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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가협회 2012년 연간집 <경남소설) 제7호에 발표한 소설가 표성흠 선생의 단편소설 "지붕 위의 남자"를 올립니다.
단편소설 지붕 위의 남자 표성흠
눈이 오려는지 잔뜩 찌푸린 날씨가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한다. 태양열을 설치한 후 아직 한 번도 따뜻한 온수공급을 받아본 일이 없는 정찬수 씨로선 여간 애 마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쨍하고 햇빛이 나와야 온수가 콸콸 쏟아져 나올 테고, 그래야 생색이 날 것인데 벌써 며칠째 날씨가 꾸물꾸물하니 비싼 돈 들인 테가 나지 않는다. 한평생 찬물에 손 담그고 산 아내를 생각하면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남 먼저 태양열 온수기를 달 생각을 한 것은 그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증거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그동안 고생을 시켜도 작게나 시켰나, 잦은 전근에 수십 번의 이사, 가난에 시달린 것은 두고라도 병든 시부모 공양까지 일임했던 그였다. 이런 미안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마지막 선심 쓰듯 설비한 태양열 온수기다. 아내도 이번만큼은 황공해 했다. "늦복이 터졌나? 뒤늦게 호강하게 생겼네." 그러면서도 아내는 산후조리를 잘 못해 산달만 되면 손발이 저리고 아프다며, 그 보상은 무엇으로도 돌려받을 수 없는 고질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때가 언젠데 지금까지 그런 오금인가. 애들이 벌써 시집 장가를 가고도 한참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툭하면 그때 그 시절을 되뇐다. 시어머니 살아생전에는 입도 뻥긋 못하던 말을 예사롭게 쏟아 내놓는 걸 보면 그간의 고충이 짐작되고도 주리가 남을 일이긴 하다. 이럴 때면 으레 너스레를 떠는 찬수 씨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다 그 어른들 덕분이지." 마침 어른들 묘소가 있던 밭이 도로공사에 편입돼 들어가는 바람에 일부 보상비를 받았다. 그 돈 없었으면 언감생심 어떻게 값비싼 태양열 온수기를 달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냐, 정부 보조금도 끊어진 이 시점에. 그게 다 시어머니 은덕이며 당신이 효도한 덕분 아니냐며 공치사를 하며 아내를 한껏 추켜세우는 그였다. 아내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에는 그저 칭찬만 한 게 없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터득해, 걸핏하면 소쿠리비행기를 태웠다. 그런데 공사를 다 끝낸 뒤 버리고 간 포장지를 보는 순간 그는 아차! 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메이드 인 차이나'다. 분명 중국제라는 표시가 포장지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애초 주문한 상품은 '7season'이라는 영어 로고가 있는'현대'제품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동신'이라는 상표가 붙은 물건이 지붕 위에 올라 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따뜻한 물이 콸콸 나와 주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련만 기대했던 온수가 안 나오니 제품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노릇이다. 애초 주문을 받으러 왔던 이영만이란 사람은 진공관 태양열 30관 1조가 1일 집수할 수 있는 온수의 양이 4십도짜리 3백 리터라 했다. 이러한 태양열 3조면 4십도짜리 9백 리터의 온수가 일시에 저장-보급된다는 이론이다. 이 집열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10개짜리 3조 정도면 방 하나 난방효과는 충분하다 하였다. 늙으면 방 안에 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어, 자연적으로 해결되는 난방기가 있다면 아무리 돈을 들여도 해야 될 일이다. 그러잖아도 난방비 걱정을 하던 참에 그야말로 공돈이 생겼으니 이게 어딘가.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는 그자의 말을 일백 프로 다 믿었다거나 혹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건 그렇게 하여 설치한 태양열 온수기였는데 이게 영 효과가 없으니 심장이 벌렁거릴 수밖에 없다. 돈이나 작나, 자그마치 돈이 6백만 원이다.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겨우 태양열 온수기 한 조를 달아 온수만 쓰는 이장 댁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물도 따뜻해야 되고 난방도 돼야 생색도 나고 본전을 뽑을 수 있을 텐데 '이게 영 아니올시다.'이니 미치고 환장하고 폴짝 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엉터리 중국제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부글부글 부아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견딜 수가 없는 찬수 씨다. 그는 차마 이 이야기를 아내한테는 할 수 없어 혼자 속을 앓았다. 햇빛이 나고 날씨가 맑으면 괜찮아지겠지, 기다려 보기도 했다. 날이 들었는데도 온수효과가 없자 드디어 인내에 한계가 왔다. 우선 속았다는 생각에 열불이 치밀어 올랐고 무엇보다도 중국제라는데 대한 불만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들었다. 금방 계약자를 찾아 전화를 해봤지만 '진공관 태양열은 국가 보조사업도 중국 OEM 방식이라는' 알쏭달쏭한 말 뿐, 속 시원한 답변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러면 왜 애초 약속한 '현대'제품을 하지 않고 엉뚱한 '동신'이라는 걸 설치했느냔 반문에는 애초 '계약서와 동일한 제품이 맞다'는 답변이다. 전화를 끊고 계약서를 다시 보니 계약사가 동신사로 돼 있다. 애초에 태양열을 설치하려고 이영만 씨를 불렀을 때는 빤히 바라다 보이는 앞집 지붕에 설치한 그 '7season'이라는 제품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에, 그 집과 같은 비용에 계약을 했었던 것인데 종이쪽지에 인쇄된 계약사는 전혀 다른 '동신사'라는 글자가 박혀 있다. 이영만 씨를 부른 것도 앞집 동리장의 소개를 받아서였고 태양열 효과도 이장한테 들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엉뚱한 제품이 설치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속았구나!' 그는 드디어 절망적인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렇게 속을 수도 있구나. 계획적인 사기에 휘말려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두눈 뻔히 뜨고 허방을 짚었다 생각하니 머리가 띵하다. 하필이면 또 뭣 하느라고 공사하는 날 집에 없었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을까? 있었다 치더라도 지붕 위에서 하는 공사를 어떻게 일일이 다 감시 감독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제품 확인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래저래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혈압만큼은 오르면 안 된다. 집안 내력이다. 그는 일단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애써 마음을 추슬러 진정을 해본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다. 다시 전화통을 잡았지만 이제는 아예 수신차단을 해놨는지 핸드폰조차도 받지 않는다. 어쩌다가 사무실 전화로 통화가 이루어져도 '제품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설치의 문제일 테니 공사를 한 설치담당 기술자에게 문의하라'는 발뺌이다. 이번에는 설치담당자가 불통이다. 속이 타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이런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다. 계약자 따로, 설치자 따로, 돈 받는 자 따로, 모두 다른 따로국밥이다. 그 흔한 홈페이지 하나 없고 사무실도 없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뜨내기 사기꾼에 휘말려든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도 없다. 어쩌다 생긴 돈을 다 털어 넣은 태양열 온수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아내의 실망은 얼마나 더 클 것인가. 아내에겐 비밀이다. 아직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해 보는 수밖에 없을 일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계약금 외에는 아직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것도 카드결재를 했다면 꼼짝달싹 못하고 갚아야 한다.'는 이야기라 더욱 속이 상한다. "아마 날씨가 흐려서 그럴 거야." 일단 아내에게는 햇볕이 나면 따뜻한 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그리고 쓰고 남은 온수는 넘치고 넘쳐서 난방에 보탬이 될 것이란 고무적인 이야기도 한다. 난방기름 값이 덜 드는 것은 물론이고 일 년 내 찬물에 손 담그지 않아도 되니 그게 어디냐, 거금 들인 값이 있을 거라고, 속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정찬수 씨인데 친구들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야, 사회물정을 그리도 모르냐?" "학교만 있던 놈이 어떻게 알겠네? 세상이 다 순진한 아이들처럼만 보였겠지." 그러니 비싼 수업료 내고 치르는 공부라 생각하란다. 평생 바깥세상 모르고 샌님으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무엇을 어떻게 더 당할지 모르니 무슨 일이건 자기들과 상의해서 하라는 훈계까지 빼놓지 않는 친구들이다. 세상은 온통 도둑놈 천지이니 조심하라는 이야기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보상금 받아 이장하고 남은 돈 날린 거라 다행이지 금쪽같은 퇴직금이라도 날렸으면 어쩔 뻔했느냐는 동정 어린 비아냥거림도 서슴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놈들한테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니 아예 포기를 하는 게 상책이란다. 섣불리 대들었다간 이쪽이 먼저 속상해 죽는다는 것이다. 괜한 일로 혈압 올리지 말란다. "시근이 형이 바로 그 때문에 죽은 거 아이가?" 영근이 형 시근이는 경로당에서 가는 단체여행 따라갔다가 엉터리 약장수한테 속아 거금을 날린 게 억울해 환불해달라고 언쟁을 하다가 혈압이 올라 뇌졸중에 걸려 결국엔 목숨까지 잃었단다. "아직 돈도 안 줬는데?" 찬수 씨는 친구들의 말에 일면 동조를 하면서도 아직 돈을 다 지불한 게 아니니 괜찮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희망을 내비쳐본다. "이미 수금이 카드사로 넘어간 이상 그 악랄함을 어떻게 감당하냐? 괜히 너만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고 말아야. 기나마 너는 통장에 돈까지 들어 있잖냐?" "남의 통장에 돈 들어 있는 것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저 순진한 친구 퇴직금까지 몽땅 날릴까봐서 그러지." 카드 회사하고 맺은 할부 금액은 버틴다고 안 줘도 되는 게 아니란다. 악착스럽단다. 자칫 잘못 걸리면 행패 보고 집안 망치는 수도 있단다. 찬수 씨는 '쉼터' 친구들 말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간다. 공연한 일로 이게 무슨 고생이랴 싶으니 혈압이 자꾸 오르는 느낌이다. 뒷목이 뻣뻣한 게 눈앞이 어질거리기까지 한다. 변기에 걸터앉아 카드사로 전화를 하니, "그건 저들이야 모르죠." 오히려 코웃음만 친다. "납기 내에 입금이나 하쇼." 이거, 정말 세상 물정 그리도 모르냐? 아무리 골샌님이라도 그렇지… 친구들은 그를 놀리기만 한다. "그거야 뭐 안 되면 그만이지만 이번 일로 아내에게 점수는 땄어야." 그의 옹색한 변명에 한 친구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네가 정말 마누라 생각해서 그거 놓았냐? 며느리 생각해서 그랬겠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다. 어쩌다가 일 년에 한두 번 내려오는 며느리를 위해 온수기 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패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패가 나누어진다. "너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말이야 홍도 같은 며늘아기가 그렇게 이쁘더란 말씀이야. 온수기 아니라 그것보다 더한 것도 있으면 해주고 싶어요. 이 할애비를 쏙 빼닮은 손주 녀석을 낳아준 뒤로부터는 아까운 게 하나도 없어요." "저 푼수하고는! 할마씨들이야 벌금 내고도 손주 녀석 자랑한다 카더라마는 며느리한테 반했다는 반푼이는 듣느니 첨이네." 친구들이야 뭐라던 찬수 씨는, "난 애오라지 마누라를 위해서야." 평생 술 퍼마시고 애만 먹이던 아내한테 헌신봉사했다는 강변이다. 야, 그깟 온수기 하나 달아줬다고 면죄부가 되냐? 보상금 나온 김에 팍팍 인심 써라. 해외여행이라도 한번 같이 가라는 친구도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부부동반으로 비행기 한번 타 본 일이 없는 그로서는 이 말도 귀담아들을 이야기라 생각한다. 까짓 돈 그거 놔뒀다 뭐하냐? 죽어 저승 갈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이젠 그렇게 유용할 돈도 없다. 남들은 큰 돈 벌었다지만 까짓 보상비 다 합해도 카드 결재대금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이 돈을 안 줄 수만 있다면, 반품만 시켜버릴 수 있다면, 정말 그 돈으로 둘이 오붓이 여행이라도 떠나리라….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쓰리다. 그렇다고 이 판국에 퇴직금 걸고 서울에 자식 집 사줬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없는 찬수 씨다. 시에서 만들어 준 노인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찬수 씨는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온수가 나오면 난방이 안 되고 난방이 되면 온수가 안 나오고 이래가지고 이거 되겠습니까?" 그는 집열관을 한두 조 단 것도 아니고 세 조씩이나 달았으면 무언가 그 덕을 봐야지 않겠느냐 항변한다. 그러니 저쪽에선 그거 가지고 완전 난방이 되는 것은 아니고 난방 보조 역할 정도는 할 것이라 옹색한 변명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순환이 잘 안 돼서 그런 것 같으니 애초 설치한 팀을 보내 확인해 보겠다.'는 판에 박은 답변이다. 그것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 그쪽 방면으로 공사를 하러 갈 일이 있으면 그때 갈 것이라는 극히 미온적인 답변이다. "그러고도 돈 받을 생각을 해요?" 그는 아직 계약금 외에는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불량제품임을 들어 반품을 하려고 은근히 엄포를 떨 작정이었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더 큰 소리를 친다. "마음대로 하쇼. 돈은 내가 받는 게 아니니까."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여기저기를 아무리 살펴봐도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쇳덩어리다. 겉만 봐서 어찌 그 속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이게 정말 태양열을 모아 온수를 제공하는 물건인지 그냥 가짜 물건인지 알 수가 없다. 이론대로라면 자연광을 모아모아 빛이나 열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야말로 천연자원을 이용하는 최첨단 문명의 이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중국제라는 점에서 목젖을 세차게 누른다. 언젠가 일본에 연수를 갔던 중 신발을 하나 사 신은 일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질척질척 내렸고 마침 샌들을 신고 외출을 한 터여서 발이 젖지 않는 신발을 살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핑계 대고 일제 신발을 하나 장만하고 싶었다. 일본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수한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선진산업국이라 일제를 사 신으면 한 십 년은 신을 것 같았던 그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르고 골라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한 켤레 사 신기는 했는데 한나절도 안 가 물이 새고 밑창이 떨어져나가는 곤혹스런 일을 당하였다. 알고 보니 중국제품이었다. 일본에서 중국제를 사 신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뒤부터는 중국제라면 무조건 두드러기부터 일어나는 찬수 씨였다. 방부제 섞인 고춧가루나 납덩이를 넣은 수산물이 아니더라도 믿을 수 없는 게 중국제품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꽉 박힌 그로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온수기야말로 도무지 가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지붕 위에서 다시 전화를 건다. "이것 보세요. 오늘은 날이 맑았잖아요? 그래도 방이 따뜻하거나 뜨건 물이 나오지 않는데 이게 무슨 온수기란 겁니까?" 볼멘소리를 해대었지만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내가 설치 팀 보낸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게 언제냐고 물었고 대답은 한결같이 그 방향으로 작업 나갈 일이 있을 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 당신네들도 어지간합니다. 제품에 하자가 없고 공사를 잘못해 그러면 하루라도 빨리 재설치를 하든지 교환을 할 것이지 당신네들 편할 대로만……." '하면 됩니까?' 하려는데, 이쯤에서 끊어져버리는 전화다. 이제는 어디라 분풀이할 데도 없다. 그저 싸늘한 철물일 뿐인 설치물을 한번 만져보고는 지붕을 내려오다가 아내와 맞닥뜨렸다. "거기서 뭘 해요?" "아, 이게 왜 안 되나 싶어서 올라와 봤지, 뭐."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지붕 위에 올라간다고 안 되는 게 되나요?" 빨리 기술자를 부르라는 아내였다. 이쯤에서 이실직고를 했어야 했는데 그는 이번에도 또 그 시기를 놓쳤다. 갈수록 저 혼자 바보가 돼 가는 느낌이었지만 하는 수 없다. 학교에만 매달려 있다가 거기서도 '명퇴'라는 미명 아래 백수건달이 되어 방콕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낭패한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창피하고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어디 가서 콱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틀인가 지났는데 문자가 들어왔다. 설치 팀을 보내 자동센서를 달았으니 이제는 잘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온수는 나오지 않았고 난방효과도 없었다. 왜 하필이면 사람도 없는데 와서 수리를 했느냐, 반문하려 했지만 문자를 넣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이래저래 열불이 오른 찬수 씨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학생들의 심정이 이러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그중에는 자신이 담임을 맡았던 학생도 있었다. 유난히 과묵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이 수찬이라 자기 이름자의 순서를 뒤집어놓은 글자하고 똑같았다. 찬수 씨는 그 충격 여파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왜 자꾸 그 학생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가 불러대는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던 궁리 끝에 모종의 글을 적어나간다. 이전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궁여지책으로 써보았던 내용증명서라는 거였다. 말로만 이럴 게 아니라, 최악의 경우, 잔금을 지불하지 않고 버텨야할 경우, 거기 따른 무슨 법적 근거를 마련해두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 받는이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123-4 동신사 (담당자 이영만) 보내는이 김천시 동면 외동리 567-8 정찬수 * 상기 이영만과 정찬수는 태양열 매매계약서를 체결하고 태양열을 설치하였습니다. 계약조건은 상품명 〈7season〉 36관 1조, 30관 2조로써 대금은 총 5백9십8만 원이었습니다. * 1. 그러나 상기 매도인(이영만)은 애초 주문한 상품이 아닌 〈동신태양열〉을 설치하였습니다. 1-1. 이 제품은 매도인이 설명한 성능- 1조당 맑은 날 기준 평균 1회 300L의 40도 온수 저장․제공, 나머지 난방효과-이 되지 않는 불량제품입니다. 1-2. 애초 상품 판매조건대로라면 태양열기구 3조에 1회 온수공급(저장)량이 평균 40도 온수 900L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온도나 양이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에 여러 가지 해명과 보조 장치(열조절 센스 설치 등)을 설치했지만 온수 공급이나 난방(보조)이 원활히 되지 않습니다. 2. 이에 불량제품임을 들어 애초 설치하기로 한 상품으로 재설치해 줄 것을 누차 요구(전화 음성 문자 등) 하였지만 〈7season〉이나 〈동신〉이나 다 같은 중국제품임을 들어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물이 새지 않으니 공사에 하자가 없음으로 교체할 수 없다 발뺌만 합니다. 2-1. 지금이라도 애초 계약했던 제품으로 교체하든지 철거해 가기 바랍니다. 2-2. 철수에 따른 계약 5조 4항(사용손율)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계약된 상품이 아닌, 타상품의 제품을 설치계약 (불이행) 원천무효했기 때문입니다. 3. 원활한 조처가 있을 때까지는 지급하기로 한 대금결재는 보류합니다. 이에 따른 제반 사태도 매수인은 책임지지 않을 것임을 내용증명으로 다시 알려드립니다. 4. 상식적인 판단과 이행을 바랍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 (공급자 따로, 설치자 따로, 돈 받는 자 따로, 주문 받는 자 따로, 서로 책임 회피하는 동안 수요자만 골탕 먹는)를 매스컴을 통해 많이 봅니다. 설치 이후 한 번도 애초 상품설명에 적절한 온수와 난방효과를 못 봤습니다. 교체나 회수를 촉구합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상기해 보시고 합리적인 조처 있길 바랍니다. 2011. 11. 11. * 찬수 씨는 대충 적은 글을, 그것도 미심쩍어, 쉼터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아무래도 친구들의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서다. 혼자서 끙끙거리다 보면 수찬이 같은 극단적인 행동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자가진단이 앞섰기 때문도 있었지만 국어 선생을 한 최 교장한테서 문구 수정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용증명을 읽어본 최 교장이 이래가지고는 안 된다면서 전화를 걸어 자기 아들을 바꿔준다. "경찰서 근무하는 내 아들이여." "암, 말보단 주먹이 빠른 세상잉께." 옆에 있던 친구까지 거들고 나선다. 찬수 씨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우정 전화를 걸어 핸드폰을 건네주는 친구에 대한 호의로 몇 마디 주고받는다. 그러나 별 다른 수가 없다. 그런 일이 하도 허다해 정식으로 고소나 고발을 하기 전에는 별도리가 없다는 것이고, 이미 작정을 하고 그렇게 사기를 쳤다면 이길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겨봤자 그땐 이미 힘 다 빠지고 오히려 경비만 날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아라 이 말이여?"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 교장이 전화기를 낚아 채 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란 말이여? 그러고도 무슨 경찰이여.'하고 경찰인 아들을 나무라는 통에 찬수 씨는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른다. 옆에서 들어도 통화내용이 그대로 다 들린다. 교장은 '그런 사기꾼은 당장 잡아넣어야 한다.'는 얼음장이고 아들은 '법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괜히 부자지간에 언성만 높아지게 생겼다. "세상 참 더러운 세상이여."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한결같이 한탄을 해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이게 다 교육이 잘 못된 탓이라 돌리는 최 교장이다. 한 평생 교육 일선에 몸 바쳐왔지만 그게 어디 소신대로 할 수 있었던 교육이었냐는 반문이다. "그게 다 우리 책임이야." 인성교육 이전에 입시 공부와 돈 버는 일만 가르쳐 놓았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는 자성론이다. 말이야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만 단정 지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현실적 여건이 있질 않았던가. 일일이 그런 이야길 하자면 밑도 끝도 없을 일이다. "세워놓고 사람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니까. 뻔히 두 눈 뜨고 당하잖아." 그러게 왜 그런 큰 공사를 하면서 남몰래 했느냐는 이야기가 곧 나오게 생겼다. 그 다음은 뻔하다. 이장한 묏자리가 나빠서 그렇다할 것이고, 친구들 모임에 나오지 않고 혼자 노니까 그렇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이다. 더 이상 험한 말 나오기 전에 찬수 씨는 휑하니 오토바이를 몰아 우체국을 향한다 '마음 변하기 전에 이걸 부쳐버려야 해.' 노인네들의 사교장인 쉼터에서 우체국까지는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정말 이걸 부쳐서 그대로 이행이 될 것인가를 따져보니 또다시 오리무중인 것이, 이미 경찰도 두 손 들고 만류한 일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격이 되는 느낌이다.'전형적인 사기수법 같은데 차라리 소비자고발센터를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경찰서에 다니는 친구의 아들은 이미 결과까지를 점치고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 내는 일이 아닐는지? 한 번 더 사정해 기술자를 보내 달라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혹시라도 시공이 잘 못돼 그렇다면…. 그렇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말짱 한통속일 텐데…. 에라, 모르겠다. 그는 기어이 내용증명을 부치고 말았다. 읍내에서 돌아온 그는 기분 좋게 막걸리를 한 잔 마셨다. "아직 따뜻한 물은 안 나오제?" "아주 차갑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 찬수 씨는 잘 가지 않는 싱크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열고 손가락을 대 본다. 나오는 물이 약간 밍기직직한 것 같기는 하다. 이게 되려나? 이러다가 온수가 콸콸 쏟아지면 어쩌나? 본래가 이 정도 따뜻한 게 전부인가? 그렇담 뭣 땜에 거금 들여 온수기 설치를 해? 자동센스라는 것을 달았다더니 그 덕분인가? 그는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갔다. 자동온도 센스기, 이걸로 적정 온도를 조절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이전에 부착해놓은 전기보온기하고 똑같다. 전기보온기는 아주 날씨가 추울 때 전기를 꽂아 쓰라고 덧붙여놓은 기기인데 '전깃세가 좀 올라갈 수 있으니 농병용 전기를 사용하라' 했었다. 말하자면 도둑전기를 좀 쓰라는 이야기였다. 그것과 새로 단 자동센스기는 선의 굵기만 다를 뿐이지 하나도 다른 점이 없는데, 저들의 말로는 계기판의 숫자대로 온도를 자동 조절하는 기기라 한다. 그렇다면 전깃세가 많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수는 있겠지만 어쩌겠느냔 답변이었다. 그렇지만 차마 '커피포트에 물 끓이듯 전기로 물을 데워 온수를 만드는 장치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어볼 배짱이 있는 찬수 씨도 아니었다. 이날 이후로 온수는 좀 나오는 것 같았지만 전깃세가 얼마나 나올지 알 수는 없다는 불안감이 또 하나 더 늘었다. 속이 갑갑한 것이 억장이 무너진다. 어쨌거나 이날로 찬수 씨는 지붕 위에 올라가는 횟수가 더 잦아졌다. 물통이 있고 물통으로 들어가는 호스의 잠금장치가 돼 있는 부분을 만져보기 위해서다. 자동센스기를 설치한 시설 팀이 그랬다. '여길 만져 보세요. 따뜻하지 않아요? 이게 태양열을 받아 물이 덥혀진다는 증거란 말에요.' 다른 부분은 차가운데 거긴 약간 따뜻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다. 그렇다면 정말 순환기 고장으로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지붕에서 내려와 보일러실로 들어간다. 새로 설치한 빨간 색깔의 순환기에 손을 대 본다. 싸늘하다. 애초 설치돼 있던 파란색 순환기는 기름보일러에 연결돼 있고 빨간 순환기가 태양열 온수를 보급하는 장치라 했다. 그는 아무리 봐도 자동온도조절기라는 게 전깃줄과 함께 연결돼 있는 것 같아 전력으로 온수를 데우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전기 검침원이 '요즘 특별히 어디 전기 쓴 일이 있어요?' 하고 다그치던 누전사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다. 언젠가 한번 수도가 얼어 터져 몇날 며칠 농병용 전기계량기가 돌아간 모양이어서 전기도둑의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장치를 떼어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게 정말 자동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온도조절기라면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애초에는 없었던 장치이니까 이걸 떼어내도 온수가 보급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게 있어 온수가 나온다면 전열을 이용해 끓인 물에 불과하다. 결론이 여기에 달하자 그는 서슴없이 전깃줄을 자르는 데 멈칫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아니나 다를까, 온수가 중단되었다. 전깃줄을 이으면 온수가 공급되고 끊으면 중단이 된다. 그렇다면 이는 설치기술자의 농간임이 틀림없다. "이건 전기로 물을 끓이는 장치잖아요?" 그는 다시 이영만 씨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시에 이런 일련의 사태가 해결 날 때까지는 요금결재를 하지 않겠다는 전화를 카드사에 걸어 은근한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어디 한 군데에서도 납득할 만한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낸 격이 돼, 카드사건 이영만 씨건 '네 맘대로 해라'가 돼버렸다. 시쳇말로 '배 째라'다. 결국 답답하게 된 것은 찬수 씨다. 그는 급기야 할부 금액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돈을 찾아 다른 통장으로 이체시키는 소동까지 벌였다. 지붕 위 집열판은 태양열을 흡수해 온수를 저장하는데 순환기가 돌지 않아 온수공급이 안된다면 설치기술자를 불러야지 이영만 씨하고는 상관없는 일일 터, 아무리 시스템이 그렇게 잘 못돼 있다 할지라도 기술자를 불러 손을 보도록 해야지 이영만 씨를 다그칠 일이 아닐 성 싶은 찬수 씨는 다시 기술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나 설치기술자의 말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거긴 아무 이상 없다니까요? 자동 센스까지 달아놨잖아요. 지금 올라가서 눈금이 어디 가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너무 높이 올려놓았으면 기다리셔야 하구요, 아님 눈금을 좀 낮춰 보세요." 자동 센스기라며 달아놓은 계기의 눈금이 40도에 놓여 있다. 40이라는 숫자는 40도 이상이 돼야 순환기가 돈다는 표시다. 그러면 40도의 온수가 나온다. 그 이상 올라간 온도의 온수는 난방이 된다. 이 40이라는 숫자는 집열관이 하루에 모을 수 있는 온도의 수치를 뜻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틀을 모으면 80도가 된다는 뜻인가?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된다. 그런데 몇날 며칠이 지났는데도 80도는커녕 40도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게 문제 아닌가. 이틀 사흘을 모았으면 40도에 눈금을 맞춰놓았어도 순환기가 돌아가야 정상일 터, 이게 안 돌아가니 탈이 아닌가. "이게 전기로 물을 끓이는 거 아닌가요?" "우리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는 그 말을 믿고 싶다. 기술자나 이영만이라는 작자가 제발 그런 사람이 아니길 빌며 지붕에서 내려오는 찬수 씨다. 찬수 씨는 차마 전깃세 많이 나올까 봐 센스기의 전선을 끊어놨다는 소린 못하고 다시 전깃줄을 이어놓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지붕 위에서 바라보는 시내 모습이 장관이다. 점점 커져가는 시가지며 높아만 가는 스카이라인이 예전의 시내 모습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도시가 눈앞에 전개 되도다'다. 진즉 시내에다가 아파트를 장만했으면 이 고생은 안 해도 좋았으련만 뭐가 좋다고 한평생 이 좁아터진 곳을 버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이걸 전원주택이라며 시내 친구들은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거긴 그래도 공기 하나는 맑잖아? 공기 좋은 것 하나만으로도 시내보다는 좋다는 이야기들이다. 시내 공기가 그렇게 나쁜가? 말도 말아라, 창문을 못 열어놓는다. 그래 공기 하나는 좋지……. 공기만 좋으면 뭘 해 이런 남모르는 고충이 있는 걸……. 그는 지붕 위에 올라앉아 하릴없이 중얼중얼 노래를 부른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 할 짓이다. 그런데도 지붕 위에서 내려가기가 싫다. 언제부터인지 지붕 위에서 바라보는 풍광에 익숙해지고 있는 찬수 씨다. 그러고 보니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이지만 그 주제곡 〈선라이즈, 선셋〉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아내와 함께 본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였고 가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준 테마였다. 가장은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냥을 하던 시절에는 사냥을 해야 했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렇다면 지금 같은 사회에선 무얼 해야 하는가? 가정의 안녕을 위해선 무어든지 감당해야 한다. 갑자기 무슨 페미니스트가 된 느낌이다. 그러한 찬수 씨의 콧구멍으로 고소한 냄새가 솔솔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마 아내가 지짐을 붙이는 모양이다. 아내는 기분이 좋으면 지짐을 붙인다. 더 좋으면 인삼주까지 따라낸다. "물 나와?" 지붕에서 내려온 찬수 씨는 개수대 앞으로 가 물을 털어본다. 밍기직직하던 물이 뜨거운 온수로 변해 쏟아진다. 아내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싱글벙글한다. 이미 욕조에 물까지 받고 있는 상태다. 이들은 이 당연한 일에, 유리병 속에서 목욕 중인 옥동자 같은 인삼까지 꺼내 씹으며 자축을 했다. 그러나 그 다음 달 고지서를 보고서야 그 뜨거운 물의 정체를 알았고, TV 뉴스를 통해 그 사실을 재확인했다. ─지금까지 태양열 덕인 줄 알고 쓴 온수가 전부 전깃세로 나왔다는 거죠? ─그러니 사람 환장할 노릇 아닙니까. 촌사람이라고 이렇게 속여먹으니 이 일을 어디다 대고 하소연합니까? 앵커는 요즘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주의를 당부한다는 말뿐, 아무런 대책마련도 없이, 또 다른 화재 현장의 기자를 불러내고 있었다.
표성흠│1970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79년 월간 《세대》지 중편소설 신인문학상 당선. 중앙대 문예창작과, 숭실대 국어국문과 대학원 졸업. 시집 《농부의 집》 등, 창작집 《선창잡이》 《열목어를 찾아서》 등. 장편소설 《토우》(전6권), 《월강》(전3권), 《친구의 초상》 등. 현재 경남 거창 〈풀과 나무의 집〉에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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