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TV문학관, <삼포 가는 길>
1. 1975년 개봉된 영화 <삼포 가는 길>은 한국 영화 최초의 로드 무비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당시로는 드물게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길을 걸으면서 일어나는 과정을 담았으며 그 속에서 각자 지닌 사연과 함께 설경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멋지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황석영의 단편 소설 「삼포 가는 길」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만추>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의 유작이었다. 개봉 당시에는 큰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후 다시금 주목받는 영화가 되었고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특별 상연되기도 하였다.
2. 영화 <삼포 가는 길>은 70년대 산업화의 와중 속에서 혼돈스러워하는 우리들의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장 연장자인 정씨는 감옥에서 막 출감한 인물이다. 그는 가족의 해체와 불행이라는 트라우마가 여전히 생채기로 남아있다. 또 다른 노영달이라는 사내는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대변한다. 그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공사장이 열리는 곳에서 일을 하며 그 곳에서 만난 여인들과 일시적인 사랑에 빠질 뿐이다. ‘백화’는 술집 작부이다. 70년대 영화 속에는 유독 유흥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했다. 성적인 환타지를 제공할 뿐 아니라 영화 작업 후 항의받지 않을 유일한 직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화 또한 생활에 지쳐 술집을 탈출한 젊은 여성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사정이었지만 정착하지 못한 인생이었다. 피곤과 고독이 지배하지만 그 것에 대해서도 정직할 수 없는 불안과 상실의 인물들인 것이다.
3. 눈보라 치는 겨울날의 혹독함을 견디며 가는 ‘삼포’는 정씨의 고향이다. 남쪽 바다 끝으로 상징되는 ‘삼포’는 따뜻한 공간과 희망으로의 회귀를 기대하게 하는 곳이다. ‘삼포’는 따뜻한 희망의 장소이지만 누구도 ‘삼포’에 갈 수 없었다. 노영달에게 고향은 없다.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가 살아갈 곳이다. 백화 또한 고향이 있지만, 그곳에 돌아갈 용기가 없다. 그렇기에 여정 중에 가까워진 백화가 영달에게 같이 고향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을 때에도 서로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라는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는지 모른다. 가장 큰 상실은 정씨에게 발생한다. 고통 속에서도 돌아갈 곳이라고 믿었던 ‘삼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용하고 따뜻한 어촌 마을 삼포는 이제 없다. 그곳은 개발을 통해 신작로가 건설되고 관광호텔이 만들어진 변화된 시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잠깐 동안의 기대였지만 그들은 ‘삼포’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정씨도, 백화에게도, 삼포는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공사장으로서의 ‘삼포’가 남아있을 뿐이다. ‘삼포’는 이제 떠돌이 노동자 영달이 갈 곳이 되었다.
4. 엄혹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진행되는 여정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었던 삼포의 변화는 어느 시대 각자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소중했던 어떤 ‘것’의 상실을 말해준다. 70년대 우리는 물질적인 발전과 의식주의 향상을 댓가로 중요했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야만 했다. 가족은 흩어지고, 농촌은 해체되었으며, 오랜 공동체적인 삶은 이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생존을 위해 사람들은 떠돌며 노동을 해야했으며, 수많은 여성들은 고향을 떠나 공장에서, 때론 유흥가에서 삶을 소진시켜야 했다. ‘삼포’는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고향이었다. <삼포 가는 길>은 그러한 최소한의 이미지 또한 붕괴되고 있음을, 아니 이미 사라졌음을 증언한다. 백화와 영달의 애틋한 감정도 통용될 수 없는, 냉혹한 현실만이 지배하는 쓸쓸한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5. 영화 <삼포 가는 길>보다, 81년에 제작된 TV문학관 <삼포 가는 길>의 쓸쓸함은 더욱 크다. 그것은 상영 시간 내내 흐르는 음악의 깊이 때문이며, 정씨 역을 맡은 배우(문오장)의 냉정하지만 절제된 슬픔과 백화를 맡은 배우(차화연)의 당돌하지만 매력적인 역할 때문인지 모른다. 김영동의 배경음악은 2시간 내내 한국적인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그 슬픈 가락 속에서 냉정하게 돌아설 수도 없는, 그렇다고 지속적으로 몰두할 수도 없는, 삶의 흔적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우리들의 불안한 현재적 위치를 발견하게 된다. 문오장의 모호하지만 깊이 있는 표정은 삶과 투쟁해야 했던 과묵한 우리들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하며, 유쾌하고 당돌하지만 내면의 따뜻함을 한탄과 쓸쓸함을 통해 표현했던 차화연의 젊은 날의 우수는 배우들이 보여준 캐릭터의 힘이었다. 그것은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서 정씨를 맡은 김진규와 백화를 맡은 문숙의 연기와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6. 80년대 로드 무비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에 보게 된 <삼포 가는 길>을 통하여 81년도 내가 지녔던 ‘로드 무비’적 감성의 정체를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가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보다는 TV 문학관의 <삼포 가는 길>이 더 큰 로드 무비적 감성과 도전의식을 함양시켰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1981년 그때 경험했던 두 작품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떠도는 삶’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김영동의 영화음악과 함께 <어디로 갈거나>의 애절한 가락이 두 영상작품과 함께 80년대를 지배한 ‘떠남과 쓸쓸함’에 대한 나의 생각을 끊임없이 강화시켰던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러한 생각은 이제 나의 생의 최종적 목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팝송 <Those were days>의 “우리는 늙었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았구나” 라는 가사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첫댓글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 노랫 가사로 머리 속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