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유대공동체#이야르
월간샤밧 이야르호의 큰 주제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독립과 건국에 관한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싣지 못한 우리 가까이 있던 유대공동체에 대한 글입니다.
두 도시 이야기
하얼빈
우리에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항일 운동 목적으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으로도 잘 알려진 도시가 하얼빈이다.
하얼빈은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 성)의 성도이며. 쑹화강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강으로, 아무르강의 가장 큰 지류이다)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이다.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된 것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면서였다. 19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넘겨받은 러시아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경험 많은 사업가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열악한 지리적 환경의 개척지에 이주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러시아는 반 유대정책과 인종학살로 고통받는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피난해 가는 대신 하얼빈으로 이주하기만 하면 반유대주의적 제약 없이, 뉴욕기업들에서 하층민으로 일할 필요나 새로운 언어를 배울 필요 없이 살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1898년에 하얼빈에 도착해 1903년 공동체를 설립하고 하얼빈에 호텔, 은행, 약국, 보험회사, 백화점, 출판사 등 많은 시설들을 세웠다.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유대인, 러시아 유대인 대학살에서 도망친 유대인 난민,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도망쳐 온 난민들이 합류하며 약 2만 명이 공동체 인구로 등록했으며, 유대교 회당이 지어졌고, 유대교 율법에 맞는 가축 도축업자, 의식용 목욕탕, 병원, 학교, 무교병을 만드는 빵집, 잡지사, 신문사, 유대 음악과 연극 공연장 등이 건설되었고 아시아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얼빈에서 풍족하게 생활하였으며 히브리어와 시온주의 사상을 공부하며 거리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그 영향력이 줄면서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6개 나라의 영사관이 개설되고, 수백 개의 공장과 기업, 은행이 세워지면서 만주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도망친 러시아계 비유대인은 하얼빈 정부 내 파시스트 정당을 세웠고 1931년 옛 유대교 회당을 불태웠다. 그 해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부유한 유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유대인 경영주와 가족을 갈취, 재산 몰수, 납치, 살해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군은 1932년 2월 4일부터 하얼빈에 진주하였지만, 패전 후인 1945년 8월 20일에는 소련군이 하얼빈을 점령했다. 1945년 하얼빈을 점령한 소련은 하얼빈에 남아 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아 굴라크라는 소련 정치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냈으며 일본군은 만주의 아이라얼구에서 퇴각하며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의 목을 베었다.
하얼빈은 중국인민해방군에게 1946년 4월에 통치권이 넘어갔다. 1949년 중국 모택동주의자들이 하얼빈을 지배하면서 여전히 도시에 남아 있던 100여 명이 넘는 유대인들의 사업과 생계를 강탈하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하얼빈 유대인들을 비밀리에 이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대체로 갈취에 복종하게 되었다. 중국은 그들의 개인 자금이 모두 소진된 뒤에야 이주 허가를 내주었고 1962년 마지막 유대인 가족이 하얼빈을 떠났다.
비로비잔
비로비잔이라 불리는 도시가 있다. 러시아의 극동 연방 관구에 속하는 자치주. 공식 명칭은 유대인 자치주이며 그 주도가 비로비잔(이디시어: ביראָבידזשאַן )이다. 동쪽의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인 하바롭스크와 마주하고 있다.
19세기까지 청나라의 영토였다가 1858년 아이훈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 제국령 아무르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 소련 시절 제정 러시아 때 탄압받았던 유대인이 러시아 10월 혁명을 지지한 대가와 시오니즘 정착민 운동을 보고 자극받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유대인 무산계급의 터전을 만들자며 유대인들을 여기로 이주시키고 1934년에 유대인 자치주를 설립하였다.
유대인 자치 구역 계획 자체는 1920년대 초반부터 구상되었다. 1928년에 첫 유대인 이주자가 도착했다. 주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쪽 유대인들이 왔으며 소련 밖에서도 이곳에 정착하는 유대인이 생겼다. 그러나 유대인 자치주는 도시 인프라가 뒤떨어졌고,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었던 탓에 인구가 많이 증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타 지역에서는 불법이었던 토지의 개인소유가 유대인 자치주에서 허용되었다.
독소전쟁 때는 전장이 된 소련 서부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서러시아 일대의 유대인들이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다가 죽어 나간 것과는 다르게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은 안전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1948년 유대인 인구는 절정에 달해 자치주 전체인구의 1/3인 5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도시 인프라가 열악해서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오지 않았고 스탈린도 막상 유대인 자치주가 설립된 이후로는 유대인 자치주 개발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스탈린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등지로 떠나기 시작해 1959년엔 이미 절반으로 줄었고, 2010년 유대인 인구는 1,628명으로 0.9% 선까지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의 땅이 따로 없었으니 이주해 볼 만했지만,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는 굳이 여기로 올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흐루시죠프 때에는 유대인 인구의 감소를 막고 우즈벡과 카자흐 일대에 살던 유대인들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 이주시켜서 유대인 자치주를 발전시킨다는 계획도 있지만, 강제 이주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인구의 감소는 지속되었고, 소련 붕괴 직전에는 8,000명 정도의 유대인이 주거했는데 이마저도 소련 해체 이후로는 대다수는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현재 남은 유대인은 2천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유대인 문화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예를 들면 비로비잔역 간판은 러시아어와 이디시어로 적혀 있고, 역 앞에는 메노라가 있다. 그리고 작은 시나고그도 2곳 있다. 그래서 유대인 자치주 측에서 지역개발을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을 떠나 평화로운 여기로 이주하라는 말도 한다. 2016년 알렉산드르 레빈탈 유대인 자치주 지사는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는 유럽 유대인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비슷한 발언을 했지만, 실제 이 프로젝트에 따라 유대인 자치주에 이주한 유대인은 단 1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천여 년의 디아스포라 후 현재 이스라엘을 건국하기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볼 수 있고 그곳의 건립부터 추방까지 눈물겨운 많은 역사의 기록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 가까이에도 존재했음과 지금껏 알지 못했음에 경이로움 또한 금할 수 없다.
과거 하얼빈의 상당한 지역은 본래 부여에 속하였으며 말갈족이 살던 땅이었고, 이를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받았다. 발해는 이 지역에 막힐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비로비잔 있는 지역은 한국 고대사와도 관련 있는 읍루와 말갈 지역이다. 읍루는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말갈로 계승되었고, 그들의 일부는 함경도 일대의 여진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 지역에는 고구려 계통의 불상과 발해 계통의 성터와 유물도 발견된 적이 있다.
이스라엘 건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중 우연히 마주치는 두 곳의 땅에서 잊혀져가는, 어쩌면 다시는 되찾지 못할 우리의 고대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냥 우연이라 하기보단 어떤 인연을 찾고 싶은 건 개인의 바램인지….
그래도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 가곡 속의 나옴 직한 그 땅에서 유대인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음에 마음이 설렘을 멈출 수 없다.
<월간샤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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