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그냥 본대로 느낀대로 세상을 포착하라
메를로 퐁티 (1908 ~ 1961)
세계를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몸
의식과 대상의 이분법 거부하며 구체적 상황에 몸 담은 인간의 철학
우리에게서 메를로 퐁티는 종종 사르트르와 함께 이해된다. 그는 사르트르와 더불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로 이해된다. 또한 그는 사르트르와 정치·사회적 활동을 함께 한 프랑스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메를로 퐁티는 독일 점령 시기인 1941년, 사르트르와 함께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레지스탕스(저항)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그는 1945년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라는 잡지를 공동 창간하여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발언한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정치적으로 사르트르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게 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사르트르가 한국전에 대해 좌파의 견해를 따랐다면, 메를로 퐁티는 한국전에 대한 구소련의 태도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했다. 메를로 퐁티는 1952년 사르트르와 공동 창간한 ‘현대’지를 떠나고 사르트르와 결별한다.
메를로 퐁티는 철학적으로도 사르트르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메를로 퐁티는 자신의 철학에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싫어한다. 사실 1940년대 중·후반부터 실존주의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철학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다. 우리가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야스퍼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는 자신들의 철학에 실존주의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싫어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메를로 퐁티와 사르트르 철학에는 프랑스 실존주의라고 부를 만한 공통적 특징이 있다. 그들은 이전 철학에 대한 반발로서 ‘구체성의 철학’을 추구한다. 이들의 구체성의 철학은 데카르트나 칸트에서 볼 수 있는 ‘반성(reflection)의 철학’ 또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를 비판한다. 그들은 지성으로서의 의식이 대상의 가능 근거를 지성적 의식 자신에게서 찾는 반성철학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지성적 의식이 대상으로 향했다가 그 대상을 구성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즉 지성적 의식의 자기 복귀(re-flection)의 철학을 거부한다. 그들은 지성적인 반성에 의해 구성된(파악된) 대상 이전의 현상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성적인 반성의 추상적 사유에 앞선 전(前)반성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사물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의 철학이 비지성적이고 전반성적인 현상을 추구하지만, 데카르트나 칸트 철학처럼 순수 주체(인간)를 주장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르트르가 지성주의자들처럼 인간과 대상의 이분법적 사고를 답습한다고 비판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대자존재(인간)와 즉자존재(대상)의 이분법적 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메를로 퐁티는 “실존주의(사르트르 철학)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전통 내에서 위대한 철학을 재건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한다.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구체적이고 상황적인, 전반성적이고 비지성적인 세계로 향하지만, 사르트르와 달리 순수 주체(인간)로서의 의식을 주장하지 않고 의식과 대상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반성 이전의 구체적인 세계로 향하면서, 순수한 주체도 순수한 대상도 없다고 주장한다. 지성적 반성에 의해 추상되고 왜곡되기 이전 상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포착하면, 거기에는 의식(인간)과 대상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것들이 애매하게 섞여 있다고 메를로 퐁티는 생각한다.
메를로 퐁티의 이런 생각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한국인의 어법에서 무척 잘 드러난다. 우리는 겨울에 집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춥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추운가? 일단 ‘날씨(바깥 공기)가 추운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춥기도’ 하다. 따라서 ‘추운 날씨’가 어디서 끝나고 ‘추운 나’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다. 그 경계는 모호하다. 그뿐만 아니라 추위는 나에게도 있고 날씨에도 있어, 추운 날씨와 추운 나는 서로서로 속에 애매하게(이중적으로) 섞여 있다. 그야말로 추운 날씨와 추운 나는 모호하고 애매한 관계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메를로 퐁티가 포착하고자 한 현상이다.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그냥 본대로 느낀대로 세상을 포착하라
메를로 퐁티는 이렇게 포착한 현상을 통해 데카르트 이후 주체와 대상의 이원론 문제와 관련된 논쟁을 해결하려 한다. 데카르트가 코기토, 즉 ‘생각하는 나’를 주장할 때, 이 ‘나’는 대상(물질)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순수한 의식(주체)이다.
데카르트는 여기 보이는 난로가 실제로 없다 하더라도, 난로를 바라보는 의식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의식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런 의식과 독립적으로 순수한 대상(물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춥다’라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추운 날씨와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가을날 푸른 하늘을 보고 그 속에 빠져 있을 때, 어디서 푸른 하늘이 끝나고 어디서 내가 시작하는지 알 수 없다. 추운 날씨와 푸른 하늘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추위로, 푸른 하늘로 물들인 채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추위를 느끼고 푸른 하늘을 보는 나 역시 순수한 주체가 아니라 그런 추위와 푸른 하늘 ‘속’에 물들여 있다. 이처럼 메를로 퐁티는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순수 주체와 순수 대상을 거부한다.
데카르트가 주체와 대상을 나눈 이후, 주체와 대상의 문제와 더불어 마음(의식)과 몸의 이원론 논쟁 역시 점철되어 왔다. 데카르트가 난로를 바라보는 의식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난로와 같은 물질뿐만 아니라 난로를 바라보는 자(의식)의 몸이 없어도 그 의식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몸이 물질세계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몸은 의식(마음)과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데카르트의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데카르트가 말하는 물질 덩어리로서의 몸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유물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말 ‘춥다’는 메를로 퐁티의 이런 생각을 또한 잘 보여준다. 내가 ‘춥다!’고 말할 때, ‘내가 추운가’ 아니면 ‘내 몸이 추운가’? 내가 춥기도 하고 내 몸이 춥기도 하다. ‘춥다’는 현상 속에는 추운 몸과 분리된 순수한 의식(마음)도 없고, 그런 의식과 분리된 순수 물질 덩어리로서의 몸도 없다. 이 때문에 메를로 퐁티 입장에서, 데카르트의 마음과 몸의 이원론도 불가능하고, 마음을 순수한 물질 덩어리인 몸으로 설명하는 유물론도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메를로 퐁티는 순수 주체도 순수 대상도, 순수한 의식(마음)도 순수한 물질로서의 몸도 거부한다. 데카르트는 지성에 의해서 주체와 대상, 마음과 몸을 명료히 구별하지만, 메를로 퐁티는 그렇게 구별되기 이전의 현상으로 되돌아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데카르트적인 지성에 의해 추상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구체적인 현상으로 복귀한다. 이런 구체적 현상에서 메를로 퐁티가 포착한 의식은 데카르트의 순수 의식과 달리 둔탁하고 불투명하다. 이미 우리의 의식은 둔탁한 몸으로 된 의식, 또는 그런 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이다. 또한 메를로 퐁티가 포착한 대상은 데카르트의 대상처럼 명료하게 완전히 다 파악되지 않는다. 의식이 몸을 통해 파악한 대상은 불투명하고 다 주어지지 않은 채 관점적으로 나타난다.
지금 나에게 책상이 오른쪽에 있고 옆면은 어둡고 뒷면은 보이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그 책상은 왼쪽에 있고 옆면은 나처럼 어둡게 보일 것이며 뒷면은 잘 보일 것이다. 나와 상대방은 각자의 몸을 통해 사물을 관점적으로 본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그래서 세계는 언제나 불투명한 채 관점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세계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다 드러나는 지성주의적 세계가 아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지성주의가 순수 지성(정신)을 통해 구체적인 상황을 초월한 채 ‘고공비행하듯’ 세계에 대한 무관점적인 모습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메를로 퐁티는 구체적인 상황에 ‘몸담은’ 채로 세계를 포착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와 칸트에게서 의식이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신적인 욕망을 가진 몸 없는 정신(지성)이라면, 메를로 퐁티에게서 의식은 세계를 고공비행하지 못한 채 관점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메를로 퐁티의 철학은 세계에 ‘몸담은’ 인간의 철학이다.
메를로 퐁티를 더 알고 싶다면
어떤 철학자를 알고자 한다면, 어렵더라도 그 철학자의 주저를 읽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8)는 메를로 퐁티의 첫 번째 저서이다. 메를로 퐁티는 이 책의 첫 문장을 “우리의 목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쓰는데, 이 말은 인간(주체)과 자연(대상)이 분리되지 않음을 주장하는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테마를 보여준다. 이 책의 마지막 4장은 마음과 몸의 문제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입장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은 메를로 퐁티의 대표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메를로 퐁티는 지각적 주체로서의 몸과 여러 지각적 현상들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이원론과 관련하여 지성론과 경험론을 양비론적으로 끊임없이 비판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남수인·최의영 역, 동문선, 2004)은 메를로 퐁티의 미완성된 유고이다. 이 책은 메를로 퐁티가 죽기 몇 년 전부터 작성한 미완의 글을 모아 사후에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의 본문 마지막 장인 ‘얽힘-교차’는 이 책의 정수인데, 인간과 사물이 동일한 조직으로 교차적으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