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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68. [역경의 열매] 이승만 (1-29) “여기는 평양 상공”… 문득 1950년 10월 악몽이
“어찌해서 이토록 악은 성하고 의인은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속으로만 내지르던 절규였다. 열아홉. 채 여물지 않은 주먹은 하도 꼭 쥐어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씹고 또 씹어 입술에서도 피가 났다. 그래도 밖으로 외칠 수는 없었다.
오후 4시 반. 중국 선양을 한 시간 반 전에 떠난 고려항공 여객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향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몇 번째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서른 번이 넘었다는 것밖에는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지난 16일 평양을 방문했다. 지난 10여 년간 서울에서 북한 장애인 돕기 사역을 해 온 미국장로교(PCUSA) 신영순 선교사와 함께 북한의 고아원과 장애인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간 것이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이렇게 평양 시내를 내려다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지난 기억의 조각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 중 빠지지 않는 것이 1950년 10월의 나날들이다. 며칠을 실성한 사람처럼 들로 산으로 다니며 시체 구덩이마다 뒤지던 어머니가 종내 50여구가 뒤엉킨 가운데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날, “어떻게든 복수하겠다. 이렇게 잔인한 자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이를 갈며 뜬 눈으로 지새던 밤들, 그나마 시신을 찾아 장례라도 치른 것이 어디냐는 친지들의 위로를 받으며 장지를 내려오던 날…. 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차마 내지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 안으로 박혀 들어갔던 억울함과 분노는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응어리졌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습니까? 그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팔순을 바라보는 나는 열아홉의 나에게 요한복음 9장의 이 말씀을 전하고 싶다. ‘네가 하고 싶은 질문을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고 있다’고 일러주고 싶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만나신, 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그를 보며 제자들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이 사람은 왜 맹인으로 태어나야했습니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태어나 자금까지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해 보지 못했을 이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똑같이 힘없고 가난했을 그 부모의 죄입니까? 왜 이리 불의한 세상입니까!”
젊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절 내내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그 해 12월 남동생 승규의 손을 잡고 피란길에 나서며 어머니와 네 여동생을 돌아보던 날, 배고픔과 추위로 푹푹 쓰러지는 사람들 속에서 승규를 업고 걷던 날, 진해에서 입대한 해병대 막사에서 깨진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바닷바람에 몇 번이나 몸서리치며 잠 깨던 날들이면 핏발 선 분노와 함께 다시 의문이 솟아올랐다.
터널 속을 걷는 듯했다. 과연 이 어둠에 끝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나아가야 했다. 마흔 아홉에 순교하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은 있지만 이룰 방법을 몰랐다. 학교에 가고 싶어 무작정 탈영도 했다. 2년이 넘도록 트럭 뒤에 타고 다니며 문산에서 서울까지 신학교 야간 과정을 듣기도 했다. 터널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다는 막연한 신념에 기대어 무작정 걷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질문의 답은 내 안에 이미 들어 와 있었다. 내가 구한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한 답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승만 (1) "여기는 평양 상공"… 문득 1950년 10월 악몽이
* [역경의 열매] 이승만 (2) 축제 분위기 평양 그러나 나는 눈물만…
* [역경의 열매] 이승만 (3) 고난 통해 남북 화해의 사명 깨달아
* [역경의 열매] 이승만 (4) 믿음의 아버지 슬하 연단의 어린시절
* [역경의 열매] 이승만 (5) 일제말 학도보국대로 끌려가 강제노동
* [역경의 열매] 이승만 (6) 해방 후 반공시위 주도했다 퇴학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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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31년 평양 출생, 대한민국 해병대 근무, 미국 데이비드앤앨킨스 대학, 루이빌 신학교, 예일대 신학부 졸업, 시카고 신학대학 종교사회학 박사,미국장로교(PCUSA) 총회장,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 클린턴 대통령 백악관 종교자문위원 역임
***[역경의 열매] 이승만 (2) 축제 분위기 평양 그러나 나는 눈물만…
평양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16일, 내가 도착한 날은 북한이 3대 후계 구도를 세계에 알린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이 1주일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번 방문 기간에 만난 사람들은 전에 없이 자신 있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바깥 세계에서 좋아하건 말건 이들로서는 그동안 불안정했던 후계 구도가 안정된 것에 일단 안심하고, 새로운 도약에 대한 기대를 품는 듯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눈을 크게 떴다. 여성들의 옷차림이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키가 커 보인다 했더니 앞쪽에도 굽이 있는 상당히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표정도 발랄했다. 젊은 여성들의 눈매가 반짝반짝해 신기했는데 놀랍게도 쌍꺼풀 수술이 대유행이라고 했다.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소속 인솔자는 “그 정도는 여기서도 쉽게 할 수 있디요”라고 했다.
함께 간 미국장로교회(PCUSA) 신영순(미국명 Sue Kinsler) 선교사와 함께 1주일간 조선장애인련맹의 안내로 평양과 원산, 사리원의 고아원과 장애인시설 등을 둘러봤다.
매번 북한 방문 때마다 그래왔듯 함흥에 사는 여동생과 친척들을 평양으로 불러 만났다. 이번이 특별했던 것은 인솔자 참관 없이 방 안에서 우리끼리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동강변 노동신문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해방산려관’에서였다.
네 명의 여동생은 1950년 겨울 내가 집을 떠날 때 14세, 10세, 8세, 그리고 생후 6개월이었다. 그나마 1978년 동생들과 재회해 자주 만나 왔으니 여느 이산가족들에 비하면 엄청난 복을 누린 셈이다. 그래도 마주할 때면 잃어버린 28년의 허전함은 늘 우리 머리 위로 맴돌았다.
나는 피란을 내려간 직후 해병대에 복무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미국에 유학 가서도 한동안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품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볼 수 없으며, 남동생과 나는 이렇게 힘겹게 살아 왔다고 가슴이 터지도록 원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로 살게 하시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인생에서 받은 가장 큰 축복이다. 흙바닥에서 구르듯이 살아왔다지만 순간순간 뜻하지 않은 도움이 있었고, 귀한 기회들이 다가왔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으나 내가 깨닫지 못하자 어느 날 쇠망치 같은 강한 깨달음을 내리셨다. 넓디넓은 세상에서 미국, 그 중 켄터키에서, 루이빌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사역했기에 나는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을 접할 수 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만났다.
“우리가 생명을 내 놓고 하고 있는 인권운동은 다만 억압을 당하는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억압자인 백인들도 함께 해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킹 목사의 이 연설을 들은 날 그간의 세계관은 깨져 없어졌다. 그리고 다음 말은 내 삶을 바꿨다. “피해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이었다. “피해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똑같이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전의 낡은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이 때 나는 평생 품어오던, “나는 누구의 죄 때문에 이 고난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확실히 얻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다”(요 9:3)
***[역경의 열매] 이승만 (3) 고난 통해 남북 화해의 사명 깨달아
1950년 12월 3일 어머님과 누이 넷을 남기고 피란을 떠난 후 처음 북한을 방문한 것은 아직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8년 봄이었다. 그 이후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또 북한 기독교 대표들을 미국으로 여러 번 초청하는 과정에서 내게는 한동안 ‘친북좌파’라는 딱지가 붙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공산당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헤어졌고,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한 세월을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다녀오면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비참한 모습과 식량난에 대해 생생하게 전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 소식을 동력으로 북에 대한 미움과 비판이 계속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말을 자제하고 있다. 내 사명은 ‘화해자’가 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화해하려고 찾아간 사람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식탁에 먼지가 많다는 둥 그릇에 얼룩이 있다는 둥 흠을 잡아서야 화해를 할 수 없다.
나는 북에 갈 때마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 긍정적인 모습, 좋은 모습을 보려고 노력해 왔다. 지난 16∼23일 방문했을 때도 고아원, 맹아학교, 농아학교, 장애인 훈련시설 등을 둘러보며 어린이와 장애인들이 인간적인 환경 아래 있다는 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 또 현지 사역자들의 헌신적 삶과 우리의 적은 도움에도 크게 감사하는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특히 황해북도 사리원에 위치한 어린이 시설들을 방문했을 때, 예닐곱 살 어린이들 십수 명이 방문객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은 작긴 했어도 똘똘하고 당차 보였다. 단체 생활을 하며 교육을 받은 때문인 것 같았다.
다만 어떤 눈동자에는 뭔지 모를 결핍이 엿보였다. 부모 슬하에서 자라지 못한 탓인지,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여든이 다 된 나와, 이곳 사리원에서 살고 있는 예닐곱 살 그들은 결국 같은 땅에서 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듯이 그 아이들의 눈동자를 오래오래 바라봤다. 나도 그들처럼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안고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만 나의 빈 구멍은 이제 채워져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기 때문도, 물질적 풍요 속에 살기 때문도 아니다. 내 삶의 의미를, 사명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란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가리키며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하셨다. 이 말씀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와도 같다.
내가 늘 품었던,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하나’는 질문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인생에 고난이 있는 이유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내 삶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나는 화해자의 사명을 받았고 감사하게도 남북 화해, 미국 소수인종 인권 운동, 장로교 연합 등 과정에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직접 눈 먼 자를 즉시 고쳐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발라주신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다. 눈 먼 사람이 어떻게 실로암까지 갈 수 있었을까? 분명 도움의 손길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이나 지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제자들이 나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숱한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은 나 또한 제자가 되어 도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4) 믿음의 아버지 슬하 연단의 어린시절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은 독특한 연단의 시기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어떤 길이 옳은가’에 대해서 일찍부터 생각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길을 쉽게 갈 수 없도록 길목마다 막으셨다. 그 때문에 자연히 어린 날부터 내 마음속에는 울분이 쌓였다. 똑같은 환경이어도 3남4녀 중 나만 유독 분을 못 참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모태에서부터 그런 성정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독교적 뿌리는 할머니 김효신 전도사께로부터 시작됐다. 평양 서성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셨던 할머니는 신앙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큰 오해와 핍박을 받았다. 어떤 날에는 집에도 들어갈 수 없어 선교사 댁에 머물곤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생각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를 외치시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한번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홍수 때 집으로 들어온 물을 퍼내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평양 보통강 근처에 사셨기에 장마 때면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믿음이 저리도 좋은 할머니를 하나님은 왜 힘들게 하실까’ 생각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가난과 핍박 속에 살 수밖에 없나보다. 그래야 믿음이 더 뿌리를 깊이 내리나보다’ 하는 생각이 시나브로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의 두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됐다.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경신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18세의 나이로 3·1 운동을 경험하고 민족 독립에 대한 강렬한 사명에 눈을 뜨셨다고 한다. 독립만세 사건으로 일경의 주목과 감시가 심해지자 한동안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해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셨고, 그 후 평양 숭실학교에 편입했을 때는 ‘학생의열단’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해주 형무소에 투옥되셨다. 1년 후 석방은 되었으나 학업의 길이 막히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중앙대학 예과와 상과를 졸업하셨다.
이때 어떤 계기인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 공부할 결심을 했고, 귀국 즉시 경성성서학원, 현재의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셨다.
졸업 후 충남 금산 읍내의 금산성결교회 초대 교역자로 파송받아 가정을 이루고 목회하며 사신 3년간이 아버지 인생에서는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거세지자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가셨고, 이때부터 늘 피신을 다니셔야 했다.
이런 처지니 자식들로서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살림은 자연히 어머니 몫이 됐다. 다행히 외가가 부유해서 원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늘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외가에 드나드셔야 했다.
내가 열 살 되던 1940년, 두 살 위인 승욱 형이 당시 명문이던 평안공업학교에 합격했다. 가족 모두는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외가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외삼촌은 “아니,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학교를 보내려고 하지?” 하고 코웃음을 치셨다. 평소 얌전하셨던 어머니는 이때만큼은 분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라도 공부시킬 테니 염려 마세요!” 하고 소리를 치셨다. 곁에서 이를 지켜봤던 나는 너무나 통쾌해서 짜릿한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애쓰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는 늘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한 뒤 효도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인생길은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5) 일제말 학도보국대로 끌려가 강제노동
요즘도 초여름 햇살이 따사로울 때면 냇가를 뛰어다니며 개구리를 잡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가롭던 어린 시절의 추억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기억 속 나는 열네 살이었다.
1944년 형의 뒤를 따라 평안공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일제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 수업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얼마 안 돼 수업은 전면 중단됐고 학생들은 모두 ‘학도보국대’로 끌려가게 됐다.
가족을 두고 떠나야 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경찰을 피해 숨어 다니셨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그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다. 그런 마당에 집을 떠나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곧 처하게 된 현실도 심각했다.
학도보국대는 학교별로 조직된 노동부대로 군수공장이나 토목공사장에 투입됐다. 나와 친구들은 평안북도 안주의 군사비행장 건설장으로 갔다.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삽과 괭이를 번갈아 사용하며 흙을 파내고, 파낸 흙을 등에 지고 날랐다.
나중에 아들을 키울 때 열서넛 된 아이의 팔과 등을 새삼스럽게 쓰다듬어 본 일이 있었다. 아직 여리고 낭창낭창한 뼈와 말랑말랑한 살을 쥐어보면서 학도보국대 시절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해 본 것이다.
과도한 노동량만 문제가 아니었다. 위생시설이 전무한 숙소와 적은 양의 끼니는 어린 학생들을 과로와 영양실조, 합병증 등으로 푹푹 쓰러지게 만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짬 날 때마다 스스로 무엇이든 찾아 먹어야 했다.
친구들과 휴식 시간마다 산으로 들어가 아카시아 꽃을 훑어 먹고, 논가의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다. 초여름 햇빛을 받으러 논둑에 나왔던 개구리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개구리를 잡아야 내가 산다는 절박함이 그 장면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1년 가까이 지나서야 공사가 끝났고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꿈에도 그리던 집이고 고향인데 돌아가 보니 녹록하지 않은 삶은 마찬가지였다.
일제 말기에 교회 지도자들이 겪은 핍박은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말로 성경을 가르치다 잡혀간 주일학교 교사들이 몇몇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목사님이 잡혀간 빈 강단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교회마다 흔한 풍경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문밖교회에도 형사들이 쳐들어와 우리말 찬송가에 먹칠을 하며 부르지 못하게 하고, 설교 내용을 적으며 설교자를 위협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를 바라보는 내 안에는 일본인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럴수록 금지된 것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대표적인 것이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라는 찬송을 몰래 외워 교인들과 부를 때면 억눌렸던 신앙의 용기가 고개를 들곤 했다.
1945년 8월이 다가왔다. 이때쯤 나는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철도국 기사로 근무하던 형과 어머니는 아버지 뒷바라지를 위해 집을 떠나 있는 일이 많았다. 남동생 승규와 여동생 세 명은 다들 어렸기에 내가 책임지고 먹여야 했는데 문제는 양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빈 쌀독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지을 때면 “학도보국대에 있을 때는 집에만 오면 고생 끝이려니 했는데…”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다 폭격기가 온다고 사이렌이 하루에 몇 번씩 울리더니 급기야 폭격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피란을 위해 평양을 떠나기 시작했다. 동리 반장도 피란을 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동생 넷을 데리고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5일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6) 해방 후 반공시위 주도했다 퇴학 당해
1945년 8월 15일. 사방에서 폭격 소리가 들렸다. 집 앞에 나가보니 곧 더 큰 폭격이 올 거라는 소문이 들려 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겠다” 싶어서 동생들을 데리고 시골로 피란을 가기로 결심했다.
일단 큰 여동생 경신이에게 “동생들 옷 갈아입히고 피란 갈 준비를 해놓아라” 하고 일러준 뒤 옆 동네에서 약방을 하는 외삼촌 댁으로 달려갔다. “피란을 가야 하는데 아무 가진 것이 없습니다. 어려울 때 양식이랑 바꿀 수 있게 약을 몇 첩만 지어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얻은 약첩을 안고 정신없이 뛰어 집으로 돌아갔다.
가 보니 마당에 동생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옷 보퉁이를 하나씩 안고 올망졸망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맥이 탁 풀렸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어린 것들을 안고 길바닥에 나섰다가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옆집 아주머니가 “승만아, 승만아!” 하며 뛰어 들어오셨다. “피란을 가더라도 오늘 정오가 지나고 가거라. 무슨 중대 뉴스가 있단다!” 하는 것이다.
그때는 라디오를 들으려면 파출소까지 가야 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동네 사람들이 줄지어 파출소로 향했다. 나도 그 틈에 끼여 걸어가자 곧 파출소 입구에 일본 경관들이 부동자세로 선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당황스럽고도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곧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귀청을 찢는 ‘만세’ 소리 가운데서 나는 “피란 안 가도 되는구나. 동생들 잃어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한달음에 집으로 가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코흘리개 동생들은 눈만 멀뚱멀뚱했다. “이제 곧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오신대” 하자 그제야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내 말대로 곧 아버지 어머니 형이 집으로 돌아왔다. 실로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여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이후 나는 평안공업학교로 돌아갔는데 이때도 학업에 매진할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평양은 공산당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대립으로 흉흉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특히 교회와 공산당의 대립이 심했다. 독립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기독교인들이 또다시 첫 번째 탄압 대상이 됐고 모든 교회 집회는 감시의 대상이 됐다. 이에 반발하는 목사들은 구속됐다.
이때 조만식 선생이 세운 기독교민주당에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가입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맨 흰 띠와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조 선생이 거리 연설을 할 때면 나를 비롯한 기독 청년들은 그 열정에 감화돼 함께 조국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공산 정권의 탄압과 점령군인 소련군의 민간인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면서 민심은 갈수록 어수선해졌다. 학교들마다 반공 시위가 시작됐다. 나도 평안공업학교 학생간부로서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합해 전 시내를 장악하고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일도 빈번했다. 다치는 학생들도 속출했고 심지어 수류탄이 터진 일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46년 5월 평안공업학교는 나를 비롯한 5명의 ‘주동자’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이때부터 내 학교 이력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졸업다운 졸업을 하기까지 무려 1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7) 1949년, 공산 정권 하에서 성탄축하음악회
1946년 5월 반공 학생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후 몇 달간 집에서 지내면서 나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울분을 어쩌지 못해 자주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겨야 했다. 정의로운 일을 했는데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손을 잡고 편입학할 수 있는 학교를 알아보러 다니셨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가까스로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승낙을 받았는데 조건이 있었다. 학생 데모에 일절 참가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라는 것이었다. 호기롭게 거절하고도 싶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이는 곧 더 큰 불행으로 돌아왔다. 그 학교에서 나를 사상이 불순한 학생으로 분류하는 바람에 졸업을 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할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이대로 학업을 중단해야 한단 말인가!” 불과 열일곱 살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는 좌절감이 엄습했다.
유일한 출구는 지금의 교회 중·고등부인 ‘소년소녀면려회’ 활동이었다. 내가 다녔던 서문밖교회를 비롯해 평양시 교회들의 소년소녀면려회가 모여 연합회를 구성했는데 여기서 총무로 선출돼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이 연합회에는 특히 퇴학생들이 많았다. 공산당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거세지고 있어서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 쫓겨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연합회 모임에서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형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학교’라는 말만 듣고도 귀가 번쩍 뜨여 따라간 곳은 성화신학교였다.
“이런 시국에 신학교가 수업을 하고 있다니!” 하며 신기해하는 나에게 학교는 선선히 입학 허가를 내 줬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47년 봄 신학생이 됐다.
목사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한 번도 목회자의 길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였다. 아버지의 사역으로 인해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이 늘 안타까웠기 때문인지 “열심히 공부해서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께 효도하자”는 것이 유일한 인생 목표였다. 은연중에는 내 불뚝불뚝한 성품이 목회자와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발걸음은 결국 신학교로 항했다. 하나님이 다른 길은 모두 막아놓고 이 학교로 나를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 뜻대로 나는 이 학교에 다닌 것을 계기로 인생 방향을 완전히 틀게 됐다.
평양 수옥리 정의학교의 담 밑에 위치한 성화신학교 교사는 아주 작고 초라했다. 건물은 교실로 쓰는 두 동과 예배실이 다였고 운동장도 비좁았다. 600여명의 학생들은 3부제로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배움의 열기는 대단했다.
예과 1학년으로 입학한 나는 학교의 신앙적 분위기에 금세 젖어들었다. 진리, 성령, 평화, 환희, 봉사 등 이전에는 잘 몰랐던 복음의 가치들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본과 1학년이었던 1949년 말 학교는 성탄축하음악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나도 참여한 합창단은 몇 달간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연습했다. 당시 인근에 ‘메시아’ 전곡 악보를 가진 이가 없어 지휘자 이재면 목사님이 수소문 끝에 함흥까지 가서 구해 오기도 했다. 12월 16일 남산현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2000여명의 청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할렐루야’를 합창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복음은 이미 공산 정권을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환희가 가득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음악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지 한 달이 채 못 돼 학교는 강제 폐교를 당하고 말았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8) 목사 아버지 공산당에 끌려가 순교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한 번은 퇴학을 당해, 한 번은 학교가 폐교돼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일은 내게 큰 좌절감을 줬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두 번의 공백기는 내 인생에서 아주 중대한 시기였다.
평안공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을 때 집에서 아무 할 일이 없던 나는 아버지께서 숭실전문학교에 다니실 때 쓰던 영어책과 사전을 가지고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다. 공산 치하의 이북에서는 외국어는 오직 소련어만 배울 수 있었고 영어를 배우다 발각되면 가르친 사람도 배운 사람도 모두 처벌을 받았다. 이때 영어를 파고든 것은 내 나름의 소극적 저항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께서는 내 심정을 이해하셨는지 영어 선생님을 모셔와 개인 교습을 시켜주셨다. 변변한 교재가 없으니 영문법책 한 권을 통째로 암기했고, 나중에는 사전까지 외웠다. 밤이나 낮이나 머릿속에서 영어 문장을 조합해 보고,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성화신학교가 폐교 당했을 때도 나는 영어 선생님 댁에 몰래 드나들며 공부했다. 불심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영어 책을 숨겨 들고 앞문으로 들어갔다 뒷문으로 나와야 했을 만큼 위험했는데도 나는 무작정 영어에 몰두했다.
그때 익힌 영어는 몇 년 후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재산이 됐고, 소중한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줬다. 한 걸음 앞만 보면서 끙끙대며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 언덕 너머에 새로운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6·25전쟁이 터졌다. 폭격이 점차 심해지자 부모님은 형과 나, 남동생 삼형제만 평양에 남겨둔 채 여동생들을 데리고 평안남도 강서로 피란을 가셨다. 그런데 10월 11일,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들을 보러 평양으로 오셨다가 공산당원에게 붙잡히시고 말았다. 우리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셨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때 평양에 남아 있던 목사들은 거의 그렇게 잡혀 갔다. 훗날 그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에게서 아버지께서 모진 고문과 취조 속에서도 신앙의 의지를 꺾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10월 20일 연합군이 평양에 입성했다. 숨죽이며 지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고 우리를 비롯해 잡혀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그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동으로 서로 뛰어다녔다.
어머니도 희망을 품은 채 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하셨으나 결국은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방공호 속에서 다른 목사들과 함께 사살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셨다.
기가 막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고 나자 비로소 ‘박해’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냥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무참히 빼앗는 것이었다. 내게는 보물인 것을 휴지조각인 양 짓밟아 버리는 것이었다. 인간 자체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지독하게도 잘못됐습니다. 비뚤어졌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까? 전능하십니까? 그런데도 이 고통을 두고만 보십니까!”
통곡하는 어머니와 훌쩍이는 동생들 곁에 앉아서 내색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절규했다. 그런 가운데 마치 속삭이듯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아버지가 못 다 이룬 일을 네가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젓기도 하고 못 들은 척도 해 봤다. 그러나 그 음성에 대한 기억은 마음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내게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됐다. 1950년 12월 3일, 남동생 승규와 둘이서 남으로 피란을 떠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9) 어머니·누이들 평양에 남겨두고 동생과 피란
1950년 12월 3일. 신발을 신고 뒤를 돌아봤다. 열네 살 경신이, 열 살 경옥이, 여덟 살 경주, 태어난 지 반년밖에 안 된 경복이, 그리고 어머니…. 나와 승규는 이렇게 다섯 여자만 남겨두고 집을 떠나야 했다. 전쟁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불길한 소문이 평양을 휘감고 있었다. 전선이 더 어지러워지면 원자탄이 사용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숱한 사람들이 평양 시내를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우리는 동생들이 너무 어려 피란을 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다 함께 남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상황이 남자들에게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셨다. 얼마 전 집을 떠난 형에게서 소식이 없어 불안해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전쟁통에 아들들을 다 잃을까 염려해 피란을 강권하셨던 것이다.
“대동강만 건너가서 이삼 일만 지내고 올게요.”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는데 어머니께서 쫓아 나와서 손을 잡으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서 가라고 재촉하셨는데 어느덧 울고 계셨다.
“너희들이 이제 이렇게 떠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또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니 기도 가운데서 서로 만나자꾸나.”
지나고 보니 그것은 어머니의 예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손을 놓는 순간 뇌리에 남은 어머니 얼굴, 손의 감촉, 눈물어린 목소리는 내 인생의 책에서 접어둔 페이지다. 늘 그 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인생은 뒤로는 걸어갈 수 없도록 돼 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평생의 고통 속에서 어렵게 배웠다.
나와 승규는 성화신학교 선배와 그 가족 등 몇 명과 함께 대동강변으로 갔다. 인산인해를 이룬 피란민들은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리하게 건너려다 강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목격했다. 다행히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배에 끼여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 건너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빈 집에서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새벽이 되기도 전에 폭격이 시작됐다. 귀를 찢는 폭발음과 섬광 속에서 우리는 “중공군이 가까이 왔나 보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등을 떠밀 듯이 폭발음은 계속해서 들려 왔다.
밤새 걷고 화물열차 지붕 꼭대기에 매달려 타고 간 끝에 개성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널찍한 곳마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불을 피우고 큰 깡통에 밥을 지어 먹곤 했다. 우리는 그런 대열에 끼여 한 끼 한 끼 얻어먹으며 버텼다. 다시 남쪽으로 출발해 걷기도 하고 트럭 끝에 매달리기도 하며 겨우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쁨은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불안감만 밀려 왔다.
일행은 흩어졌고 나와 승규는 먼저 월남해 청파동에 살고 있다는 외삼촌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두 다리에 맥이 탁 풀렸다. “이 하늘 아래 우리 형제 둘뿐이구나!”
목적지도 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낯익은 사람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 보였다. 쫓아가 보니 전쟁 직전에 월남했다던 큰아버지였다. 가장 막막한 순간에 큰아버지를 서울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 꿈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큰집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오래 신세를 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을 받았다. 서울에서 만난 성화신학교 동창들이 “유엔군에 자원입대하자”고 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0) 진해 훈련소까지 18일간 목숨 건 행군
평양 집을 떠난 지 20일째 되던 1950년 12월 23일, 다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8일간의 죽음과의 사투가 시작된 날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성화신학교 동창들의 제안으로 나와 승규는 군에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신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아 유엔군에 입대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솔깃해 간 것이었는데, 모병 장소인 국회의사당 앞에 가 보니 ‘방위군’이라는 임시 조직이었다. 방위군은 30명씩 소대를 편성해 훈련소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다 함께 배치된 소대의 훈련소는 경남 진해에 있었다.
하필 가장 추울 때 출발해 오로지 걸어서 가야 했다. 식량 배급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고 일어나면 추위 속을 걸어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성탄절 이브가 됐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마침 한 마을을 지날 때 교회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장로 한 분이 맞아 주셨다.
“저희는 평양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입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럼 저희 성탄예배에서 순서를 하나씩 맡아 주시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탄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따뜻한 예배였다. 예배 후 성도들이 차려 준 음식이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그 교회를 다시 찾아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도무지 위치를 기억할 수 없었다.
강행군은 계속됐다. 큰 길은 정식 군대가 사용하기에 우리는 주로 험한 산길로 다녔다. 안 그래도 추위와 배고픔에 허약해진 사람들이 쓰러져 죽는 일이 속출했다. 조금 전까지 함께 걷던 동료가 죽어가는 일은 공포감도 줬지만 삶에 대한 의지도 줬다. ‘살아야겠다’고 이를 악물며 걷고 또 걸었다.
다만 소대에서 가장 어렸던 열일곱 살의 승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체력은 바닥나고 발에 물집이 생기고 부어서 도저히 걸을 수 없게 됐다. 이를 본 동창들이 승규를 번갈아 업어줬다. 자신들도 생사의 기로에 있으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친구들의 마음은 두고두고 곱씹을수록 감동적인 것이었다.
한 번은 내가 승규를 업고 가는데 남쪽으로 가는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운전수에게 통사정을 해서 승규를 태워 보냈다. 무조건 남쪽으로만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행군 중에 다리를 절며 홀로 걷고 있는 승규를 만났다. 뛰어가 보니 입고 있던 외투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이니? 외투는 어디 있어?” 승규의 대답이 트럭을 타고 내려가다 시골 여관에 묵었는데 여관 주인이 숙박비 대신 외투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전쟁 통에 이 힘없는 자에게서 겉옷까지 빼앗는 자가 대체 사람인가!”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행군 중에 그토록 굶주렸던 것은 몇몇 장성과 지휘관들이 보급물자를 빼돌렸기 때문이었다. 훗날 처벌을 받았다지만 당시 죽어갔던 사병들을 떠올리면 죗값을 치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행군 중에 도움을 받기도 하고 부당하게 착취당했던 일들은 나에게 오래도록 많은 생각을 줬다. 특히 ‘나그네 된 자’에 대한 연민을 가지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을 떠난 지 18일 만에 진해에 도착했다. 다행히 우리와 성화신학교 동창 20명은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 ‘해병대’에 대해서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1) 성경 읽으며 해병대 혹독한 훈련 견뎌
서울에서 방위군으로 자원입대한 후 18일간 사선을 넘나든 끝에 훈련소인 진해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도착했다. 1951년 1월이었다. 그곳에서 해병대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훈련은 제일 세고 가장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지만 보급은 최고로 좋다더라.” 이 말에 나와 성화신학교 동창 중 15명은 “기왕 군대에 들어간다면 밥이라도 실컷 먹게 거기로 가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시험을 보러 경회동 해병대 신병훈련소를 찾아갔다.
간단한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마친 뒤 체력시험이 치러졌는데, 이는 기합을 얼마나 견디는지를 측정하는 단계였다. 시험관은 한 사람씩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두툼한 각목으로 엉덩이를 다섯 대씩 사정없이 내려쳤다. “바지 내려! 허리 구부려! 하나! 둘! 셋! 넷! 다섯!” 시험관의 악쓰는 소리와 퍽퍽 소리는 다음 대기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나님! 견뎌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며 한 대씩 매를 견뎌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동생 승규 차례가 된 것이었다. 방위군 대열에서 낙오할 뻔한 아이를 천신만고 끝에 데려왔는데 여기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승규야! 이제는 떨어지면 안 되니까 꾹 참고 매를 맞아야 해. 살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동생은 생각보다 잘 견뎌줬다. 그러나 동생이 맞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가 맞을 때보다 몇 배 아팠다. 결과는 우리 17명 모두 합격이었다.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우리는 아픈 것도 잊은 채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이렇게 해병 6기가 됐다. 시험 장소였던 신병훈련소에서 4주간의 훈련에 들어갔다. 소문과 달리 춥고 배고프기는 이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막사 창유리는 다 깨져 있고 그 사이로 들이치는 바닷바람은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난로나 이불도 없었다. 추위에 몇 번씩 잠을 깨고야 새벽을 맞을 수 있었다.
훈련 또한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깜깜한 새벽에 기상명령이 떨어지면 전기쇼크를 받은 사람들처럼 벌떡 일어나 연병장에 집결하고, 얼음장 같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씻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됐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꾸물거리면 바로 구둣발이 날아들었다. 종일 쉴 새 없이 뛰고 구르고 달리며 훈련을 받았다.
다행히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워 분대장을 맡기도 했지만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훈련은 고되고 식사는 너무 적은 터라 많아 보이는 밥그릇을 차지하기 위해 동료와 싸우는 일도 있었다.
나는 점점 짓눌려 가는 마음을 이기기 위해 모두 잠든 시간에 성경책을 읽었다. 피란과 험한 행군 가운데서도 늘 지녀 온 성경이었다. 창에 스미는 달빛을 받으며 읽었던 시편과 예언서들, 복음서와 바울서신은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줬다. 특히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즐겨 읽었다. 요셉도 갖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했기에 모든 이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그래, 요셉처럼 살아보자.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보는 거다!”
동생 승규와 떨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만도 큰 은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승규는 내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목적이었다. 승규는 성격이 밝아서 중대장 전령병으로 발탁됐는데 중대장이 취사장에서 얻어다 주는 누룽지를 내게 가지고 와 밤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나눠먹곤 했다.
그때쯤 내 인생의 기로가 된 일이 생겼다. 해병부대 본부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2) 부산 감신대 입학 위해 해병학교 탈영
해병대 신병훈련이 3주째 접어들었을 때 해병부대 본부에서 영어 능력 보유자를 선발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신병 중 40여명이 지원했다. 나를 비롯해 성화신학교 동기들은 전원 응시했다. 나는 필기와 회화시험을 통과해 3인의 최종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동생 승규는 회화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떨어졌다.
합격자 3명에게는 진해 해병학교에서 영어교재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후면 전방에 배치될 동생 승규를 생각하면 기뻐할 수가 없었다. 교재과로 가는 것을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상관에게 얘기했지만 “누구 맘대로 안 가? 지금 교재가 없어서 난리인데, 군대가 무슨 장난이야!” 하는 불호령만 들었을 뿐이었다.
“승규야. 밥 잘 먹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거다. 우리 꼭 다시 만날 거야” 하며 동생을 훈련소에 두고 짐을 싸서 나오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을 고비마다 동생을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텨 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다행히 그것이 헤어짐은 아니었다. 교재과에 가 보니 서울의 대학교수들까지 불려와 교재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 나도 7일 만에 책 한 권 번역을 마쳤다. 문제는 이 번역 내용을 등사해서 교재로 만들려면 누군가 철펜으로 등사지에 옮겨 적어줘야 했다.
나는 상관에게 “제가 펜글씨까지 쓰면 시간이 두 배로 걸립니다. 펜글씨에 능한 사람을 두고 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로 동생을 추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승규가 교재과로 오게 됐다. 내가 번역하면 승규가 철펜으로 쓰는 호흡이 워낙 잘 맞아 우리는 장교들에게 칭찬을 받게 됐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은 것과 같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감사기도를 드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학업의 길이 막혀 불만 속에서 끙끙대고 있을 때 소일거리로 공부했던 영어가 우리 형제를 지켜 준 것이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앞이 캄캄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감사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또 불만거리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1952년 해병대에 군목제도가 신설되면서 나는 군목실로 옮겨가게 됐다. 이때부터 학업에 대한 열망에 다시 불이 붙었다. 안 그래도 성화신학교 동창 중 몇몇이 부산에 임시로 설립된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을 보고 부러워하던 차였다. 목사 안수를 받고 배치된 해병대 군목들을 보면서 “지금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이 문제로 군목실 유제선 목사님과 여러 차례 상의를 해 봤지만 당장 군대를 그만두고 학교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군에 들어온 지 2년째인데도 공부할 방법은 없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옥죄어 왔다.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탈영을 하기로 한 것이다. 동생도 뜻을 같이하겠다고 해 함께 해병학교를 탈출하기로 했다. 영외에 있는 유 목사님 댁에서 하루를 묵는다는 명목으로 빠져나가 다음 날 새벽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탈영병은 즉결처분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부산 감리교신학교에 입학이나 해 보고 죽자”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3) 학교 찾아온 군목실장 설득에 부대 복귀
부산에 도착해서 성화신학교 은사인 김학수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아무리 공부가 하고 싶다고 탈영을 한단 말이냐”며 난감해 하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셨는지 다음날 아침 우리 형제를 부산 감리교신학교에 데리고 가 입학시켜 주셨다.
승규와 나는 학교 복도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교환했다.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잊은 채 학생이 됐다는 데만 기뻐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어렸던 시절이다.
신학교의 김용옥 목사님께서는 사정을 들으시더니 우리 형제의 향학열을 기특하게 여겨 보호자를 자청해 주셨다. 그렇게 일주일여 지내고 있는데 상관인 이원동 군목이 찾아왔다.
“지금 빨리 복귀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이 나에게 돌아온다. 당장 돌아가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형제에 대한 평판이 좋아서 “탈영할 사람들이 아니니 해당 부서인 군목실에서 찾아 데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완강히 버텼다. 이 군목은 “헌병을 불러 잡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화를 내며 돌아갔다.
이제 학업의 길도 막히고, 목사의 길도 막히는가 싶어 불안감으로 밤을 지새웠다. 신학교 친구들은 “여차하면 도망가거라, 우리가 도와주마”하기도 했다. 다음날 해병대 사령부 군목실장 박창번 목사님께서 찾아오셨다. 군목실 최고 지휘관으로 나이 지긋한 분이었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목사님은 우리에게 “조용한 다방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다방 한쪽 구석에 마주 앉은 목사님은 우리 손을 꼭 잡으시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그 울음소리에서 우리 형제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나와 승규도 서러운 마음에 함께 울었다. 조그만 다방 안은 세 남자의 울음소리로 꽉 차고 말았다.
“너희 형제를 보니 내가 너희만할 때 일본에서 고학하면서 고생하던 생각이 나는구나. 얼마나 힘든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단다. 공부하고 싶은 너희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내가 너희가 공부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길을 열어 줄 테니 나를 믿고 부대로 돌아가자. 이것이 정말 너희가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설득에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죽어도 부산에서 죽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사랑의 눈물 앞에서는 어떤 단단한 둑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형제는 박 목사님의 지프차를 타고 그날 해병학교로 복귀했다. “저희들이 군법을 어기고 잘못했습니다. 탈영병으로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행정처장 김한수 대위 앞에 가서 영창에 갈 각오로 복귀 신고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 두 형제는 공부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니 특별히 고려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외출을 허락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당장 영외에 나가 저녁마다 영어학원을 다녔다. 몇 개월 후부터는 사령부 군목실에서 근무하며 그렇게 원하던 감리교신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 갈 때마다 콧노래로 찬양이 절로 나왔다.
승규도 사령부 군목실로 옮겨와 근무하다가 부산 한영고 3학년에 편입해 고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고, 마침 그때 생긴 ‘의가사제대’ 법 덕택으로 제대해 부산에 내려와 있던 연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승규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며 마음에서 큰 벽돌 하나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승규는 내 도움 없이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동안 내가 이를 악물고 살아올 수 있도록 버팀목이 돼 준 승규에게 깊은 고마움도 느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4) 미 해병학교 6개월 연수 인생 활로 찾아
가족 중 둘이서만 피란 와서 갖은 고비마다 서로 의지했고 해병대에도 함께 입대했던 동생 승규가 1953년 의가사 제대로 군대를 떠나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내 인생의 행로도 조금씩 방향을 잡아갔다.
어느 날 부대 게시판에 미국 해병대 해병학교로 연수 갈 사병을 뽑는다는 광고가 붙었다. 응시과목은 영어뿐이었다. 입대 직후 교재과에서 영어 교재를 번역했고, 이후 부산부두 외자과에서 2년 가까이 미 해병들과 근무한 덕에 영어 실력은 자신 있었다. 청소년기 평양에서 학업의 길이 막혔을 때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틈틈이 기초를 쌓아둔 영어가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열어 준 것이다. 응시 결과 사병 합격자 중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성화신학교 동기인 함성국도 합격했다. 비록 어렵게 입학해 다니고 있던 부산감리교신학교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쉽게 오지 않을 기회여서 선뜻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53년 9월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다. 해병학교는 워싱턴DC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버지니아주 콴티코에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지평선에 닿도록 펼쳐진 푸른 잔디와 한가로이 오후를 즐기는 가족들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한동안 이 장면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몇 년째 전쟁의 상흔과 피란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봐 오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도 주일예배를 빠짐없이 드렸다. 부대 안에도 부속 교회가 있었지만 나는 미국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부대 주변 교회들도 몇몇 방문하곤 했다. 그럴 때면 종종 한국에 대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와 성국이가 전쟁으로 이북에서 부모형제들과 헤어져 피란해 온 처지라고 말하면 성도들은 놀라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다가와서 위로를 전해 주기도 했다.
또 어려서부터 새벽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있어서 아침마다 부속교회에 나가서 통성기도도 하고 찬송도 불렀다. 그럴 때마다 이국땅에서 이렇게 기도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담임목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기쁠 때 오히려 소리 내 찬송하고 기도를 한답니다.” “오, 그렇습니까?” 목사님은 무척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나에게 소중한 휴가와 같던 6개월여의 연수 생활을 마치고 1954년 2월 귀국했다. 그러자 ‘학업을 마쳐야 한다’는 부담이 다시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에 함께 배치돼 일산 문산과 금촌 지역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리고 서울 장사동에 위치한, 현 강남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신학교 야간부에 등록했다.
당시 해병여단 최고 지휘관인 여단장 김대식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교회 장로여서 내가 신학교에 다니도록 특별히 허락해 줬다.
일과를 마치면 서울로 가는 트럭 짐칸을 얻어 타고 장사동까지 가야 했다. 3시간을 달려 내릴 때가 되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 됐다. 그렇게 2시간 공부하고 다시 3시간 걸려 돌아와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트럭 안에서 나는 공부에 매달렸다. 달리 공부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대로 돌아오면 새벽 1∼2시가 돼 있곤 했다.
1년반이나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겠다는 일념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중앙신학교 역시 마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5) 어렵게 미 유학 반년간 책상에서 잠자
해병대에 복무하며 어렵게 중앙신학교 야간부에 다니던 시절, 평양 성화신학교 스승이셨던 박대선 목사님께서 연락을 해 오셨다. 목사님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계셨는데 여러 제자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애쓰셨다.
목사님께서는 나를 위해서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앨킨스시에 위치한 데이비드앤앨킨스대학 입학 허가와 장학금, 생활비 지원 약속까지 받아 주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 유학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런데 원서를 쓰다보니 나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주소였다. 해병대에 속해 있긴 해도 남한 땅 안에 내 개인 주소가 없었던 것이다. 평양을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 나그네로 살아 왔다는 것을 절감했다. 입학원서의 현주소란에 ‘해병대 제1여단 병기감실, 경기도 파주군’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다.
재정보증도 필요했다. 그때 미국 연수 시절 해병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한센 소위가 “언젠가 미국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게. 대학에 간다면 도와주겠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연락을 하니 흔쾌히 재정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해서 해병대에 입대한 지 5년 만에 군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다니던 서울 중앙신학교는 마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중도에 그만둔 신학교만 평양 성화신학교, 부산감리교신학교까지 세 곳이나 됐다.
이북에 두고 온 가족들과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슬펐다. 비록 자립을 했다지만 부산에 동생 승규를 두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승규는 “내 염려는 말고 꼭 박사학위까지 받고 돌아와야 해”라며 격려해 줬다.
1956년 1월, 김포공항을 떠나 20여 시간을 날아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다. 미국은 두 번째였지만 혼자라는 사실에 긴장이 됐다. 다행히 한국에서 알고 지낸 미국 선교사님이 미국 교인 한 분을 소개해 주셔서 그분이 공항에 마중을 나오셨다. 그분은 낯선 한국 청년을 환대해 주신 후 대륙횡단 시외버스인 ‘그레이하운드’에 태워 주셨다.
버스 여행은 무려 열흘이나 걸렸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고풍스런 캠퍼스를 보니 피로가 싹 가셨다. 800여명이 재학 중인 학교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수준 높은 도서관이나 실력 있는 교수진, 가족적인 분위기는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대학에는 다른 학교의 학점을 인정해 주는 제도가 없었지만 다행히 지도교수께서 “첫 학기 동안 실력을 보여 준다면 2년간의 학점을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력을 증명하려면 강의 시간과 숙제를 통해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는 4시간 동안 학생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은 한밤중밖에 없었다. 혹시 깊이 잠들까 봐 침대에 눕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잘 정도로 긴장한 채로 반년을 지냈다.
그 덕분에 첫 학기 성적이 잘 나와 중앙신학교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1년 반만 공부하면 드디어 대학 졸업장을 받는구나”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그러던 중 매일 아침 강당에서 드려지는 예배 설교를 부탁받았다. 영어로 설교한다는 사실이 무척 떨렸지만 살아온 과정을 열심히 설명했다. 일제 치하와 전쟁 중에 받은 박해와 아버지의 순교, 가족과의 이별, 피란 등 과거를 되짚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학생과 교직원들도 내가 쏟아내는 고난의 양에 놀라워하며 공감해 줬다. 그리고 이 일은 나에게 소중한 기회를 가져다 줬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6) 내키지 않는 간증 자리서 평생의 은인 만나
미국 데이비스앤앨킨스 대학에서 공부하던 첫해인 1956년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찰스턴 장로교회로부터 간증 초청을 받았다.
그 당시 나는 간증 초청을 받곤 했다. 학교 예배 때 지나온 삶에 대해 고백한 일이 계기가 됐다. 당시 많은 교회들과 기독교연합사업단체들이 한국의 전쟁고아 등을 돕기 위해 모금과 입양 사업 등을 벌이고 있었기에 나처럼 한국의 실상을 직접 알려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멀리까지 다닐 만한 시간은 없었다. 학업도 빡빡했지만 생활을 위해, 그리고 조금씩이나마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서는 학생 식당 아르바이트도 꼭 해야 했다. 때문에 찰스턴 간증 건은 고사했다. 학장님이 나서서 두 번이나 부탁했는데도 거절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총장님이 나를 불렀다. “찰스턴 장로교회는 우리 학교에 가장 큰 기부금을 내는 곳입니다.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학교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꼭 다녀와 주세요.”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며칠 후 학장님 차를 타고 교회로 갔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다.
교회에 도착한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3000여명의 성도 수나 예배당 크기나 내가 본 교회 중 최대 규모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동안 해 왔던 것과 대동소이한 간증을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지만 감흥은 크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가려고 하니 담임목사님께서 당회장실로 부르셨다. 그곳에는 초로의 여성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이분은 미세스 프레스톤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저희 교회 시무 장로님의 부인이시지요. 여전도회장으로도 오래 일하셨습니다.”
프레스톤 부인은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승만군의 삶과 고백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괜찮다면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면 그 3년간의 학비와 경비를 내가 부담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겠습니까?”
나는 놀라다 못해 충격을 받았다. 몇 번이나 거절했던 이 간증 뒤에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회개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내 미래를 내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 일에 순종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 주시는구나!”
이렇게 인연을 맺은 프레스톤 부인은 내 유학 기간 최대 후원자였음은 물론 심정적으로도 내게 ‘미국 어머니’ 역할을 해 주셨다.
2년간의 대학생활 후 57년, 나는 졸업장을 받게 됐다. 한국에서는 그렇게도 받기 어렵던 졸업장이었던 터라 졸업식에서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 좋은 모습을 평양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마 프레스톤 부인이 찾아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줘서 쓸쓸함을 덜 수 있었다.
나는 졸업 후 루이빌 켄터키에 위치한 루이빌 장로교신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입학까지 남은 3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나 해 볼까 하고 친구 따라갔던 버지니아 코빙턴에서는 뜻하지 않게 한 교회의 주일 설교를 맡기도 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다고 고사했다가 성도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맡게 된 것인데 미국 교회의 규례와 관습, 절기, 체계를 익힌 소중한 기회였다.
9월을 맞아 나는 짧게나마 정들었던 첫 목회지 코빙턴을 떠나 루이빌 장로교신학교로 향했다. 이 학교를 택한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전통 있는 장로교 계통 신학교를 찾던 중 그곳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것뿐이다. 그런데 루이빌과의 인연은 내 인생에 크나큰 전환점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7) 루이빌 신학교의 교훈 ‘교회는 하나다’
미국 루이빌 장로교신학교로 진학한 일은 여러 가지로 내 인생에 영향을 줬다. 첫째로 당시 학교는 미국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에 동시에 속해 있었다. 미국장로교회는 남북전쟁 중에 두 개로 갈라졌는데 대부분 신학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가입했다. 그러나 이 신학교만은 완강하게 교단 분열을 반대했고, 양 교단 모두에 속해 있기를 고집했다.
나는 이 학풍 속에서 ‘교회는 하나다’ ‘형제는 갈라졌다 해도 다시 하나가 될 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게 됐다. 그리고 1983년 북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일할 때 이 남·북 장로교회가 123년 만에 통합할 수 있도록 작으나마 힘을 보탰고, 남북한의 통일 문제, 초교파 연합운동 등에도 비전을 가지게 됐다.
또 하나는 흑인 인권운동과의 만남이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백인 동네에 집을 살 수 없었으며, 호텔이나 공공시설에 출입할 수도 없었다. 많은 대학이 흑인 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장실이나 버스에서조차 구분된 구역을 벗어나면 가차 없이 쫓겨났다. 심지어 버스 사고가 나면 기사는 백인 부상자만 보호하고 흑인 부상자는 길에 방치했다. 병원에서도 흑인은 아무리 위급한 환자여도 치료를 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빌은 그 중에서도 흑백 갈등이 심한 지역이었다.
물론 동양인들은 이 흑백 갈등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입장이었다. 동양인 학생과 교수들은 다들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특히 당시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살아남기’에 급급해 있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미국 사람들의 평균 수준 정도로 사는 것이 당면 과제였고, 다음은 자녀들을 잘 교육시켜 사회 주류에 편입시키는 것이 그 못지않은 삶의 목표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공부를 마치면 떠나야 할 땅이었고, 전쟁 직후 황폐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온 조국 걱정에 미국 사회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어서 학위를 따 한국에 돌아가자, 조금이라도 평양의 가족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 살자는 생각만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나 보다. 나를 미국까지 보내 공부를 시키신 것도, 다른 곳도 아닌 켄터키 루이빌에서 신학을 하게 하신 것도, 지금 돌아보면 다 그분의 세심한 계획 아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3년 만에 루이빌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루이빌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루이빌 신학교 교목을 겸직하게 된 60년 이후였다. 이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물론 빨리 공부를 마치려는 계획에서 볼 때는 조금 먼 길을 돌아가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60년도 넘은 미국 현지 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일도, 교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도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일이었고, 제대로 해 보겠다는 의욕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61년부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 흑인 학생들의 인권 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남부의 인종분리 정책에 맞서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남부를 돌며 시위한 ‘프리덤 라이드’ 운동이 이때 시작됐다. 운동의 중심은 기독교인들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흑인들은 불매운동, 연좌농성, 준법투쟁 등으로 인종차별의 부당성을 알려 나갔다. 그 중심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다. 킹 목사와의 만남은 나를, 나의 삶의 목표를 가장 크게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8)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손 잡고 “우리 승리하리”
루이빌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에서 시무하며 루이빌 대학교 교목으로 일하던 1960년 어느 날, 내가 교목실에 있는데 흑인 학생 대표가 찾아왔다. 당시 미국은 흑백분리정책으로 흑인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대학이 많았으나 우리 학교에는 5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흑인 인권운동의 바람은 우리 학교에도 불어와 있었다.
“교수님, 흑인 학생회를 새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학생자치기관으로 등록하려면 지도교수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교수님께서 맡아 주십시오.”
흑인 교수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교수들이 선뜻 나서지 않자 나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비교적 흑인 학생들을 잘 이해하는 편이라는 평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학생의 간곡한 요청에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꺼리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와 학교 일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나날이었다.
“대신 약속해 줄 것이 있네. 앞으로 흑인 학생회가 무슨 일을 결정하든지 반드시 나에게 와서 먼저 상의해 줬으면 하는 것이네.”
학생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이 일은 곧 내 삶에 회오리를 몰고 왔다. 당시 흑인 인권운동은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시위대의 당면한 목표는 루이빌 시의회가 흑인들에 대한 공공시설 출입금지 조례를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흑인들이 적어도 호텔이나 식당 같은 공공시설이라도 출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양심적인 교수들과 백인 학생들도 가담하면서 경찰들과 대치하고 시민들과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나는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처음에는 “내가 꼭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경찰의 진압이 강경하고, 시민들의 야유와 욕설이 하도 심해 잔뜩 위축되기도 했다. 심지어 계란과 콜라병이 날아와 학생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시위가 연일 계속되면서 경찰 진압에 부상당하거나 구속되는 학생 수가 늘어나자 백인 시민들의 양심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도 학생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수록 지극히 정당하고 기본적인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이 출입하는 식당에 발만 들여도 매를 맞고 쫓겨나는 학생들. 그런 부당한 대우에 직면할 때마다 학생들의 눈망울에 번지곤 했던 슬픔들이 내 일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슬퍼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나마 권리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나도 힘을 보태주고 싶어졌다.
어느 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루이빌에 왔다.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기 위해 흑인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킹 목사는 연단에 올라 조용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로 연설했다.
“용서는 얻어맞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복을 할지, 용서를 해줄지는 가해자의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불신과 의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자는 것입니다.”
연설이 끝나고 시위대는 가두행진을 했다. 킹 목사의 손을 잡고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이 순간이 내 삶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9) 흑인 인권운동에서 깨친 ‘화해자의 사명’
“일제 36년간의 억압과 차별도 뼈에 사무치게 분했는데, 400년이 넘는 흑인들의 무참한 역사를 미국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1960년대 초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흑인들의 이주 역사와 그들이 처한 법적, 현실적 환경에 대해 공부하게 됐다. 알면 알수록 그 현실은 참혹하고 심각했다. 특히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한 나로서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이중 삼중의 차별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흑인들에 대한 공공시설 출입금지 조례를 철폐하라”고 외치며 뜨거운 도로 위에서 시위를 계속해 나가던 1963년 여름, 드디어 조례가 폐지됐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작은 벽을 넘었을 뿐이지만 큰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시위를 응원하고 언론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 준 몇몇 백인들, 그들을 통해 시민의식이 살아있음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나 개인에게도 이 시기는 중요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통해 ‘화해자’의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킹 목사의 연설은 첫째로 내가 가지고 있던 ‘피해 의식’을 다른 의미로 승화시켜줬다.
일제하 기독교에 대한 핍박, 아버지의 순교, 6·25전쟁, 가족과의 이별, 피란 등을 겪으며 나는 내내 “왜 나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하나”라는 울분으로 떨어야 했다. 미국에 와서도 그 분노는 그대로 응어리져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서 때때로 ‘용서’에 대해 설교하면서도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꿰뚫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과 북한 공산당,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와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핍박받고 차별받았던 흑인들 속에서 함께 싸우면서 “왜 나만”이라는 의문이 풀렸다. 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가해자인 백인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라고 말하는 킹 목사와, 이를 지지하는 흑인들을 바라보며 “무엇 때문에”라는 물음도 해답을 얻었다.
내가 고난을 받은 것은 바로 ‘화해’를 위해서였다. 화해자의 값진 자격을 얻기 위해서 먼저 피해자가 된 것이었다. 목사가 된 이유도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였지만 진짜 사명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삶의 실마리가 풀렸다. 또한 당시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한 흑인 인권운동을 가까이서 목도하면서 나는 희망을 품었다. 더딜지라도 열심히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사회 전체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당시 나에 대한 학교와 학생들 양쪽의 신뢰는 점점 커져 갔다. 조례 철폐 이후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고, 때때로 과격해져서 학교 건물을 점거하는 일도 생겼는데,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과 대화에 나설 수 있는 교수는 나밖에 없었다. 대학 총장이 나서도 승복하지 않던 학생들은 고맙게도 내가 하는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 줬다. 나도 자연히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고, 그들의 요구를 최대한 학교 측에 전달하려고 애썼다. 이는 내가 흑백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덕이기도 했다.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처럼 ‘중간자’가 꼭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이때 내가 품었던 변화에 대한 희망은 아직 덜 여문 것이었다는 사실을, 1963년 11월 큰 사건을 겪은 뒤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0) 케네디 피격에 최고의 문명 미국 ‘흔들’
1963년 11월 22일. 교인 심방을 마치고 차를 몰고 가던 중 라디오 뉴스에서 들려온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댈러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 대통령이 괴한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차를 세우고 인근 상점으로 뛰어갔다. 가게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몇 사람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당시 미국은 20세기 최고의 문명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차 있었다. 그런 미국에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백주 대낮에 피격 사망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사회 구조에 대한 믿음을 단번에 허물어트리는 사건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중적 지지 속에서 패기 있게 국내외 문제를 잘 처리해 나가고 있었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철폐에도 적극적이었다. 흑인 인권운동이 점점 거세지는 것에는 대통령에 대한 기대도 한몫을 했다.
이후 미국 사회는 큰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젊은 세대의 충격은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과 국가 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했다. 젊은이들은 기성문화와 규범에 대한 부정과 조롱으로 히피 운동을 키워갔고 교회마저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암살 사건은 나에게도 오랫동안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내가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 올 때는 10년이면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8년이 다 된 지금 나는 어떤 길 위에 있는 것일까?”
여러 인종이 출석하는 서민적인 분위기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를 맡아 시무한 일이나 루이빌 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하며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한 것 모두 중요한 사역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해결치 못한 채 안고 있던 고민들, 현실의 모순에 대한 궁금증이 이때 확 부풀었다.
그 대답을 학문적 연구를 통해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에 목회를 잠시 중단하고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신학교에 원서를 넣은 결과 예일대 신학부에서 장학금과 입학을 허락받았다. 내가 택한 연구 주제는 ‘종교사회학’이었다.
64년 가을, 교회와 학교에 각각 1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신청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꼭 가셔야 합니까?” 하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흑인 인권운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여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해서 예일대가 위치한 뉴헤이븐으로 떠나게 됐다. 이때 나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가정적으로는 더할 수 없이 안정적인 시기였다.
내가 낯선 미국 땅에서 담임목사로, 대학교 교목으로 무리 없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이혜선 사모가 동역자의 역할을 헌신적으로 감당해 줬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나의 인연은 부모님 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내의 부친 되시는 이장춘 장로님은 평양에서 이름난 사업가셨고 신앙이 좋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 댁도 51년 1·4 후퇴 때 월남해 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제주도까지 피란을 갔다가 부산으로, 서울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7명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시키셨다.
나도 피란 내려와 해병대에 근무하며 그 댁이 남쪽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연이 맺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55년 가을, 내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때에 연락이 왔다. 평양 서문밖교회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낸 김성환 집사님이셨다. 피란 내려와 남쪽에서 만난 우리 형제를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신 분이다. “대전 이 장로님 댁에 초대를 받았는데 같이 가자”는 말씀에 문득 설렘이 느껴졌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1) “천국과도 같구나” 여겼던 가정에서 아내를
1955년 가을, 단풍이 곱게 든 어느 날 나는 대전 이장춘 장로님 댁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불쑥 찾아가는 셈인데 실례가 안 될까요?” 피란 내려온 이후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던 김성환 집사님은 내 물음에 “오늘은 네가 꼭 가야 하는 날이다”라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씀만 하셨다.
이 장로님 가족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모님이신 김찬길 집사님은 “고생이 많지”라며 며칠 묵다 가라고 권하셨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나 밝고 평화로운 가정 분위기에 취해 3일이나 머물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예배를 드리고 나면 그 댁 장녀, 당시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다니던 혜선이 치는 피아노 곡조에 맞춰 다 함께 찬양을 했다.
‘천국과도 같구나! 나도 언젠가 꼭 이런 가정을 이루고 싶다.’ 그때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꿈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혜선도 평양에서부터 안면이 있었고, 은근히 마음에 둔 적도 있었지만 당시는 내 처지가 하도 어려워서인지 멀게만 생각됐다.
그런데 그날 이후 김성환 집사님은 나에게 계속해서 혜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그 댁 집사님과 얘기를 해 봤는데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혜선에게 연락해서 데이트도 하고 그래.”
자꾸 말을 듣다보니 나 자신도 혜선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지만 용기를 내기까지는 몇 달이 더 걸렸다. 몇 달 후인 56년 1월, 유학을 1주일 앞두고서야 혜선의 집으로 다시 찾아갔다.
식사 대접을 받은 후 혜선과 둘이서만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해 온 말을 시작했다. “내 인생의 세 가지 중요한 결심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며 먼저 종이 위에 십자가를 그렸다. “나는 일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왼쪽에 화살을 그렸다. “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칼을 그렸다. “나는 사회의 정의와 옳은 일을 위해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혜선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혜선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치유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 둘이 생각하는 삶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저는 그 두 삶이 하나로 묶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저와 결혼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었다. 곧 혜선의 두 손이 다가와 네 손과 하나로 묶어졌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이 약속을 나눈 1주일 후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5년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은 깊어졌다. 내가 루이빌에서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혜선도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60년 7월 22일, 드디어 혜선이 미국에 도착했다. 광활한 사막을 두 사람이 양쪽에서 걸어오다 그 한가운데서 만난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혜선의 손을 잡자 이제 더 이상 사막 한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틀 후는 목사 안수식이었다. 혜선은 내 옆에 서서 함께 목회 서약을 했다. “혜선양, 승만과 함께 하나님의 목회 사역에 동참하시겠습니까?” 혜선은 “예!”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그로부터 6일 후 결혼식이 열렸다. 내 나이 서른, 혜선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올해가 결혼 50주년이 되는 해다. 오늘까지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2) 한국교회 놀라운 성장에 귀국 고민
1964년 가을 예일대학교에서 시작한 석사과정은 예정된 1년보다 짧은 9개월 만에 마칠 수 있었다. 하루빨리 루이빌로 돌아가기 위해 촌음을 다투며 공부한 덕택이었다.
65년 초여름, 아내와 아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식이 열렸다. 그러자 대학 졸업식 때 사고무친한 나를 위해 달려와 줬던 프레스톤 부인이 생각났다. 신학교 3년간 장학금을 주며 어머니처럼 나를 지켜준 분이었다. 마침 며칠 전 축하 편지가 와 있었다. 편지에는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혹시 잠깐 나를 보러 올 수 없겠습니까”라는 물음이 조심스레 달려 있었다. 읽을 때는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싶어졌다.
짐을 꾸려 뉴헤이븐을 출발해 밤새 차를 달려 찰스턴으로 갔다. 프레스톤 부인은 연로해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너무나 기뻐했다. 하룻밤을 그 댁에서 묵고 떠나면서 부인의 건강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 몇 개월 후, 부인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때 방문하지 않았다면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도 못할 뻔했던 것이다.
루이빌의 상황은 전보다 복잡해져 있었다. 3월 미국이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찬성과 반대 시위가 각각 확산 일로였고, 젊은이들의 징집거부 시위까지 벌어졌다.
가을학기가 시작한 얼마 후인 11월 13일 정오, 학생들이 모두 본관 앞에 모였다. 단상을 둘러싼 신문기자들의 취재 열기도 대단했다. 교목실에 있는 나에게 참전 반대 측 학생들이 찾아왔다. “오늘 저희 발언 때 참전지지 측의 공격이 예상됩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그 요청을 받아들여 교목실의 목사 네 명과 신부 한 명이 함께 단상에 올랐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학생 대표가 “오늘 모인 목적은…” 하고 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계란과 토마토, 물 풍선이 날아들었다. 학생과 교목들 모두 범벅이 됐다. 곳곳에서 고성이 나고 다툼이 시작됐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적어도 대학 캠퍼스에서는 각자 다른 의견을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 없다면 이것이 무슨 대학이고 민주주의란 말인가?
나는 “뭣들 하는 건가!”라고 소리치며 시위대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 학생에게 말할 기회를 주라! 여기는 대학이란 말이다!” 내 고함에 놀랐는지 일시에 조용해졌다. 학생은 간단히 연설을 마쳤고 시위는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다음날 일간신문 1면에는 토마토와 계란 범벅의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이 일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의식 있는 동양인 목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루이빌에서의 목회와 교목생활은 안정돼 갔다. 미국에 있는 몇몇 한인 교수들과 함께 ‘한인대학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런데 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괴한의 총에 살해됐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전국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얼마 후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 ‘말콤 엑스’와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차례로 암살됐다. 월남전은 장기화되고 대학가는 히피운동에 휩쓸렸다. 젊은이들의 마약 문제도 대두됐다. 일생 중 가장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시대였다.
이때 셋째 딸 미나가 태어났다. 서울에서는 영락교회가 주일예배를 네 번 드릴 정도로 부흥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제 돌아갈 때가 아닌가?” 싶어졌다. 한인대학인회에서 교류한 강원용 목사는 한국 교계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목사, 공부 마치면 고국으로 오세요. 할 일이 많아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하신 내 길은 달랐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3) 18년 만에 찾은 조국… 민주화 시위 봇물
1970년 나는 다시 안식년을 받아 시카고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년 반 만에 종교사회학으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아 루이빌로 돌아왔는데 평양 성화신학교 은사인 박대선 목사님께서 찾아오셨다. 연세대 총장이셨던 목사님은 “우리 학교 교목실에 와 달라”고 제안하셨다. 또 강원용 목사는 내 친구 한완상 박사를 통해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오셨다. 이번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72년 가을, 한국을 떠난 지 꼭 18년 만에 처음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방송을 통해 ‘보리밭’ 노래가 흘러나왔다. 순간 타국 땅에서 살아오며 느꼈던 외로움과 향수가 봇물처럼 밀려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본 조국은 마음이 시리도록 반가웠다. 폐허였던 거리는 풍요로워졌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아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을 만나러 연세대에 가 보니 정문 앞에서 학생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학생들은 “군사독재 물러가라! 학원자유 보장하라!”고 외치며 돌을 던졌다. 미국에서 숱하게 겪은 시위였지만 고국에서 겪으니 착잡하기만 했다.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총장실에서 박 목사님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총장님, 저는 아무래도 여기서 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학교나 정부 쪽보다는 학생들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은사 되시는 총장님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괜찮아, 충분히 이해하네” 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또 불러주셨으면서도 내 처지를 먼저 생각해 주시는 은사님께 한없이 고마웠다.
이후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강 목사님을 뵙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내가 미국에서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강하게 왔다.
그런 한편 ‘나에게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오히려 미국에서 국제적 힘을 모으는 것이 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포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곧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사명에 흥분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소수인종 교회들을 묶어내는 일에 착수했다. 72년 나는 우선 내가 속한 북장로교 안의 소수민족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 ‘아시아인 교회협의회’를 만들었고 교단 총회로부터 정식 기구로 인정받았다. 또 총회 세계선교부 지역 총무직에 지원했다. 보다 세계적 사역에 뛰어들고 싶다는 의욕이 충만했다.
동양인에다, 미국에서 시골로 치는 켄터키의 목회자인 내가 총무에 선발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73년 여름, 나는 10여년간 고향처럼 살았던 루이빌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총회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출근해 보니 뜻밖에도 내게 주어진 일은 아시아가 아닌 중동지역 총무였다. 그해 10월 처음 중동 선교지를 순회 방문하던 중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을 때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었다. 하루는 공습 사이렌이 들리더니 호텔 전기가 모두 나갔다. 일제 때와 6·25때 듣던 사이렌이 떠올라 머리가 쭈뼛해졌다. 2주간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묶여 있었다. 이때 세계 곳곳이 언제든 전쟁이 날 위험 속에 있다는 것, 전쟁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4) 떨리는 마음으로 북한의 가족 생존 확인
1973년부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로 일한 기간, 나는 낮에는 중동지역을 위해, 밤에는 한국을 위해 일했다. 당시 한국 정치상황은 수렁에 빠진 상태였다. 한국의 지식인과 언론들이 탄압을 받을수록 해외에서의 조국 민주화에 대한 관심은 강하게 피어올랐다. 내 사무실은 자연스레 재미 지식인과 학자들의 민주화운동 본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77년 카터 대통령이 당선돼 부임한 직후에는 백악관과 한국대사관 앞에서 죄수복을 입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규탄하기 위해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벌인 시위였다.
중동지역 총무로 일하면서는 세계적으로 화해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78년 이집트 교회 선교 125주년 행사를 위해 카이로에 갔을 때 사다트 대통령을 만난 일을 잊을 수 없다. 대통령은 미국 교회 대표들을 집무실로 초청해 73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에도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집트는 10여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점점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없는 보복을 가져올 뿐입니다. 국민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평화주의에 감명을 받아 “저희 조국도 분단돼 있습니다. 다음 평화협정은 한반도에서 이뤄지도록 협력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사다트는 “화해를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듬해 반대파의 테러로 피살됐다.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화해란 항상 이렇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인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역시 78년 카이로에 머물 때였다. 미국 선교사 한 분과 저녁식사를 하는데 북에 두고 온 가족 얘기가 나왔다. 선교사는 “카이로에 북한 대사관이 있는데 가족의 생사를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는 외국에서 북한 주민과 접촉하기만 해도 친북으로 몰리는 시대였으므로 “위험한 일입니다”라고만 답했다. 그러나 실은 ‘정말 살아만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오랜 대화 끝에 북한 대사관에 찾아가기로 했다. 선교사가 미리 전화로 방문 신청을 해줬다.
다음날 북한 대사관에 찾아갔지만 다리가 굳어지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죽기 전에 어머니와 동생 소식을 한 번은 듣고 싶다’는 진한 감정이 대사관문을 벌컥 열게 만들었다.
대사관 직원에게 내가 살았던 평양 주소와 가족 이름을 적어 주며 생사 확인을 부탁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저희 아버님께서 목회하실 때 강량욱 목사라는 분과 교분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 분과 같은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라고 했다.
직원 눈이 커지면서 “강량욱 부주석과 선생의 부모가 아는 사이란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강 목사님이 부주석인 것을 몰랐기에 내심 놀랐으나 맞다고 대답했다.
대사관을 나오는데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떨렸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숙소로 돌아갔다. 대사관에서 다시 오라고 한 날까지의 사흘이 30년처럼 길었다. “정말 살아 있을까? 폭격으로 다 죽었을까?”
사흘 뒤, 다시 북한 대사관에 찾아갔다. 창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이 오더니 말했다. “동생 분들께 연락이 왔습니다. 모두 살아 있답니다.”
“예? 그것이 정말입니까?” 눈물이 쏟아져서 주체를 못하고 있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강 부주석께서 이 선생을 초청하셨습니다. 직접 들어와서 가족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5) “아! 오마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1978년 이집트 카이로에 미국장로교총회 선교부 총무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나는 북한대사관으로부터 북한 방문 초청을 받았다. 가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뜻밖의 제안에 나는 놀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며칠 뒤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호텔로 돌아와 나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혹시 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 번갈아 엄습했다.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나는 침대 옆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하나님!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것처럼 매달리고 매달렸다. 동이 트자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오늘까지 생명을 지켜 주신 하나님이 북한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대사관에 가서 “강 부주석의 초청에 응하겠다”고 했다. 대사관 직원은 “1주일 후 동독대사관으로 오시면 평양까지 안내하겠습니다”라고 했다.
1주일간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고 카이로를 떠나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의 동독대사관에 도착했다. 카이로의 그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경유해 평양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무를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을 떠난 비행기는 광활한 러시아 땅을 가로질러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모스크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8년 만에 고향 땅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돼 잠도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뉴욕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숨겨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30분 후에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합니다.” 안내방송에 손에는 벌써 땀이 흥건했다. 착륙하고 보니 공무원들이 마중 나온 가운데 저 멀리 꽃다발을 든 여인이 보였다. 동생 경옥이었다. 50년 열 살이었던 소녀가 중년 부인이 돼 있었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큰 누이동생 경신이까지 우리 셋은 서로 끌어안고 대합실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오마니는, 오마니는 살아 계시네?” “오빠, 오마니는 오빠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다가 7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뭐라고? 오마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오마니!”
세 남매는 한 시간도 넘게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안내원과 직원들도 아무 말 않고 기다려 줬다. 나머지 두 동생도 호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헤어질 때 생후 6개월이었던 막내는 “오마니께 귀가 닳도록 들어 오빠가 낯설지 않아요” 했다. 밤새 얘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집 떠난 두 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무릎 꿇고 울며 기도하셨다고 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승규도 사업가로 성공해서 남쪽에서 잘 살고 있디. 나는 미국에서 목사가 됐고….” 내가 들려주는 소식에 동생들은 28년 전 소녀 시절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다음 날에는 누이들과 평양 시내를 관광했고, 3일째에 나를 초청해 준 강량욱 부주석을 만나 북한 교회의 형편을 자세히 물어봤다. “강 목사님, 저희 아버님 뒤를 이어 저도 목사가 됐습니다. 이곳에 교회가 재건되기를 바랍니다.” “이 목사, 나도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해 보겠네.”
후에 평양에 봉수교회가 세워진 것은 강 목사님의 힘이 컸다. 그리고 본래 법관이었던 그 아들 강영섭 목사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에 올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나는 이때 북한을 방문한 일을 한동안 가족 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6) 방북 후 ‘친북’ 딱지… 한국 방문도 어려워
1978년 북한을 방문해 여동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나는 2년이 되도록 아내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함께 피란을 나왔던 남동생 승규에게만큼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사업하는 데 누가 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이 얘기를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80년 11월 미국 북장로교회 교단잡지 등에 북한 방문기를 기고하면서였다. 이후 내내 나에게는 ‘친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이때 이후로 나에게는 ‘남북통일의 가교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나서는 데 대해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특히 통일을 강조하면 “평양에 갔다 와서 물든 거 아닙니까?”라는 말이 나왔다.
“통일은 성경적으로 하면 화해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힘으로 얻는 통일은 또 다른 분노와 보복만 가져올 뿐 온전한 평화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화해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화해목회’ 철학에 대해 수긍하고 내 편이 돼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단지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빨갱이’ ‘좌파’로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가슴이 아팠다. 심지어 오래 인권운동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서조차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80년 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의 내 직책이 중동 담당에서 아시아 담당으로 바뀌었다. 이제 구체적으로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위치가 됐다는 데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다.
그런데 설렘을 안고 도착한 김포공항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안기부에서 내 입국을 막은 것이다. 안기부에서 나온 직원은 내가 아무리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대표 자격으로 왔다”고 설명해도 내가 북에 다녀온 사실과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사실들만 되풀이해 말했다.
자칫하면 경찰에 연행돼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 안위도 문제였지만 미국 북장로교의 파트너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는 이만저만 걱정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총무였던 김윤식 목사님이 안기부에 연락해 “내가 그분 신분을 보장하고, 만일 염려하는 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대신 들어가겠소”라고 호소한 끝에 겨우 입국이 허락됐다.
이 일로 나는 김 목사님을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됐다. 당시 한국에서 친북과 용공으로 낙인찍히면 얼마나 어렵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 살아가면서도 상대의 ‘진심’을 알아보고 그에 합당하게 대우하려는 자세에 탄복한 것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후에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 취임 때 김 목사님을 초청해 설교를 부탁드리기도 했다.
한국 방문 때 해직교수와 민주화운동 관련 구속자 및 가족들을 많이 만났다. 또 이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목회자들과도 대화했다. 그러던 중 “내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미국에 돌아간 나는 즉시 미국 장로교 각 노회를 다니며 호소했다. “한국의 양심적 학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한 노회에서 한 명의 체류비와 학비를 맡아 주신다면 그들이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김찬국 한완상 이만열 박창해 등 여러 교수와 지식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7) 김일성 “어릴적 어머니 따라 칠골교회 다녔다”
1983년 내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아시아 지역 총무로 있을 때 남·북 장로교회가 통합하는 경사가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 123년간 갈라져 있던 교회가 하나가 된 것이다. 나는 이 통합의 의미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총회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첫 통합 총회가 열리는 날 한반도 문제에 대한 특별 선언을 채택하자”고 설득했다.
“한반도 분단은 미국과 소련에 역사적 책임이 있습니다. 결자해지하려면 미국이 한반도 화해와 통일에 기여해야 합니다. 특히 미국장로교회는 100년 전 한국에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한반도에 화해의 복음을 전해주는 데 앞장섭시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차츰 동의해 선언서가 나오게 됐다. 북한 선교와 한민족 화해에 대한 미국교회의 책임을 확인하고, 남북 1000만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미국 정부와 의회가 나설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총회 석상에서 선언서가 채택되려는 찰나 방청석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초청된 한국 장로교단 대표들에게서 완강한 반대가 터져나온 것이다. “이 성명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내용이 아닙니까!” 이에 잠시 술렁임도 있었지만 성명 자체는 압도적 지지 속에 채택됐다.
91년 11월에는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에 당선됐다. 35개 기독교단과 5000만명의 교인이 속한 종교계 최대 기관의 대표직에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으로서도 처음 오른 것이다. 이취임 예배 때 나는 남북한 교회 대표를 초청했다. 서울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인 구세군 김성환 사관이, 평양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고기준 목사를 비롯해 세 명이 참석했다.
이런 사역들로 나는 고국 교회로부터 ‘친북인사’라는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 모두는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일이라고 확신한다.
다음 해인 92년 8월 미국교회협의회 대표 15명과 남·북한을 동시 방문했을 때의 일은 두고두고 ‘친북’ 이미지를 더 공고히 해줬다.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난 것이다. 김 주석은 미국교회 대표가 조선인이라는 데 대해 놀라고 자랑스러워하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계속 힘써 달라”고 말했다. 대표단과의 만찬 때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칠골교회를 다닌 일, 청년 시절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잡혔을 때 감리교 목사님이 석방을 위해 힘써줬다는 등의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우리 대표단과 김 주석의 면담은 당시 북한의 중앙방송TV는 물론이고 미국 언론에도 일제히 보도됐다. 1주일 후인 22일에는 미국교회협의회와 조그련 대표가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국과 북한 두 나라 기독교인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데 협력해 나가자”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역 가운데 나는 비난의 장벽을 숱하게 넘어야 했다. 나는 늘 미국과 한국 두 정부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었다. 한국 방문 때마다 안기부 직원들이 내 숙소 앞을 지켰다. 그래도 심한 제지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미국 장로교회, 또는 미국교회협의회 내의 직책 덕분이었다. 교단 내에서도 역경은 있었다. 97년에 교단 신문 중 하나가 나를 ‘북한의 앞잡이’로 보도했다. 92년 방북 때 김 주석과 찍은 단체사진이 내가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로 제시됐다. 총회 본부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소란해졌고 내게 갖가지 사임 압력이 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8) 클린턴에 “北핵, 무력으론 해결 안된다” 설득
1997년 교단 내 보수적 색채의 신문 ‘레이맨’(Layman)이 “이승만 목사의 화해 목회는 실상 북한의 앞잡이 노릇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실은 뒤 총회에는 내 직책의 적절성을 놓고 찬반 논란이 격렬히 벌어졌다. 그러나 73년부터 나를 봐 온 총회 동료와 목회자들은 나를 변호해 줬다.
나도 가장 심하게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리고 장시간 대화하고 설득했다. 그런 끝에 몇몇은 오해를 풀었고, 도리어 나를 믿어 주고 지지해 주는 교회는 더 늘어났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 내 한국계와 흑인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해 한 일들이다. 92년 4월 28일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났다.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의 약탈에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한인 이민자들이 애꿎은 피해자가 됐다. 미국 언론은 폭동을 한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당시 미국교회협의회장이었던 나는 폭동 직후 LA에 구호대책반을 파견했다. 나도 직접 구호반을 인솔해 LA로 갔다. 폭동 당시 총에 맞아 사망한 이재성군의 장례식이 열렸다. LA지역 한인 대표들이 거의 참석했다. 미국 주요 언론들도 취재를 위해 모여 들었다. 나는 미국 언론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의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가졌던 꿈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평등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려는 꿈, 그 꿈이 실현되도록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LA지역 흑인과 한인 교회 대표들을 만나 한·흑 갈등 해소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마라톤 회의를 며칠간 진행했다.
93년 3월 24일에는 미국교회협 대표단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 당시는 제1차 북핵 위기로 미국과 북한 간의 힘겨루기가 한창이었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군 폭격이 임박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미국교회협이 10여년간 한반도 통일과 화해를 위해 애써 온 과정을 전하며 “북한을 다룰 때 군사력이나 전쟁과 같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다시 한 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한국 민족은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게 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답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다뤄 보겠습니다. 대신 교회협의회는 미국의 경제와 국제 문제를 위해 힘써 기도해 주십시오.”
이 일로 대통령은 나를 백악관 종교자문위원으로 공식 임명했다. 그 후 미국과 북한은 경수로 제공 대가로 핵을 포기하는 ‘제네바 합의서’에 공동 서명했다.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당시로서는 평화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백악관 종교자문으로서 주로 한 일은 흑인과 한인간의 화합운동이었다. 각 도시에 흑인·한인 협력위원회를 만들었고 흑인 지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한국을 소개하기도 했다.
94년 미국교회협 대표단과 함께 로마 교황청을 방문, 요한 바오로 2세와 면담했을 때도 나는 어김없이 한반도 이슈를 꺼냈다. 내가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교황께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달라”고 하자, 교황은 “한반도의 어려운 문제들이 속히 제거되고 그 땅에 화해와 평화가 곧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미국교회협의회장직을 마치고 95년을 맞았다. 나는 다시 미국장로교 선교부 부총무 일에 매진했다. 이때 ‘이번에는 남북한 교회 대표들을 미국으로 부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29·끝) 6·25 아픔이 일군 ‘화해와 평화의 목회’
1995년은 내가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했을 때 ‘남북한 교회의 희년’으로 양쪽의 의견을 모았던 해였다. 그 뜻에 걸맞은 행사를 치르기 위해 고민한 끝에 미국장로교회 총회에 남북한 교회 대표를 초청하기로 했다.
남쪽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김기수 총회장과 한국기독교장로회 배야섭 총회장을, 북쪽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강영섭 위원장을 초청했다. 남북 분단 이래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성대하게 열린 총회 둘째날, 이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남북 대표에게 각각 긴 나무막대와 푸르고 붉은 긴 헝겊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대표들은 단상에 올라 나무를 겹치고 청홍색 끈을 묶어 십자가를 만들었다. 2000여명의 청중은 기립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남과 북에서 자란 나무가 하나로 엮여 십자가가 된 모습에 나도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98년 미국장로교 선교부 부총무직을 마지막으로 25년의 사역을 마치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리고 지금 몸담고 있는 유니온 신학교로 와 아시안목회선교센터를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쳐 오고 있다.
2000년에는 미국장로교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열렸던 212차 총회에서 나는 첫 번째 투표에서 과반을 득표해 미국장로교 212년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 총회장이 됐다. 1만2000개 교회와 250만명의 교인을 가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때 ‘뉴욕타임스’ ‘뉴스위크’를 비롯한 미국 언론들도 나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아버지를 공산당에게 잃고 가족이 이산하는 아픔을 겪었으면서도 오히려 남북 화해와 통일을 위해 애써 왔다는 점이 조명을 받았다. 또한 미국사회 내 인종갈등, 교회 내 보혁대립 등을 치유하는 데 앞장선 ‘화해 목회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내년이면 살아온 세월이 80년이 된다. 그 사이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태어나 자란 평양,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내일의 꿈을 꾸었던 한국, 그리고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 온 미국, 모두 내 조국이다. 그뿐 아니라 선교를 위해 수없이 방문했던 중동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그 밖의 나라들도 결국은 다 내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다.
눈앞의 고난에 짓눌려 무엇을 기도할지조차 몰랐던 소년을 하나님은 한없이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셨다. 많은 것을 보여주셨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하셨다.
세상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전쟁 속에 아버지를 잃은 지 6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아직도 그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남과 북의 전쟁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른다. 그 속에서 또 누군가의 아들이, 아버지가, 가족이 목숨을 잃고 있다.
지난달 27일, 나는 두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백악관으로 향했다. 그 앞에서 여러 단체들과 함께 반전 시위를 했다. 미국 정부에 “한반도를 전쟁 상황으로 몰아가지 말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우리의 목소리는 외신을 통해 세계 곳곳에 타전됐고 한국 신문에까지 게재됐다.
미국 내 한인사회에도 “북한을 확실히 응징해야 한다” “한·미 공조를 더 공고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이 나서는 안 된다. 평화를 심어야 한다. 내가 일평생을 통해 배웠고 내 단 하나의 신념이 된 생각이 있다. 그것으로 이 긴 이야기를 끝맺고 싶다. “하나님은 화해와 평화를 원하십니다. 화해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애쓰고 손해보고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마지막 주의 시간이 올 때까지 화해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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