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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운무와 설악의 암릉을 경험한, 불암산-수락산 종주
1. 일자: 2014. 9. 6 (토)
2. 장소: 불암산(510m), 수락산(638m)
3. 행로/시간
[학도암(07:13) -> 전망대(07:30) -> 헬기장(07:49) -> 깔닥고개/사거리(07:56) -> 불암산(08:10-23) -> (귀바위) -> 덕능고개(09:03, 수락산 4km) -> 철탑(09:36) -> 도솔봉(10:00, 540m) -> 치마바위(10:13) -> 하강바위(10:19) -> 수락산(10:46) -> -> 홈통/기차바위(11:06) -> 석림사 갈림(11:24) -> 도솔봉(11:42, 525m) -> (계단) -> 샘터(12:19) -> 동막골 초소(12:35) -> 회룡역(13:08)]
< 불수 종주를 준비하며 >
백두대간 산행을 함께하는 동기들과 정보 교류의 장으로 '밴드'를 하고 있다. 일상사의 소소한 일들이 게시판에 오르며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지만, 역시 산행정보 교류가 내겐 가장 큰 관심사다. 며칠 전 옥혜님과 아이넷님이 불암산-수락산 종주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그머니 마음이 동했다. 평소 접근이 용이치 않아 찾을 엄두를 내지 않던 불암산과 수락산이 마음 속에 들어온다. 대개의 산꾼이 그렇듯이 목표 산이 정해지면 마음에 풍선이 달린다. 지도를 꺼내 코스 탐사에 들어간다. 중계역 부근 학도암을 들머리로 능선 길로 불암산을 오르고, 덕능고개를 지나 암릉을 따라 걸어 수락산에 닿고 회룡역으로 하산하면 종주 길이 완성된다. (이렇게 코스를 정하고 대간 산행에서 확인해 하니 공식적인 종주 코스는 원자력병원 후문을 들머리로 회룡역으로 하산하는 것이란다. 원자력병원 방향은 접근성이 쉽지 않다. 일단 원안대로 추진해 보기고 한다.)
이번 산행이 잘 마무리 되면 회룡역을 기점으로 사패산과 도봉산 종주를 2차로 추진하고, 이후 우이동에서 불광동까지 북한산 능선 종주까지를 마무리하여 소위 말하는 ‘불수사도북’ 산행을 완성하고 싶다. 남들은 무박으로도 종주한다는 코스인데 3번에 나누어 가는 것이 뭔 의미가 있겠냐고 폄하 하는 이도 있겠지만, 대간 중심의 산행에서 근교 장거리 종주 산행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건 의미 있는 변화다. 이후의 목표는 광교산-백운산-청계산 종주와 검단산-남한산 종주로 이어질 것이다.
288동기들 중엔 산행 입문을 대간 종주로 한 이들도 있지만 난 아니다. 근교 산행이 내 산행 활동의 뿌리다. 2005~2006년 관악산, 청계산, 수리산 등을 집중적으로 오르며 다양한 코스의 길을 접한 건 이후 원거리 산행에 자양분이 되었다. 일종의 온고이지신의 정신으로 근본을 다시 살펴야겠다.
한때 근교 산행 코스 탐사의 바이블로 표지가 닳도록 보던 700산행을 꺼낸다. 코스를 삼등분 해 본다. 학도암 입구-덕릉고개 4.9km 2시간 30분, 덕릉고개-수락산 2시간, 수락산-동막골 5.3km 2시간 식사와 휴식을 포함하면 7시간의 산행이 예상된다.
D-Day는 8월 31일로 잡는다. 새벽 첫 전철을 타고 여정을 떠나는 산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사행은 이와는 달랐다.)
< 희망사항 >
불암산과 수락산은 도봉산과 북한산를 조망하는 더 없이 훌륭한 조망터다. 기억은 도봉의 선인봉과 삼각의 인수봉을 불러온다. 상상만으로도 희뿌옇고 매끄러운 화강암 암봉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진다.
불암산은 2007년 초, 수락산은 2008년 여름 마지막으로 올랐다. 6~7년 전의 일이다. 놀랍다. 7년 전 불암산에서의 일들이 비록 조각이지만 생생히 기억난다. 기록의 힘인가 보다. 2007년 첫 산행부터 매번 산행일기를 써 오고 있는데, 불암산이 3번째 여정이었으며, 당시 글을 쓰는 고통에 빠져 요리조리 핑계거리를 찾던 기억마저 살아 있다. 나태함을 이겨 낸 결과로 기억의 저장소에 당시의 일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오늘 되살아난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다시 지도를 들여다 본다. 전체 구간 중 절반 정도를 이미 걸어보았다.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종주 길을 완성시켜야겠다. 2008년 한 여름 땀 뻘뻘 흘리며 두려움 속에 오르던 기차바위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을까 궁금하다. 익숙한 길에서 새로움을 찾는 산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 상계역 가는 길에 >
5시도 되기 전에 눈을 떴다. 지난 주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 곧바로 몸을 일으킨다. 나태해지면 새벽산행은 못한다. 간단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버스에 올라 사당에서 전철로 갈아 타고 상계역에 내리니 7시 어름이다. 망설이다 택시를 잡고 학도암으로 간다. 절 밑 주차장에 도착하니 7시 15분, 산에 가는 인간이 들머리를 택시로 와도 되나 하는 후회가 되면서도, 높이진 고도와 단축된 시간에 흐뭇해한다. 인간 참 간사하다. ㅋㅋ
< 학도암에서 불암산 >
모처럼 맑은 하늘을 기대했는데 뭉게구름이 듬성듬성 눈에 띤다. 공사 중인 학도암 옆으로 난 산 길을 타고 능선에 올라 붙는다. 길을 따라 목책이 길게 이어진다. 특이한 점은 목책 재료의 형상이 자연 그대로로 부근에서 베어낸 나무들을 사용한 점이다. 원래 있었던 것이라 길과 잘 어울린다. 새 것 만이 능사는 아니다.
습기는 적지만 기온이 올라 더위를 느낀다. 겉옷을 벗고 걸어도 금세 땀이 솟는다. 아침 산책을 나온 이들을 여러 본다. 멀리서 군부대의 함성이 들러온다. 데크가 있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풍광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 북한산 원경 >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연한 회색 빛 하늘 아래, 마치 낯선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질서 있게 들어서 있고, 그 위로는 우주선을 닮은 산이 구름 위에 떠 있다. 멋지다. 북한산 주 능선을 이리 적나라하게 본 적은 이제껏 없었다. 반대편으로는 남산이 구름에 흘러간다. 지리산의 운해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도시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 구름에 흘러가는 남산과 주변 풍경 >
예기치 못한 풍경에 남아 있던 잠이 확 달아났다. 몸도 산에 완전히 적응되었다. 북동쪽 방향으로 이름 모를 산들의 파노라마를 보며 불암산으로 향한다. 산들이 구름에 떠 있는 모습은 계속 보아도 경이롭다.
길이 순탄해지더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광장 중앙에 작은 꽃밭이 정성스레 가꾸어져 있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가을에 문턱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불암산의 정수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바위와 국기 >
깔딱고개 사거리 길과 만나고 난 후, 이내 긴 암릉과 만난다. 긴 계단이 나 있다. 암릉과 계단의 인상이 설악의 울산바위와 닮아있다. 조금 전에 본 지리 운해의 감동이 체 사라지기도 전에 설악의 기운을 느끼니 오늘은 참 행복한 산행을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행운을 얻었다. 구름이 옅게 낀 날씨가 전화위복이 돼 주었다.
불암산 정상 위로 올라서는 바위를 부여잡는다. 예전에는 겁이 나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태극기 밑으로 작은 평지들이 여럿 있다. 사방을 조망한다. 역시 압권은 도봉산에서 북한산을 지나 흐르는 능선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북동쪽 방향으로 흐르는 산줄기 끝에는 용문산으로 추정되는 높다란 산도 보인다. 한참이나 풍경에 취해 눈 길을 거두지 못한다. 새벽 잠을 떨치고 산에 오른 보상을 제대로 받는다.
< 불암산 정상에서 1 >
정상 밑 바위에 앉는다. 차가운 빵을 베어 물면서도 눈은 풍광을 음미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식당 터가 또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카이라운지도 지금 이곳보다는 못하리라. 산이 있는 풍광 자체가 천하일미 음식이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온다. 기분 참 좋다!!
< 불암산 정상에서 2 >
< 불암산에서 수락산 >
덕릉고개로 향한다. 긴 내리막 계단을 만난다. 난간에 서서 다시 북한산을 바라본다. 햇살이 들기 시작한다. 희뿌옇던 대기에 생기가 돈다. 삼각산의 정수리가 빛을 발한다. 카메라를 꺼내어 모습을 또 담는다. 선인봉의 커다란 암괴도 우유 빛 속살을 더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오늘은 삼각과 도봉의 모습으로 인해 참 많은 감동을 받는다.
< 북한산과 도봉산 원경 >
덕릉고개 가는 길은 특징 없는 숲으로 이어진다. 가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나 하고 걱정이 들 만큼 등로가 희미해 지곤 했다. 이러 저런 생각에 잠긴다. 최근 부쩍 드는 생각에는, 사회 전체가 정상 궤도를 벗어나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견뎌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하다. 서로 속이고 헐뜯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타인은 어찌되어도 나 몰라라 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국민 개개인은 본인이 가진 능력보다 높은 삶의 질에 욕심 내고, 이로 인한 책임에는 남 탓을 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는 정부와 정치인을 탓하고… 한 마디로 국가 전체가 힘에 겨운 삶을 살아 가고 있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정치하는 이들의 무능과 잘못된 정치문화가 나라를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릇 정치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헤아려 보면 답은 금세 나오는데 말이다. 국민의 삶이 빨리 제자리를 찾아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보상을 받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최근 동생에게 벌어진 사건도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남의 약점을 잡아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로 인해 사회가 좀먹는다. 덕릉고개로 향하며 문뜩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 하나가 떠 오른다. 이래저래 머리로 생각을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사이 어느덧 민가가 보이는 고개에 도착했다. 산이 난제에 답을 주었다. 산 길이 고착되어 있던 머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어 새 판을 짤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일단은 머리를 쉬게 한다. 지나치면 모자란 만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 수락산의 바위 1 >
지도에서만 접하던 덕릉고개는 도로가 지나는 마을이다. 우회로를 따라 다시 산에 올라탄다. 이내 수락산 3.8km를 알리는 이정표와 만난다. 평탄한 오솔길이 길게 이어졌다. 작은 언덕에 올라 지나온 불암산 줄기를 음미해 본다. 불암은 잘 생긴 산이다. 산자락을 따라 군부대가 여러 목격된다. 아침을 울리던 함성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주변이 군사적 요충지 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철탑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올랐다. 길 가에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잦아진다. 수락산 줄기에 들어선 것이다. 도솔봉 부근을 지난다. 높다란 암봉 밑에 선다. 초입을 네 발로 딛고 오르는데 앞서 가던 이가 길이 없다고 도로 내려온다. 없는 게 아니고 위험하다는 말이겠지. 망설이다. 나도 돌아 내려온다. 많고 많을 암릉 중 하나일 텐데 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 수락산의 바위 2 >
도솔봉을 우회하여 돌아드니 수락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치마바위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사진을 찍어 주시는 분이 나를 보며 ‘많이 배우신 분’ 같다 한다. 피식 웃는다.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시군요’. 그래도 잠시나마 기분은 좋아진다. 이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나 보다.
< 치마바위 부근에서 >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더위와 목마름을 해소해 보고자 함이었는데 먹고 나니 배가 살살 아프고 갈증은 더 난다. 너무 찬 놈이 배에 한꺼번에 들이닥치니 여러 장기가 놀랐다 보다. 좋은 경험을 했다. 산에서는 물이 보약이다. 치마바위를 지나며 바위의 향연이 펼쳐진다. 하강바위, 코끼리바위 등이 연이어 나타난다. 황홀한 풍광에 취해 어딘지도 모르게 봉우리를 올랐다 내렸다 반복한다. 공기돌을 쌓아놓은 듯한 전망이 보이는 바위에서 잠시 멈추어 선다. 여러 면에서 주변이 도봉의 주봉과 닮아 있다. 계단을 내려서며 수락산 정수리로 향한다.
< 수락산 정상으로 향하며 >
인파가 늘어난다. 긴 계단이 올려다 보인다. 예전엔 없던 구조물이다. 10시 45분 무렵 국기가 펄럭이는 수락산 정상에 올랐다. 출발 3시간 반이다. 예상보다 빠른 행보다. 정상 밑 작은 공간이 어수선하다. 그 와중에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는 이가 있어 분주함이 더하다. 한 떼의 미국들이 수락산 정상에 서성인다. 휴일을 맞아 산에 올랐나 보다.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거침없이 떠들어 낸다. 눈꼴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부럽다. 언제쯤 우리도 남의 나라에 가서도 눈치 보지 않고 감정을 표출할 수 있을까? 나라가 부강해야 자신감도 생김을 새삼 느낀다.
< 수락산의 바위 3 >
< 수락산에서 회룡역 >
시간을 어림잡아 본다. 당초 7시간 산행을 계획했는데 이대로 가면 6시간이면 끝나겠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사진 찍는 시간 외에는 쉼 없이 걷기만 한 결과다. 기차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한다. 직벽을 힘겹게 오른 이들의 거친 숨소리가 길에 뚝뚝 떨어진다.
잠시 쉬고 나니 다리의 힘이 생긴다. 기차바위 위에 선다. 아찔하다. 초반 발 디딤이 쉽지 않다. 줄을 잡고 낑낑거리며 내려선다. 발의 흙의 감촉이 느껴진다. 살았다. 조금 전까지 생명을 담보해준 줄을 팽개치고 뒤 이어 내려오는 이들의 모습을 재미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참 이기적이다. ㅎㅎ
< 미륵바위에서 >
기차바위를 지나자 길이 순해진다. 평탄한 능선 길이 이어진다. 지나온 행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작은 발걸음들이 산을 저 만치로 밀어냈다. 석림사 갈림을 지나 도정봉으로 향한다. 정상 부근 미륵바위에서 사진 몇 장을 찍으며 돌아보는 주변은 여전히 멋지다. 남양주 들녘도 보인다. 아직은 푸른 논들에서 연한 노란 기운을 감지한다. 곧 가을이 깊어지리라.
도정봉을 지나자 파장 분위기다. 아직 10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하지만 앞에 큰 봉우리가 없다는 점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뭐니 뭐니 해도 등산은 오름의 싸움이다.
< 도정봉에서 바라 본 풍경 >
동막골까지는 2.2km가 남아 있다. 30분 정도를 내려가자 작은 샘터에 당도한다. 수통에 물을 채울까 하다가 내려갔다 올라올 엄두가 나지 않아 내쳐 걷는다. 도봉산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날머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 동막골 하산 길 풍경 >
< 예필로그 >
12시 35분 동막골 초소에 당도했다. 이제부터 회룡역까지는 도로 길이다. 6시간의 산행이 마무리된다. 여러 잡념으로 어지럽던 머리가 가벼워진다. 예기치 않게 난제를 풀 실마리도 얻고 작은 성취감도 맛보았다. 산에서 힐링을 얻었다. 특히, 도심의 산에서 지리와 설악의 기운을 동시에 받은 일은 좀처럼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일상에 찾아 든 작은 행운에 행복해 하며 삶을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회룡역애서 점심을 사 먹고 회룡골로 향하는 길에 눈 도장을 찍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 화요일 아침 다시 이곳에서 산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 학도암~동막골 산행 궤적 >
첫댓글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