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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 곳간 스크랩 여행,역사>중국여행0601 - 7.8.9.중국의 역사와 한반도...
서화주 추천 0 조회 22 11.04.02 14: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 중국여행을 정리하면서...

    (문화적 동질성, 역사에 대한 다른 생각...)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이고

중국에게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중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중국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나와 우리에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90년대 초반 시작된 해외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한국적이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했고

곧바로 이어진 경주를 비롯한 문화답사 유적에서 그 실체를 뜯어보고 싶었고

일본에 다녀온 이후에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흔히 정체성과 원형질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특히나 공동체의 일체감이 무너지거나 또 다른 공감대가 필요할 때,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준비를 도모할 때...

어찌보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때,

우리는 비로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너나없이 더듬는지도 모른다.

21세기를 맞이하던 시기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에서 신화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듯이...


집단이 이루어낸 기록이 역사라면,

역사는 다시 집단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강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집단의 기억들은 다시 정치, 경제, 생활의 공동체가 선택할 잣대로 현현되고...

그래서 나는 나와 우리를 묶어주는 집단의 기억과 공동체가 주는 소속감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유구한 5천년 역사’ ‘독자성’, ‘단일민족’, ‘백의민족’이 주는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가

과연 나와 우리의 공동체를 묶어주는 동질감과 연대감의 뿌리인가 회의하게 되었고,

오히려 폐쇄적이고 편협한 관념이 아닌가?

혹은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하다 찾은 과거를 빙자한 또 다른 환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고,

결국 이러한 관념들이 주는 우월감이 결국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내 자신이 정체성의 피해자는 아닐까?


인종과 민족의 옷을 벗고,

일본과 중국과 유럽과 미국에 대한 열등감을 버리고,

제3세계와 소위 후진국에 대한 우월감을 포기하고,

역사의 실체를 점검하고,

문명의 비교가 주는 편협함을 극복하고,

차별의 편안함이 보장하는 소속감, 그 소속감이 주는 안이함을 떨쳐내는 일...

그것이 열린 마음과 사고와 행동이 아닐까?


물론 내가 우려하는 것은 또 다른 큰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그 우물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게는 더 넓고 길고 깊은 시야와 안목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부터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결국 일본과 중국까지 포괄할 수 있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의식주와 언어의 동질성이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사고가 열리고

일면적인 집단적 기억을 객관화시키고 보편화시킬 때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존재론과 차별적 잣대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세계인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집단적 기억은 역사로 표출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아니, 생활방식으로까지 구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정치적 공동체의 소속감이 동질성을 획득하고

보다 편안하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활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보다 현실에 충실하고, 삶에 근착해야하며,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나는 새롭게 혹은 나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전수된 집단적 기억을 추적하고 싶다.

보다 넓은 시야와 장기적인 안목, 그리고 열린 마음과 선택을 위해...

아직 다듬어야할 점들이 많지만 그런 차원에서 중국여행은 내게 무척 필요했고

유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8. 중국의 역사에 대한 생각...


이런 의미에서 나는 중국역사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물론 나의 중국역사 정리는 주류 역사학계와 중국적 관점과 많이 다르며

접근도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은 물론 정치경제학적 접근도 비껴간다.

그 보다는 문화권을 위주로, 중국내 4세력의 정치적 대립을 중심으로

그리고 우리 한반도를 포함한 동방문화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그냥 상식을 조합해보고자 한다.


1. 

BC10세기 전후 중국문명은

황하의 중상류, 지금의 시안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황하 하류와 산둥반도, 랴오닝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방 문화권(동이족이라 해도 좋다),

그리고 양자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한 하남 문화권의 세틀로 나뉘어 발전한다.

그래서 한족 문화권 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중국역사는

고대왕조 은과 주의 수도인 시안에서부터 시작되게 기록된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문명과 문화를 집대성한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로 한족이 중국역사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진나라가 세운 기틀을 한나라가 꽃피우며 중국역사가 본격화 된다.

생활권이 확대되고, 철기 사용으로 농경문화가 정착되며

상업의 발달로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꽃피우며

유교란 국가적 기틀을 만들며 중국의 문명과 문화는

불교와 도교를 발달시키고 종이와 비단을 생산하는 등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때의 주요한 대립은 한족 중심세력이 황하강 하류로 진출하면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던 동방 문화권과의 대립이었다.

진시황은 황하하류까지를 세력권으로 만들면서 만리장성으로 영역에 선을 그었다면

한나라는 랴오닝 반도 이남의 한반도까지 진출하여 동방문화권을 무력화 시킨다.


2.

그러나 동방 문화권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한나라는

5호 16국시기를 거쳐 위, 진, 남북조시기로 다시 분열하게 되는데

이는 불교의 선종과 도교가 유행하는 등 개인주의적인 문화의 영향이 컸고

이때가 동방 문화권을 대표하는 고구려와 백제가 가장 번창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전쟁사중 가장 대규모의 전투(20세기 전까지)가 수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지고

결국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 된다.


당대에 이르러 비로서 중국은 북으로는 몽골, 서로는 위구르, 동으로는 발해만의 요하,

남으로는 오늘날의 인도와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는 대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되고

관료체계와 운하건설, 귀족문화 등을 발전시키며

동 아시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며 광대한 문화권을 형성시키게 된다.

참고로 나는 진과 한, 수와 당을 별도의 왕조로 구분하지 않는데,

진과 수가 통일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한과 당은 그 꽃을 피운 연속된 왕조와 사회체제로 파악한다.


송대에 이르러 중국은 농업, 수공업, 상업과 무역을 발전시키며 성장하였으나

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 여진과 거란족에 의해 군사적으로 압박을 받고

서로는 티베트계의 서하가 독립하는 등 혼란을 겪다가

결국 몽골의 칭기스칸에 의해 점령된다.


그리고 하남 문화권과는 또 다른 남부지역이 이 시기(송대) 중국의 영역으로 흡수되는데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 진출 전초기지였고

20세기 중국 개혁, 개방의 최초 실험지역이었던 광둥지방(광저우, 선전)은

11세기 송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통합되어

12세기에는 20세기의 홍콩, 마카오처럼 대외무역창구가 개설되었다.

(* 가장 늦게 편입된 만큼 현재의 광서성 좡족자치구에 가장 다양한 수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3.

유목민과 기마족의 전통에 기반 한 원제국은

먼저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황하 중하류의 한족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키게 되는데,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한 북방 문화권이 중화문화권에게 거둔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고,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북아시아 문화란 말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인류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계기는 두 번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영토 확장, 또 한 번은 속도의 혁명...

영토 확장이 노예와 노동력 확보를 뜻했던 로마시기와 중국의 진,한대에

인류사는 정치체계와 철학/사상, 그리고 종교와 문화의 기틀을 만들었고,

기동력을 근간으로 상업(정보)의 독점/공유/확장의 체계를 완성한 몽골제국에 의해

오늘날 인류사를 이끌어가는 유럽과 동양은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이 두가지 계기는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시장의 확대를 포함하지만 19~20세기 제국주의세력의 식민지 경영도

영토확장(노동력의 확보)이란 형식을 통해 인류사를 변화시킨 계기를 만들었고,

정보통신의 혁명을 근거로 인터넷을 통해 무한 발전의 동력을 갖춘 21세기도

결국 이동속도에 대한 질적 심화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아무튼 칭기스칸의 원나라는 정착과 농업이 아닌 유목민의 근성과 상업으로

인간의 맨몸과 말의 기동성(도구=배,차,비행기가 아닌 동물)을 앞세워

약탈을 위한 군사력(종교와 정치체계가 아닌)과 상업만으로 번성한,

그리고 육지(바다가 아닌)를 통해 확대될 수 있는 인류사의 마지막 정복국가였다고 생각된다.


14세기를 정점으로 인류의 역사는 과학과 자본에 기반 한 해양세력이 주도하게 되는데

네델란드, 포르투칼, 스페인을 거쳐 영국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의 근현대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생산과 무역을 겸비한 자본의 힘을 근거로

육지에서 바다로 눈을 돌린 세력에 의해 세계사는 재편된다.

물론 이 힘은, 르네상스로 대변되는 인간성의 회복과 근대의 사상(국가와 민족 등),

그리고 종교개혁과 과학의 혁명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 등

생산력의 무한한 확장을 근거로 한다.


4.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중국의 도시의 발달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초기 진, 한대를 전후하여 중국의 중심을 이루었던 시안, 뤄양, 난징, 난창, 우한 등은

황하와 양자강 등, 장강 중류의 교통요충지로 군사적 측면이 강했고,

(지리적 접근성이 용이한 지배영역의 공간적 중심부에 위치)

중국 중세의 정치 경제 중심지는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양저우, 쑤저우, 항저우, 광저우등 농경과 상업을 대변하는 곳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지리적 접근성과, 생산과 이동의 중심지라는 효율성에

단위국가의 내부와 육지를 중심으로)

근대에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들인 상하이, 홍콩, 칭다오, 다렌 등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가장 먼저 식민지화 되어 외세에 의해 개발된 항구도시들로서

군사적, 상업적, 공업적 요충지이자 중심지로

도시발달의 무게중심이 이동하였다는 점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아무튼 원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베이징이 중국 정치의 중심지로 부상하는데

베이징의 위치는, 시안과 뤄양을 중심으로 한 한족 문화권과

산둥반도, 랴오닝반도 중심의 동방 문화권,

그리고 몽골을 중심으로 북방 문화권의 지리적 중심지라는

전적으로 공간적 접근성이 주요하게 부각된 정치적 요인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5.

명대에 이르러 중국은 최초로 양자강 중심의 하남 문화권 세력에 의해 통일되는데

(모택동도 하남 문화권 출신이지?)

주원장은 독자적인 하남 문화가 아닌, 한족 중심의 한과 당대의 번영을 목표로 내세우지만

결국 중국의 마지막 정복왕조이자 동방민족의 후예인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고

청나라의 건국과 함께 중국은 새롭게 재편된다.


즉, 시안과 뤄양을 중심으로 한 한족세력과

산둥반도, 랴오닝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방 문화권,

그리고 양자강 중하류의 하남 문화권이 중국민족으로 융화 통일되는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문화를 만들었던 4개의 세력은

한족과 하남 문화권을 하나로 묶고 동방 문화권의 주력을 포섭하여

위구르의 초목지대와 티베트의 사막지대를 지배하게 된 중국과

바이칼 호 주변에 남아 있는 북방 문화권의 몽골,

그리고 동방 문화권은 한국과 일본으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9. 동방 문화권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메모...


참고로 우리의 문화적 영역을 너무 크고 넓게 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 혹은 내가 속한 문화적 뿌리를 동방 문화권으로 보고

여기에 산둥반도와 랴오닝 반도를 포함시키는 이유는 역사적 실체에 근거한다.

약간의 고고학적 자료와 나의 단편적 지식과 상상을 엮어 생각을 전개해 보면...


소위 황하 문명은 엄밀히 두 개의 영역으로 크게 구별되는데

황하 중상류의 채도문화 중심의 신석기 유적과

황하 하류 산둥반도 일대 흑도 중심의 룽산(용산)문화는 엄밀히 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의 유적, 유물들인 빗살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고인돌과 석관묘 등은

발해만 일대의 산둥반도, 랴오닝 반도, 그리고 한반도에서만(!)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동시기 황하 중류나 양자강 일대의 유물들과 뚜렷하고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 흐름은 청동기 시대의 비파형, 세형동검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발전의 흐름을 갖고 있다

이는 동방 문화권이 퉁구스족 갈래의 별도의 세력을 나타내는 고고학적 근거이며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이를 근거로 중국의 문명, 문화적 지도를

북방 문화, 한족 문화, 동방 문화, 하남 문화권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선비, 돌궐, 흉노, 부여, 말갈, 거란 등 여러 형태로 불리 우는 동방 문화권의 제세력은

고조선 시대에 한족 문화권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였거나 역사적 기록을 망실하여

춘추전국시대에는 베이징을 근거로 한 연나라나 산둥을 기반 한 제나라가

이미 중국 역사에 포함되거나 한족 문화권으로 중심이 이동되어 진대에 분화되며,

결정적으로 한나라에 패배하여 고조선에 설치된 한사군에 의해

동방 문화권 고유의 정통성과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고대사가 파괴된다.

이는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이며 역사적 실체를 갖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다.

(고조선 스스로 국호에 고(古)를 붙여야할 이유가 없다...)


조금 더 나아가 당대를 전후한 동방 문화권의 흐름을 살펴보면...

온조(부여계)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 비류백제는 발해만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유지하였으나

(백제는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와 달리 유일하게 난생(알)신화가 없다)

고구려와 갈등이 첨예화된 4세기 전후 백제가 쇠퇴하면서

산둥반도와 중국 동남부 해안에 대한 동방문화권의 해양세력은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7세기 중반 백제, 고구려의 멸망은 동방문화권의 세력이

만주(고구려⟶발해⟶거란(요)⟶여진(금,청))와 한반도(신라⟶고려⟶조선),

일본열도(왜⟶백제⟶일본)로 완전히 분화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문화적 동질성에 근거한 동방 문화권의 역사적 잔재는

한반도만이 아닌 중국지역에서도 나타나는데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은 두 개의 나라를 만드는데

하나가 만주를 중심으로 발해만과 랴오닝 반도까지 세력을 회복한 발해와

또 하나는 산둥반도 일대(오늘날 산둥성의 영역과 거의 일치)의 태평치국의 건국이었다.

결국 발해의 몰락과 지도층의 신라투항은 만주지역에서의 동방문화권이 지닌

자주성과 독자성이 쇠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0세기의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산둥반도와 중국 상하이 주변, 그리고 큐우슈우, 오사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영역을 장악하는데

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과 중국 내 양저우 등의 신라방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장보고는 백제식 해상 네트워크를 만들고 황해(동아시아의 지중해처럼)를 장악했는데

이는 동방문화권의 해상영역에 대한 마지막 진출이자 네트워크 형성이었다.


또한 동방 문화권이 해체된 이후의 여진, 거란족을 동방 문화권의 후예들로 보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당당히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부하였고

(서희 담판 때 거란장수 소손녕의 발언)

고구려의 성지였던 오녀산성은 청나라에게도 성지였다는 점등에 근거한다.

(청나라 발상의 영산이 백두산이고, 오녀산성은 지금까지 우리측의 취재가 거부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은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는데

이성계의 군사적 기반이었고 정치적 세력근거는 여진족이었으며,

그의 군사적 근거를 마련해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은 여진만호였다.


실제로 문화적 동질성에 근거한 영향력 혹은 복고 부흥운동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역사적 변혁기에 정치적 명분으로 곧잘 등장하는데

발해멸망이후 조선조까지 이어진 만주에 대한 북진정책도 생각할 수 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300년이 지난 10세기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이 있었고

또다시 300년이 지난 12세기 후반 고려말기에도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부흥운동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발해멸망 이후 조선조까지 이어진 만주에 대한 북진정책도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발해의 중심지였던 만주의 간도는 1909년 청일 협정으로 조선의 영토에서 지워진다.


원의 몽골세력을 몰아낸 명나라 건국의 명분은 한족의 부흥이었고

청의 만주세력에 대항한 한족의 중화주의는 중국 공산당에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최근의 동북공정도 그러한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문화적 동질성에 근거한 역사적인 뿌리들은 오늘날의 중국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중국에는 베이징빵, 상하이빵, 상둥빵이란 말을 통해 확인해 보면...

정치로 성공하려면 정치적 중심지인 베이징으로 가고(3세력의 대립지)

상하이에 가서는 상업과 경제를 논하지 말고(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지)

중국군대 최고위 별자리의 3~40%를 점하고 있는 산둥출신 앞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그것이다.


역시 일본에도 비슷하게 역사적 지역적 기반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도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역사적 중심지로 부각되는 17세기 이전까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중심지는 초기 큐슈에서

오사카, 나라, 교또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에는 백제의 세력 분포와

흔히 도래인이라 불리던 백제(가야 포함)세력의 정착과 지배층 이동이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잔재(고구려, 신라의 흔적들도 많지만)는 충분히 남아있다.


결국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많은 이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7세기 중반 백제의 부흥을 위해 대규모 선단을 파견하여 당-신라연합군에 대항하고

한반도의 백제가 멸망한 이후, 천황이란 명칭과 일본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690년이나

한반도와 대륙진출을 꿈꾸던 임진년의 조일전쟁 당시나

20세기 일제강점기를 주도하고 만주국을 만든 메이지 유신의 일본 제국주의자의 주력은

백제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던 후꾸오카와 오사카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오늘날에도 이 지역출신들은 일본 내에서 가장 뿌리 깊은 세력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김운용씨는 한일 감정대립을 신라와 백제의 경쟁의식으로까지 단정 지은바 있다.



아무튼 일본에 대한 이야기까지 넘어가면 너무 산만해질 것 같고

역사학에 대한 접근, 한국사에 대한 검토,

또한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특수성 등

보다 심도 있는 주제들이 거론되어야 하고

하나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검토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일단은 중국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큰 틀을 정리하면서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동질성의 길고도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생각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을 공간적으로 연결하고

고대와 중세와 현대에 연속성을 부여하기 위한 나의 어설픈 시도일 수도 있으나.

내게 각인된 집단의 기억을 추적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들이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나 지금의 나의 글에 실소할 수도 있지만

기간에 정리된 한국의 중세와 근대사, 그리고 일본에 대한 정리를 중국사와 함께 묶는다면

나는 조금 더 열린 마음과 선택으로 넓은 시야와 장기적인 안목을 갖출지도 모르지 않을까?

지금보다 조금 더 넓은 동아시아에 대한 세계관을...


                                                             



                                                                     060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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