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牛眠山)이 든든하게 뒤에서 지켜주고 있다.
이 소는 너무 먹은 탓에 늘어지게 잠만 자고 있다. 그래서 우면산이다.
뒤쪽에 산이 있고 앞쪽에 넓은 들이나 강을 접한 지형을 배산임수(背山 臨水)라고 한다.
예로부터 마을이 들어설 최적의 조건으로 삼았다. 배산은 마을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준다.
임수는 양호한 일조량을 얻게 하며, 근수(近水)는 수운 교통과 관개용수 그리고 물고기까지 얻을 수 있다.
.“산은 다른 산으로부터 지맥을 따라 지기를 받아 전달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지기를 생산해 흘려보내기도 한다.
즉 산은 지기의 공장이거나 저장탱크다. 따라서 산은 크기와 모양에 따라 지기의 저장량이 각기 다른데 우선 산이 커야 하고
토성의 산이어야 한다. 산이 평평할 경우 토심이 깊어지고 지기를 많이 저장할 수 있다. 토성의 산은 흙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면산은 규모는 작지만 형태로 보면 지기가 꽉 찬 산이다.”-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
잠만 자는 우면산이다. 산줄기의 운동량은 아주 적다. 관악 석산(石山)에서 서북쪽으로 술렁술렁 내려오다
남태령 길 하나를 건너자마자 그대로 누워버린 우면산이다. 정말 배가 부른 우면 토산(土山)이다.
풍수적으로 관찰할 때 방배 반포 등 서초가 부자 마을이 된 것은 우면산의 정기가 지맥을 타고 전달됨으로써
소가 누어 있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기 때문이다. 와우형은 곡초가 쌓인 듯한 적초안(積草案)을 안산으로 삼는다.
소는 성질이 유순하고 누워서 음식을 먹는다. 따라서 와우형의 터는 큰 인물이 배출되고 자손 대대로 누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부자가 배출될 터이다.
최근 부촌(富村)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방배동이다. 방배본동과 반포4동 경계에 위치한 서래마을이 부촌(富村) 방배동의 중심이다.
우면산의 정기가 지맥을 타고 전달된 방배동은 예로부터 서리풀이 무성히 자라던 땅이고, 초목이 무성하다면 지기도 왕성한 터이다. 그리고 상하로 기복(起伏)한 구릉 위에 초목이 자라니 이것은 마치 곡초를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의 적초안(積草案)으로 보여 풍수는
방배동을“소가 누어있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라 부른다. 소는 성질이 유순하고 누워서 음식을 먹는 동물인데, 혈처는 되새김질을 위해 입 부위에 기가 모이고, 또 파리를 쫒고자 꼬리 부위에 힘이 쓰인다. 그리고 와우형의 터는 큰 인물이 배출되고 자손 대대로 누워 먹을 정도로 부귀를 누리며 살 터라고 한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른다고 해서 붙여졌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에 살던 주민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수해 를 입고 이주해 오며 생겨났다.
방배동(方背洞)의 배(背)는 배산임수 중 배산(背山)을 가리킨다. 이 마을 뒤에서 지켜주는 산은 남쪽에서 버티고 선 우면산이다.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임수(臨水)로 삼아 우면산을 배산으로 한 방배(背)동은 산북수남(山北水南)의 한양 남촌마을과 그 모양이
흡사하다.
우면산 기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터 잡고 삶을 일군 곳이다. 지금도 우면동 한국교육개발원 남쪽 갓배(대한교원복지회관 앞
언덕)에는 전형적인 북방식 탁자형 고인돌이 남아 있다. 이 고인돌은 지금은 도시개발에 휩쓸려 대부분 사라졌지만 인근 양재동·
원지동의 고인돌과 연결돼 일군의 문화유적지를 형성했던 것으로 관련 학계에서는 간주한다. 우면산터널 남쪽 입구 근처에서는
백제시대의 횡혈식 묘제가 발견돼 삼국시대에도 이곳은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면산 북쪽 기슭에는 침류왕 원년(384)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한 동진(東晋)의 승려 마라난타와 얽힌 전설이 있다.
이곳은 소년 소녀의 형국이어서 이 생기처에서 두 줄기의 생명수가 솟았는데 마라난타가 전도 중 수토병을 얻어 고생하다 이곳에
대성초당을 짓고 머무르며 생명수를 마시고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면산 남쪽 기슭은 밖에서는 바람이 부는 등 일기가 사나워도 이곳에만 들어서면 움 속처럼 따뜻하다고 해서 ‘움 안’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방증이다. 지금도 우면동을 ‘우마니’라고 한다.이는 발음이 비슷한 우면동에서 비롯한 지명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사실은 ‘움 안’이 변한 말이라는 것이 형촌마을 토박이 조경구(76) 씨의 말이다.
그는 “이전에는 말죽거리부터 과천시 뒷골 인근까지 모두 열두 우마니가 있었다”고 말했다. 형촌마을 앞에는 조선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이 자리하며, 인근 송동마을은 능안이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능이 자리할 정도의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방배동 내에서 한강이 보이지 않는 터는 모든 물이 서쪽의 방배로 쪽으로 빠져나감으로 기가 유순해 살기 좋은 터이다.
또 방배동을 에워싼 산들을 보면, 우면산은 평편한 토성(土星) 위에 물결이 이는 듯한 수성(水星)이 가미돼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부귀를 누리며 살기에 적합하고,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듯한 관악산은 화성(火星)으로서 학자나 세계적 예술가를
배출할 산이다.
부촌 방배동(方背洞) 아래녘 반포동(盤浦洞)이다. 반포천과 사당천이 만나고 또한 한강까지 만나는 곳이다.
물줄기 Y자 2개가 연이어 있다. 그 중 합수머리 2개에 방배동과 반포동이 각각 자리를 하고 있다.반포는 세빛섬 등을
비롯해 한강변이 연상되는 부촌이다. 원래는 장마철 상습침수 지역이었다. 반포(盤浦)라는 지명은 홍수피해를 입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던 데서 유래됐다. 다만 처음부터 한자명이 '盤浦'는 아니었다.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 반포천이다.
두서없이 이리 저리 흐르는 개울을 보고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해서 서릿개라고 했다.
물뱀이 이리저리 구불대는 형상에 이유해서 벌레를 뜻하는 서리 반(蟠)의 반포(蟠浦)로 표기했다.
여기서 '서리다'는 말은 '빙빙 둘러서 포개어 놓는다'는 의미와 '물안개와 같은 것이 잔뜩 끼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하천의 물줄기가 마치 실타래를 서려 놓은 것과 같이 구비쳐 흐른다는 뜻의 '서리다'이다.
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 일대에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흘러 가는 지역이라고 해서
서래마을이라는 자연촌락명이 남아 있다. 이 촌락의 이름이 구비쳐 흐르는 물줄기의 형태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반포천 물줄기 일대에는 아침이면 늘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다고 한다.
하천이 굽이쳐 흘러 안개가 많이 끼어 있는 마을 서래마을이라고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서리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물안개가 늘 끼어 있었던 하천 반포천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난리가 나더라도 반석(盤石)처럼 견고한 터라는 바람에서 반포(盤浦)라고 했다.
2001년 반포는 수해로 침수된 적이 있다. 이후 빗물펌프장을 만들고 펌프장으로 들어가는 관로를 개선하면서
상습침수지역에서 벗어났다. 반포는 현재 교통의 중심지인데다 부촌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곳이 되었다
한강 홍수 때는 모두 침수되던 곳 반포이다. 1987년 반포는 물난리를 겼었다.
늘 침수위험이 있던 반포 남단에 있던 반포섬다. 이렇듯 반포는 한강 변에 접한 물판이다.
예로부터 반포섬이 있었던 곳이다. 반포섬은 일명 기도(碁島) 바둑섬이라고도 했다.
고지도에는 기도(基島)라고 나온다.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제1첩에 있는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는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사이의 한강에 ‘기도’(碁島)가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바둑돌을
채취하던 곳으로 추정하고도 있다. 하얀 바둑돌이다.
한강의 기도의 위치와 관련해 한양지역 무속인들의 성주풀이에는 ‘…서빙고 말 무덤 지나 놓고…
동작소 흘러내려 바둑 섬을 건너서서 흑석이며 노들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시대 관원들이 숙직 당번을 서면서 근무 중 바둑을 두다 적발되면 ‘기도(基島’로 하루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모래로 된 섬 반포섬은 남아있었다.
한강 개발과 함께 반포섬 기도(碁島는 사라진다. 그 자리에 최대의 인공섬 서래섬(端來島)이 들어선다.
서래섬은 반포한강공원 반포지구에 있는 섬이다.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1982부터 1986년까지 올림픽대로 건설 및 한강 종합개발을 하면서 조성한 인공 섬 서래섬이다.
면적은 25,000㎡이며 서래1교, 서래2교, 서래3교 등 3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