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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혼의 새벽을 향하여(태을금화종지) 2/4
어느 무더운 오후 올빼미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는데 고니 한 마리가 날아와 곁에 앉으면서 말했다. "어휴, 정말 푹푹 찌는군, 여보게 올빼미. 저놈의 해 때문에 온통 땀에 젖었지 뭔가."
그러자 올빼미가 말했다. "뭐라구?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해라니? 그리고 푹푹 찌다니? 어둠이 몰려들면 뜨거워지는 법이 아닌가? 자네가 말하는 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쳤나? 아니면 어떻게 됐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겐가? 해 같은 건 없다네. 여태껏 없었어. 뜨거워지는 빛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결코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네 어둠이 몰려들면 뜨거워지는 법이 아닌가. 자네는 지금 나를 놀리는 거지? 그러나 나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니야. 모든 경전들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고니는 이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고니는 어떻게 하면 이 늙은 장님 올빼미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보게, 친구. 나는 내 눈으로 볼 수가 있다네. 한낮이 되면 태양이 아주 밝게 빛나면서 뜨거워진다네. 자네는 그것을 어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네. 어떻게 하면 자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 근심이군."
올빼미가 대답했다. "그러면 함께 가보세. 저기에 가면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많은 올빼미와 위대한 학자들도 있다네. 그들에게 물어볼 수 있을 걸세. 그들은 경전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몇몇은 아주 학식이 풍부하다네. 자 어서 가세." 그들이 날아간 곳에는 많은 장님 올빼미들이 앉아 있었다.
그 올빼미는 이야기했다. "이 고니가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한낮이 되면 태양이 내리쬐면서 빛이 사방에 퍼져 뜨거워진다고 말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의 부모와 그 선조와 그 선조의 선조와, 사실은 우리 올빼미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느 누구도 태양같은 것은 본 적이 없어. 그러므로 태양 따위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겠어? 너는 단지 속고 있을 뿐이야. 그에게 귀기울이지 마라. 그는 미쳤거나 아니면 사기를 치고 있는 거야. 그는 우리의 종교를 부패시키려 하고 있어. 우리는 항상 어둠 속에 살아왔고 어둠을 숭배해 왔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기반이야. 그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파괴하고 말거야. 그는 바로 그런 종류의 녀석이야. 만약 원한다면 우리는 다수결로 투표를 해 줄 수도 있어."
한 올빼미가 일어나 외쳤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존재하는 건 어둠입니까? 빛입니까?"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어둠,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
"그러면 뜨거운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너무 어두워서 그렇다. 어둠의 작용으로 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외쳤다.
"그를 여기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는 우리의 종교와 전통과 소중한 우리의 과거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그를 즉각 내쫓아라. 그는 완전히 눈이 멀었거나 아니면 180도 돌아버렸을 것이다."
이 조그만 우화는 진리의 일면에 대하여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진리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전달해 줄 방도가 없다. 나의 진리는 나의 것일 뿐이다. 그것에 대하여 그대에게 말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말해 주는 것이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니다. 듣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눈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스승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설법이 아니라 그대가 눈을 뜰 수 있도록, 그대가 영혼의 창을 열고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 눈이 그대를 대신해서 보아 줄 수는 없으며 내 발이 그대를 대신해서 걸어 줄 수도 없고, 내 날개로 그대를 대신해서 날아 줄 수도 없다. 그대는 그대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다 그대의 죽음을 맞아야 한다.
이것이 기억해두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일들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참 지식이 아닌 위조에 불과한 빌어온 지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식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대는 속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빌어온 지식으로 저주 아래 떨어져 살아간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마치 앵무새처럼 성경이나 코란이나 기타(Gita)를 암송해 댄다.
그것은 장님 올빼미들이 코란이나 기타나 성경 따위를 암송해 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경험이 아니다. 그들의 경험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들의 경험은 오히려 기타나 성경이나 베다나 법구경(Dhammapada)이 말하는 진리를 부정하고 있다. 그들의 경험으로 보면 붓다는 미친놈이요 예수는 사기꾼이며, 소크라테스는 영리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그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들기 때문에 귀 기울일 놈은 못된다.
인간은 눈이 멀어서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종교를 말이다. 눈이 먼 자들은 하나를 볼 수 없고 다수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종교, 이 조그만 지구상에 무려 300개가 넘는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이야기한다. 우리의 진리만이 참 진리이며, 우리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요 그외는 다 가짜이며, 다른 진리들은 조작에 불과하고 다른 모든 길들은 황무지에서 끝나지만, 우리의 길만은 낙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이다.
이 300개가 넘는 종교들은 계속해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보지 못하며, 아무도 실제와 얼굴을 마주 대하지 못한다. 그들은 믿어왔다. 이것들은 종교가 아니라 전통들이다. 그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들으면서 믿어왔다. 믿는 것은 편하지만 발견을 위하여 모험을 감행하자면 목숨이 달려있게 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탐험은 위험하지만 믿는 일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간편하다.
그대는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비참하다. 직접적인 하나님만이 하나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진정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경험도 진정한 삶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붓다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도가 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확실히 아니었다.
예수도 보고 만나 깨달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기독교도가 되는 것은 정말 바보 멍청이 짓이다. 그대가 그리스도(구세주)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참 종교인은 전통에서 벗어나며,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간접적인 신이나 믿음들을 여의고, 진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젖히고 수용적이 된다. 그는 확실히 실행하는 자이며 실제로 해 본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몸소 해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믿는 자들은 해 볼 필요가 없다. 진리를 묻고 찾고 캐내려는 자들은 몸소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거기에 제거되어야 할 많은 일들과, 떨어버려야 할 많은 불순한 것과, 극복되어져야 할 많은 장애와 방해들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눈은 뜨여져야 하고 귀는 마개가 뽑혀져야 하며 가슴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존재와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완전히 존재 속에 어우러질 때 그대의 눈은 열리고 그때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변형이며, 그대를 송두리채 바꿔놓는 것이다.
보는 것, 그것은 새로운 안목이요, 새로운 삶이며 새로운 모습이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육체나 마음, 기타 어떤 것에도 구속당하지 않게 된다. 그대는 한정됨이 없이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대 속에 흐르고 있는 영원에 대한 자각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끝없는 과거와 끝없는 미래로 펼쳐지는 이 무한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 있는 신성神性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간접적이 될 수 없다.
홀로 탐구해야 하며 찾는 것은 진정 개인적이어야 한다. 진리는 다수결 투표로 결정될 수 없다. 진리는 완전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대들은 나의 몸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객관적인 현상이다. 이 몸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판가름이 난다. 그러나 내가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가 없다. 하물며 다수결 투표 따위로 결정될 수 있겠는가?
붓다가 붓다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다수결로 결정을 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순수한 선언에 의해서이다. 자신 외에 증인이라곤 없다. 그것은 완전히 사적인 일이며 어느 누구도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진리란 다수결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그래서 종교들은 신도들을 모으는데 그토록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신도수가 많아지면 진리가 더 불어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들의 많은 신도수로 해서 자이나교보다 더 많은 진리를 지껄여댈 수 있다. 만약 투표라도 있게 되면 기독교는 승리하고 자이나교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투표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천 마리나 되는 올빼미들이 어둠만이 있을 뿐 태양은 없고 빛은 존재해 본 적도 없었노라고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거짓으로 남는다. 환한 낮이란 걸 선언하는데는 고니 한 마리면 족한 것이다.
진리는 민주적인.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카톨릭에서는 산아제한에 반대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어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란 것은 산아제한이 허용되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것 때문이다. 인구야말로 그들의 유일한 힘이다. 그들은 인구를 계속 증가시켜 어느 날에 가서는 세상에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보라, 우리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쪽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나는 그대들에게 조오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유명한 말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가 누군가와 다투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믿고 있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틀릴 수 있단 말이요?"
버나드 쇼는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소. 내 이야기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옳을 수 있냐는 거요."
핵심을 잡아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옳을 수 있겠는가? 군중들은 장님이며 깨닫지도 못했다. 진리는 항상 소수와 함께 하여 왔다. 붓다가 출현했을 때도 그는 혼자였으며, 예수가 예루살렘을 거닐 때도 그는 혼자였다. 소크라테스 또한 그랬다. 물론 몇몇 찾는 이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학파가 형성되긴 했지만 그 학파 역시 소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배짱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누구를 위로해주려고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의 모든 위안들을 걷어내 버리고는 그대의 모든 환상들을 산산조각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대가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강제로라도 그대의 눈을 열게 할 것이다. 그대가 잠자도록 자장가 같은 것은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붕 꼭대기에서 "이놈 ! 어서 깨어나라."하고 외칠 것이다. 그대에게 충격을 주면서 두들겨 패기까지 할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프라데빠(Pradeepa)가 나를 보러 왔다. 물론 질질 짜면서. 그런 그녀를 나는 무지막지하게 나무래주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머리를 그렇게 망치로 두들겨 패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나를 의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해서 나에게 성가시게 굴어왔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착잡해져 있었다. 그래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 특히 그녀에게 말해야겠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심하게 꾸짖기 때문에, 내가 그대들을 거칠게 대할 때마다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말로 성장하려고 할 때, 그때만 채찍을 드는 것이다. 그대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런 일은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채소가 아닌 음식은 먹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라데빠에겐 그걸 먹지 말라고 아주 심하게 말했다. 그녀의 의식은 성장하고 있다. 이제 채소가 아닌 음식은 방해가 되기에 이르렀다. 높이 날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짐을 져도 된다. 그러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한 사람들은 모든 불필요한 짐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대의 에너지가 순화되면 순화될수록 그대는 거기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귀중한 에너지는 잃기는 쉽지만 얻기는 매우 어렵다. 잃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온갖 바보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상관이 없다. 그들의 전존재가 바보짓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모두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대들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들을 내가 요구하게 되리라는 것.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인도에는 가장 뛰어난 천재적인 위대한 화가 한 사람이 있었다. 난 다랄 보제(Nandalal Bose), 그는 또 다른 천재적인 스승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Avanindranath Tagore)의 제자로 있었다.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라빈드라나쓰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삼촌이었다.
어느 이른 아침,아바닌드라나쓰와 라빈드라나쓰는 함께 차를 들면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잇었다. 그때 난다랄이 크리슈나의 그림을 한 장 그려 가지고 들어왔다. 라빈드라나쓰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여태껏 그렇게 아름다운 크리슈나의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크리슈나의 상은 언제라도 그림에서 뛰쳐나을 것만 같았다. 그의 피리에서는 언제라도 아름다운 가락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멋진 그림이었다."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그 그림을 지켜보더니 그것을 집 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고는 난다랄에게 말했다. "크리슈나의 그림을 그렸다는 게 겨우 이 따위냐? 벵갈에 있는 삼류 화가라도 이 보다는 잘 그릴 것이야."
라빈드라나쓰는 어리둥절해졌다. 라빈드라나쓰는 삼촌의 그림솜씨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삼촌도 평생 동안 크리슈나의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촌이 그린 어떤 그림도 난다랄의 그림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난다랄의 그림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난다랄은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의 발을 만져 예를 취하고는 그 후로 삼 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라빈드라나쓰는 삼촌에게 물었다. "그 불쌍한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셨읍니까? 그의 그림은 최고였는데요."
그러면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맞다. 그의 그림은 최고다. 나라도 결코 그렇게까지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다랄이 떠난 후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그의 그림을 항상 그의 방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라빈드라나쓰는 물었다. "그러면 왜 그에게 심하게 하셨나요?"
아바닌드라나쓰는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 이상의 기대를 걸고 있다. 이것은 그가 훌륭한 그림을 그렸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그는 그 이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 년 동안을 난다랄은 벵갈의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 다녔다. 그의 스승이 벵갈에 있는 삼류 화가라도 그 보다는 잘 그릴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삼 년 동안 벵갈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삼류화가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다시 스승 앞에 나타나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스승님이 옳았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그림을 던져버리기를 잘 하셨습니다."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그런 그를 껴안고 말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늙었고 네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가슴을 조여야 했었다. 돌아와 주어 다행이다. 너의 그림은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았던 게야."
그대들 속에 있는 보다 큰 가능성을 볼 적마다 나는 그대들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대들과 내가 여기에 함께 머물고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모든 것들이 드러나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나는 그대들의 심연까지 일깨워야 한다. 아직 그대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모른다. 나는 알고 있지만... 그러므로 내가 어떤 요구를 할 때마다 고맙게 여겨라.
그대는 선(Zen)수도원에서 스승이 그의 지팡이로 제자를 때릴 때마다 맞은 제자는 일곱 번이나 절한 후 스승 앞에 엎드려 감사한다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언제 맞게 될까, 스승이 역정을 내며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는 그 축복의 순간이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린다. 그들은 꿈꾸고 기도하면서 그 축복의 순간이 올 날을 희망하는 것이다.
명심하라. 이곳은 하나의 연금술 학원이다. 그대들은 여기에 들어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 위해서 있다. 그리고 변화에는 고통이 따른다. 왜냐하면 많은 옛것들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옛 잡것들은 그대가 쉽게 벗어 버릴 수 있는 옷과는 다르다. 그것은 피부나 마찬가지다. 피부가 벗겨지면 상처가 난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대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길이요, 충격을 회피하는 마음을 부숴버리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대를 부자유하게 하고 있는 기운을 깨뜨려 버리는 유일한 수단이다.
서서히 그대 자신의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면 그대의 눈은 열리고 귀는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직접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어라.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만이 진리라는 것, 그것은 다수에 위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전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의해서만 결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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