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의 추억
곽구영
올해도 중국에서 발생한 변종 코로나 감기 바이러스로 우리를 아니 세계를 염려스럽게 하고 있다. 한참 발전하려는 한국에게 시련이 찾아오는 것인가? 어떤 물리적, 화학적 현상에도 인과응보라는 진리가 있다. 작금 한국의 경제, 정치 현실에서 통증은 어디에 연유한 것인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독감이었다. 50년이 넘은 이야기다. 1966년 겨울부터 감기로 고생한 추억이 유달리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신종 바이러스다, 변종바이러스다 하여 겁을 주고 매스컴에 도배를 하며 온 나라가 시끄러운 계절이지만, 50년 전 감기도 올해 중국 우한 사태같이 심각하지는 않았고, 증상이 오늘날 독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콧물이 줄줄 흐르고 머리가 찡하며 목에서는 누런 가래가 끊임없이 솟아올랐는데,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겨울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텨온 겨울이었다.
지금은 대구 대봉교회 옆 초라한 사거리 초라한 건물이지만, 당시에는 주변에서 가장 현대적인 3층 건물로 계성고등학교 유도 선생 권수보 선생이 소유한 건물에 대덕목욕탕이 있었다. 1층은 여탕이고, 2층은 남탕인데 2층과 3층을 구별하는 슬라브와 창문도 밋밋하게 하지 않고 중간에 장식을 넣어 한 층이 두 층으로 보이게 설계를 한 것이 특이했다. 내가 다니던 독서실은 그 목욕탕과 작은 골목을 두고 있는 건물 2층이었다. 다닥다닥 칸막이를 한 작은 책상에 고등학교 선후배들과 동네 학생 50명 정도가 좁은 공간에서 끙끙거리며 삼위일체 영어책이나 정석수학을 들여다보던 곳이었다. 점심때가 되면 난방용 마세크탄(동글동글하게 자갈처럼 무연탄을 찍어 만든 땔감) 난로 위에 노란색, 흰색 사각 알루미늄 도시락을 층층이 올려두고 데워먹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또 삼양라면이 처음 나올 때라 어쩌다가 용돈이 생기면 난생 처음 별난 맛을 보게 된 곳이 그 독서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 겨울방학이라 공부를 오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에 따라 하루 잠은 5시간으로 한정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코가 멍멍하고 머리가 찡하더니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요즘같이 훈훈한 독서실이 아니지만 연탄난로만 겨우 있는 횡한 곳이라도, 유도나 태권도를 배워 몸을 단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기쯤은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입시 공부하느라고 건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몇일이 지나도 낮지를 않았다. 기침을 하면 노란가래가 목에서 계속 나오는데도 병원에 가지를 않았으니 참 미련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는 선입관 때문에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칠까 알리지도 않았다. 휴지가 제대로 없는 시절이었으니 신문지로 얼굴을 닦고 나면 시꺼먼 신문 활자 기름이 얼굴을 어지럽혔다. 콧물을 처리하느라고 변소에 들락거리면서 수도물로 씻던 기억이 난다. 독서실에서 기침을 하면 옆 좌석에 옮긴다고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라, 다행히 아무도 기침한다고 주의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요즘 같으면 따가운 눈총과 함께 거친 항의가 들어오겠지만, 당시에는 전염 문제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모여서 장난스럽게 떠들다가 소리가 한참 커지면, ‘좀 조용히 합시다.’ 소리 한번 지르면, 모두 조용하던 시절이었다. 나도 조용하라고 소리 지른 때가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떠든 학생은 최근에 알고 보니 1년 선배였는데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있었다. 내 기침 소리가 커서 그들도 꽤나 시끄러웠을 텐데 거기에 대한 항의는 없었으니 큰 다행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기침소리인지 떠드는 소리인지 학생들이 웅성거리면서 창밖을 보고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조용해지겠지 하고 다시 책장에 눈을 돌렸는데 계속 시끄럽다.
무슨 일인가 하고 틈에 끼어서 창밖을 보니 건너편 일층 목욕탕 창문에 하얀 수증기가 끼어있고 그 너머로 여자들의 맨몸이 슬쩍 슬쩍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당연히 젊은 총각들이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웃음을 참느라고 모두 입을 막고 눈이 동그래져서 서로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증기가 많이 끼면 창이 흐려져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만 보자하고 학생들을 흩어 내보냈지만, 다음날 그 시간쯤이 되면 또 창가에 모여든 학생들이 있었다. 평생 처음 여체를 본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하다면 양심을 속인 일은 아닐 것이라 고백한다. 공부가 손에 잡힐 턱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독서실 주인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목욕탕 창문을 가려버리고 우리 독서실 쪽 창문도 가려버렸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서 독서실에 나가지 않았는지 다닐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었는지, 독서실의 추억은 열흘이 넘게 지속되던 감기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겨울이면 꼭 아이들에게 맞는 사물탕 한약을 한재씩 지어주시던 어머니의 덕분인지 개학과 동시에 봄이 오니 역시 감기는 소리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도 고향의 감기는 쉽게 지나갔다.
그 이듬해 3학년 겨울이 들어서자 서울로 대학진학하려는 여러 친구들이 방학도 되기 전에 미리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옮겨갔다, 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핑계였는지, 돈이 많아 호화스럽게 공부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나도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우리 형편에 하숙할 비용은 엄두도 못 내었다. 공무원 하시던 아버지가 겨우 사업을 시작하여 한 푼이 아쉬울 때였는데 무슨 하숙이라니, 나는 고학을 해서라도 서울대학을 들어가고 미국유학까지 한다고 작심을 한 터였기에 숙식만 해결하면 되지 꼭 돈이 꼭 많이 들어야 공부하나 싶었다.
아버지를 졸라 서울 간다고 돈을 조금 얻어 초록색 비닐 돕빠(요즘 패딩보다는 짧고 점퍼보다는 약간 길었다) 하나 입고, 참고서 서너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역에 마중 나온 친척집에서 하루 자고 신문에서 본 독서실을 찾았다. 동대문 지나 고려학원이라고 있었는데, 자체 독서실도 있다고 광고가 났던 기억이 있었다. 비싸지 않는 금액이라 학원도 다니고 잠자리도 해결되니 나한데 꼭 맞는 곳이라고 선택했다. 일단 한 달 치 학원 등록금을 지불했다. 11월 말이라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난로를 피워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명도 어두컴컴한데 난로까지 없으니 난감하였다.
그렇다고 없는 돈에 좋은 데로 옮길 수도 없었다. 일단 버티기로 들어갔다. 다른 학생들은 집이 있으니 밤이 늦으면 모두 집으로 들어가서 잤다. 두 세 명 정도는 나 같은 신세였는지 말없이 자기 나름대로 자리를 뜨지 않고 버티는 것 같았다. 그들도 나와 같이 독서실 책상에 엎드려 밤을 새우거나 의자를 나란히 겹쳐두고 나무침대를 만들어 잠자리를 대신했다.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불기 없는 나무 침대에서 겨울을 나는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정말 아침에 일어나면 어지간한 장골도 1주일만 지나면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다.
1월 중순에 대학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적어도 두 달은 버티어야 했다. 아침저녁 식사는 길가 돼지고기 순대국밥으로 해결했다. 부부가 장사를 하면서 한 달 치 쿠폰을 만들어주어 일단 한 달은 하루 두 끼 식사가 해결되도록 조치가 되었다. 그렇지만 내 형편을 모르는 포장마차 주인이 소주 한잔도 안 팔아 주니 나중에는 나를 싫어했다. 그런데 춥고 어두컴컴한 독서실에서 의자 여러개를 나란히 두고 위에 책을 깔고 돕빠만 덮고 잠을 자면서 버티는데, 보름정도 지나니 아니나 다를까 기침이 나고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병원에는 안 간다고 작정을 했고 젊음으로 버티는데 역시 콧물과 흰 가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독감으로 발전한 것인지 기관지염증 같은 노란 가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경험상 나는 보통 몸이 차거워지면 독감이 걸린다고 믿는다. 추운 날 바깥에서 특히 밤에 오래 있으면 꼭 감기가 걸린다. 그리고 일주일 뒤 진하고 노란 가래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면서 묽어지면 일단 일주일 안에 낫기 시작하는 징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해 겨울 감기는 대학교 합격 소식과 함께 물러갔다.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국내정치 감각과 국제교섭능력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다. 세계 5대 무역국이자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과학기술면에서 일본도 놀랄 정도로 제조와 건설부문이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고, 스포츠나 문화 예술분야에서도 한류는 큰 물결을 타면서 세계 각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사회와 정치 현실을 본다면 이상하리만치 홀기차면서도 매우 안타까운 면을 볼 수 있다. 정치를 표방하는 각 당이나 단체마다 마치 성장통을 하는 청소년처럼 천방지축 주장이 백가쟁명을 이루고 있으며, 가짜뉴스가 인터넷에 횡횡하며, 잠재적으로 어떤 폭력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매일 보고 있다. 지금 한국 역사는 분명히 창조적인 면을 보이면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표현한다면 성장 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청소년도 성장하는 환경이 좋지 않으면 평생 기억하게 되는 아픔을 겪는 것과 같이. 그런 아픔이 다행하게 감기 정도로 잘 극복될 수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감기를 떨구는 민간요법을 다 아시겠지만, 30대에는 소주에 고추가루 진하게 타서 취할 정도로 많이 마시고 따뜻한 방에서 땀을 내고 푹 자면 거짓말 같이 코가 시원하게 뻥 뚫리고 가뿐해지면서 감기가 나았다. 그러나 몸이 약해지는 50대부터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드디어 병원에 가서 주사한대 맞아야 낫는 것이다. 아직까지 독감예방주사는 맞지 않고 있는데, 다들 미련하다고 한다. 사실 이번 겨울에도 진한 감기로 고생하고 친구 병원에 가서 혈관주사 맞고 일주일 약을 먹고 나서야 회복기로 들어갔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떤 해에는 전기장판에 40도 정도 올려놓고 맨살로 잠을 청해서 온 몸이 젖도록 땀을 흘려 나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 뜨거울 정도로 몸을 굽는 것이 내게는 꼭 필요하다고 믿는 구석이 있다.
독감이나 감기도 걸린 원인이 있다. 추운 사무실에서 밤늦도록 3일간 실내화만 신고 서류작업을 한 적이 있었고, 이 겨울은 따뜻하다고 밤늦게 길가에 앉아 막걸리 파티를 하는 만용을 부린 것이 원인이었다고 믿는다. 다행히 내가 개발한 황기차를 2년이 넘게 복용한 덕분에 몸이 가볍고 젊어진 것을 느끼지만,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면 하늘은 꼭 내게 벌을 내린다는 것을 깨닫는 겨울이다. 올해와 내년에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정치 일정이 숨 가쁘게 다가오고 있다. 모쪼록 우리나라 경제, 과학기술면의 발전 수준과 발맞추어 시민들이 정치문화면에서도 자만하지 않고, 슬기롭게 국민의 삶을 밝힐 좋은 정책을 개발하기를 기대한다. 비록 감기에 걸리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는 청년처럼 조화로운 한국,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힘차게 움직이는 한국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 나라가 감기몸살 때문에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기를 빈다.
(2020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