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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어진. 영조 역시 편집증 환자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도세자(1735~1762)는 '정치적 희생양'인가?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도세자가 노론 세력의 음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런 인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남인, 소론, 소북 세력과 가까이 지내면서 집권 세력인 노론의 견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노론은 자신들을 멀리하는 세자에게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영조가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씨 등과 공모해 세자의 비행을 자주 왕에게 고해 바쳤다. 영조가 세자를 불러 심하게 꾸짖는 일이 잦아지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세자는 자신을 아끼던 정성왕후(영조비)와 인원왕후(숙종의 계비)가 잇달아 세상을 뜨고 조정에서 강경 노론이 득세하자 극심한 신경증과 우울증 등 정신병에 시달렸고 결국 영조는 그런 아들을 죽이는 결정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혜경궁은 그의 저서 '한중록'에서 "후인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데 누가 그 사건을 나만큼 잘 알까"라면서 "사도세자가 병환으로 천성을 잃어 스스로 하는 일을 몰랐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일에 어찌 터럭만 한 과실조차 있다 할 것인가"라고 밝힌다.
아들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견해 중 하나는 사도세자가 원래 병환이 없었는데도 영조가 헐뜯는 말을 믿고 과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그러나 이 사건이 초래된 본질적인 원인은 사도세자에게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중록'은 혜경궁이 61세부터 72세까지 쓴 '나의 일생' '내 남편 사도세자' '친청을 위한 변명' 등 세 차례에 걸친 회고가 합쳐진 책이다. 글은 친정 식구 또는 손자인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집필됐다. 책은 혜경궁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뒤돌아보고 비판하고 분석한다.
영조와 남편 사도세자 등 여러 인물들의 생각과 행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실록에서 언급되지 않는 사실도 다수 담고있어 가치가 높다.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1762년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사건)의 단초가 된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아들을 호학군주로 키우려던 영조의 과욕이 불러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혜경궁은 다른 요인도 제시한다. 세자는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유희를 더 즐기고 활쏘기, 칼 쓰기, 기예에 집중했다. 그림 그리기로 날을 보냈고 딱딱한 경전을 멀리하고 기도나 주문서, 잡서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궐내에 출입하는 점쟁이 김명기에게 명해 주문을 써오라고 하여 외우기를 반복했다. 혜경궁은 남편이 옥추경(玉樞經·도교경전의 하나로 귀신을 부리는 주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정신이상 증세가 생겼다고 전한다. 밤마다 옥추경을 읽으며 공부하던 세자는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천둥을 주관하는 옥추경의 주신)의 보인다. 무서워, 무서워"라면서 덜덜 떨었다.
세자는 그 뒤 천둥이 칠 때마다 귀를 막고 엎드려 두려워했다. 구급약인 옥추단(玉樞丹)도 옥추경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겁내서 받지 못할 정도였다. 혜경궁은 "1752년 겨울에 그 증상이 나셔서 1753년 놀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를 자주 보이셨다. 1754년 이후 점점 고질병이 되었으니 그저 옥추경이 원수"라고 안타까워했다.
세자의 병환은 종이에 물이 젖어 번져 나가듯 깊어져 갔다. 영조에게 문안 인사하는 것도 드물어지고 수업을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영조의 질책도 더 잦아지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두려움은 공포의 수준이 됐다. 영조도 편집증 환자였다. 사람을 한 번 미워하면 집요하게 싫어했다.
1755년 나주에서 소론 일파가 조정을 원망하는 흉서를 써 붙이자 영조가 친국한 후 일당을 처형했다. 처참한 친국장과 사형장에 매번 세자를 불러냈다. 혜경궁은 "길한 일에는 세자를 참여치 못하도록 하고 상서롭지 못한 일에만 자리하게 했다"고 했다. 백성들이 얼어죽거나 굶주려 죽거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있으면 세자가 부덕해서 그렇다고 질책했다.
세자는 의대증(衣帶症)이라는 희한한 병도 앓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옷 입기를 고통스러워하는 강박증이다. 혜경궁은 "옷을 한 번 입으려면 열 벌이나 20~30벌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며 "입지 못한 옷은 귀신을 위하여 불태우기도 했다"고 했다. 1759년과 1760년 사이에 군복을 지어 없앤 비단이 몇 상자인줄 모른다고 했다.
마음을 의지했던 정성왕후, 인원왕후가 같은 해 승하하자 세자의 증상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 해 6월 화증이 더하여 사람 죽이기를 시작했다. 내시 김한채를 죽여서 그 머리를 잘라 들고 다니면서 내인들에게 둘러보였다. 혜경궁은 "내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흉하고 놀랍기 이를 것이 있으리요"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세자는 사람을 죽이고야 마음을 조금 풀리는지 내인 여럿을 죽였다고 혜경궁은 말한다. 1760년 이후 내관, 내인 중에 다치고 죽은 것이 많으니 다 기억하지 못했다고 했다. 내수사 담당관 서경달은 내수사 물건을 늦게 가져온 일로 죽음을 당했고 점치는 맹인도 점을 치다가 말을 잘못하면 죽였으며, 의관이며 호위무관 등 대궐에서 하루에도 죽은 사람이 여럿일 때도 있었다고 혜경궁은 회고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할 때 짐승이라도 죽여야 화가 삭았다. 혜경궁은 "하루는 전하께서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세자를 직접 찾아 한 일을 바로 아뢰라고 다그쳤다"고 했다. 세자는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더이다"라며 "상감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라고 실토했다.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조선 후기의 문신 박하원이 임오화변을 기록한 '대천록(待闡錄)'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온다. 그 숫자는 놀랍게도 100명이 넘는다. 책에는 "영조가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100여 명에 이르며 (불로 달군 쇠로 지져 죽이는) 낙형이 참혹했다고 발표했다"고 쓰여 있다.
세자는 궁궐 내인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으면 무차별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혜경궁은 "내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른 다음에도 가까이 하시니 뉘 좋아하리오"라고 기술했다. 1757년 9월에는 인원왕후 침방 내인 빙애를 데려다가 방을 꾸며 살게 했다.
빙애는 은전군과 청근현주를 낳은 귀인 박씨다. 앞서 1752년에는 내인 유혜를 후궁으로 삼았다. 유혜는 은언군과 은신군의 생모인 숙빈 임씨다. 은언군은 철종의 친할아버지이며 은신군은 고종의 법통적 증조부(은신군의 양아들이 고종의 친할아버지 남연군)다.
사도세자는 병세가 악화되던 1761년 귀인 박씨도 죽였다. 1761년 정월 세자는 궁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갑아 입다가 의대증이 발발했다. 이때 옷 시중을 귀인 박씨가 들고 있었다. 세자는 귀인 박씨를 마구 때린 뒤 그냥 궁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귀인 박씨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혜경궁은 시신을 대궐 밖으로 내보내고 세자궁에 딸린 궁방에서 장례를 치렀다. 세자는 궁으로 돌아와 이런 사실을 전해들었지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 형조판서 윤급.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해 세자를 죽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사도세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한다.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이 그간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것이다. 이 같은 폭로가 있고나서 궁지에 몰린 세자는 주위에 "칼을 차고 와서 부왕을 죽이고 싶다"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영빈 이씨가 나서 영조에게 고했다. "어미로서 차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동궁의 병이 점점 깊어지니 상감의 옥체와 세손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히 하기 위하여 대처분을 내려소서."
세자는 1762년 윤 5월 13일 아버지의 명령을 뒤주에 갇힌 지 7일 만인 윤 5월 20일에 사망한다. 혜경궁은 "오후 3시쯤 폭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세자가 천둥을 두려워하시니 이 무렵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 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일본 덴리대 소장.
▶혜경궁 홍씨(1735~1815)=영조 11년 태어나 손자인 순조 15년 81세로 사망했다. 대표적 노론 명문가인 남양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홍봉한이다. 10세 때 동갑인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포함해 2남2녀를 뒀다. 남편이 뒤주에 죽을 때는 28세였다. 사도세자 사후 영조의 배려로 궁에서 살았으며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 칭호를 받았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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