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부활과 승천 후 그리스도교는 율법과 할례를 중요시하던 유다교의 틀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건 유다인이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전례에 다 같이 참여하고 있었고 그 문제들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 차 유다 항쟁의 결과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기반인 성전과 그곳의 전례가 사라지고, 율법과 할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특히 70 년 이후 정치, 종교적 제도에 집착했던 유다교의 다른 파당들 특히 사두가이파의 몰락한 뒤에도 살아남은 바리사이들의 갈등과 대립은 예수님 당시의 상황도 있었겠지만 복음서 저자들의 집필 시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바리사이들은 성경과 구전 율법에 정통한 스승 랍비들의 가르침에 철저히 의존하였다.
1 차 유다 항쟁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겠다. 로마의 행정관 또는 총독으로 번역되는 이들은 그들의 재임 중 식민지 주민들에게 되도록 많은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일과 반란을 막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식 삶의 양식과 기준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무리하게 적용하려고 했다.
로마에 대한 반감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금을 정확히 책정하려고 식민지 전체에 인구 조사가 내려졌을 때 더욱 높아졌다. 인구 조사에 대한 언급은 루카 복음 2,1-2 절에 나온다.
인구 조사는 유다인들에게 민감한 사항이었다. 그 이유는 하느님 백성의 수를 헤아리는 것은 그 백성의 주인이요 임금이신 하느님에게만 유보된 권한이었다. 사무엘 하권 24 장에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산 일이 있다. 사도행전 5,37 절을 보면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인구 조사는 유다인을 모으게 하고 그래서 독립을 위한 선동이나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행정관들의 부패와 불의가 도화선이 되었다. 가이사리아에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이방인들이 있었다. 유다인들의 회당이 있었는데 유다인들이 회당에 편하게 가기 위해서 그 구역을 매입하려고 하자 이방인들은 오히려 반유다 감정에 휩싸여 상점을 빼곡히 지어 유다인들이 다니는 회당 골목을 더 비좁게 만들었다. 유다 청년들이 계속 상점을 지으려는 이방인들을 제지하려다가 폭력 사태가 일어났고 유다교 지도자들이 당시 행정관이었던 플로루스에게 8 달란트(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48000 데나리온, 하루 품삯을 10만 원으로 보면 48억)의 뇌물을 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방인이 옹기그릇에 새를 담아 제사를 바치는 시늉을 하였다. 이 의식은 유다인들을 나병환자 취급한다는 뜻이다. 레위기 14,4-5 절 참조.
이에 격분한 유다인들과 이방인이 싸움이 일어나고 행정관 플로루스는 유다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보내게 된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이 행정관에 대해서 증오심이 들끓게 되었다. 또한 플로루스는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서 17 달란트를 갈취를 한다. 그는 이 돈으로 황제에게 내는 세금을 낼 심산이었다. 성전 금고가 탈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인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플로루스는 폭동자들을 잡아 처형을 하고,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도시의 상가 지역을 약탈하게 한다. 이때 많은 유다인들이 체포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에 유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안토니아 성채 등을 파괴한다. 이때 시리아에 있던 체스티우스 총독이 예루살렘에 와 사태를 파악하고 조치를 하겠다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자 유다인들은 네로 황제에게 직접 상소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유다인들이 파손한 성채 등을 재건하고 부과된 세금을 바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헤로데 왕가의 마지막 왕 아그리빠 2세가 충고하자 이를 받아들여 40 달란트를 거두어 세금을 바쳤다. 그러나 플로루스는 권좌에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다인들이 들고일어나게 된다.
열혈 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유다 반군은 유다 지방의 중요 성읍을 장악하면서 세력이 커졌다. 유다 반군이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헤로데가 세운 철옹성 마싸다이다. 지방에서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유혈 사태가 발생을 하자, 66 년 9 월 시리아 총독이 로마의 25 군단 중 4 개 군단을 데리고 내려오면서 유다인들이 점령했던 요빠, 가이사리아를 탈환하고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다. 70 년 성전 벽이 뚫리고 성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것이 1 차 유다 항쟁이다.
1차 유다 항쟁을 거치면서도 바리사이파와 랍비 유다이즘과 신생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조직을 갖추어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둘째, 로마인들이 파괴한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사두가이파처럼 성전 자체를 삶의 기반으로 삼지 않았다. 셋째, 그리스도교나 바리사이는 어떤 장소에 뿌리를 둔 체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었다. 넷째, 율법 또는 구약의 가르침을 세상의 변화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다섯째, 그리스도교나 바리사이는 다음 세상에 대한 사상과 영원한 구원, 그리고 자선과 애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들 때문에 랍비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체제에 도전하고 제국의 안보와 질서를 해치는 위험한 세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젤롯파의 줄기찬 반란과 항쟁에도 유다교 자체를 금지하거나 박해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한 분파로 여겨 유다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완전히 갈라져 나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합법적 종교인 유다교의 그늘에서 신앙을 안전하게 지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을 하게 된다. 게다가 네로 황제 때부터 로마인들은 제국에 닥친 불행의 탓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다.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아서 제국에 재난이 닥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써 신들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고 제국에 다시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황제 숭배 사상도 극에 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헐적 박해가 자주 그리고 더 넓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313 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고 로마는 교회의 박해자에서 선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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