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회 18일 군부동향 계엄군감축 결정속 광주만 증파
18일 오전8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은 총장 접견실에서 5.18 조치에 대한 후속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계엄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 결정된 주요사항중 하나가 주요 보안목표에 배치된 병력은 단계적으로 감축토록한다는 것이었다. 즉 서울.광주등 전국 각지의 대학과 주요 보안 목표물에 배치된 계엄군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 유일하게 광주에서만은 계엄사의 방침과 달리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광주에는 17일밤 최초의 공수부대, 7공수여단에 이어 18일 오후 3시 11공수여단의 증파가 결정되는등 최강의 정예인 공수부대가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11공수 여단의 증파와 관련, 주목할만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즉 현지지휘관의 추가투입 건의가 없는 상황에서 계속적인 증파가 이뤄졌고 현지파 견 공수부대가 상급지휘부대인 지역책임부대에는 정확한 보고를 않고 특전사에 상세하고도 직접적으로 보고했으며 7공수부대의 광주시내 진압작전 투입전에 이미 11공수여단의 광주추가 투입이 결정됐다는 것등이다.
즉 육군본부(중앙계엄사)-2군사령부(2군지구 계엄사)-전교사(전남북 지구계엄분소)-31사단 사령부(전남지역 계엄분소)-7공수33대대, 35대대라는 정식 명령계통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또 보안사는 보안사 나름대로 광주지역을 책임진 505보안부대를 통해 광주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공수부대의 사령탑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누구인가. 육사 11기로 5공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5공때 내무,국방장관을 역임한다. 노태우 수경사령관과는 경북고 동기(32회)이며 74년 나란히 장성진급을 한 죽마고우다. 정사령관은 노태우와 함게 각각 7공수,9공수 창설 여단장을 2년반도안 지낼 때 동기인 전두환은 한발 앞서 소장을 달고 최정예 수도권 방위부대인 1사단장을 지냈다.
정사령관은 12.12당시 대구의 50사단장을 지내다 동기들이 주축이 된 쿠테타의 논공행상에 따라 특전사령관이 됐다. 12.12사태때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한 정호용은 5.18을 통해 신군부 정권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됐다. 정사령관의 광주개입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88년 7월5일 당시 평민당 정웅의원의 대정부 질의에서였다.
정의원은 80년 5월18일 광주에 내려와 11여단 3개대대, 20일에는 3공수여단 5개대대 증파, 21일에는 20사단 증파, 25일 최종진압작전 등을 전보안사령관과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직접요청해 승인을 얻었다고 주장, 정사령관을 광주관련 주동자로 몰았다.
정의원은 이와함께 국회청 문회에서 31사단장으로서 5.17계엄확대와 관련, 광주의 기존병력으로 시위 진압이 어렵다는 예견이나 견해를 보고 한 적이 없다고 답변, 광주에 공수부대의 파견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사령관은 증언을 통해 육군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18일 점심직후 전화로 광주사태가 악화될 조짐이 있어 3공수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줘 내가 3여단 보다는 11공수여단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자 11여단으로 교체된 것이라고 밝혔다.
즉 육군수뇌부에서 증파가 결정된데 대해 자신은 소속부대장으로서 의견만 개진했다는 얘기다. 또 그는 18,19일의 시위상황은 전혀 보고받은바 없으며 육본의 결정에 따라 휘하부대를 보낸것이라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 했다.
정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11여단 추가증파 결정은 오후1시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시점에서의 광주시위는 전남대앞에서 공수부대의 일방적인 유혈 진압에 밀린 학생들이 50-1백명 단위로 소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을때였다.
이같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통해 세울수 있는 가장 설득력있는 가설은 신 군부가 김대중씨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가 민중봉기로 발전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 그리고 자기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의 저항도 가차없이 분쇄할 의지와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량학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11여단을 증파했다는 것이다.
11공수여단의 증파가 결정된 시점과 거의 맞물려 주목되는 것이 이날 오후 1시께 당시 신군부의 배후인물인 진종채 2군사령관(중장)이 작전지도차광주 현지를 방문한다.(전교사 전투상보)
진사령관의 광주방문이후 공수부대의 광주시가 시위진압투입명령이 떨어졌다. 오후 2시 2군사령부는 전교사를 통해 31사단장에게 7여단을 광주시내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정사단장은 시위규모가 크지 않아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오후 2시30분 2차 군투입명령이 떨어진다. 오후 3시 3차 독촉명령이 떨어졌다. 정사단장은 할수 없이 자시의 전용헬인 50MD로 조선대와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35대대와 33대대를 방문했다.
정사단장은 이자리에서 대대장에게 인명피해 없이 신중하게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살필수 있듯이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자 전투교육사령관인 윤흥정 중장이나 7공수여단에 대한 최종적 지휘권을 가진 31사단장에게는 포괄적 임무를 규정한 훈령형명령이 아닌 명령형 명령만 떨어졌다. (국회광주특위刊, 광주민중항쟁 백서)
이같은 계엄사의 11공수여단 증파는 육본의 폭동진압 작전교범에 비춰봐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진압대상이 일반적인 시위로서 물리적인 힘에 의한 진압이 요구될시에는 수적으로우세한 보병부대를 요청하고 소요사태가 극렬화하여 무장폭도 들이 특정시설을 거점으로 항거할 시에는 특공작건을 수행할수 있는 특수부대를 요청한다 광주에 대한 공수부대 증파는 육본의 작전교범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당시 광주에는 전남지역에서 차출된 경찰 병력만도 1천8백여명이 배치돼 시위를 진압하고 있었으며, 특정시설을 거점으로 무장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11공수여단은 수도경비사령부로부터 작전통제권이 해제돼 광주로 증파됐다. 18일 오후 4시 11공수여단 선발대장교 45명과 하사관, 사병 1백23명은 성남 16K비행장에서 C-123수송기 5대에 분승 광주로 향했고 여단 본대는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열차편으로 광주로의 이동을 완료했다. 도착과 동시에 11여단은 2군 작전통제를 받게되며, 19일 유혈진압의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