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32
학봉 김양수 문학평론가
내가 학봉(鶴鳳) 김양(金良洙)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으로 재임할 때 성춘복 선생과 함께 한 문협 행사에서였다. 문협과 예총의 심포지엄 행사 때에는 주제 발표자로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는 해박한 문학지식 뿐만 아니라, 당시 문단의 이슈였던 민중문학에 대한 순수문학의 반론적 비평을 주로 토로해서 회원들에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김양수 선생은 1933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1955년 『현대문학』에 문학평론「독성의식(毒性意識)의 자폭(自爆)」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현실참여의 문학을 비판하고 반 참여 또는 반 리어리즘적으로 문학의 독자성과 자율성에 입각한 미의 창조를 주장하는 순수예술을 지향한다고 ‘어문각’ 발행『한국 문예사전』에서는 요약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 말 전봉초(전 서울음대 학장) 선생이 한국 예총회장에 재임할 당시 사무총장 오학영 희곡작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그 후임으로 사무총장에 지명되어 부임하면서 나와는 예총의 전반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후배로서 존경하고 문학과 문단에 대한 많은 조언을 받게 되었다.
그의 평론은 모든 예술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그대로 향유하고 그것을 분석 종합하는 인상주의 비평에 주력한다는 주위 문인들의 평가가 그를 확고한 한국 평단의 주축으로의 위상을 정립하고 있었다.
그는 김동리 문협 이사장을 보좌하고 그후에 문협 부이상도 역임하면서 황 명, 성춘복, 김시철, 홍성유, 김해성, 홍윤기 선생등과 교류를 하면서 주요 평론으로 「문학에서의 미(美)의 창조」「참여문학의 문학 학살」「유치환의 수상록」「민족문학 확림의 과제」「형상화의 문학」등이 있으며 현대문학 신인상, 인천시 문화상, 경기도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인이 즐겨 쓴 ‘눈물’과 ‘안개’와 ‘바람’과 ‘그리움’에 ‘별빛이라는 말이 무엇을 대변하는 것인지 설명을 안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왜 ’눈물‘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써야했던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또 다음으로 ’안개‘와 ’바람‘을 많이 쓰게 되었고
’그리움‘과 ’별빛‘을 읊조리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표제의 ‘안개’를 문명 또는 문명의 공해를 비유한 것이라고 시집의 해설자는 풀이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그렇게 풀이하건 안하건 간에 ‘안개’에 갇혀 ‘그리움’과 ‘별빛’을 목말라 ‘눈물’로 호소하는 것과는 틀림없는 영혼의 외침을 시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받아들여 마땅하다고 본다.
--「잠꼬대가 아닌 詩」중에서
그는 나의 시집『안개여, 안개꽃이여』(1988. 도서출판 거목)의 서평(1989. 3. 『心象』수록)으로 평을 해주었다. 그는 ‘이번 시집의 60편 가운데 제일 많이 사용한 말이 <눈물>이란 말로서 모두 24번이나 배치되어 있고 <안개>가 22번, <그리움>이 13번에 <별빛>이 8번 등장하고 있다’라고 일일이 시어의 배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표하고 있어서 나의 작품을 얼마나 꼼꼼하게 살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86년에는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때 연간집으로 한국문학비평선집 『분단현실과 비평문학』을 간행(편집위원 : 김양수 김우종 김상일 윤병로 전규태 유한근)하여 분단과 문학의 상관성을 집대성해서 문단에 관심을 모은바가 있다.
여기에서 그는「미래의 문학과 현실 과제」를 제시하면서 ‘좁은 시야의 문학과 고정관념의 문학이 부지의 세월로 지속되고 있는 탓으로 해서 이른바 민중문학 운운하는 정치주의 사이비문학을 역설하면서 그들이 하는 일만이 참다운 문학을 하는 것이라는 넌센스를 벌이는 시점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라는 논지로 당시 창궐한 민중문학과 그 아류들을 강렬하게 질타하고 나섰다.
이러한 부류의 정치주의 사이비문학의 유표가 횡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멀쩡한 줄 알았던 문인까지도 문학의 민주화를 운위하는 희극적인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 문학의 미래가 축복받고 영광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상의 비관적 측면에서 본 장애들이 우리 문학에서 바로 잡히고 극복되는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하겠다.
그는 이렇게 우리 문학이 민중적 호소를 내세운 민중문학과 정치주의 사이비문학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논조를 고수하면서 문협쪽 보수진영의 순수문학 옹호를 위한 논리를 계발하여 심포지엄이나 잡지의 특집에 기고하여 진보문학 진영과 맞서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것이 우리 미래의 문학과 현실적인 과제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1982년, 조연현 선생이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재임시 발간한『문예비평론』에서는「문학과 종교」란 논문을 통해서 ‘문학이 인간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성에 그 기초를 둔 것으로 신앙이야말로 미적감동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미(美-문학)는 반드시 신앙적인 것이 됨으로써 자신을 영속화한다고 주창한다. 결국 오늘의 종교는 일어버린 인간적 감동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며 현대의 문학은 영원무궁한 초자연의 세계를 다시 감지하는 능력을 일깨워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문학과 종교의 상호 감응(感應)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무용가 강선영 선생이 예총회장에 당선하면서 새로운 운영과 발전적인 방안을 창출하기 위해서 사무총장을 최절로 시인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그는 퇴임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획관리실장이란 직함으로 계속 근무를 하면서 행정에 관여했다. 최절로 총장과는 약간 어색한 감이 있어서 운영체계와 행정 및 사업시행에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를 빗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의 와중에서 나는 적절한 화해와 융화를 위해서 상당한 고충도 따랐다. 그래도 강선영 회장 임기까지는 잘 견디다가 신영균 회장이 취임하면서 퇴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문협에서는 ‘문인촌’ 건설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었다. 판교 어디쯤(나는 가임을 하지 않았기에 정확하게 장소를 알지 못함)에 몇 만평의 임야를 매입하고 앞으로 문인들의 낙원을 건설한다는 방대한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일부 가입자들이 당시 유한근 사무국장을 상대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벌어져 문협이 어수선하여 대외적인 여론이 하락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사무국장을 교체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그가 나서서 그 자리에 나를 추천하려 했다. 어느 날 퇴근시간에 나를 동행하고 동대문쪽 어느 술집에 마주 앉아서 이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문협 사무국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수용했으나 그쪽의 문제가 생각하는 마큼 쉽게 풀리지 않아서 무산된 적이 있다.
그는 나의 행정력과 추진력(?)을 신뢰했는지 그러한 요직에 나를 적극 추천하여 새로운 진용으로 문협의 위상을 높이려는 그의 구상이 문협 부이상과 평론가협회장 그리고 예총 사무총장이라는 직함에 합당한 미래지향적인 경영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문협 문인촌 문제는 아직도 미결로 남아 있다는 안타까운 전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