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5.18 민주화운동 - 80518
 
 
 
카페 게시글
────-- 자료실 스크랩 광주 기독병원 / 은미희
黃薔(노란장미) 추천 0 조회 149 07.11.28 12: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주기독병원

 

은미희

 

 인간은 무엇일까. 조물주가 자신의 형상을 본 따 만들었다는 인간. 선과 악, 성과 속, 이성과 감성. 자신에 대한 성찰은 물론 타인에 대한 박애와 자비의 마음까지. 그 모든 것을 제 몸 안에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그 태어난 순간부터 나름의 존엄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조물주의 모습을 닮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무한한 축복을 받은 셈이다. 그럼으로 인간은 존재자체만으로 존엄하다. 하지만 1980년, 5월. 그 시기의 광주는, 광주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광기에 휩싸인 사냥꾼의 표적이었을 뿐.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철저히 무시된 날들이었다.

 

 기독병원 역시 피의 5.18로부터 비껴나 있을 수 없었다. 18일부터 병원에 환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리들에 분노한 의료진들은 거리로 나가 시위에 동참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이내 병원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응급환자 때문에 거리로 나가지는 못했다.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 군화발 등으로 얻어맞아 중상을 입은 시민과 학생들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늑골이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고, 곳곳의 피부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은 환자들로 이내 기독병원 응급실은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들의 환부만으로도 시내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급박한지 의료진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민간인을 보호해야 할 군인들이 자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만행, 그 잔인함에 의료진들은 말을 잊었다. 

 

 처음 병원으로 실려 온 환자들 가운데는 택시기사들이 많았다. 젊은 사람들을 싣고 시내를 달리던 그들은 계엄군들이 무조건 택시를 세우고는 타고 있던 젊은 사람을 끌어내려 하자 택시기사들은 몸으로 항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택시기사들이라 해서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피 맛을 보았고, 서로 경쟁하듯 인간사냥을 하면서 이성을 잃은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계엄군들은 무차별적으로 이들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타박상을 입거나 늑골이 부러졌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보다는 잡혀간 학생들을 걱정했다. 광기로 번득이는 계엄군들의 눈빛이 잊혀 지지 않는다면서 그들은 아픈 몸으로 진저리를 쳤다.

 

 19일이 되자 시내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20일 저녁, 광주 기독병원 응급실에 처음으로 총상 환자가 도착했다. 20대의 남자였는데, 좌측 쇄골 직상부에 조그만 총상입구가 있었다. 19일 밤에 총상을 입은 환자는 하룻밤 동안 숨어있다 뒤늦게 병원으로 후송돼 온 것이다. X선 촬영결과 위 가슴 뒤편에 산탄총알 같은 것들이 퍼져있었다. 그 환자는 수술도 받지 못하고, 식도파열과 기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20일 밤에는 무려 23건의 수술이 시행되기도 했다.

 

 21일이 되자 금남로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타타타타. 그 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총상환자들이 한꺼번에 응급실로 실려 왔다. 가마니에 실려 오는 부상자들을 더 이상 응급실에 수용할 수 없어 별실복도에 그들을 수용했다  또 영안실이 비좁아 총에 맞아 숨진 주검은 병원 한쪽 뜰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병원은 피바다가 되었고, 절망의 울음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쿨쿨,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를 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한창 나이에, 몸속 피 끓는 젊음으로 불의에 항거에 싸우다 그들은 맥없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와 자신들의 목숨을 희롱하는 죽음에 대면한 것이다.

 

 그들을 살려야 한다는 것, 그들을 다시 저 거리에 펄펄 뛰는 젊은 생명으로 풀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의사와 간호사들은 피로를 잊은 채 그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곳곳에 신음하는 환자들이었다. 피 묻은 손을 내저으며 고통을 호소했고, 두고 온 동료들을 걱정했으며, 의식이 없는 환자들은 살아있다는 신호도 내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질서정연하고, 소독 냄새로 가득 차 있던 병원 응급실은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당시 기독병원에는 모두 다섯 개의 수술 방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 다섯 개의 방으로도 밀려드는 환자를 모두 감당할 수 없었다. 외과, 정형외과 의사들이 3일 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수술에 매달려 수십 명이 넘는 총상 환자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냈다.

 

 총상환자가 넘치자 퇴직했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힘을 보태고, 기독병원 출신 외과 군의관이 군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병원으로 달려와 수술에 참가하기도 했다. 모두 한 마음이었다. 무사히 살아주길. 환부를 더듬을 때마다 그들은 기도를 했고, 아침마다 기도실에 가 하나님을 찾았다.

 

 총상환자들은 산탄총알이 비교적 넓은 부위에 박혀 있었다. 얇은 총알 껍질 속에 강철탄환이 아닌, 납탄이 들어있었는데, 몸에 닿으면 종이 같이 얇은 구리합금 피복이 찢어지고 그 안에 있던 납덩이가 산산 조각이 나면서 환부를 넓게 만들었는데, 이렇게 넓은 부분에 걸쳐 박힌 납 총알 파편들은 척추나 기타 주요 신경이 있는 부위를 건드려 수술로도 회복시킬 수 없었다.

 

 설령 목숨을 건지더라도 그 손상의 정도가 깊어 불구의 몸이 됐다. 부상자 가운데는 총알을 빼지 못한 경우도 생겼다. 탄환이 뼈에 맞으면 몸속에 퍼져버려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납탄의 경우 국제 법에서도 금지되어 있었다. 헌데 어떻게 자국민을 대상으로 납탄을 쓸 수 있었을까. 

 

 수혈할 수 있는 피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기실에는 헌혈하겠다고 몰려든 시민과 학생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오히려 그들을 돌려보내느라 더 애를 먹어야 했다. 어떤 이는 제발 헌혈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왜 헌혈을 막느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저렇게 피를 흘려가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살릴 수 있다면 피보다 더한 것이라도 주고 싶은데 왜 말리냐며 금방이라도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덤벼들었다. 한 할아버지는 마들가리처럼 마른 팔을 내밀고 헌혈할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호통을 쳤고, 한 여고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또 헌혈을 하러왔다가 피가 넘친다는 말을 듣고 가던 한 학생은 빵과 우유를 가져와 이거라도 대신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했다. 피는 넘치고 넘쳤다. 헌혈한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채혈한 피를 보관하는 것도 문제였다.

 

 헌데 사람들을 더 가슴 아프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기어이 헌혈을 하고 돌아가던 여고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따듯한 피를 빼주며 환하게 웃고 나가던 여고생이었다.

 

 그녀는 수송차로 소태동 부근을 지나다 도청에서 퇴각하던 군인들이 쏜 총에 그만 얼굴이 거의 없어져 버린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이 여고생은 도청에서 퇴각하면서 미친 듯이 쏘아대던 공수부대 장갑차의 기관포에 머리를 맞았던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누가 이기고 지는 싸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분명한 것은 누구도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지는 싸움. 절대 치유되거나 봉합될 수 없는 상처가 모두의 가슴과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역사의 오점으로, 죄의식으로, 분노로, 부끄러움으로 그것은 우리 역사의 한 얼굴로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수술환자들은 이름을 알 수 없어 가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들 역시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환자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잠이 오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가며 그렇게 육신에 찾아온 잠을 쫓아냈다. 그랬다. 죽음과 삶의 편에 각각 한발을 담근 채 죽음이냐, 삶이냐, 기로에 서있는 환자들을 두고 쪽잠을 자는 일은 죄를 짓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절대적 공포와, 두려움과, 죽음 앞에 서있는 데서 오는 절망과, 외로움을 나눠 질 수 없었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대검에 베이거나 찔린 환자들은 엄청난 통증과 함께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함께 겪어야만 했는데, 턱에서부터 코 위로 대검에 찔린 환자를 치료하던 간호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함께 울고 말았다.

 

 한 어머니는 피를 흘린 채 응급실 구석에서 신음하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로 범벅이어서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또 부상자와 시신사이를 돌던 한 늙은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부둥켜안고 울다 간호사에게 제발 주사 한 대만 놓아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아들은 살아날 거라고, 그러니 주사 한 대만 놓아달라고 통곡하기도 했다. 그 어머니의 단장의 울음에 간호사들은 다들 눈물을 흘려야 했다.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보다 못해 대항하다 척추에 총상을 입고 실려 온 김용대 씨는 병원에서 척추수술을 받는 동안 부인이 같은 병원에서 딸을 낳는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

 

 김용대 씨는 딸을 보며 이렇게 울며 말했다. 척추를 다친 자신은 앞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텐데, 이 딸을 예쁘게 키우겠다고. 환자들 가운데는 서울에서 노점상을 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단칸방을 마련했다며 고향에 인사를 드리러 가다가 총에 맞은 장용주라는 사람도 있었다.

 

 환자들마다 왜 이런 사연이 없었겠는가. 다들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안고 지내다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사냥꾼의 표적이 되어서는 병원으로 실려와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시 기독병원에서 치료했던 환자들은 모두 143명. 역시 차트를 남기지 않은 부상자는 제외된 숫자였다. 그들은 부상정도를 확인하고 위급환자부터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환자들은 자신보다도 더 상처가 심한 환자를 돌보아달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대검에 찔리거나 총상을 입고 실려 온 부상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치료를 거부한 채 다른 위급한 환자부터 치료해줄 것을 사정했던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거나, 자신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으니 중환자를 돌보라며 병원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또 겉으로는 피가 나지 않았지만 내출혈이 심해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던 부상자도 피를 흘리는 사람먼저 치료하라며 치료순서를 양보했다.

 

 총상환자들을 치료하던 의료진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날짜별로 총상의 부위가 다르다는 사실을. 21일, 처음 도착한 총상환자들은 대부분 허벅지 아래 하체부분에 총상을 입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총상 부위가 점점 위로 올라온 것이다.

 

 나중에 들어온 환자들은 복부와 흉부 등의 상체에 집중돼 있었다. 이는 군인들이 위협사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냥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사냥하듯 시민들을 정조준 했던 것이다.     

 

 27일 새벽. 진압군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광주는 또다시 유린당했다. 다 연발 기관총 소리, 트럭, 헬리콥터 소리, 장갑차,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가 광주의 고요한 새벽을 찢어놓았다. 그 새벽,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얼마만큼의 희생자가 생겼는지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도청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으로는 언덕을 이룬 시체더미들이 몇 개나 있었다는 사실이었고, 부상자들은 전원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

 

 광주의 새벽은 그렇게 끝이 나고, 광주는 그렇게 피를 흘린 채 다시 계엄군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들이 광주를 장악한 후 기독병원으로 파견된 수사대는 입원환자들을 데려 가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기독병원 측은 어떻게 치료를 하고 있는 환자를 내놓을 수 있느냐며 내놓지 않았다.

 

 전쟁 중에서도 부상병들은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며,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수사대에서는 소령계급의 책임자를 파견했고, 그는 인수인계를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들을 압송해간다는 소문이 돌면서 입원환자들은 두려워했고, 그들을 지키는 일 또한 광주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한 병원 측은 어떤 위협에도 응하지 않았다. 기독병원 측의 이런 노력에 다행히 환자들은 병원에 남아 그대로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일했던 기독병원의 외과과장은 자신이 아마도 개인적으로 총상환자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치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 과장은 어느 날 자신이 그렇듯 평화롭던 시기에 총상환자를 다루게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오는 불행에 속수무책인 것이다. 언제 죽음의 그림자가 예비 돼 있는지, 그것이 언제 우리의 발목을 걷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