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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양 성당 천주교 양양성당(백과사전 제공) - 연원 및 변천 강원도 양양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것은 1866년 이후로 계속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충청도 지역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양양의 범뱅이골(현 양양읍 화일리)이나 속초의 싸리재(현 속초시 도문동의 상도문) 등지로 이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명지골과 화일리의 쉬일 등지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1882년부터 1902년까지 쉬일·명지골·싸리재 등 9개 지역에 공소가 설정되었다. 이후 이 공소들은 1883년 4월에 설립된 이천 섭가지성당에 속했다가 함경도의 원산·안변·내평성당에 차례로 속하게 되었다. 1921년 5월 5일 연로한 뮈텔(G. 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주교를 대신하여 서울대목구의 사목을 관장하던 드브레(E. Devred, 兪世竣 에밀리오) 보좌 주교는 양양(襄陽)성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간도 조양하(朝陽河)성당에 재임하던 최문식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최 신부는 우선 상도문리의 싸리재공소로 부임하였으며, 다음해 2월 17일에는 양양읍 서문리에 매입해 둔 가옥으로 이전한 뒤 인근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12월 22일에 새 성당을 완공하였다. 1927년에 부임한 2대 주임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는 1936년의 수해로 서문리 성당이 침수되자 성당 신축을 계획하는 대신 이전 계획을 세우고 현재의 성내리 부지를 매입하였다.
1939년 7월에 부임한 3대 주임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신부는 성내리의 새 성당 공사를 시작하여 1940년 2월 28일에 이를 완공한 뒤 봉헌식을 가졌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양양성당은 몰수되었다. 이광재 신부는 월남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면서 남하하는 사제·수도자와 신자들을 보살펴주다가 함경도 원산 신자들의 연락을 받고 그곳으로 가던 중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이후 그는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0월 9일 형무소 뒷산의 방공호에서 총살되었고, 양양성당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1952년 이후 양양성당은 속초 동명동(東明洞)성당의 초대 주임인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M. S. S. C.)의 맥고완(P. McGowan, 元 파트리치오) 신부 관할이 되었다. 이때 맥고완 신부는 현재의 양양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954년에 완공하였고, 그 결과 같은 해 11월에는 설리반(T. Sullivan, 서 토마스) 신부가 양양성당의 4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1월 30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주보로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이후 양양성당에서는 1983년 10월 1일 성당 내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 및 기념각을 건립하였고, 1988년에는 수녀원을 신축했으며, 1995년에는 성당을 증축하였다. 또 1998년 3월에는 디모테오 어린이집을 개원하고, 2009년 6월 9일에는 이광재 신부 탄생 100주년 기념상을 안치하였다. 현황 : 역대 본당 신부 가운데 유재옥 신부와 이광재 신부는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 성당 입구에 이광재 신부님 순교각 바로 옆에 기울어진 채 문이 열린 곳이 기념관입니다. 마음 아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고 그 정신이지요. 그 앞에 약력비가 고요하고. 문 안으로 들어서니 역대 주임신부님들의 초상화 관련 서적과 성물 소년 같은 이광재 신부님의 초상을오래오래 바라 보았습니다.양양 성당 내부 우리는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열정적인 기념관장님의 이광재 신부님 소개 시간이 모자라서 다 듣지 못해 죄송하고 아쉬웠습니다. 미사 후에 성당문을 나서니 뜻밖에 현북면 어정전리 산골에 사는 손수지 수필가가 한 시간을 운전해 와서 미사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착실한 개신교 신자인 그녀와 성모상 앞에서 급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잠깐의 눈맞춤과 말 몇 마디 나누고, 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또 혼자 한 시간여를 달려 오대산 끝자락 어성전으로 돌아 가겠지요. 헤어질 때 손 선생은 말했습니다. "저는 양양군내에 살아도 이렇게 유서 깊은 성당이 있는 줄 몰랐어요. 다른 날 다시 와서 천천히 둘러봐야 될 것 같아요. 이광재 신부님, 정말 감동입니다." ================================================================= 2. 임당동 성당 공소 시대와 본당의 설립 (임당동 홈페이지)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된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다. 다시 충청 · 전라 · 경기도의 신자들이 산간 지대로 피신해 오면서 이곳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중 강릉 지역은 1882-1883년에 삼정평(강릉군 구정면 여찬리) · 새울(강릉군 구정면 어단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1887년에는 금광리(강릉군 구정면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는 등 병인박해 이후 꾸준히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다. 좀 떨어져 찍어야 하는데 시간상 바로 앞에서 올려 찍었더니 사진이 영 그러네요. 당시 영동 지역은 1893년 이후 안변(내평) 본당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본당의 설립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교구에서는 1921년 5월에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해서 임당동 성당 홈페이지서 제공하는 사진과 그림을 보여드려요. 그런데 양양 본당의 신설 당시, 교구에서는 이미 영동 지역에 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최문식 신부의 보좌로 임명된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는 1921년 12월에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 · 임당동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고 강릉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이철연 신부는 1923년 말에 주문진(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새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단정한 내부 착한 목자상 뒤쪽 휴게실에서 어르신들의 댄스가 한창이고, 요한 바오로2세 교육관에선 어르신들의 노래가 신나게 흘러나왔습니다. 노인분과가 많이 활성화 된 듯 보였어요. =================================================================== 3.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개설되어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한때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 본당으로서 1921년에는 양양 본당과 함께 영동 지역 두 개의 본당 중 하나였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흥선 대원군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개설된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이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박해 이후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베푼 것이다. 그 당시 금광리 공소와 속초시 상도문리의 싸리재 공소(도문 공소)는 단독 공소 건물을 갖추고 신자 수도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려다 본 공소 =================================================== 강릉부 관아. 시간이 없어 내리지도 못하고 버스에서 스쳐 지났기에 서운해서 인터넷에서 찾아올립니다 칠사당 임영관 객사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