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설
화랑도는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신라시대의 청소년 수련단체이다. 화랑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젊은이’이라는 뜻인데, 선랑(仙郞), 국선(國仙), 풍월주(風月主)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회랑도는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집단으로 교육적, 군사적, 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성립과정
가. 화랑도의 기원
화랑도는 우리 고유의 것으로 그 기원은 옛 씨족사회에 있었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된다. 같은 연령급단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그 사회의 전통, 규율 및 제사의식, 사냥과 전쟁의 기술을 배우고, 노래와 춤을 통하여 강한 동질감을 형성시켜 갔다. 따라서 종교적 사회적 습속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그들의 노래와 춤은 이 땅과 조상을 섬기는 의식이기도 했다. 화랑의 풍류는 이와 같은 소박한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전래되자, 고유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폭넓게 수용되었다. 이것이 화랑정신의 사상적 기초가 된 것이다. 따라서 화랑도의 사상은 고유의 것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며, 외래사조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에 대한 자존과 외래문화와의 융화, 보용이 조화된 정신세계였다.
나. 화랑도의 성립과정
이 화랑도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생동하는 빛을 발휘하는 것은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무렵 화랑도는 국가적으로 공인되고 제도화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37년(576)에 원화(源花)제도를 화랑(花郞)으로 바꾸었으며, 삼국유사에는 최초의 화랑을 설원랑(薛原郞)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는 이보다 14년 앞서 화랑 사다함에 대한 기사가 있어 화랑도의 성립시기는 더 소급된다. 또한 동국통감에는 진흥왕 원년(540)을 화랑도의 성립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화랑도는 6세기 전반기에 국가적으로 공인된 조직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6세기 전반기’는 신라가 안으로 국가체제가 확립되고, 그 국력이 밖으로 팽창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화랑정신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대정신이었다. 신라가 진흥왕때부터 대외적으로 웅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초개같이 던질 수 있었던 화랑들이 수없이 나타나 그 시대를 이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 화랑도의 조직
화랑도는 한 시대에 여러 집단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화주(花主)가 있어서 여러 화랑도를 통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는 화랑과 낭도로 구성되었는데 낭도 가운데는 승려낭도가 있었다.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인물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여 사교성이 있는 진골귀족 중에서 낭도의 추대로 뽑혔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모두 2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승려낭도는 교양이 풍부하여 화랑을 도왔다. 낭도는 평민을 포함한 여러 신분에서 자발적으로 모여서 조직되었다.
3. 화랑도의 성격
화랑도는 원래 풍류도(風流道)라 일컬었는데 이는 멋과 조화로움이 화랑도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화랑도는 수많은 낭도들이 훌륭한 품성을 가진 화랑을 준거 인물로 삼아 서로 배우며 심신을 수련하는 조직이다. 이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다. 이 노래와 춤은 명승지순례와 더불어 그들에게 강한 정신적 일체감과 창조적인 활력을 형성시켰다. 무리가 어울려 같이 풍류를 즐기고 도의를 연마함으서 강한 동질감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들의 우정과 신의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다투어 앞장서는 시대정신을 형성시켰다. 삼국사기에 있는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화랑뿐만 아니라 낭도나 일반병졸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신명을 바치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화랑도의 정신은 집단수련을 통해 배양된 것이었다. 화랑세기에는 훌륭한 충신과 용감한 병사가 모두 화랑 가운데에서 나왔다고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신명을 바쳤고 화평의 시대에는 충신으로서 나라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 화랑이었다.
4. 화랑도의 수련방식
화랑도의 수련방식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삼국사기를 보면 ‘도의로서 서로 연마하고(相磨爾義), 가악으로서 서로 즐기고(相悅以歌樂), 산수를 찾아 유오하되 멀다고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遊娛山水 無遠不至)’라 하였다. 이들의 도의란 민족의 전통과 신앙을 바탕으로 5계와 3미의 정신을 체득 연마하는 것이요,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긴다는 것으로 보아 화랑들은 멋과 여유를 아는 풍류인들이었다. 화랑들은 고지식한 선비나 비정한 무사 이상의 품격을 가졌다. 산수에 유오한다고 하였으니, 명산대천을 찾아 대자연 속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아울러 조국산천에 대한 애착심을 체득하고 천지신명에 제사지냈던 옛 조상들의 정신도 이어 받았다.
5. 화랑정신
화랑정신은 우리 고유의 민족정신으로 전 역사를 관통하여 우리들의 혈맥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다. 이 화랑정신의 실천적 표현은 그들의 계율에 잘 나타나 있다. 진평왕(579~632)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과 취항(?)등 두 젊은이에게 세속5계를 전수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 事君以忠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고 事親以孝
벗을 사귐에 신의로써 하고 交友以信
싸움에 임하면 물러남이 없게 하고 臨戰無退
산 것을 죽임에 가림이 있어야 한다. 殺生有擇
이 세속5계는 우리 고유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유×불×선의 3교사상이 융합되어 표현된 것이다. 특히 임전무퇴의 정신에서는 당시 신라가 지닌 시대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귀산과 취항은 세속5계를 받들어 평생의 계율로 삼아 실천하였고, 아막성에서 임전무퇴의 정신을 지키고 전사하였다.
화랑의 실천정신으로서는 5계와 함께 3미(三美) 혹은 3덕(三德)이 있다. 헌안왕(857~861)때의 국선 응렴(膺廉)은 전국을 순유하면서 지방의 권세있는 호족 등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 호연지기와 높은 기상을 수련하였다. 그리하여 명예와 재산과 권세 등 현실의 범용한 욕구를 초탈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응렴이 왕에게 말한 미행하는 자 셋, 즉 겸손×검소×겸양의 정신을 일컬어 3미(三美)라 하는 것이다.
“신이 미행(美行)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
남의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겸손하여 남의 아래에 있는 것이 그 하나요,
남보다 부자이면서 입는데 검소한 이가 있으니 그 둘째요,
본래 강한 세력이 있으나 그 위엄을 쓰지 않는 이가 있으니 그 셋째입니다.”
화랑정신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5계 3미의 실천정신에서 그 핵심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풍류와 멋을 바탕으로 한 조화의 정신이요, 젊음의 정신이다.
화랑정신은 우리 역사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내려온 살아있는 정신이요, 시대에 뒤진 것은 아니다.
화랑정신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융화 발전할 수 이는 포용성 있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국수적인 사상은 아니다.
화랑정신은 민족을 하나로 묶는 통일의 정신이요 창조적 정신이다. 그것은 대의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초개같이 던질 수 있었던 정신이요, 이 나라의 산천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했던 정신이다.
6. 새화랑으로서의 자세
누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하여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감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생각을 가다듬고, 스스로 격려하여 그런 사람과 같이 했던 김흠운(金欽運).
의(義)없이 사는 것은 의있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의가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利)라 하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던 해론(奚論).
우리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이 나라에서 수백, 수천의 멋진 젊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시대를 이끌어 갔음을 본다. 그래서 화랑도와 화랑정신은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오늘의 이 시대와 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우리는 화랑도가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견뎌낸 고난과 이겨낸 시험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우리 민족은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국토가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앙금을 지닌채 수십년을 지내왔던 것이다. 그것은 남의 뜻에 의해 이루어져 갔던 역사였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이상과 의지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丹齎 申采浩)는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가 ‘화랑’이라고 했다. 역사상 크고 작은 도전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해 왔던 민족의 저력은 화랑정신이었던 것이다. 21세기를 내다보며,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가더라도, 우리의 마음바탕에는 뿌리깊은 화랑의 얼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새화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들이 다양한 여러분야에서 활동하더라도 우리는 새화랑으로서의 공감대를 가지고 밝은 미래를 열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짐을 지워 주었다.
아니,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화랑의 유적지>中에서 화랑교육원장 이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