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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교회에 쏟은 정열
천리길 머나먼 묵호 땅에 이틀 만에 도착하였다. 사경을 헤메던 아이들도 주의 은혜로 씻은 듯 나았고, 묵호교회에서는 무슨 귀빈이라도 맞이하듯 백여 명이 나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나와 있었다.
1946년 4월 23일, 이 날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전도사로서 목회를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내 이삿짐을 운반하기 위하여 나왔던 신자들은, 이삿짐 트럭을 보낸 후에도 여전히 내가 빈 몸으로 서 있는 것이 궁금했던지 “반 선생님, 이삿짐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내가 웃으면서 베개만한 괴나리봇짐 몇 개를 들어 올리며 이것이 전부라고 하니 모두 망연 실색하는 표정들이다.
좀 있던 재산은 지난 5년간 돌아다니며 전도하느라고 다 쓰고 이 봇짐이 내 재산 전부라는 얘기에 모두 유구 무언이었다. 사실 연합회가 이사비로 준 120원도 묵호 도착할 때에는 한푼 없이 바닥이 나 있었다. 이 당시 월급이래야 겨우 500원인데, 그것도 한 달 일한 후에 보내 주기 때문에 앞으로 한 달 살아나갈 일이 문제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의 길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 그 당시 묵호교회의 중견 지도자였던 허석 씨와 그의 부인 심정숙 씨가 식료품을 준비하였는데, 부엌에 가 보니 쌀, 좁쌀, 각종 반찬 거리와 장작이 쌓여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매일 아침과 저녁은 교우들이 식사 초청을 해주어서, 사다 놓은 식료품을 소비할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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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를 아시고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여 주셨다. 지난 5년간 굶다시피 살아온 배고픔의 세월들을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풍성한 식탁으로 갚아주심으로, 지칠대로 지친 나와 아내의 육신과 허약한 아이들의 힘을 돋구어 주셨다.
비록 학문적으로 갖추지는 못했을지라도 나는 아래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늘 목회 사업에 임하였다.
1. 일단 하나님과 약속한 일을 돌이키는 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요, 한번 주님께 드리고자 결심한 몸을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다.
2. 주께서 나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은 당신의 사업을 위탁하고자 하신 것이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명령은 내게 대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일 뿐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곧 화가 내게 미친다.
3. 내가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았으나 주님께서 기이한 방법으로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항상 함께 하신 까닭이다.
4. 어려운 중에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씀을 그
때그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사랑하시어 나의 하는 일을 기쁘게 보신 까닭이다.
5. 주께서 나의 헐벗고 굶주림을 그대로 버려 두시는 것은, 시험하고 연단하신 후에 정금같이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 때문이다.
6. 내가 10년 동안 낙심하지 않은 것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상한 자를 싸매시는 우리 주님께서 택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7. 내 몸을 반석 되시는 예수님께 던져서 산산조각나도록 하지 않으면 그 반석이 내 위에 떨어져 나를 부수리라.
8. 내가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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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재림하시리라는 긴박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9.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하기에 항상 힘쓴 것은, 택하신 종으로서 부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 나는 나의 몸을 주님께 바쳐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주님에게서 상 받는 일이요, 설령 이 땅에서 보상이 없더라도 주님 오실 때에 그분께서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부임하자 나는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개종한 새 신자들이 열성을 가지고 협력하여, 그 때까지 개종하지 않았던 개신교인들이 본교회로 넘어 옴에 따라서 그 곳에 있던 감리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장로교는 묵호에서 외지다고 하는 “개구석”이란 곳으로 이사 가고 말았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자들의 협력으로 교회가 나날이 든든히 서 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교회의 순탄한 발전을 마귀가 시샘하였다. 그것은 묵호 예배당 건물 때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 묵호 예배당 건물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건물이었다. 교회 정면에는 종각이 높이 서 있어서 화요일, 금요일 및 안식일이면 은은한 종 소리가 온 묵호 읍민들의 심금을 두드렸다. 종각의 나무는 한기종 씨가 자기 집 뒷뜰에 자란 수백 년 묵은 약 50척 높이의 나무를 네 그루나 벌목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 네 그루의 나무는 당시 돈으로 계산해도 몇십만 원에 상당하는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세력있게 나아가니 묵호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호 사는 사람으로 우리 교회에 한 번 나와 보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결혼 주례도 으레 안식일교회 전도사에게 부탁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할 정도였다. 이쯤 되니 사단이 방해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묵호에는 이때 “먹통”이라는 악명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군정청을 드나들며 활동을 하더니 묵호 지서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나왔다. 이 심술이 삐뚤어진 사람이 사법권을 잡았으니 세력이 당당한 안식일교회를 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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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 지서 건물은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으나 건물이 고옥(古屋)이었고, 우리 교회는 길가에 우뚝 솟은 좋은 집이니, 이 사람이 우리 예배당을 빼앗을 악심을 품고 군정청에다 신청을 냈던 모양이다.
하루는 미국 장교가 와서 나를 찾기에 나가 보니, 군정청에서 왔다는 것이다. 통역의 말을 들으니 현재의 지서 건물과 안식일교 예배당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히 대답하였다.
“그리 못하겠습니다.”
“내가 필요해서 쓰려고 내 집을 달라는데 왜 못 준다고 합니까?”
“아무리 군정청 집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허락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상 줄 수 없습니다.”
내 태도가 너무 강경해서 도무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던지 이 “먹통”지서장은 나를 붙들어서 유치장에 집어 넣었다. 경찰이면 다들 벌벌 떨던 무법 천지 시대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2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게 되었고, 이 동안에 결국 우리는 그 좋은 예배당을 지서에 빼앗기고 말았다. 연합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허사였고, 춘천 군정청에도 사정하였으나 그들의 태도는 강경하였다. 할 수 없이 지서와 건물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교회가 큰 손해를 당하는 듯했으나 하나님께는 또 다른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지서 건물로 옮긴 후에 국민학교 사업에 내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에서 그렇게 교회가 쉽게 재난 앞에 거꾸러지고 타락하는 것은 그 기초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바로 국민학교 사업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국민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일본 정신을 넣어 주어 정신적으로 이들을 일본인화한 것이었다. 나도 기회가 오면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를 위한 정병이 되도록 국민학교를 시작해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런 내 소신을 나는 묵호에서 실천에 옮겼다.
해방 후 한국에 국민학교를 세운 곳으로 묵호보다 앞선 데가 없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인 교육 실천이 내 목적대로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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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부터가 그런 그리스도인 교사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지 아니하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사가 미흡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주재한 곳은 묵호였으나 강릉과 삼척까지도 돌보도록 책임이 주어졌다. 삼척은 김관호 씨의 활동으로 적산 불교당을 얻어 상당 수의 사람이 모이고 많은 발전을 보았다.
간혹 강릉에 출장을 가면 5, 6명밖에 모이지 않아 나 역시 거기만 갔다오면 용기가 떨어지곤 하여, 아무래도 강릉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하고, 강릉에서 전도회를 열되 묵호 신자들이 가서 경영할 것을 강조하고 전도대를 조직하였다. 나는 남녀 10여 명을 인솔하고 강릉으로 향하였다. 한기종 씨가 이 전도대의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한기종 씨는 강릉에서 학교를 다녔으므로 친구와 동창생이 많았다.
먹을 양식과 침구를 가지고 강릉에 도착하였는데 전도회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몇 사람에게 부탁하여 강릉 시내 길 안내를 해 달라고 불렀더니, 나갈 때는 묵호 전도대원들과 같이 나가고는 중간에 흐지부지 뒤로 새어 묵호 신자들만 전도지를 뿌리거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 예사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도회를 개최하니, 황무했던 강릉에도 주께서 부르시는 영혼들이 많은지라 많은 사람이 나와 기별을 받아 교회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전도사를 보내야 할 만큼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
이 전도회 기간에 이수정 씨가 강릉에 들렀었는데, 강릉에는 그의 사위되는 정동혁 씨가 살고 있었다. 정동혁 씨가 바깥일을 보고서 오는 길에 전도회 벽보를 보고 돌아와 보니 묵호의 장인이 집에 와 있었다. 장인에게 말하기를 “안식일교회에서 전도회를 하네요.” 하니 이수정 씨 대답이 “맞다. 전도회를 하느니라.”
“저 그 전도회에 나가 볼까요?”
“자네 가지 말게. 자네 가면 안식일교회로 넘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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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버님도! 안식일교회 한 번 간다고 거기 넘어갑니까?”
“가지 말라면 가지 말게. 자네는 줏대가 없어서 넘어간다. 나도 넘어갈 뻔했으니까, 반 선생의 설교만 들으면 자네는 틀림없이 넘어간다.”
“나는 안 넘어갑니다. 오늘 밤에 가 보렵니다.”
할 수 없이 이수정 씨도 사위가 참석하는 전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위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데 내가 설교를 마치고 예수 믿을 사람 손을 들라고 하니 정동혁 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곁에 앉았던 장인 이수정 씨가 그것보란 듯이 눈을 흘겼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집에 돌아와서 사위에게 “봐라. 내가 자네 넘어간다 하지 않았던가. 의지가 강한 나도 손을 들려다가 말았는데 자네같이 의지가 약한 사람은 잘못하면 안식일교 유혹에 빠진다”라고 경고하였으나 정동혁 씨는 그후 우리 교회에 꾸준히 나와 신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강릉교회에서 오랫동안 장로로 시무하였다.
1947년 10월, 북평(北坪)을 개척하기 위하여 북평읍 김진만 씨 사무실 2층을 빌려서 한 주일 동안 전도회를 개최했다. 저녁마다 묵호에서 북평 용정까지 나가서 집회를 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영혼의 수확을 주셨다. 김남수, 장순담, 김진석, 이보덕, 최용업 씨 등과 그 외에도 내가 다 기억 못할 많은 영혼들을 주셨다.
전도회가 끝난 후 회심한 사람들이 거리가 먼 묵호까지 나오게 되니 아무래도 북평 시내에 교회가 필요하였다. 대부분의 회심자들이 북삼화학회사(北三化學會社)원들이었기 때문에 회사와 사택이 가까운 용정(龍井)에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북삼화학회사에서도 우리 교회에 호감을 보여, 교회 소풍 시에는 쇠고기 국까지 끓여 우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가 제일 전도하기 좋았던 때는 해방 직후였다. 이 때에 안식일교회가 졸지 않고 깨어 활동했으면 한국 내의 안식일교회 기반이 완전히 잡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뒤늦게 남들이 다 일한 후 이삭을 줏으려니 알찬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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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그저 한두 군데에서 사경회 형식으로 집회가 있었던 것 같으나, 거리에 광고를 붙이고 전도회를 한 곳은 내가 알기에는 동해안 외에는 한 곳도 없는 줄로 알고 있다. 지금은 전도회를 열면 몇백만 원의 예산이 따르고 찬양대가 동원되고 사역자들이 집합하고 온 교회가 동원되어도 신자 몇 명 얻을지 말지인데, 해방 직후에는 심지어 사회할 사람도 없이, 찬미 한 곡 인도해 줄 사람 없이 전도회를 혼자 해도 한 주일이 끝나면 교회가 하나씩 일어섰던 것이다.
1947년 여름, 어느 안식일을 삼척교회에 가서 지내고 일요일에 집에 오니 옆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내게, 저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아느냐고 물었다. “글쎄,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 같소마는…” 하고 대답하니까,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은 이웃집 아들이 정신이상이 되어 외치는 소리라고 말하였다.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들어 보니 과연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닌 악귀의 울부짖는 소리였다. 쉬지 않고 외치는 말 중에는 “가랑이를 찢어 죽인다”는 말이 반복되었다.
이웃집은 묵호에서 굴지의 부잣집으로, 이 지방에서 명망 있고 이름난 집안이었다. 이튿날 그 젊은이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김구 주석 만세”, “이승만 박사 만세” 등의 글귀를 적고 시가지를 행보했다. 그 후 이웃집에서는 약 보름 동안 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병을 고치기 위해 무당의 푸닥거리가 계속되었다.
하루 저녁에는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부엌쪽 문이 가만히 열리더니 한 젊은 여자가 들아와 사쁜히 앉았다. “참 이상도 하다. 웬 여자가 이 밤에 남의 집에 말도 없이 들어오는가?” 너무 이상해서 안식일학교 교과 공부를 하다 말고 기도를 드린 다음 아내에게 물어 보았다. “이제 들어온 이분을 당신 압니까?”라고 물으니 “옆집 앓고 있는 분의 부인”이라고 말했다.
피차 인사를 한 후에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염려되시겠습니다”는 위로의 말을 하자 그 부인은 갑자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생각이 되어 자세히 물으니 대강 이런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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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보름 동안 굿을 했는데 자기 남편이 낫기는커녕 점점 더하게 되니, 무당이 온 가족을 모아 놓고 하는 말이, 이 집에 무슨 신을 섬기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길래 우리 집에서는 아무 신도 섬기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무당이 다시,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들 우리 집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는데, 어떤 식구가 내게 혹 예수를 믿느냐고 묻기에,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처녀 시절 19세까지 예수를 믿었노라 대답하니, 이 무당이 듣고, 이 집은 예수를 믿어야 될 집이라고 하면서 책임을 예수님께 돌리고 가 버렸다고 한다. 온 집안이 며느리 잘못 얻어 집안 망한다고 야단하니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답답해서 덮어놓고 들어왔다는 사연이었다.
자초 지종을 듣고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면 아무 염려 없이 예수를 믿읍시다.”
“그렇지만 우리 집 식구 중 아무도 믿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부인께서 집에 가셔서 나를 청하도록 해보십시오. 내일 내가 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튿날 하루 종일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날 밤이 화요일 밤이라 기도 집회를 마치고, 몇 사람에게 내일 아침에 방문할 곳이 있으니 좀 와 달라고 했더니, 그 다음날 수요일 아침에 조반을 끝내고 모두들 왔다.
“오늘 옆집 안씨 집의 환자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그 집에서 오랍디까?” 하고 허석 씨가 질문하였다.
“아니오. 오라고는 안 했습니다.”
“오라고도 아니하는 집에 어떻게 갑니까?”
“오라고 하지는 않았어도 이웃집 환자 방문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습니까? 다들 어렵게 생각되시면 내가 먼저 가 본 후에 내가 오라면 다들 오십시오.”
넘어지면 코 닿을 이웃집엘 들어서니 그 집안 분위기가 초상집이었다. 식구들이 마루에 걸터앉아 턱을 받혀든 채 망연히들 있는데, 내가 들어가도 그냥 그 모양대로 정신 나간 것처럼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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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가면서 머리를 숙이고 “우환이 있는 것 같아 이웃에서 문병왔습니다” 하니 그 집의 맏형님 되는 분이 일어나 나를 맞았다. 내가 들어가면서 “환자를 좀 만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의 형님이 말하기를 “못 봅니다. 환자가 지금 악이 바싹 나서 사람을 보면 잡아먹으려 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때 마루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 그 양반이 들어가면 괜찮을지 모르니 만나게 하셔요.” 이 말을 듣고 맏형님이 “저 방에 있으니 들어가 보시려면 보시지요” 하고 허락했다.
내가 환자가 갇혀 있는 방에 가까이 가자 벌써 문 사이로 고약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문을 여니 이것은 참으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형상이었다. 환자를 보니, 방 네 귀에다 대못을 박고 튼튼한 끈으로 사지를 꼭 메어 놓았다. 온 방바닥에는 가래침이 함부로 여기저기 뱉어져 있었다. 환자의 얼굴을 보니 이는 사람이 아니라 유령과 같았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환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붓는 대신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가슴속 맺힌 한으로부터 솟구치는 눈물처럼 너무도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한참 울더니 이윽고 울음을 그치면서 입을 열었다.
“아, 선생님! 왜 이제 오십니까? 선생님이 전에 내게 오셔서 전도지를 주시며 예수를 믿으라고 할 때 그때 내가 예수를 믿었으면 내 신세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저는 이제 신세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또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회한의 눈물이요 탄식의 울음이었다.
이적! 그것은 이적이었다. 그렇게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젊은이가 나를 보자 하염없이 눈물과 탄식의 말로 자신을 되찾은 뒤 통한의 울음으로 반응하는 이 변화는 분명한 이적이었다. 흐느끼며 우는 그 젊은이 앞으로 다가서면서 나는 큰 소리로 “왜 사람을 이렇게 결박해 놓았나? 마귀는 그대를 결박했지만 하나님의 종은 이제 그대를 풀어 놓는다”라고 외치면서 그를 묶어 놓은 줄을 한 가닥씩 풀어서 자유케 하였다.
두 달 이상을 별로 먹지도 못해서 사람이 뼈만 남고, 수염은 깎지를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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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 무슨 악귀와 같았다. 줄을 풀어 주니 환자가 일어나 앉더니 다시 울면서 “어머니” 하고 불렀다. 이 “어머니” 소리가 환자의 입에서 나오자, 지켜보고 있던 온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이 소리를 들은 그의 어머니가 문앞으로 다가서며 울면서 말하기를 “며칠만이냐? 75일 만에 네가 처음으로 어미를 불렀구나! 무슨 정신이 들어 어미라고 부르느냐, 이 자식아!” 하고 흐느꼈다.
나는 간단히 기도를 올렸다. 이 때 환자는 갑자기 드러누우며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병든 지가 꼭 75일인데 75일 만에 처음 자는 것이라고 가족들이 속삭였다. 나는 그 집 뒷창을 열고, 아직도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자들에게 손짓하니 모두 몰려와서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를 크게 부르고 기도를 했다. 환자는 이 예배 시간 동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초상 난 집처럼 어두움이 짙게 드리웠던 이 가정에 갑자기 생명의 봄이 찾아온 것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 온 가족은 감격과 기쁨에 넘쳐 얼싸 안고 춤이라도 출 듯이 좋아했다. 그러고는 모인 교우들과 가족들을 위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 성찬을 마련하여 점심을 들게 했다.
점심을 먹기 시작하는데 막내 아들이며 이 집의 주인인 안용준 씨가 들어왔다. 그의 맏형이 그를 붙들고 울면서 “용준아, 네 형의 병이 나았다. 정신이 돌아왔다!”라고 말하니 안용준 씨는 “형님 병이 낫다니요? 곧이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며 믿지 않는다.
“아니다. 용준이 네가 보지 못해 그렇다. 이 양반이 병을 낫게 했다.”
“그러면 우리 집에 꽃이 피게요?” 그는 이렇게 한숨 쉬듯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 환자는 안용준 씨의 중형인데, 해방 전에는 함경도 방면에 있다가 해방이 되니 자기 동생 집에 와 있으면서 동생의 일을 도와 주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런 병이 든 모양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형님의 모습을 보더니 “형님이 잘 때가 있습니까?” 하면서 바싹 가서 볼에다 얼굴을 대도 잠든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자정쯤 해서 이웃집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속히 와 달라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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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이었다. 급히 달려가 보니, 그 젊은이가 또 발작을 시작했다. 내가 그를 방으로 붙들어 들이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자 갑자기 “아악, 아악!”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흰 이를 드러내면서 무서운 몰골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자 그의 위세가 일순간에 꺾이고 또 죽은 듯이 누워서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젊은이의 마지막 발작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무서운 병에서 치유를 받게 되었다.
집안의 우환으로 웃음을 잃었던 안씨네 집에 다시 행복이 돌아왔다. 이 기쁨과 새로운 행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 안씨네 가정은 그 다음 안식일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묵호에서도 이름난 집안이고, 돈 있고 명망있는 가문이었으나 교회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살다가, 죽어가던 한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기울기 시작한 가정이 다시 안정을 찾자 그 고마움과 기쁨에 스스로 교회를 찾은 것이다. 12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한꺼번에 우리 교회에 나오자 교회는 더욱 흥왕하기 시작하였다.
예배당을 지서 자리로 옮기고 보니, 마루가 다 꺼지고 집이 낡아서 기분이 좋지 아니하였다. 아무래도 예배당을 건축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건축위원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나부터라도 건축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터라 좀 당황하였으나, 하면 된다는 결심 하나 가지고 신자들에게 예배당 건축에 대한 호소를 하니 다 합심이 되었다.
지난번 우리 교회에 입교한 안용준 씨가 52킬로그램 시멘트 750포대를 바쳤다. 이뿐 아니라, 이 가정에서 금비녀, 금가락지 등이 나왔다. 이 집에서 이같이 패물을 내놓으니 다른 신자들에게서도 금가락지, 금붙이 등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연합회를 찾아가 이런 사실들을 고하니, 온 연합회가 들썩들썩했다. 안식일교회 “김익두”가 나왔다고 야단이었다. 김익두란 그당시 장로교의 유명한 부흥 강사로서, 그가 가는 곳마다 신자들이 열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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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물들을 바친 데서 나온 말이었다.
연합회장을 만나 묵호교회 예배당 건축을 하겠다고 하니 연합회장의 안색이 달라지면서, “연합회는 예산이 없습니다”는 차가운 대답이었다. 아마 내가 예배당 건축을 위해 돈이라도 달라고 손을 내밀러 온 줄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연합회장님, 묵호 예배당을 짓지 말까요?” 하고 내가 질문하니 “아니, 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회에 예산이 없다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하므로 내가 다시 이렇게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연합회장님, 저는 돈 얻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예배당 짓는다는 보고하러 온 것뿐입니다.”
1948년 3월, 착공하면서 나는 교인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매 일요일에 전교인이 봉사합시다. 그 외의 날들에는 각기 시간 있는 대로 나와서 봉사하십시다.” 신자들은 내 요구 이상으로 더 많은 봉사를 드렸다. 일요일마다 신자 전원이 나와 모래를 운반하는데, 바다 모래 사장에서 예배당 건축장까지 줄을 잇는 장관을 이루었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져 날랐다. 진합 태산으로 금시 모래산을 이루었다.
이렇게 묵호 교회당은 신축되었다. 이것은 해방후 한국 교회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예배당 신축이었고, 또 연합회나 대회로부터 한푼의 보조 없이 순전히 교인 자신들의 노력과 힘으로 지은, 그 당시로는 상당히 크고 좋은 예배당이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21일 안식일, 연합회장의 집례로 헌당식을 거행하였고, 예배후 연합회장이 내게 와서 손을 잡으며 “이렇게 일을 하자면 많은 수고 했겠습니다.” 하면서 치하의 말을 하였다. 예배당 곁에는 미군정청 장교 사택이 있었는데, 연합회장이 거기 숙식하였다가 그들을 통해서, 묵호교회 신자들이 봉사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야기를 잘 들었다면서 신자들 앞에서 치사를 했다.
37세의 전도사로 새로 출발한 목회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나는 감사했다. 비록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모두 맡긴 자에게 주께서는 넘치는 영혼의 수확을 허락하심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기도한 나의 간구를 응답하시고, 또 첫발자국부터 은혜 주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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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를 실감하면서 나는 남은 생애를 한국 재림 농원에 전부 바쳐 죽는 날까지 활활 타는 구원의 횃불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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