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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사 정기법회
(2007.01.21.일(음12.03))
쌈예사의 논쟁
오늘은 병술년 음력 12월3일입니다.
이제 우리 스님들이 2달간 공부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제 2달 후에 뵙게 되었습니다. 여기 현지사는 아시다시피 춘천에서도 30분 더 들어가는 38선 이북으로 대단히 오지입니다. 부산이나 울산, 광주 같은데서 오시는 분들은 아침 2시경 일어나셔서 오시는데 오늘 이렇게 많이 오셔서 정말 감사 합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 모두 박수로 환영 해 주십시오.
부처님 가신 지 1200년 만에 우리 수보리 존자가 중국에 오셔서 불과를 이루셨습니다. 대적정삼매를 통과해서 불신을 얻으셨고, 그 후 200년 그러니까 부처님 가신지 1400년 만에 사리불 존자가 또 우리나라에 오셔서 불과를 증했습니다. 그 두 분은 대 적정삼매를 통과 하면서 자기 불신을 얻으면서 그냥 가셨습니다. 그 후로 약 1200년 후 가섭과 아난이 왔습니다. 그래서 모두 대적정삼매를 통과하고 불신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이후 그 누구도, 일신교 그리고 힌두교, 유교, 도교 말할 것도 없이 거기에는 붓다가 나올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 붓다가 나옵니다. 그러나 힌두교는 대단히 그 교의가, 철학이 깊지요. 그러나 붓다는 나올 수 없습니다.
만현은 법을 설하는 법왕자로 되어 있습니다. 법을 설하는 법왕자. 그래서 청정법신비로자나불로부터 법의 수레를 받았습니다. 법을 설할 때에는, 여러분! 전에 한두 번 이야기를 했지요. 불신인 자재통왕불이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좌우 보처가 시립합니다. 상행・정행. 뒤로 조금 높이 우리 불세존이 정좌하시고 그 좌우 보처로 문수・보현이 시립하고, 그 뒤로 많은 부처님들이 배석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여기 600명 정도라고 보지만 많은 하늘 사람들, 성중들이 와서 법문을 듣습니다. 그런 법회이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 오시기 위해서 아침 새벽부터 2시, 3시에 일어나셔서 이렇게 달려온 보람이 있을 겁니다. 계속 부처님께서 방광을 하시기 때문에 여기 오신 우리 단월님 중에 마음 착하고, 그리고 현지사 사상에 대하여 깊이 알고,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스님이 일러준 공부법으로 착실히 수행을 한 사람은 정말 삼생을 두고 닦아서 얻는 공덕보다, 여기에 와서 법문을 듣는 공덕이 훨씬 비교가 안 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문을 못하도록 하거나 그러한 결정을 내린 사람은 정말 무서운 죄업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 현지사 천도재를 못하게 방해하는 남편, 혹은 친척이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업을 짓게 됩니다. 그보다도 정법을 펴는데 압력을 가해서 많은 눈 어두운 중생들에게 감로 정법을 듣지 못하게 한다든지 만약에 그런다면 그 사람은 정말 천추의 한이 될 겁니다. 무서운 죄업을 짓는 겁니다. 나는 인연을 따라서 법을 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하는데 무엇 하러 가서 법을 설합니까? 그렇게 아시고 오늘 우리 현지사의 불교사상! 여러분들은 많이 아실 겁니다. 내 책을 많이 읽은 분도 계시고, 또 수행도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현지사의 불교 철학을 많이 아실 겁니다. 더욱더 이해를 돕도록 하기 위해서 그 유명한, 역사적인 법전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을 오늘 소개 하면서 현지사의 불교 사상을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유명한 법전! 그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이 지금 아시는 달라이라마의 고국 티벳트, 티벳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전, 티벳트 불교는 인도에서 들어 왔습니다. 네팔을 통해서요.
그래서 큰 절을 짓고 왕, 대신 이하 많은 지도층에서 토속종교인 뵌교를 극복하고 불법을 널리 폈습니다. 이때가 중국은 당나라지요. 중국에서 선불교가 들어와서 포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죠 선불교. 선불교가 지금 우리 한국 불교입니다. 이 선불교는 한국에 일찍 들어 왔지요. 이 선불교가 한국으로 들어 온 것은 신라 도의국사 때니까 지금부터 약 1200년 전입니다. 역시 티벳트도 그랬습니다. 선불교의 큰 스님들이 티벳트에 가서 포교를 하고 많은 제자들을 확보 했습니다. 자! 동시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티벳트에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인도 불교를 따르는 승려들, 재가 단월들. 중국 불교인 선불교를 따르는 승려들, 단월들이 가끔 갈등하고, 또 시비하고 그러면서 점점 그 대립이 대단히 심각 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티벳트 왕이 좌시 할 수가 없어서 국론이 분열되고 그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은 도대체 어느 종교를, 어느 종파의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두고 갈팡질팡 하니까 나라의 총 지도자로서 이것을 가려줘야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중국 선종을 돈문(티벳트 말로는 뗀뮌이라고 해), 돈문이라는 것은 돈오, 아시는 분은 아실거요. 돈오! 돈오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일초직입여래지. 선종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돈오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 법문이 지금까지 1년 6개월간,2년동안 점점 쉬운 것부터 깊이 들어갑니다 스님법문이. 그런데 앞으로 2달을 쉬려고 하니까. 우리 현지사의 불교사상! 현지사의 불교는 현재 주목받고 있는 티벳트의 불교, 남방불교, 그리고 소위 선불교, 정토 염불종 불교와 대비해서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우리 신도들한테. 법문의 내용이 조금 어렵다 하더라도 진지하게 들어주시면, 지금 많은 불보살님들이 여러분을 응시하고 방광해 주시기 때문에 듣는 것 만으로도 큰 공덕을 짓게 되기 때문에, 녹음테이프를 사가지고 가셔서 많이 들어 보십시오.
오늘 내가 선불교를 고의적으로 폄하하기 위해서 나는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뭘 모르기 때문에, 불교 교의도 잘 모르고, 그런 분들이 많기 때문에, 또 그러나 이중에는 상당한 수준을 갖춘 그런 단월님도 계시기 때문에, 오늘 꼭 이 법문을 해 줘야겠다 싶어서 이 제목을 가지고 법문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중국 선종을 지지하는 뗀뮌과 인도 불교를 따르는 쩬뮌, 점문이라고 합니다. 선은 ‘돈오’, 인도는 ‘점수’ 그래요. 이제 스님 법문을 들은 후에는 여러분이 많이 들어서 이제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자, 돈오! 돈오문중에서도 ‘돈오돈수’가 있고 ‘돈오점수’가 있어.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했고 보조나 다른 역대 많은 조사님들은 ‘돈오점수’를 이야기 했어. 여기까지 아시고. 자, 들어보세요.
인도불교(대승불교)를 따르는 ‘쩬뮌’! ‘점문’,‘점수’를 주장하는 교가의 입장(대승불교 교가). 여기는 선가 그래. 선종(선가라고도하고,선문이라고도하고,돈문이라고도 해). 자, 여기 교는 ‘교가’라고도하고, ‘교문’이라고도 하고, ‘교학’이라고도 해. 교가를 ‘점수’라고도하고 ‘점문’이라고도 해.
이의 극한 대립상황은 결국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 한 체 ‘쌈예사의 논쟁’이라는 역사적인 대사건으로 비약하게 된다. 그 당시에 쌈예사라고 하는 크나큰 절을 지었어요. 아주 잘 지었어요. 그 쌈예사에서 국왕 임석하에 ‘돈문’과 ‘점문’, 과연 어느 쪽이 옳으냐? 대 논쟁을 하도록 한 거요. 대논・대론을 하도록 한 거요. 법전・법의 전쟁에서 패하면 안 되지요. 근 3년에 걸쳐 양측에서 벌였던 격렬한 논쟁이 결국은 쌈예사의 법전이라는 양자의 대론을 통해서 종식 된다. 이건 상당히 의미 있는 법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내가 선불교를 비방하고 고의로 폄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여러분한테 알려드리는 것이오. 드디어 ‘아사리 까말라실라’가 도착, 인도불교를 티벳트에 포교하고, 상당히 수행이 깊고, 교리에 밝은 인도스님 입니다. 까말라실라! 한문으로 번역하면 이름이 연화계입니다. 왕이 인도 큰스님(대승불교의 큰스님)하고 중국불교의 큰스님 마하연을 지금 앉히는 것이오. 그래가지고 대론하도록 하는 것이오. 까말라실라가 도착하자 중앙의 사자좌에는 국왕이 앉고, 오른쪽의 사자좌에는 마하연 화상(중국선불교의 큰스님)이 오르고, 그 뒤를 따라서 비구니가 된 왕비, 도사장춘, 쑤양땅, 당까 등등 비구 등이 뗀뮌(돈문)의 많은 제자들이 열을 지어서 길게 앉았다. 왕비도 선불교에 빠졌어요 그때.
그래서 왕비를 비롯해서 여러 비구들 돈문의 여러 비구제자들이 마하연 오른쪽 사자좌 뒤로 쭉 앉았다 그 말이오. 또 왼쪽의 사자좌에는 아사리 까말라실라가 자리를 잡고 점문의 제자들인 삘량과 바이로짜나와 에쉬왕뽀 등 많은 비구들이 따라 앉았다. 이렇게 해서 법전이 벌어집니다.
이에 국왕이,(두 아사리는, 큰 스님을 말하는거요) 두 큰스님과 땐뮌과 돈문, 쩬뮌・ 점문의 모든 승려들에게 흰 꽃다발을 하나씩 손에다 바치고 나서 말한다. 왕이 내가 뵌교, 뵌교의 흑법을 고집하는 옹아리지방의 백성들을 위해 인도에서 친교사 보리삿다를 모셔온 뒤 적은 수 백성이나마 불법을 믿게 하였고 신심 있는 몇몇은 출가를 하기도 하였다. (왕이 지금 하는 말이오) 또 사원도 여럿 건립해서 삼보의 터전을 마련한 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불법을 배우도록 하게 해서 소수 신심 있는 자들이 출가하는 상황아래 마하연 화상이 여기에 와서 머물게 되어 (중국 선불교 마하연 화상이 포교차 들어와서 머물게 되자) 대부분의 반대승려들이 중국 화상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게 되었다. (왕이 하는 말이오) 그 나머지는 친교사 보디삿다의 제자들인 까닭에 화상의 법을 따라 배우지 않게 되자 마침내 뗀민과 쩬민의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양측의 견해가 같지 않아서 서로 다투는 것에 대하여 나의 명령을 달가워하지 않는 화상의 제자들 가운데서 양 샤민은 자신의 살을 끊어서 죽었고 마고화상은 자기의 머리에 불을 질러서 죽었고 옹옥림뽀쩨와 낙제마라는 자신의 성기를 돌로 쳐서 죽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비수를 하나씩 품고서 쩬뮌들 전부를 죽이고 우리들도 역시 궁전 앞에서 죽겠다고 말함으로써 ((선불교가 그렇게), 그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도 대단히 배타적이고 그럽니다.) 내가 그와 같이 하지 못하게 하고자 이와 같은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법전이라고 하는 대론의 장을 마련했다 그거요.)
쩬민의 대표는 친교사 보디삿다이며 그 제자가 까말라실라인 바 그가 이제 여기 왔으므로, 마하연 화상과 둘이서 논쟁토록 하라. 논리가 수승한 쪽에게 논리가 부족한 측이 교만을 버리고 법답게 꽃다발을 바치도록 하라. (이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그 당시 왕의 영, 권력은 날아가는 새가 문제가 아니라, 삼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절대자였습니다. 왕인 그 사람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 대론을 통해서 승패를 가려가지고 승자를 밀어주려고 했어.
중국의 마하연 화상이 말하되(선불교 대표자지요), 내가 이곳에 먼저 왔으므로 먼저 묻겠으니 답변하기 바란다. 까말라실라한테 말한 거요(인도불교, 대승불교의 큰스님한테).
그러니까 아사리 까말라실라가 말하되 그러면 먼저 그대의 견해를 변론토록 하라, 했단 말이오. 참 멋지지요? 이해하겠습니까?
이제 마하연 화상이 말한 것, 이걸 강의를 해야되는데 시간은 적고 그래서 이걸 여러분한테 죽 읽어만 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조금씩 조금씩 해설해 드립니다. 마하연 화상은 누구냐 하면, 선불교를 대표하는 중국에서 온 선승이여. 선승이 먼저 이제 말한단 말이에요
‘중국의 마하연 화상’,
모든 유정들이 마음의 분별로 야기한 선과 불선에 의해서 선취와 악취등의 과보를 받으면서 삼계에 윤회하는 것이다. 어떤이가 일체를 전혀 사유하지 않고 전혀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를 전혀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보시 등의 10법행을 행하는 것은 범부로서 선근이 없는 우둔한 자들을 위해서 설해진 것이다. 미리 지혜를 닦아서 근기가 날카로운 자들에게는 흰 구름이든 검은 구름이든 그 둘 전부가 또한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이 선악의 두 가지도 역시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를 전혀 사유하지 않고 전혀 분별하지 않고, 전혀 관찰하지 않는 것은 제법을 가히 보지 않고 곧바로 10지보살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하연 화상이 말한 내용인데, 이 내용이 저 말이 무슨 말이냐? 하고 이해를 못하실 것 같아서 스님이 간단히 말해줍니다. “일체를 사유하지 말고 분별하지도 말고 오직 화두일념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깨달아 부처를 이루리라” 이 말이오.
이제 이것은 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 스님의 일장법문이었어(주장이었어). 이에 대해서 인도 까말라실라의 답변이 나옵니다. 답변이 나오는데 너무 장황하게 쓰여 있어서 이것도 대충 줄여서 이야기 합니다.
‘인도의 까말라실라’,
무분별의 법계에 증입하는 데는 여실히 관할 수 있는 반야로써 가능하다. 여실히 관찰해 들어감으로써 무분별 제법의 무자성성의 공성을 깨닫는다. 억념과 작의를 행함 없이는 일체 지를 얻을 수 없다. 여실히 관찰하는 반야로써 전도된 망상을 영원히 여의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분별망상을 제멸하고 모든 악견들을 영원히 여읨으로써, 원만한 지혜를 구족, 불지에 드는 것이다.
좀 어려운 말인데, 답론을 장황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국왕이, 마하연도 할 말 다했고, 인도 불교를 대표하는 교학승 까말라실라도 반론을 제기했고, 그러니까 국왕이 그럽니다. 여기 온 사부대중들도 할 말이 있으면 논쟁에 참여해도 좋다. 그렇게 선언했어요. 그러니까 대승불교 교학,
인도불교 교단의 수장인 삘량스님이 말하되,
“만약 단번에 깨달아 부처 된다면, 들어가는 문이 옳다고 하면, 그것이 만약 단번에 깨달아서 부처될 수만 있다면, 그 말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6바라밀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 다음에
에쉬왕뽀라고 하는 큰 인도불교를 신봉하는 티베트의 큰 스님이 말하되,
“산을 오르는 것도 반드시 한 걸음씩 올라가야 하며, (이게 아주 중요해요) 보살이 초지를 얻는 것조차 지극히 어려운데, 하물며 일체지를 얻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일체를 전혀 행함이 없이 성불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전의 말씀에 크게 위배됩니다. 문사수의 세 지혜에 의해서 법의 뜻을 전도됨 없이 바르게 이해한 뒤, (나중에 문사수라든지 그런 것은 스님이 법문할 때 합니다). 10법행을 배우고 닦아서 ((이 10법행도 나중에 말씀을 합니다), 가령 보시도 하고, 공양도 하고, 경전도 읽고 열 가지가 있어요. 기초 수행) 10법행이 초지에 들어가는 가행도 일위에 오르는 것, 그 다음 무과실 정성에 들어가고, 그 다음 청정한 반야의 지혜로써 나머지 구지들을 차례로 수습, 10바라밀을 수확, 의식의 흐름을 정화하고 복혜의 두 자량을 온전히 구족한 뒤 비로소 성불하는 것이다. 그대들처럼 (선승을 가리키면서) 두 자량도 쌓지 않고, 복혜((복도 쌓지 않고 지혜도 쌓지 않고), 부처님은 복혜 양족존이라고 하지, 복도 쌓지 않고 지혜도 쌓지 않고 두 자량도 쌓지 않고) 의식의 흐름도 정화하지 않고, 세간사도 또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일체지를 성취할 것이냐? 단지 공성 하나만은 자리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이타의리를 완성 할 수 있는 것이냐.”
토굴을 파고, 토굴에서 스님들이 10년 30년 정진하는 선방승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공부한다고 해서 도가 안 터진다. 왜냐? 자리自利만을 생각해서 토굴 생활을 10년하고 30년 한다고 해서 도가 터질 줄 아느냐? 아무리 깊은 산 토굴에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가끔 말합니다. 도를 이루려면 새의 양날개가 있지요. 양 날개가 있어야 날아가지. 지혜와 복덕을 갖추어야 해. 닦아야 되는 거요, 교가에서 쓰는 말이 맞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 보고 조상님을 천도해 주시오. 그래야 억겁을 내려오면서 지은 업장과 그리고 지은 은혜, 빚과 그리고 업을 짓는 원인이 되는 탐진치, 무지 요런 것의 뿌리를 뽑을 수가 있으니 그런 공덕을 짓고 또 선근공덕을 지으시오. 하는 말이 그 말이오. 앉아서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거요. 복덕도 닦아가야 되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가 완전히 구족해야 됩니다(복혜구족, 복혜양족존). 하나만 닦아가지고 안 되는 거야. 그리고 공부가 안 되는 이유가 또 많이 있습니다.
‘
“공성 하나만은 ‘자리’自利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이타’利他의 의리를 완수할 수 있겠소? 그와 같이 선불교는 경론의 전거도 없고, 부처님의 팔만사천대장경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선불교가 참선하라는 구체적인 말씀이 없다. 경론에 전거도 없고, 방편과 반야가 함께하지 않는 법은 (아까 공덕과 지혜를 말하는 거요) 곧 부처를 훼손하고 기만하는 것이오, 보살이란 중생의 이익을 위해 발심한 뒤 이타행을 근수해서 복덕의 자량을 쌓고 일체의 지식을 배워 통달하고 참회로써 마음을 닦아 지혜의 자량을 쌓는다. 그래서 성불한 다음에는 모든 중생들을 부처의 지위에 인도하는 여래의 사업을 윤회의 길이 다할 때까지 행하는 것이 경전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먼저 일체의 경전을 읽어서 그 뜻을 통달하고, 고요한 처소에서 사미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해야 되는 것이오” 하고 에쉬왕뽀가 마지막으로 또 인도불교 교학(점수문)이 옳다고 변론한 것입니다.
중국 불교 선불교는 많은 헛점이 이렇게 있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한 말이오. 이에 뗀뮌이(선불교를 말합니다. 돈문) 변론의 의지를 상실한 채, 꽃다발을 던지고 패배를 인정하였다. 그 때 화상의 시자인 쪼마마라고 하는 중이 분을 못 이겨서 자기의 성기를 짓이겨서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이에 국왕이 선언했습니다.
“단박에 깨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중국 선불교의 화상에의 참선법은 10법행을 훼멸하는 법이므로 행하지 말라.”
이걸 자세히 이야기했으면 좋겠으나, 자! 스님이 우리 현지사 불교도 그렇고 인도 대승불교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자! 선방을 봅시다. 고등학교 나왔소? 대학교 나왔소? 물어보고 은사가 선방으로 데려갑니다. 자!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나와서 어느 정도 기초 학문은 했으나 불교 교학은 몰라. 불교 기초 교학도 없이 막바로 선방에다가 넣는 다고요. 선방에 가서 화두 받아가지고 면벽하고 앉았어. 화두가지고 공부한단 말이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기초, 예비 교육, 예비 수련이 있어야 되는 거요. 막바로 해서는 안 되는 거요.
그래서 왕이 하는 말,
“마음이 우매해서 자타로 하여금 수심의 문을 닫고, 중단시킨다면 마음은 몽매해지고 법은 쇠락하게 되니 그와 같은 법은 화상, 그대만이 닦도록 하시오”. 마하연한테, 그랬어.
“그 밖의 화상의 제자들과 티베트 승려들은 이제부터 종교는 니가라쥬나의 법을 따르고 대승 불교의 창립, 개종,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으로 위대한 대승불교의 큰 스님을 용수라고 합니다. 나가라쥬나, 그 나가라쥬나가 모든 대승경론 체계의 골격을 체계적으로 잡은 거요. 그래서 종교는 나가라 쥬나의 용수의 법을 따르고, 도행은 육바라밀과 10법행을 실천하고, 수행은 삼혜를 통해서 마음을 닦고 방편과 반야를 겸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도록 하라. (왕의 명령이오. 이제) 이후부터는 우리의 티베트 군신들과 백성들도 역시 불법을 닦는 것을 이와 같이 행하도록 하라. 대저 티벳트는 땅이 외지고 궁벽하며 사람의 심성은 우둔하고 성정이 거칠어서 이와 같은 법을 이해하기가 힘들고 어렵다. 그래서 왕이 인도의 저명한 대학자들을 초빙해 후원하고 뛰어난 역경사가 번역해서 확정한 불법을 닦도록 하라. 국왕이 후원하지 않고 역경사가 확정하지 않는 불법은 닦지 말라.”
이렇게 엄중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선대의 국왕 5대에 걸쳐 확립하지 못한 불법을 띳송뎃쩬(이분이 보살의 화현입니다), 왕과 친교사 보디삿다와 에쉬왕뽀와 쌍싯따등 네사람이 삼보의 공양체를 확립하고 불법을 전 티베트인들에게 전파했다. 그래서 오늘날 티베트불교가 순수 대승불교입니다.
지금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8세기 당시(지금부터 1200년 전), 쌈예사의 논쟁을 통해서 만약에 인도 불교가 중국의 선불교한테 져버렸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지지 않고 이기기를 얼마나 천만다행이냐? 저 선불교 무지와 계행, 외도 나부랭이들. 그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선불교가 신라통일 이후부터 도의국사를 시발로 해서 중국에 들어가서 선사들한테 공부를 해서 법을 받아가지고 구산선문을 일으켜 그것이 선종 하나로 통합이 되었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한국 불교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선불교가.
자재 만현이 말합니다. 이제 평가합니다.
흠결이 한 두 개만 있어도 그건 아닌 거요, 그런데 많다면 그건 생각해볼 일입니다. 돈오를 주장하는 선불교, 이것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체질에 따라서 선을 할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해봐요 되나. 잘 안 돼. 왜 그러느냐? 화두에 의심이 붙어야 되고, 의심이 쌓여서 단이 이루어져야 되요 의단이라고 합니다. 내가 화두를 해서 잘 알지요. 의단이 쌓여야 돼, 의단이 더 커지고 더 커지고 의단이 커져가야 되는 거요. 그래야 탁 터져요. 그런데 의단이 터질려면 신심이 있어야 되고, 신심이 있을려면 불교의 어느 정도 기초 교학이 있어야 되는 거요. 그 다음에 기초 교학이 있어서 신심이 있다고 하더라고 분심이 없으면, 의심은 의단을 낳을 수가 없어. 분심이 뒷받침 안 해주면, 분심이라는 건 뭐냐? 바로 요런 생각이오. 아하! 죽으면,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 있다더라. 죽으면 다 끝난다는 것이 아니고 가는 곳이 있다더라. 뭐가 가? 몸뚱이가 가나? 몸뚱이는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화장해버리면 잿더미가 되어버려. 요건 못가. 뭐가 가지요? 내 책을 많이 본 사람은 알지. 이 몸속에서 한 평생, 몸속을 의지하고 사는 죽지 않는 자기가 있어요. 그걸 나는 영혼체라고 했어요. 영혼체. 그걸 줄여서 영체라 했어. 매미가 허물을 벗을 때 쏙 빠져나와 버리잖아요? 그 허물, 그놈이요. 이 몸뚱이는요. 허물이요, 이것은 집이요 집. 집은 오래가면 어떻게 되지요? 다 낡아서 폐가가 되어서 망가져 버립니다. 요것은 그거야. 여기서 한평생 살다가 명이 다했거나, 또 비명 했거나 간에 죽으면 쏙 빠져나온 놈이 있어요 그걸 영혼체라 그래. 요놈이 주인이야. 주인이란 표현도 많은 이야기를 해야 되지만, 자 주인이야 요놈이. 여러분들이 깨끗이, 착하게, 바르게, 좋은 일 많이 하고 살았다면 요놈이 깨끗해. 그렇지만 업을 많이 지은 사람들의 영혼체는 안 그래, 스님이 뭐라고 하던가? 아주 더러워. 아주 탁하고 아주 더러워. 심지어 우리는 뭐라고 말하느냐? 어디서 막 건져 나온 것 같아. 그렇게 생겼어. 그러한 영혼체는 악도로 가게 되어있어. 악도로 가. 악도라고 하면 지옥 있어, 짐승도 돼, 아귀도 되고, 또 거기도 못 들어가는 팔자가 된다고. 거기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 비명에 죽을 때, 사람은 30%, 40%, 50%는 명부에 못 들어가더라고. 그 원인은 착, 집착, 자살했다든지 나쁜 병을 얻어서 와병․ 똥오줌 싸고 죽었다든지, 또 횡사, 객사(집을 나가서 죽었다든지) 하면 거의 명부에 못 들어가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못 들어가는 것은 과거생에 그 사람이 지은 없이 지중하기 때문에 그래. 그런데 착하게 살았으면 이 영혼체가 대단히 맑다고요. 깨끗하다고요 그래서 하늘로, 사람으로 나온다구요. 그러나 대단히 적어. 100명이면 한 둘 셋, 그 이상은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이것은 문제다 해서 천도재를 현지사에서 합니다. 부처님이 주관하는, 부처님이 주관하지 않는 천도재는 절대 효과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어, 목련경이나 여러분 우란분경을 보면 알아. 경전에 근거가 있어. 그 당시, 목련존자는 10대 제자야. 목건련이. 신통이 대단했어. 알고 보니까 전생에 불격을 갖춘 최상수 보살이었어. 목련존자가. 영산당시에도 아라한과를 증하고, 보살과까지 갔었어. 그렇지만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할 수 없었다고. 그런 큰 스님도. 그런데 어느 절에서 500만원, 1000만원, 3000만원.. 지적은 않습니다. 아무 능력 없으면서 돈만 생각해서 하느냐 그거요. 법력 없이 그렇게 하면 절대 무서운 과보가 옵니다. 500만원, 1000만원 받았으면 그 값을 해줘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이건 큰일 나는 거야. 그래서 어느 절이건 천도재를 한 절을 영적으로 보면 성지가 아니라 아주 악취가 나는, 여러분! 그런 곳 알지요. 어디 헛간 가면 그렇지요. 그렇게 되어 버렸어, 그 많은 영가들이 안 가. 불러서 천도해 준다고 돈받아 먹었으니 거기 있어, 안 가. 그러니 좋은 절에서 수행도량인데, 그러한 정말 닭똥 냄새가 문제가 아니라, 그 영혼체의 생김새도 몇 십년을 밖에서 문둥병 환자가 얻어먹고 다니는 거렁뱅이 보다도 더 더러운 그런 형상이야. 몇 미터 앞에만 있어도 악취가 나서 코를 막아야 할 그런 정도로 그런 영가들이 와서 한없이 있단 말이오. 수 백 명, 수 만 명이 그 절에. 그러면 어떻겠소? 그 절은 성지가 이미 아니야. 그것은 천도재 능력이 없으면서 천도재를 했기 때문에 그래. 경전을 봐도 부처님이 임석해서 4번을 해서 어머니를 하늘로 올려 준거요. 우리가 4번 하는 이유가 있어. 우리는 부처님이 언제라도 꼭 한 분은 주관을 하셔.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바쁘시면 다른 부처님이 와서 주관을 하셔. 그래서 부처님이 주관하시는 천도재는 되는 거요. 왜냐 하면 지옥이나 짐승이나 아귀 세계에 떨어진 그 사람들을 어떻게 데리고 오느냐 말이오. 신병 확보를 해야 되는 것인데, 신병확보를 못하면 천도는 안 되는 거요. 그리고 명부에 못 들어간 영가들, 이 영가들은 너무너무도 날쌔. 영악스럽고 도망도 잘 가. 이거 어떻게 잡어? 오라고 한다고 해서 와? 형사가 저기 살인범을 찾는데 오라고 한다고 와? 순순히 옵니까? 죽어라고 도망치지. 잡히면 나는 죽는다 이거요. 도망친다고. 그런데 너무너무도 빨라 그놈은. 죽은 지 몇 백 년 되어버린, 몇 십 년 된 영가들은 오통을 구족하고 있어. 바람처럼 도망 가버려, 그런데 그 사람을 어떻게 쫓아가느냐 그거요. 이 몸에서 빠져나온 스님도 거의 없어. 이 몸에서 마음대로 빠져나온 스님도 거의 없어. 그런데 어떻게 잡아? 마음대로 빠져나온다고 해도 그 날쌘, 오통을 구족한 저 영가들을 어떻게 잡아? 성중도 못 잡는데. 못 잡는 영가가 있다고. 그 때는 부처님이 무량광으로 잡아. 그런데 어느 중이 천도를 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선불교를 평가를 하면서, 이 참선을 전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질상 참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생에 참선을 닦은 사람들. 과연 참선 으로 화두타파 할 수 있습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가끔 하잖아요? 그러나 선근 있는 사람들은 해요. 돼요. 그런데 화두타파를 했단 말이에요. 깨달았습니다. 깨닫는 것이 다가 아니어. 본성, 마음자리를 본거요 이제. 봤으면 마음자리와 같이 청정 청정하고 깨끗하게 내 마음을 닦아가야 돼. 이제부터는. 요걸 잊어버리면 안 돼. 요걸 몰라 선불교가. 그래서 그렇게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합니다. 자, 화두타파가 되었으면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래서 견성은 시작이다 했어요. 이제부터 정말로 무섭게 계율을 지켜야 돼. 비구 같으면 음계를 지켜야 돼. 음계를 안 지키면 안 돼. 그래서 음계와 중계, 어쨌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율을 잘 지키면서 두타행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요. 두타행 아니면 이 몸뚱이에 대한 착을 못 끊어. 착을 끊어야 되는 것이오. 그래야 정말 대 자유인이 되는 것이요. 탐욕의 경계를 당했어도 흔들리지 않고, 진의 경계(성내는 경계)를 당했어도 흔들리지 않고, 이 육신에 대한 애착이 가장 뿌리 깊은 번뇌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이미 초월이 된 거요. 그래서 독사가 와도 호랑이가 와도 입을 쫙 벌리고 먹으려고 해도, 전혀 마음이 안 흔들리는 거요. 여기가 아라한인 거요. 그래서 깨달으면 진짜 공부를 이렇게 해야 아라한과를 증한다 이거요. 아라한과를 증해야 윤회생사에서 벗어나더라 그거요.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깨달으면 다라고, 심즉시불이라 해서, 마음이 부처다, 마음을 깨달아버리면, 봐버리면 부처되었다. 이렇게 해버려. 그래가지고 무애행을 한다 이거요. 무애행을. 이제 거리낌이 없다 해가지고 적당하게 여자도 범하고 막행막식하더라 그거요. 그래버리면 급전직하합니다. 요건 부처님의 정말 노파심 어린 충고요 말씀이었습니다. 꼭 이것은 선불교에서 알아주어야 한다 그거요. 이런 말이 왜 비위에 거슬리느냐 그거요. 인도 불교에서 선불교의 흠결을 네다섯 군데를 지적했는데, 나는 그 위에다가 열 가지를 더 지적합니다. 선불교의 흠결! 대단히 중요한 치명적인 흠결이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신행이 없습니다.
마음이 부처라 해가지고요, 부처님이 있다, 계신다 하면, 저건 외도다 하거든요. 참 슬픈 일이죠. 그런데 과연 부처님 뵙는 것은 어렵습니다. 대단히 어렵습니다. 견성가지고 안됩니다. 보살 되어가지고도 안됩니다. 최상품보살이 사람 몸 받아와가지고, 최상품 보살은 억겁을 통해서 수행을 했단 말이오. 탐진치의 뿌리를 뽑으려고 노력을 했고, 청정 청정으로 들어간 사람이오, 무소유로 산 사람이오. 억겁으로 그렇게 해서 선정에 (삼매로) 들어간 사람이오. 그런 사람이 사람 몸을 받아와 가지고 선정삼매로 들어가서 부처님의 빛을 보고 그럽니다. 내가 무량광 열아홉 가지 특성을 <존평>에다 써 놓았을 거요. 그것도 부족해. 그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붓다, 부처님. 그러면서도 32상 80종호가 문제가 아니오. 그 부처님의 아름다운 상호는 또 능력에 있어서는 우주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이런 붓다를 뵙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되면, 이제 무아 속 절대세계에 내 불신이 생깁니다. 붓다가 되는 거요. 순서가 그렇게 되어있어. 뵙기가 어려워. 역사 이래로 뵌 사람이 없어. 용수, 대승불교의 용수 이상의 학승은 없습니다. 그 사람도 우리 부처님을 뵈었다고 하는 기록이 없어. 그것가지고 안 돼. 불과를 증해야 봐. 불의 경계야. 부처님은 빛 덩어리야. 빛의 존재야. 눈이 부셔서 못 보는 거요. 그런데 그 경계에 가서는 본단 말이오. 자세히도 본단 말이오. 그리고 대화를 해. 그런데 부처님이 없다고 하거든? 없다 그래. 마음이 부처라 그래.
마음은 사과 씨라고 생각하면 돼. 사과 씨를 땅에 심어 놓으면 거름도 주고 물도 주고, 태양빛도 적당히 쐬어 주고, 바람도 사람손길도 주고, 그래야 싹이 나서 이제 사과나무가 되어가지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는 거야. 그래야 사과가 나와. 씨하고 사과하고는 이건 차원이 달라.
두 번째, 조사불교(선불교)는 스님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음계 중계 계율을 지켜라 이거요.
불교는 계율이 없으면 불교가 아니오. 계율이 가장 필수더라 이거요 공부하는 데는 계율이 없으면 공부가 안 돼. 여자를 알면 공부가 안 돼. 그것은 될 수가 없어. 그래서 음계와 중계를 강조하는데 선불교에서는 그 계율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거요. 마음을 깨쳐버리면 됐지, 다 부처가 되어버렸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친 대견성 선사들이 누구라고 지적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음계를 파합니다.
세 번째, 경전을 소홀히 해. 부처님의 경전을 소홀히 해.
이건 불자가 아닌 거요. 오히려 선사들의 어록을 중시하고 있더라 그 말이오. 일개 아라한도 못된, 그걸 조사라고 해가지고, 그 어록을 중시하고 경전을 소홀히 하더라구요. 경전도 《반야경》이라든지 《법화경》이라든지 《화엄경》은 대단한 경전이요. 이걸 심즉시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우스꽝스럽지. 요것은 소설 같지. 이해가 안 되지. 그러나 불과를 이루어보니까 정말이더라 그거요.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말씀은 진짜더라 이거요.
네 번째, 염불하는 행자를 하근기라 해가지고, 심지어는 외도라고 해가지고 몰아붙입니다.
이건 아닌 거요. 부처님이 계시는데, 부처님같이 나도 되려고 부처님의 말씀을 꼭 옳게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그런데 가끔 그 능력이 부족하고 선근이 부족해서 부처님의 성호를 부르는데 왜 그 사람보고 외도라 하느냐 그거요. 이건 정말로 아닙니다. 이건 결정적인 흠결이오.
다섯 번째, 복덕 닦는 일을 안 해.
복덕을 닦아야 됩니다. 지혜만 닦아도 안 됩니다. 효를 해야 돼. 아무리 스님이라 하더라고 효를 해야 돼. 일자출가하면 구족이 생천 한다는 말은 그건 너무너무도 부풀려서 한 말이오. 불과를 증해야 돼. 그래야 구족이 생천 해. 지금 스님이 많지요. 만명, 이 만명...... 부처님은 천 명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해. 그 중에서 백 명 정도는 괜찮아. 잘 하면 성중 하늘에 가.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성중하늘에 간다고 해서 구족이 생천할 수 있나? 안 돼. 아라한 되어도 구족이 생천 못 해. 그래서 스님들도 효를 해야 됩니다.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 돌아가셔서 저기 악도에 있는데 자기만 도통한다고 하면 안 돼. 안 되는 거요. 부모나 가까운 친인척 존비속이 하늘로 올라가야 해. 최소한 육 하늘로 올라가야 해. 그래야 성과를 얻을 수 있어. 이것이 이치요, 그런데 왜 효를 안 하느냐 그거요. 나我 중이 됐으니까 부모님 형님 할아버지 다 하늘에 갔다 그거요. 생천 했어. 이건 아니어.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부처가 없고 무슨 놈의 극락지옥이 있느냐. 마음, 마음속의 마음의 산물인데 요렇게 말 하거든요? 이건 아니오. 이건 법을 능멸 모독한 거요.
여섯 째, 생사관이 없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몰라. 지옥이 없다고 하는데 하늘도 없지, 극락도 없지, 아귀세계도 없지, 그러니 육도윤회를 인정을 안 하고 그렇기 때문에 생사관이 없어. 이건 아니다 그거요. 그런데 너무 독선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참선 아니면 모두 사이비고, 외도로 규정해버려. 이건 법을 능멸하고 붓다를 모독 하는 거요. 이렇게 안했으면 좋겠어. 이게 진정한 내 지적입니다.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불교 교학, 교학을 기초로 해서 수행에 들어가면 ‘점수’ 문이 나는 옳다고 봅니다. 그 당시 8세기 티베트 불교는 수행체계가 잘 잡혀졌어. 지금 티베트 불교는 거기다가 밀교적인 가르침이 더해져 조화를 이루어가지고 수행법은 훌륭한 체계를 갖췄습니다. 그래서 나는 티베트 불교를 내 책에서도 평가합니다. 티베트 불교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거기는 기초 수행을 단단히 하고 들어갑니다. 그건 잘 한 겁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 오늘날 달라이 라마 티베트 불교는, 생사해탈이 불교의 목적인데(불교 수행의 목적인데), 달라이 라마는 생사해탈로 가지 않고, 다시 사람 몸을 거듭거듭 받아 옵니다.부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대단히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이법을 역행하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를 만나면 지적할거요. 자기가 법에 대해서 겸손하고, 그런다면 합장하겠지요. 그 외에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다음 현재 남방 불교, 태국이라든지 미얀마라든지 스리랑카라든지 그 남방불교, 참 좋습니다. 거기는 관법선 위빠사나 선을 합니다. 사물의 진상인 법을 주제로 해서 위빠사나 선을 하는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념처, 사성제, 십이연기, 그리고 부정관, 오온관, 그리고 마흔 가지 마음집중, 명상 주제가 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아함경을 철저히 근거해서 수행체계가 잘 잡혀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선같이 경전상의 확실한 근거가 있고 또 남방 불교는 철저히 계율을 지킵니다. 음계를 무섭게 지키고 두타행을 합니다.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 대단히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흠결이 없고 인도 불교도 대단히 평가를 합니다. 대승 불교(점수문), 그러나 돈오문은 많은 흠결이 있습니다. 이걸 주목해야 될 겁니다. 그 분들이 이걸 주목해야 됩니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현지궁 현지사를 먼 훗날 평가를 할 것입니다. 겁에 한 번 오시는 부처님, 붓다 내실 때만 오십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보신불 이야기입니다. 현지사는 부처님이 상주하는 도량입니다.
첫째, 우리 현지사에서는 계율을, 특히 음계를 철저히 지키고, 우리 제자들에게 무섭게 교육을 합니다.
둘째, 부처님에 대한 귀의귀명을 내 목숨 바치더라도, 바치는 그런 정신으로 우리 부처님에 귀의 귀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셋째, 효를 주장합니다.
우리가 가고 없을 때에는, 천도재는 안됩니다. 그러나 차선책은 있습니다. 《지장보살본원경》을 백독정도하고, 불 선업을 짓지 말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서 천도재를 하면 청정한 몸으로 큰 스님을 청해서, 그러면 효과는 좀 있습니다.
그 다음 정토종 이야기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 정토종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방불교 이야기 했고, 저 쪽 티베트 불교, 대승불교 이야기 했고, 여기 선불교 이야기 했고, 이제 정토, 왕생극락 할 수 있다는 연종, 정토종 염불종 이야기하는 거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데, 아미타경을 읽었으면 좋겠다. 먼저, 반드시 경전을 먼저 읽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진언을 해라(아미타불 무량겁멸죄진언). 그 다음에 이제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을 관하면서 해라. 의상 대사처럼 미타의 철저한 신행자 되어서 해라. 의상 대사는 관세음보살님을 미래제가 다하도록, 당신의 본사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쪽을 등지고 앉은 적도 없었고, 부처님 불상을 등지고 앉은 적도 없었어, 요 정도로 신심이・ 사상이 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에 오만 번, 육만 번, 십만 번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큰 스님들이 있었어(정토종에). 그 분들처럼 해라. 그리고 계율도 지키고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대승경전도 읽고, 포교도 하면서.
자, 미타경, 염불종 좋습니다. 좋은데 정토종에다가 꼭 충고, 제언을 하고 싶은 것은, 경전을 먼저 읽어라. 《정토삼부경》이 있거든요. 그 중에 하나를 읽어라. 그런데 아미타경이 제일 짧거든? 진언 후에 염불로 들어가라. 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지금 아미타불을 많이 부르는 조직체가 있어요. 그 분들이 우리를 조금 싫어합니다. 왜 그러느냐. 그 사람들은 죽을 때 십념만 해도 미타국에 난다. 이렇게 되어 있어. 죽을 때 열 번만 불러도,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않거든요. 보살이 되어야 간다고 말합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모든 부처님나라의 상식이야. 또 실제로 보니까 그래. 보살이 안 되어 가지고는 갈 수 없어. 그건 정말 어려워. 어렵지만, 이것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5여래 중에 한 분이오, 아미타 부처님의 48원 가운데, 열여덟 번째 십념왕생원 있어. 그와 같이 아미타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섭취합니다. 관심을 두어요. 그 점이 있어. 끄는 힘이 있다고. 끄는 힘이 있으니까 보살 팔지, 꼭 보살 팔지라야 미타국에 가는 것은 아니고, 보살 초지나, 삼현위라 하더라도, 정말 스님이 말씀했듯이, 꼭 그렇게 순서대로 공부하고, 효도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아미타불 님이 계시는 것을 확신하고, 미타국이 있는 것을 확신하고,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정진 정진 잘 하면 갈 수 있다. 요건 맞아. 못 간다는 것은 아니오. 꼭 보살이 되어야 간다는 말을 해석해 줍니다.
보살팔지부터 보살이라 그래(우리 부처님은). 보살팔지는 원효정도인데, 이거 너무너무 어렵죠. 아니더라도 칠지나 육지나 오지나 삼지나 초지래도 또 삼현위라고 있어. 삼현위에 머무는 단월이라고 하더라고 스님 가르침처럼 하면 간다 그거요. 자, 우리 스님들 가운데 우리 회상에서 지금 거기서 온 분도 있고, 그 분들 빼고 세 사람의 후보가 나왔습니다. 미타국에 왕생할 수 있는 분이.
21세기 기독교? 서구에서는 사양길이라고 합니다. 21세기 기독교 사람들, 그런 옅은 종교사상으로는 21세기 정신문화를 선도할 대안이 없습니다. 그 천박한 진리 갖고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떤 종교 사상이라야 되느냐. 답은 불교지요. 그런데 이 불교는 그 동안에 많이 왜곡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버렸어. 함량미달이 되어버렸어. 그래서 현지사에서는 정법을 사자후 하는 거요. 불신관이 투철하고 생사관이 분명하고 우리 현지사의 불교는요. 너무너무도 깊어. 그래서 머지않아서 위대한 사상으로 세계문화 정신문화 사상에 반드시 클로즈업 될 것입니다.
이 나라에도 수많은 사찰이 있지요. 아마 만 개도 더 될 거요. 동남아 중국 일본 서구까지 하면. 수십만 수백만의 사찰이 있을 걸요? 이 조그마한 현지사가 앞으로 머지않아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시킬 겁니다.
그들은 현지사와 같이 깊은 불신관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없습니다. 경전에는 있으나, 부처의 삼신설이 있지요. 그러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현지사는 삼신에 대한 법설, 불신에 대한 법문, 생사관에 대한 깊은 법문, 깨달음 이후 아라한과를 증득한다든지, 더 가면 보살과 또 더 가면, 불과를 증한다는 사자후, 그리고 효를 강조하는 점, 그리고 석가모니불 칭명 수행을 외치는 점, 정말로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세계의 양심 있는 단월들의, 의식 있고, 지혜 있는 단월들의 이목이 우리 현지사로 집중됩니다.
동서고금의 철학, 종교 사상 가운데 불교 사상이 물론 제일입니다. 불교 사상만큼 심오한 사상은 없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좀 더 잘 살 수 있고, 해탈의 길이 있고 완전한 해탈의 길, 빛의 존재까지 이를 수 있는 길이 불교에는 있습니다. 현지사에만 있습니다. 빛의 존재로까지 붓다가 되는 그런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백 천 만생을 살아도 만날 수 없는 현지궁 현지사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현지사가 있습니다. 보살까지 될 수 있는 부처님 회상입니다. 우리 현지사는요. 여러분 지금은 500~600백명 이렇게 오시지만은 앞으로 진짜는 적습니다. 진짜라는 것은 수가 적습니다마는, 앞으로 갈 수록, 우리 현지사는 물량 면에서도 외양 면에서도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은 티베트 불교가 소위 쌈예사의 논쟁을 거치면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중국 불교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인도의 대승불교 전통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정말 순수합니다. 지금. 선불교는 범접을 못합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아주 순수합니다. 쌈예사의 논쟁은 8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의 티베트 대표적 큰 사찰인 쌈예사에서 띳송뎃쩬 국왕 임석하에, 중국의 선승 마하연 스님과 인도의 까말라실라 스님이 벌인 논쟁이다. 이걸 알아두시고. 한국 불교에는 도의국사가 있었지요. 도의 국사가 선불교를, 선을 중국에 가서 법을 받아왔습니다. 1200년 전됩니다. 지금부터 티베트 불교에는 까말라실라 라고 하는 스님이 티베트 불교의 틀을 잡아준 인도 스님입니다.
티베트 불교에는 잊을 수 없는 대단한 은인입니다. 선종 중심의 한국불교는 신라 말, 도의국사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대승 불교 가운데 밀교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티베트 불교는 까말라 실라 스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도의국사라든지, 티베트의 까말라 실라 스님 등, 이 두 스님은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원류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현지사 신도 분들은 참선도 하셨지만, 그 참선에 대한 회의를 갖고 다시 우리 칭명염불로 들어온 분들도 더 있는 걸로 압니다. 인도 불교와 중국 선종의 역사적 충돌이 쌈예사 논쟁입니다. 성불의 방법상 견해를 놓고. 일대의 격론을 벌인 법론이었습니다. 법전이었습니다. 이걸 우선 알아두십시오. 선종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주장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마음이 부처니까 그저 마음 마음, 안으로 내관해가지고 마음을 보아라 그거요. 그래서 마음자리 하나 딱 깨쳐버리면 그러니까 텔레비젼도 보지 말고, 책도 보지 말고, 신문도 보지 말라고 그럽니다. 선방에서는요. 이 마음 딱 하나만 깨쳐버리면 심즉시불이오, 붓다요, 부처요,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돈문 그럽니다. ‘몰록’ 그럽니다. 오, 돈오, 몰록, 깨쳐버렸다. 돈오 그런데 돈문에서는 돈오 돈수가 있고 돈오 점수가 있어. 돈오 돈수라는 말은, ‘몰록’ 깨쳐버리면 억겁의 습도 다 제거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말이 안됩니다. 돈오 점수는 말이 됩니다. 돈오 점수는 깨쳤어도 다생겁으로 익혀 온 습이라든지, 기라든지, 탐진치는 닦고 닦아서 씻어내야 한다는 거요.
그래서 돈문에는, 돈오돈수가 있고, 돈오 점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돈점 지금 돈점 논쟁을 이야기했는데, 돈은 오, 깨달았다고 해서 거기가 부처가 아니라는 것, 아라한도 아니라는 것, 진짜로 수행해 가서 증오해야 아라한이 된다는 것, 아라한은 다시 사람 몸을 받아와 가지고 보살과를 이루지요. 보살도 사람 몸을 여러번 받아와서 바라밀 수행을 하고, 보현행원을 다 하면 붓다가 된다는 것. 요 정도 알아두시고 우리 현지사의 불교 사상과 수행법은 정말로 괄목할 만한, 평가할 만한, 역사가 평가할 만한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해주는 그러한 불교다. 벌써 <존평>이 나왔지요. 벌써 1년밖에 안되었는데 <존평>이 나왔지요. 의식 있는 훌륭한 학자들은 이거다 그러지요. 우리 선불교는 현지사 불교 사상을 많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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