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1) - 천주교 박해와 조선
1. 조선에서 ‘천주교’의 시작은 이벽과 정약용 가문을 중심으로 한 남인 시파들이 천진암에서 모여 실시한 ‘서학 강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천주교 교리에 매료된 이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였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1891년 윤지충이 어머니의 장례을 천주교식으로 지내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으로 그 파문을 가져왔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천주교의 전래를 유교의 강화로 극복할 수 있다하며 본격적인 탄압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후 천주교는 권력 교체 시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상대 정치세력을 제거하는 희생양 도구로 사용되었고, 강압적인 통치를 지속시키기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채택되어 수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2. 대규모의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세력이 남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시도한 일명 <신유박해(1801)>에서 시작된다. 이때 남인 시파의 주요한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가게 되어 많은 가문이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대규모 박해는 1834년 헌종의 즉위 이후 벌어진 <기해박해>인데, 이 또한 권력 다툼 과정에서 천주교를 희생양으로 삼게 되면서 확산되었다. 1839년에서 1841년에 걸친 박해에는 프랑스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희생당했고 집권 세력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백성들을 통제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순교한 1846년을 ‘병오박해’라 하는데 이것도 기해박해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3. 가장 큰 박해는 고종 즉위 이후 대원군이 집권했을 때인 1866년에 시작되어 1870년까지 진행된 ‘병인박해’이다. 1864년 고종 즉위 후 왕의 친부로서 권력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이하응)은 러시아 남하에 따른 정치적 고민을 안게 되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였던 남종삼의 건의로 프랑스를 통한 러시아 견제에 매력을 갖게 되어 천주교 인사와 교섭하려 시도한다. 흥선에게 천주교는 자신의 아내까지 신자일 정도로 익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경한 유교 극단주의자들의 항의와 당시 일어났던 병인양요의 혼란까지 겹치면서 ‘병인박해’는 약 2만명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로로 잔인하게 진행된다. 지금 합정동(과거 양화진)에 있는 절두산 성지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장소였다.
4. 19세기 벌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박해는 흔들리고 있던 유교적 조선의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심각한 징후였다. 노론과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한 세도정치 상황에서 대부분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함을 넘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소위 ‘3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이라 표현되는 백성들에 대한 착취와 약탈은 수많은 민란을 불러 일으켰고, 백성들은 유교적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세계에 몸서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의 탄생 또한 현재의 세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모여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신분질서를 강요하면서 희생을 요구하는 유교질서에 대한 분노에 그 자양분이 있었던 것이다.
5. 집권 세력은 사회구조의 모순과 잘못에 대한 개혁보다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처형하는 것으로 문제에 대응했다. 천주교 박해는 사회적 모순에 대처하는 집권 세력의 반동적이고 반개혁적인 수구적 움직임이었다. “천주교 박해는 비열하고도 광기어린 행동이었다. 그것은 권위와 권력에 아무런 자신감도 없는 자들이 하는 협박이었고 그 공포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세 말기 유교의 한계를 본다.”
6. 천주교 박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유교사회의 허약성과 그 허약함을 감추려는 권력층의 광기에서 시작되었지만 또 다른 원인은 경직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천주교의 교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주를 태웠던 ‘진산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천주교는 동아시아의 유교의례를 우상숭배라 규정지었고,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시켰다. 오랫동안 한 사회의 질서를 규정지었던 문화를 부정하는 것은 유교를 신봉하는 양반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혐오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태도가 불필요한 희생을 더욱 확대시켰던 것이다.
7. 그럼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주었던 태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들의 용기는 주목할 만하다. 박해 때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배교를 강요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선택하여 목숨을 구했지만, 보통의 사람들 특히 많은 여성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통해 오랫동안 누적되고 고통받았던 여성들이 가졌던 위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조선 사회에 대한 불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동력이 된 것이다. “교리엔 무식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한국여성이 당한 사회적 구속에 대한 반발이요 저항이었다.”
8. 19세기 천주교 박해를 통해 무너지고 있는 유교적 조선의 위기를 직시할 수 있었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모순 앞에서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슬픔을 인식하게 된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또 다른 세계를 꿈꿀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시선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도굴에 안내를 했던 내포의 천주교 신자들의 행동은 개인의 생존을 위한 처절하고 치열한 투쟁으로도 볼 수 있다. 사회가 혼란해지고 지도자들이 온갖 부정에 빠져들 때, 수많은 반국가적인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고 왜곡된 판단의 결과일지라도 그것을 만들어낸 권력자들의 책임을 방기할 수 없다. 아니 개인의 존엄을 파괴시킨 권력자들의 만행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였던 것이다.
첫댓글 - 알지 못하는, 알 수 없었던 그러나 지금 겪고 있는 이 지랄같은 세상보다는 더 낫다고 들리는 세계에 대한 열망이 희망을 불러온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같을 수밖에 없었을 시간, 눈앞의 빤한 세계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세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