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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조선인 자치 및 독립운동의 첫걸음, 간민교육회1
몇 사람의 작은 모임이 활성화되고 공명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며 길이 되고 역사가 된다.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 중, 특별히 1910년대 간도에서 일어난 자생적인 자치, 독립운동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간도 최초의 단체인“간민교육회”와 “간민회”의 공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첫머리에 놓아도 손색이 없다.
간민교육회와 간민회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두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하나는 김약연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립과 이동휘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들의 기여와 공로를 강조한 글들이다.
김약연은 크리스천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는 분이고, 김립과 이동휘는 조기 사회주의자로서 추앙받는 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서 가능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 진위와 과장들이 드러날 것이다.
1885년 청나라 조정이 정식으로 청조의 발상지인 백두산 일대와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350킬로미터, 넓이 20~25킬로미터 되는 지역을 조선이주민 개간구역으로 확정해주었다. 악정과 기근에 허덕였던 조선인들이 물밀듯이 들어가서 1890년대에 이르러 무산에서 종성대안에 이르는 100킬로미터 두만강 이북이 전부 개간되었다. 그들은 남만주지역과 연변지역 뿐만 아니라 멀리는 내몽골에 까지 벋어나가면서 수전을 개발하고 경제생활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차별로 인한 고통과 불이익,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당시 연길현의 자료에 의하면 1909에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개간민은 184,867명이었다. 그들은 “간도협약”이 말하는 잡거지역에서 거주권과 토지소유권을 가지고 살면서도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대변할 강력한 단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차츰 민족의식이 분출되며 자치 기구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들이 드러났다.
1. 간민교육회
1) 설립의 역사적 배경과 창립
20세기 처음 10년에 일어났던 조선의 멸망과 조선사회의 구국운동으로서의 계몽운동과 독립투사들의 간도 이주 그리고 청나라가 펼친 신학운동은 연변의 간민사회의 사립학교 운동과 간민교육회 창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이 한국사회를 휩쓸었다. 계몽 운동가들은 일본의 침략은 조선의 실력부족에서 오는 것이므로 실력을 양성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 서구문명의 수용으로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여 자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들은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신민회 등을 결성하며 대중 계몽운동과 신교육에 의한 교육구국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그 결과로 서우학회, 호남학회, 호서학회, 서북학회, 기호학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근대적 교육을 목표로 한 사립학교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 운동가들은 사립학교 교육으로 장차에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찾으려는 열망으로 사립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하여 1909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2,250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이런 한국의 계몽운동과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간도에도 밀려왔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에 대한 일제의 전면적인 탄압이 강화되자 독립투사들이 간도지역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들은 한인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근대문명 전수와 더불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함으로서 연변지역 한인 사회 내부에서도 교육을 통한 항일계몽 운동이 신속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화룡현 동신학교와 덕흥학교의 건립을 효시로 하여 1906년에 서전서숙이 용정에 세워졌고 창동학교, 명동학교, 정동학교, 광성학교 등 근대교육을 지향하는 사립학교가 세워져서 민족 교육의 틀을 만들었다.
1903년에 청정부가 반포한 “주정학당장정”은 중국교육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신학학제로서 발표되자마자 유례없는 신학열풍이 불어서 1908년에 건립된 관립대학교가 123개에 달했으며 1910년 한 해에 청정부는 무려 415개의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 연길청에서는 국자가에 교육행정기관인 “연길권학소”를 설치하였으며, 1908년 연길청 산하에 “학무공서”를 설치하고 연변지역의 근대교육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런 중국 내의 신학운동은 연변지역의 한인교육운동의 추진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0년 대 초기 10년에 간민사회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간민교육회”의 설립이다. 간민교육회는 1909년 9월 처음에 “간민자치회”로 발족하였으나 동남로관찰사의 권유로 간민교육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10년 3월에 정식으로 중국정부에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
간민민교육회에 창립에 대하여 많은 이견들이 있다.
최근갑은 ❰시련의 열매❱에서 1907년에 김약연이 규암재 서당에서 김영학, 구춘선, 강백규, 마진, 유찬희 등과 같이 “교민회”를 조직하고 1907년에는 이동춘과 함께 “간민교육회”를 조직하였다고 했다.
서대숙은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의하면 김약연이 1907년에 비밀결사인 “교민회”를 조직하였으나 후에 명동학교 교직원들과 구춘선, 김영학, 문치정, 강백규와 다른 유지들과 함께 “간민자치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간민자치회가 한인사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자 일본이 중국을 종용하여 간민자치회가 해산에 직면하여 이름을 “간민교육회”로 바꾸고 1909년 9월 월에 길림동남로병비도관찰사서의 공식인가를 받고 발족하였으며 이동춘이 이봉우, 구춘선, 박찬익, 정재면, 운해 등과 함께 간민교육회를 지도하였다. 창립 때 이동춘, 김약연, 박정서, 구춘선, 정재면, 정안립, 계봉우, 김립, 윤해, 박상환, 장석함, 강봉우, 윤명희, 김영학, 강백규, 문치정, 김정규, 김하규, 마진 등이 참가하였다.
❰중국조선족통사 상권❱에 의하면 “간민교육회”는 1909년 7월 이전에 이동춘에 의해 “간민자치회”로 발족하였으나 동남로관찰사서의 권유로 “간민교육회”로 이름이 바뀐다.
❰연변조선족사 상권❱에 의하면 1909년에 설립되었고 1910년 3월에 이동춘, 박찬익, 윤해 등이 증국 관변측의 공식 허가를 맡았다.
리광인에 의하면 이동춘이 1909년 9월에 반일지사들과 함께 국자가에 “간민교육회‘를 세웠다.
김춘선의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의하면 1909년 10월 이동춘, 박무림 등이 ‘북간도 한인의 단결자유를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간민자치회를 발기하였다. 이에 대하여 1910년 1월 길림순무 천자오창은 조선인들의 귀화입적을 전제로 하고 자치회 설립을 인가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3월에 이미 귀화입적을 한 이동춘, 박찬익, 윤해가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고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였다.
서굉일과 김재홍의❰ 규암김약연선생❱ 의하면 간민교육회는 처음 한민자치회로 출발하였으나 일제의 항의로 한민교육회로 고쳤고, 한민교육회는 합방을 당하며 1910년 8월 간민교육회로 바뀌었다. 그들은 교육회가 이동춘의 발기로 중국지방당국의 협조로 시작되었으며 박무림, 정재면, 김약연 등 명동학교 중심이 주동이 되어 이동춘의 협력으로 중국관청에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심영숙에 의하면 1909년 이동춘과 김립 등이 조선족교육을 전문 담당하는 기관인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였다.
반병률에 의하면 박무림 등이 조직한 한민자치회, 한민교육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한인 자제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1910년 3월에 조직된 것으로 이동춘, 이봉우, 윤해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책마다 설립연도와 설립 배경, 설립자에 대하여 조금씩 다르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리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①상기의 기록들에 의하면 설립연도는 1909년 9월 설, 1910년 3월 설, 1910년 10월 설이 있다. 대부분의 중국 자료들은 간민교육회는 1909년 9월에 창립총회를 열었고 다음 해 3월에 중국 정부에 공식으로 등록하여 허가를 받은 것으로 기술한다. 나는 중국의 사가들이 중국 내에 있는 그 당시의 기록들인 원 자료와 사료를 인용하여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며 이동춘과 박무림이 간민자치회를 발기하고 제출 신청서를 낸 것이 10월이므로 그 이전 9월에 창립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춘선이 말하는 1910년 3월은 창립일이 아니라 간민자치회가 이름을 바꾸어서 중국정부에 간민교육회라는 이름으로 공식허가를 받은 날이다.
②반병률과 서굉일, 김재홍이 주장하는 간민교육회가 한민자치회의 발전적인 후신이라는 말은 사료를 근거로 해서 검증해야 한다. 김춘선의 주장대로 이동춘과 박무림등이 1909년 10월에 “간민자치회”로 중국정부에 신청서를 냈다가 “준하면 곧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길 것이고 금하면 감정이 크게 상할 것이니 두 가지를 공평하게 하려면 좋기는 국적해결로부터 하는 것이다.” 회시를 받고 1910년 3월에 이름을 “간민교육회”로 바꾸어서 신청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간민교육회는 한민자치회의 후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한민자치회가 간민교육회를 창립으로 말미암아 그 쪽으로 자연스럽게 합류되었을 것이다.
③조기 사회주의자인 김립과 이동휘가 간민교육회 창립과 발전에 공이 있다는 몇몇의 주장에 대하여 살펴보자.
간민교육회는 1909년 9월에 설립되었고 김립은 1910년 2월 15일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생 중의 1명으로 졸업을 한 뒤. 1911년 초에 비로소 북간도 사회에 나타난다. 그는 길동 기독학당을 간민교육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세우는 중에 학교가 재정문제에 봉착하자 3개월 만에, 4월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그 후, 1912년 3월에 다시 북간도로 들어와서 간민교육회 교육권장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간민교육회가 신식교육을 반대하는 보수적인 유학자들, 완고한 농부들의 강력한 저항, 일제의 외교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퇴락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서대숙이 김립을 간민교육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으로 정리한 것은 시대에 대한 착오일 것이다.
이동휘는 구례선 선교사의 파송을 받은 순회 전도사로 1910년 하반기에 북간도에 잠시 발을 디뎠다. 그러나 1911년 초에 105인 사건으로 개성에서 붙잡혀 황해도 무의도에 3년 유배를 당하였다. 1912년 가을,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에서 빠져나온 후에 망명을 시도하여 다시 간도로 나왔을 때 간민교육회는 신교육을 반대하는 간민들과 일본의 압력으로 지도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간민교육회의 주요 인사들과 안면이 있으며 그들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그를 간민교육회의 활동가나 공로자로 기록하는 것은 후세인들의 과장으로 보인다.
2부로 계속됨
참고서적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주필 김춘선, 연변인민출판사,2015
중국조선족통사 상권, 주필 김춘선, 부주필 김철수, 연변인민출판사,2009
연변조선족사 상권, 집필소조편 김영만,리송영, 연변인민출판사, 2011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심영숙, 민족출판사, 2016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서굉일, 김재홍, 고려글방,1997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목운동, 김춘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시련의 열매, 최근갑, 료녕민족출판사, 2011
겨레 항일지사들1, 리광인, 민족출판사, 2007
겨레 항일지사들3, 리광인, 민족출판사, 2007
김약연, 서대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중국조선족유래와 20세기초기의 학교, 관봉 엮음
여명기의 민족운동의 순교자들, 반병률, 신서원, 2013
2018.12.17.~18/월,화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간도를 개척한 조선 선열의 처절한 삶에 경의와 찬사를 보냅니다.
당시 그 곳에서 조차도 일본의 압박으로 얼마나 어려웠으면
자치회에서 교육회로 개명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