1749년 유배에서 풀려나 1750년 경상좌병사·어영도감좌별장 등을 지냈으나, 조정을 기만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지냈다. 저서로는 죽월헌집(竹月軒集)이 있다.
또 무신으로 병사(兵使)를 지낸 노상추의 일기(盧尙樞日記)가 이름이 나 있는데, 1736년(영조39)부터 1829년(순조29)까지 약 67년간 쓴 일기를 탈초, 표점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자료는 조선후기 무반(武班)의 한 사람인 노상추(1746~1829)가 열일곱 살 무렵부터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생활을 기록하여 남겼다. 그의 일기는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구성원과 친족, 이웃과 하인 등을 주인공으로 한 조선후기 한 촌락 구성원들의 생활 및 친교(親交)의 기록이며, 관료로서의 일상과 동료들과의 인간관계의 기록이다. 이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49집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또 노호(盧澔, 1765~1833)라는 분이 있어 선산읍 독동리의 안강노씨 세거지에 세워진 문산서원(文山書院)이 서원으로 승격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평생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많은 유림으로부터 존경받았으며,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 존노(尊老)라는 칭호를 얻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노씨(慶州盧氏)는 1985년에는 총 928가구, 3,885명, , 2000년에는 총2,057가구, 6,49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마을은 옛 생활 문화가 잘 보전되어 선현들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가고 있으며, 구미시에서 선발한 효(孝) 마을에 걸맞게 마을 입구에는 충효정(忠孝亭)이 있고, 사단법인 영남유교문화진흥원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로 천연기념물 제357호인 구미(龜尾) 독동리반송(禿同里盤松), 문산서원(文山書院), 죽월헌(竹月軒), 노경건의 처 송씨정려비, 북사지(北寺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