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탄생 100주년, 문학적 자산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④ 고향 고창, 어떻게 투영됐나 기사승인 2015.08.24 21:48:39
- 자신이 만나고 접한 마을 사람들 삶 고스란히 / 동생 서정태 옹 "어린 시절 들은 구전도 영향"
▲ 미당 서정주가 살던 ‘질마재 마을’ 전경.
철학자 하이데거는 ‘철학을 고향에 대한 향수’라고 정의했다. 하이데거가 정의한 철학과 마찬가지로, 미당 문학에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드리워져 있다. 실제로도 미당 문학의 바탕에는 고향의 정서가 듬뿍 담겨 있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유년시절 외할머니가 해주던 옛이야기와 고향의 구전설화가 스며든 시집 <질마재 신화>, 주모(酒母)와의 슬픈 추억이 담긴 ‘선운사 동구’<동천> 등은 ‘고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당이 묘사한 풍광이 살아있는 곳 고향 ‘고창’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그 곳에는 미당의 동생인 서정태 옹(93)이 1989년 귀향해, 형의 생가 바로 곁에 초가삼간, 우하정(又下亭)을 지어놓고 산다. 그를 찾는 사람들의 용건은 대부분 그의 형 서정주이기에 항상 말을 전하는 사람의 위치로 비켜 있을 터지만, 지속적으로 미당을 찾는 사람들과 교우하고 있다. 21일 본지기자의 취재에 동행했던 김동수 미당문학회 회장도 서정태 옹과 교분을 유지하는 한 사람이다.
이날은 서정태 옹 역시 취재에 동행해 미당의 생애와 관련된 장소와 그가 시집에 형상화한 곳곳을 설명해주었다. 그의 집에서는 방문만 열고 북쪽 방향에 시선을 주면 <질마재 신화>의 모티브가 된 질마재가 보인다. 질마재. 산굽이를 따라 구불구불 길게 뻗은, 소나 말 안장을 닮았다는 언덕이다. 서 옹의 안내를 따라 가는데도, 길이 구불구불해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덕의 정상에는 형 내외와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묘소근처에는 잡초가 제법 길고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서 옹에게 ‘혹시 시묘살이 하는 것 같지 않냐’ 는 질문을 하니, 팔자려니 은근히 즐겁다고 했다.
질마재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소요산을 등지고 있는 미당 시문학관이 보인다. 질마재길이 시문학관까지 잇닿아 있는데, 차로 5분 내외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미당의 유품과 친필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어, 미당의 생애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문학관과 인접한 개울을 건너면 다시 미당 생가가 나온다. 생가의 담장은 낮게 둘러쳐져있고, 초가집 한 채와 창고가 덩그러니 서 있다. 그 사이에 위치한 마당에는 미당이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상가수의 소리’)’라고 일컫던 우물이 있다.
미당 생가에서 벗어나 마을 입구 쪽으로 나오면 유년 시절 미당이 다녔다던 서당터가 있다. 바로 그 서당터의 건너편에는 미당 시 세계의 설화적 배경을 제공한 외가가 있다. 서 옹에 따르면 외할머니는 질마재 주변에 맴도는 설화 등을 미당에게 들려주며 시적 모티브를 제공했던 사람이다.
외가의 오른편에는 배 모형의 전시물이 있고, 앞 벽에는 바다와 초가집이 그려져 있고, 시 ‘해일’이 적혀져있다. ‘일찍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오지 않던 남편’을 기다렸던 미당 외할머니의 심정을 떠오르게 한다.
△슬픈 사연 간직된 ‘선운사 동구’
▲ 서정태 옹(왼쪽)과 김동수 미당문학회 회장이 지난 21일 질마재 언덕에 있는 서정주 묘소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
미당이 남긴 절창(絶唱)중에 ‘선운사 동구’는 국민 애송시의 하나다. 이 시에는 슬픈 일화가 깃들어 있다. 송하선 우석대 명예교수가 쓴 <서정주 예술언어>에 따르면 미당은 선운사에 갔을 때 어느 주막에서 취중에 한 예쁜 주모를 본다. 그 후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뒤 다시 가보았더니 주막은 잿더미로 변하고 주모도 없는데, 그 잿더미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반기더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실제 사연은 시 ‘아버지 돌아가시고<팔할이 바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미당은 1942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고향에 내려간 길에 선운사에 들렀다. 어느 이슬비 내리는 가을 오후에 ‘길가에 실파밭 건너 오막살이 주막’에 들어가 약주를 찾았다. 주막에서 나이 사십 쯤 되보이는 주모와 만나 술을 마셨는데, 얼얼해진 주모가 육자배기를 들려줬다. 그 노래는 미당에게 진솔하게 전달됐다. ‘내 생애에서도 이것이 최고 정상이었네’ 라고 평했다. 주모는 떠나는 시인에게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오, 이~’ 했다. 미당은 술에 취해 독일어 ’이히 리베 디히(난 널 사랑해)’를 연상했다. 세월이 10년 정도 흘러 미당이 그 주막을 다시 찾았는데 한국 전쟁 때 주모와 가족이 빨치산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빨치산 토벌에 나선 경찰들에게 밥을 죄어 목인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미당은 시에서 “그 주막도 불태워져 버리고 뒤에 내가 보았을 땐 그 실파만 남았더군. 그래 나는 그 뒤 선운사의 내 시비에 새긴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 그 육자배기 소리를 담아보았지”라고 밝혔다.
서정태 옹은 “시에 나온 대로 주막집 없어진지 오래됐다” 며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이 식량 얻으러 내려와서 불질러버렸다”고 말했다. 실제 고창군 부안면에 있다고 추정되는 주막터를 찾아보니, 음식점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고창’
▲ 미당 시의 설화적 근원이 된 외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고창’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서정주의 시 세계는 고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습니다” 논문 ‘서정주의 신라정신과 남한 문학장’으로 지난 2013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김익균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미당의 고향인 고창은 자신의 시 세계의 설화적 배경을 제공한 외할머니와 구분될 수 없다. 서정주의 고향 고창은 외할머니가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자화상)’를 평생 동안 기다리고 있는 공간이다. 이는 미당의 시적 창작동기를 지배하는 원형이 된다.
예를 들어,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동천)’에 나온 구절인 ‘천 살에도 안 죽기로 한 신랑이 돌아오는 풀밭길’ 은 ‘일찍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오지 않던 남편(해일)’과 연결된다. 또 만주에서 들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쓴 ‘신부(질마재 신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 안에서, 첫날 밤 도망가 버린 신랑을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 산화한 여성은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기다리며 고창에서 늙어간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변용한 것이다. 결국 미당의 시 세계에서 외할머니와 고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게 김익균 연구원의 설명이다.
시집 단위로 볼 때, <질마재 신화>는 고창의 ‘질마재’ 주변에 맴도는 설화들과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썼다. ‘간통사건과 우물’, ‘단골무당네 머슴아이’, ‘이삼만이라는 신’ 등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유년 시절에 들은 동네 설화를 기반으로 변형을 한 뒤,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다.
이밖에 고창을 다룬 개별시로는 유년시절에 만났던 네 명의 소녀(섭섭이, 서우니, 푸접이, 순녜)를 그려낸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가<귀촉도>’, ‘수대동시<화사집>’, ‘내 영원은(동천) 등이 있다. 이에 대해 고봉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그의 논문 ‘탈향과 귀향의 형이상학’에서 “서정주의 시 세계는 지속적으로 자기 실존의 근거를 확인하려는 ‘귀향’의지의 산물이다”고 했다. 김세희 saehee0127@jj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