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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6월 6일의 관찰사 경질상황 | ||||
도 명 |
경질 전 관찰사 |
비고 |
경질 후 관찰사 |
비고 |
경 기 도 |
이규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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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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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북도 |
이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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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봉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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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
양재익 |
일진회 |
최정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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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
이두황 |
망명 |
이두황 |
망명 |
전라남도 |
김규창 |
일진회 |
신응희 |
망명 |
경상북도 |
이충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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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 |
유학 |
경상남도 |
김사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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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철 |
망명 |
황 해 도 |
박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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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
망명 |
평안북도 |
권혁로 |
망명 |
권혁로 |
망명 |
평안남도 |
박중양 |
유학 |
이진호 |
망명 |
강 원 도 |
황 철 |
망명 |
이규완 |
망명 |
함경북도 |
윤갑병 |
일진회 |
윤갑병 |
일진회 |
함경남도 |
한남규 |
일진회 |
이범래 |
일진회 |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병탄을 단행함에 이르러 여러 세력이 이에 협조하였다. 하나는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민병석 등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황실세력이나 전통적인 명문가 양반계층이다. 다른 하나는 이용구∙송병준∙윤시병∙윤갑병 등의 일진회원처럼 일제에 빌붙어 권력의 일각에 자리잡고 있던 신흥세력이다. 그외 구연수∙이두황∙조희연∙이진호∙신응희∙박중양∙황철 등 일본에 유학했거나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그룹이다.
일제는 강점하고 나서 상층부를 회유할 목적으로 황족이나 명문양반들에게 그리고 병합에 큰공을 세운 자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관직을 부여하였다. 후작에는 이재완∙윤택영∙박영효 등이, 백작에는 민영린∙이완용 등이, 자작에는 박재순∙권중현∙이근택∙고영희∙이재곤∙조중응 민영휘∙이용직∙윤덕영∙민병석∙민영소∙김윤식∙민영규∙송병준∙이하영 등이 뽑혔다. 이들을 총칭하여 매국친일파라고 하자.
이들의 매국 동기는 각각 다르다. 조선왕조체제에서 누렸던 기득권을 유지, 온존하기 위하여 친일의 길을 걸은 황실관계자나 명문양반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황실보존’과 ‘민족구제’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반면, 왕조체제에서 주변인으로 ‘현상타파’를 통하여 입신출세하거나 권력을 향유하려는 정치적 소외계층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진회인데, 그들은 ‘한일합방론’과 ‘대아시아제국건설론’으로 요약되는 대아시아주의를 내걸었다. 일본의 우익집단이 일진회를 비롯하여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내세운 슬로건이 바로 대아시아주의였는데 그러한 감언이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친일매국행각을 정당화하였다. 이들이 표방한 대아시아주의란 요컨대 문화적∙인종적 ‘친근성’에 착목하여 동아시아 중에서 한족(漢族)의 중국을 대상화하면서, 몽고∙만주∙조선에 살고 있는 ‘동이족’이 일본을 중핵으로 민족적 위계질서에 의해 ‘대아시아제국’을 건설한다. 그래서 제1단계 작업으로서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고, 그를 토대로 만주와 몽고까지도 합병해 간다는 것이었다. 기만적 대륙침략론에 지나지 않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병합되고 나서도 이들은 일본에의 완전한 동화를 목적으로 하는 ‘내선일체화’를 친일의 논리로 삼았다. 그것이 20년대 계승되어 나타난 것이 곧 조선자치론이나 참정권론 같은 것들이다. 한 예로 민원식 등 같은 자는, ①조선인에게 지방자치권을 주고, ②중의원의원 선거의 참정권을 부여하여, ③피아(彼我)간 완전히 무차별 평등의 경지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년대 총독부의 어용단체로서 활약한 국민협회(國民協會 ; 회장 민원식, 1920년),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 ; 1920년), 동광회(同光會 ; 간사장 李喜侃, 1921년), 조선혁신당(朝鮮革新黨 ; 1923년), 동민회(同民會 ; 1924년),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 ; 1924년),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 1926년) 등이 ‘내선융화를 기치로 내걸어 그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이들 매국적 동화단체들은 대체로 ①조선자치제의 실시, ②거류민 및 조선인에게 참정권의 부여, ③시정의 개선, 등을 내걸고 일제 당국에 건백 혹은 청원의 형식을 통해 동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서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의 계열을 포함한 ‘독립운동파’의 분열 및 회유의 공작에도 총독부의 주구로서 암약하였다.
2. 변절친일파
1919년 3∙1 독립운동이 있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민족은 독립을 외치었다. 일제는 이에 충격을 받고 종래의 무단통치로서는 한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른 바 ‘문화통치’라는 것을 내걸어 민족분열정책을 획책하여 많은 민족지도자들을 변절시켰다. 이때 넘어간 지도자들이 최린∙최남선∙이광수 같은 자들이다.
이들보다는 한 세대 아래이면서도 이른 바 ‘신식교육’을 받아 문화, 여성, 사회의 각계에서 지도층으로 활약한 자들도 있었고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1937년 대륙침략전쟁을 도발하고 나서 한반도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또한 대대적인 ‘한국인의 일본인화’인 즉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이 전쟁강제동원 정책에 수많은 사회지도층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협력하였다. 한국인을 전쟁의 소모품으로 끌어가는데 앞장 선 것이다. 여성계, 예술 문학계, 종교계 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정춘수, 김동환, 최재서, 주요한, 김활란, 모윤숙, 고황경 등). 뿐만이 아니니라 사회주의자였다가 전향하여 일제의 주구로 활약한 자들도 있다. 이들을 통틀어 ‘변절 부일파’라고 하겠다.
이들은, 아시아침략전쟁을 아시아민족해방과 위대한 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선전하면서 침략전쟁의 주구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정신사적으로 볼 때 병합당시 대아시아제국건설론을 부르짖던 대아시아주의의 흐름을 잇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변절과 전향의 동기나 계기는 매우 다양하다. 3∙1독립운동에 앞장섰다가 변절한 자들인 경우에는 그 독립사상의 불철저성과 한계 등을 들 수도 있다. 이광수처럼 ‘독립청원주의’나 기회주의적인 성격, 혹은 최남선처럼 독립이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인식하여 좌절과 체념 속에서 관념적∙사변론적 독립론자가 되었다가 ‘일선동조론’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실력양성운동론’이나 ‘조선자치론’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우파(개량주의자)들인 경우도 그 사상적 한계 때문에 변절될 가능성을 스스로 배양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앞에서 설명한 매족적 동화단체에 의해 제기되는 ‘조선자치론’ 혹은 ‘조선내정독립론’과는 그 목적과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다. 즉 후자의 경우는 ‘합방론’, ‘일시동인론(一視同仁論)’, ‘내선일체론’ 등 일본측의 주의∙주장에 근거한 것으로 한민족말살책의 일환으로 제시되는 것인 반면, 전자인 경우는 “현재는 독립 실현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합법적∙실천적 운동’으로 민족의 자치를 실현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에 가서는 민족의 독립에 도달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 우파계열의 이러한 투항주의적∙타협주의적 운동은 20년대부터 교육진흥∙민족언론의 창달∙민족대학의 설립∙물산장려운동으로 시작하여, 지방자치제 실시∙공민권의 획득∙선거법의 실시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근본목적이 다르다 하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동화단체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이후 심화되는 일제의 파쇼탄압과 통제 체제하에서 ‘불패’의 신화만이 주입되고 황도주의에 의한 ‘위대한 성전’의 세뇌 공작을 받으면서 이들도 쉽게 변절하여 일제의 주구로 전락하여 갈 것이라는 것은 쉽게 간파할 수가 있다.
민족지도자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재산이나 권력, 명예 등 기득권을 온존, 유지할 목적으로 일제에 빌붙어 안주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부일 협력의 정당화 구실로 내 새운 것은 ‘일선동조론’과 ‘내선일체화론’, 그리고 ‘대동아성전론’ 같은 것이었다. 본래 일본민족과 한민족은 조상을 같이 하는 형제인데(‘일선동조’), 이제 하나로 합쳤으니 명실공히 차별이 없는 ‘내선일체화’가 이루어져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일제가 주장하는 ‘한국인의 황국신민화, 한국의 황토화‘라는 완전동화론과 같은 것으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름 아닌 한민족말살론 바로 그것이었다. 일제 당국이 중일전쟁이후 대대적으로 전개한 ’황민화‘ 정책 즉, 종교적∙사회적∙문화적∙혈통적 동화정책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일제가 주장하는 ‘대동아성전론’을 그대로 받아드려 한국인을 전쟁의 소모품으로 끌어가는데 주체적으로 활동하였다. 후일 그들은 일제가 패망할 것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기도 하다.
3. 황민(皇民)친일파
일제는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황국신민’ 교육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우리말을 못쓰게 하고 이름과 성조차도 빼앗았다. 이러한 교육을 철저히 받은 식민지 2세대(일제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 중에는 일제의 관료나 군인이 되는 것이 출세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고등문관시험 등에 합격하여 고급관리로 출세하거나, 일본 군대의 장교가 된 자들이 있다. 또한 하급관리이면서도 헌병이나 경찰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탄압한 자들도 있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방해하거나 부일 협력을 하였다는 점에서 친일파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다. 이들을 ‘황민 친일파’라고 한다.
1919년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민심수습에 나섰다. 한국어신문 발행허가는 사전검열제라는 법적 장치를 전제로 한 것으로, 민족분열과 사회적 지도엘리트 특히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개량화를 획책하면서 회유책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문화창달’이라는 것은 전통적 문화와 관습을 파괴하여 ‘문화적 일본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조선사 정립’이라는 것은 한국사를 왜곡시켜 일본사의 한 지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 속에 획책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교육제도 개혁을 통한 교육의 문호개방은 일본어 보급과 정신적 동화를 전제로 하여 ‘황민화’된 식민지 관료(교사 포함)와 농촌지도자를 포함한 전문기능인을 배출시켜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문화정치’의 본질은 민족문화말살책이고 또한 민족의 상층 및 중간계층에 대한 개량화 정책이었다.
이때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서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대책이었고, 병합이래 ‘참정권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여 온 부일세력 및 개량주의자들의 불평․불만을 무마하고 회유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육군대신에서 총독으로 자리를 바꾼 육군대장 우가키 카즈시게(宇垣-成)는 ‘내선융화’를 표방하면서 종래의 민족 개량화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궁핍농가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농촌진흥운동’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 운동의 본질은 새로 커 나오는 보통학교 졸업자를 선정, ‘중견인물’로 교육시켜 식민지통치에서 전위적 역할을 담당케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식민지 지배를 떠받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농촌의 중간계층 출신의 청소년들을 ‘황민화’시켜 양성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새로운 지지기반 구축책이었던 것이다
30년대에 들어오면 식민지 관료, 군인, 전문기술직 등 테크노크라트군이 대대적으로 형성되는데, 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황국신민’이 되어 있어서 이들에게서 민족의식이나 독립의지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이들은 전문기술을 가지고 새롭게 일제통치기구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내선일체화’와 전쟁강제동원의 중추적인 핵심세력으로, 혹은 아시아침략전쟁의 수행자로 활약하였다. 그 길이 ‘입신출세’의 길이라고 확신하던 자들로 부일 협력이나 반민족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있을 리 없었다.
4. 해방이후 친일파의 재등장
미군정은 냉전구조가 형성되는 와중에서 일본에서도 과거청산을 하지 아니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남한에서도 일제 때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하고 부일 협력자인 테크노크라트를 대거 기용하여 남한을 통치하였다. 친일파가 우선 부활한 곳은 미군정의 물리력인 경찰이었다. 1946년 현재 미군정청에 재직중인 경위이상 경찰 총 1157명중에서 82%인 949명이 일제 경찰 출신일 정도이다. 그 이후 경찰은 친일 경찰의 주도아래 반공의 투사로서 활약하였다. 다음에 그들이 진출한 분야는 군이다. 해방직후 독립운동을 하였던 계열에서 국군준비대와 광복군 국내지대를 결성하여 국군 창설을 준비하여갔다. 그런데 미군정은 두 단체를 와해, 해산시키고 1946년 1월 8일부터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독립운동계열은 거의 밀려나고 일본군 출신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국군을 이끌어 나갔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군 출신, 제1연대장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제2연대장 이형근은 일본육사 56기, 제4연대장 겸 경비대 총참모총장 정일권은 일본육사 55기이다(<표>, 참조).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 정책은 단지 군과 경찰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계, 학계, 법조계 등,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황국 신민화 된 식민지 엘리트들을 대거 기용하여 테크노크라트로서 재활용하였고 그들은 특히 관계, 군, 경찰, 법조계를 장악하여 제1공화국을 좌지우지하였다(<표>, 참조).
한 예로, 초대 한국은행총재를 거쳐 자유당 때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구용서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구연수의 아들이고 송병준의 외손자로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반역자 집안이다. 구연수는 1895년 국모인 명성왕후시해사건에 연루된 자이고 송병준은 잘 알다시피 나라를 팔아먹은 제1의 국적이다. 진정 해방되었다고 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구용서를 발탁한 것은 최순주이다. 그는 일제시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시 강제동원 전쟁에의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 행각을 벌이다 미군정이 들어서자 유창한 영어실력 때문에 조선은행 총재를 하였고 1950년 재무부장관을 하다가 제3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4사5입 개헌’을 주도한 자이다. 그가 자신의 후임으로 구용서를 앉혀 부활시켰다. 유유상종하여 친일파 인맥을 형성하여 가는 좋은 예이다.
이러한 기류에 타서 ‘변절 부일파’들이 면죄되고 재등장하여 사회와 학계의 지도층으로 활약하게 된다. 임영신, 김활란, 이병도, 이선근 등이 그 예이다.
친일파들은 변절자인가, 황국신민인가를 묻지 않고 집단을 형성하여 세력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1961년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후 박정희 정권은 일본군 출신과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제의 권력에 빌붙었던 부일 협력자들을 중용하여 이 나라를 통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아래서 국무총리를 지냈던 자들만도, 정일권(일본육사), 최규하(만주국 관리), 신현확(일본 군수성 관리), 진의종(일본국 관리), 김정렬(일본육사),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표>, 참조).
제3공화국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부일 협력자들은 특히 일제 때 만주지역에서 활약하였던 만주인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일본에 있는 만주인맥(기시 노부스케 수상, 정계흑막 세지마 류조, 등)과 상통하면서 새롭게 한일 관계를 맺어 나갔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한일협정(1965년)이다.
동서냉전체제와 남분 분단구조의 와중에서 부활하고 집단화되어 결국에는 권력을 장악한 부일 협력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의해 유신독재 체제가 붕괴되고, 자연 연령에 의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80년대 이후는 권력의 전면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전두환 등의 제5공화국 세력은 그들의 불법적 권력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육사론’, ‘한글 세대론’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그 이전의 권력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단절을 꾀하는 것처럼 비치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박정희 친일집단으로부터 철저히 세뇌교육 받은 적자이기 때문에 구호에 그쳤을 뿐, 식민지 잔재와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기대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은 두말을 요하지 않는다.
해방이후 친일파의 부활과 재등장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우선은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에게 일제가 패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곧 친일파를 청산할 주체가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미국의 대한 정책을 들 수가 있다. 미국은 진주하면서 한반도를 적성지역으로 규정하여 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들은 한반도의 역사와 사정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뚜렷한 정책을 수립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인적 자원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점령군으로서 통치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일제가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여 통치하였기 때문에 한국은 철저히 파쇄화 된 단열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되고 나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 틈새를 타고 친일파는 슬금슬금 헤집고 들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2차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적 규모로 불어닥친 동서 냉전의 기류이다. 화전(火戰)은 끝났으나 새롭게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남북 분단이 획책되고 고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친일파는 반공투사로 변신하여 ‘건국의 공로자’로 행세하여 갔다. 한국 전쟁은 그들에게 면죄부나 사면∙복권의 기회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새 나라의 주역으로 등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전쟁은 반공을 국시로 하는 통제체제와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고 여기에서 일제 파시즘의 정신교육과 훈련을 받은 친일파들은 그러한 체제를 떠 받히는 인적 자원으로 재활용되었다. 이후 반공 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래서 60년대 이후 그들은 국가 권력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맺으면서
해방되고 나서도 한민족은 엄청난 시련을 겪어 왔다.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동족 상잔의 전쟁까지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체제는 더욱 공고화되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은 그 후 장기집권, 군사쿠데타, 유신체제, 군사정권 등 독재권력과 통제체제로 자유를 억압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말살하면서 굴종적인 삶을 살도록 하였다.
민족정기가 제대로 서지 않는가 하면, 정의와 도덕에 대한 불감증으로 탈법과 탈세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금전만능과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맹목적인 권력지상과 권력집중의 사회구조와 정신구조가 짜여져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이러한 병적인 풍조와 구조는 반민주적이고 반시민적인 사회를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 이것이 곧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과거 한국을 이끌어 왔던 친일파들은 1930년대부터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철저히 황국신민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그 교육은 반민족적인 ‘한국인의 일본인화’ 교육이었고, 반시민적인 전체주의 교육이었다. 기본적 인권의 보호와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법의식이나,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본질로 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원리를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들에게 민족주체성이나 도덕과 정의감이 존재할 수가 없다.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버는 ‘입신출세’의 요령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에게서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는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해방되고 나서도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동서냉전 구조와 남북분단 체제가 형성∙강화되는 과정 중에서 슬금슬금 부활하여 드디어 국가권력까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그들에게서 민족통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산에서 고기를 잡으려는 짓에 다름 아니었다.
숨통이 꼭 꼭 막히던 70년대부터 친일파 청산의 주장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독재권력의 본질과 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당시 지도층의 부일 협력의 경력은 주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반인륜적인 고문 제도도 일제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었고,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지도자 육성책은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을 모방한 것이었다. 유신체제는 40년대 태평양 전쟁기에 한국인을 전쟁의 소모품으로 강제 동원하기 위하여 구축된 군사병영적인 통제체제였고, 근대화정책은 괴뢰 만주국의 발전모델을 흉내낸 전체주의적인 개발정책이었다. 그들이 청소년기에 체득한 지식을 해방된 조국에서 그대로 적용하여 써먹은 것이었다. 그들이 창출한 파쇼적인 권력 집중과 독재 권력은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와 건전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것은 잘 알려진 그대로이다. IMF 체제라는 국가경제의 위기도 길게 보면 실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종래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면 불온시하고 심지어는 좌익시 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권력의 안보를 위하여 이데올로기로 색칠하여 버리는 것이었다.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극일론’이 제기되고 스스로 그 이전 시대와 단절시켜 일제로부터 교육을 받지 않은 한글세대임을 주장하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 또한 쿠데타를 통한 불법 권력의 정당성을 학보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들 역시 친일파로부터 세뇌 받은 친일파의 적자들이었다. 때문에 한글세대임을 자칭하는 그 권력을 통하여서도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수행될 수가 없었다.
광주민중항쟁과 6∙10시민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민주주의사회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후 민주화운동세력을 주체로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은 곧 친일파와 식민지 유산의 청산과 그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반증하듯 아직도 그 과제는 달성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또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독버섯처럼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저항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친일파 청산이란 과제는 개개인의 잘 잘못을 논하여 포폄하자는 것도 아니고 법에 의하여 사람을 심판하자는 것도 아니다. 한타령식의 저주나 폭로로 치달아 민족을 분열시키고 갈라놓는 짓은 더더욱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학적 실증과 분석을 통하여 역사적 심판이나마 제대로 하고 올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역사운동이다.
친일파는 반민족세력이고 반민주세력이며 반시민적이고 반통일세력이었다. 민족분열을 일삼고 부정과 부패를 만연시킨 정의롭지 못한 세력이었다. 때문에 친일파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 유산의 청산은 민족통일국가, 성숙한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근대’의 완성을 위한 실천적 과제로서 한민족에게 부여된 지고한 임무라고 하겠다.
<표> 해방이후 부일 협력자의 군∙관계 진출상황
역대 대통령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5, 6, 7, 8, 9 |
박정희 |
일본육사 졸, 육군대위 |
대통령 |
5, 10 |
최규하 |
만주 대동학원(15기), 만주국 관리 |
국무총리, 대통령 |
역대 부통령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2 |
김성수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 임전보국단 감사 |
한민당 창당, 부통령 |
4 |
장 면 |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 |
국무총리, 부통령 |
역대 국무총리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2, 7 |
장 면 |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 |
국무총리, 부통령 |
4, 10 |
백두진 |
조선은행 |
조선은행 이사, 재무부 장관, 국회의장 국무총리 |
9 |
정일권 |
일본육사 졸,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
12 |
최규하 |
만주대동학원(15기), 만주국 관리 |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
13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 장관 |
17 |
진의종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북해도청 농무과장 |
국무총리, 보건사회부 장관 |
19 |
김정렬 |
일본 육사, 전투기비행 중대장 |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
역대 외무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8 |
송요찬 |
지원병,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외무부 장관 |
10, 15 |
김유식 |
청진지법 판사 |
외무부 장관, 통일원 장관 |
11, 13 |
정일권 |
일본육사,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 |
14 |
최규하 |
만주 대동학원(15기), 만주국 관리 |
국무총리, 대통령, 외무부 장관 |
16 |
김동조 |
일본고등문관행정과, 일본후생성근무 |
주일대사, 주미대사, 외무부 장관 |
역대 재무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3 |
백두진 |
조선은행 |
조선은행 이사, 재무부 장관, 국회의장 국무총리 |
4 |
박희현 |
일본 관리 |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
7 |
인태식 |
홍천세무서장, 청주세무서장 |
재무부 장관 |
9 |
송인상 |
식산은행 |
한국은행 부총재, 재무부 장관, 부흥부 장관 |
11 |
김영선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진도 군수 |
내무부 장관, 통일원 장관, 주일대사 |
16, 23 |
황종률 |
만주 대동학원(3기) |
재무부 장관,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충북 도지사 |
역대 내무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1 |
윤치영 |
미영타도대좌담회(1941)에서 대동아성전 연설, 임전대책협의회(1941) |
내무부 장관, 서울시장 |
9 |
김태선 |
조선총독부 경무국 수사과장 |
내무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치안국장 |
11 |
백한성 |
평양, 청진, 광주, 대전지법 판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내무부장관 |
12 |
김형근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내무부 장관, 대통령 비서관 서울지검 검사장 |
13 |
이익흥 |
박천경찰서장 |
내무부 장관, 경기도지사, 헌병사령관 |
14 |
장경근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판사 |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
15 |
이직근 |
원주군수 |
내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 |
17 |
김일환 |
봉천무관학교(5기), 만주군경리학교, 만주군 대위 |
국방부 장관, 상공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 |
19 |
홍진기 |
전주지법 판사 |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
20, 31 |
이 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검사, 경성고검 검사 |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주일대사 |
22 |
이상철 |
일본군 장교 |
군단장, 내무부 장관 |
23 |
현석호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화순군수 |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
24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흥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25 |
조재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판사 |
내무부 장관, 경북 도지사 |
26 |
한 신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내무부 장관 |
27, 28, 32, 36 |
박경원 |
일본군 장교 |
군사령관, 내무부 장관 |
30 |
엄민영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내무부 장관 |
37 |
김치열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검찰총장,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
역대 법무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3 |
이우익 |
재판소 통역생․서기, 부산지법 밀양지청 판사, 함흥지법․대구복심법원 판․검사 |
법무부 장관 |
5 |
조진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해주지법 판사 대구지법 부장판사, 대구복심법원 판사 |
법무부 장관, 대구지법, 지방판사 |
8, 20 |
이 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고검 검사 |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주일대사 |
9 |
홍진기 |
전주지법 판사 |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
11 |
조재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판사 |
내무부 장관, 경북 도지사 |
12 |
이병하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법무부 장관 |
13 |
고원증 |
만주 고등문관 |
법무부 장관 |
16, 17, 18 |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대검찰 총장, 대법원 판사,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 |
19 |
권오병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법무부 장관, 문교부 장관 |
21 |
배영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법무부 장관 |
24 |
황산덕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행정과 |
성균관대총장, 문교부장관, 법무부장관 |
26 |
김치열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검찰총장,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
27 |
백상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서울지검 검사장, 법무부 장관 |
역대 검찰총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2 |
김익진 |
충주, 강원, 평양, 함흥지법 판사 평양복심법원 판사 |
대법관, 검찰청장 |
4 |
한격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서울지법원장, 검찰총장 |
5 |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경성지법 판사 |
대검찰 총장, 대법원 판사,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 |
6 |
정순석 |
대구지법 안동지원 판사 |
검찰청장 |
9 |
장영순 |
지원병 |
검찰청장 |
10 |
정창운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검사 |
검찰청장, 동국대 법정대학장 |
역대 국방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4 |
신태영 |
일본 육사(26기), 일본군 장교 |
국방부 장관 |
7 |
김정렬 |
일본 육사(54기), 전투기비행중장 |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
8 |
이종찬 |
일본 육사(49기),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9, 11 |
현석호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화순 군수 |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
12 |
장도영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3 |
송요찬 |
지원병,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8 |
최영희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9 |
임충식 |
간도특설대 |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차장 합참의장 |
20 |
정래혁 |
일본 육사(58기), 일본군 장교 |
국방부 장관 |
21 |
유재흥 |
일본 육사, 일본군 장교 |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차장 대통령안보담당특별보좌관 |
23 |
노재현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
24 |
주영복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역대 문교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2 |
백낙준 |
‘미영타도좌담회’ 참석, 대동아 성전 선전. 친일 논객으로 활동 |
문교부 장관, 연세대 총장 |
4 |
이선근 |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 |
문교부 장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성균관대 총장, 영남대 총장 |
7 |
이병도 |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 조선사편수회 활동. 식민사학자 今西龍의 수사관보로 근무하면서 식민사관 형성에 기여 |
문교부 장관 |
12 |
박일경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문교부 장관 |
14 |
고광만 |
조선총독부 시학관(학무국) 충주공립중학교 교장 |
문교부 장관, 부산대 총장 |
16, 18 |
권오병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문교부 장관, 법무부 장관 |
22 |
황산덕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
성균관대총장, 문교부장관, 법무부장관 |
역대 농림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5 |
임문환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용인 군수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 조선총독부 광공국 서기관․민정관 |
농림부 장관 |
11 |
임철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한일회담 대표,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
13 |
정운갑 |
충남 군속,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농림부 장관 |
15 |
이근직 |
원주 군수 |
내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 |
16 |
이해익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개성 군수 |
경기도 도지사, 농림부 장관 |
18 |
장경순 |
일본군 장교 |
농림부 장관 |
역대 상공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1 |
임영신 |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발족 |
상공부 장관, 중앙대 총장 |
5 |
이재형 |
금융조합 이사 |
상공부 장관, 국회의장 |
7 |
박희현 |
일본 관리 |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
9 |
김일환 |
봉천무관학교(5기), 만주군경리학교 만주군 장교 |
국방부 장관, 상공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 |
10 |
구용서 |
조선은행 동경지점 근무 조선은행 대판지점 서구출장소 지배인 |
한국은행․산업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
13 |
오정수 |
조선곡물사․만주곡물사 사장 |
체신부 장관, 상공부 장관 |
14 |
이태용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
상공부 장관 |
15 |
주요한 |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임원 친일문필 활동 |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 |
17, 19 |
정래혁 |
일본 육사(58기), 일본군 장교 |
상공부 장관, 군사령관 |
21 |
이병호 |
동양척식회사 근무 |
상공부 장관 |
역대 건설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3 |
박임항 |
만주신경군관학교, 일본 육사 |
국방대 총장, 건설부 장관 |
6 |
전예용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광주 군수 조선총독부 사회과장, 학무국 원호과장 |
한국은행 총재, 부흥부 장관건설부 장관 |
9 |
이한림 |
일본 육사(57기), 만주신경군관학교 |
육사 교장, 건설부 장관 |
역대 부흥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3 |
송인상 |
식산은행 |
한국은행 부총재, 재무부․부흥부 장관 |
4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 장관 |
5 |
전예용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광주 군수 조선총독부 사회과장․원호과장 |
한국은행 총재, 부흥부․건설부 장관 |
6 |
주요한 |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임원 친일문필 활동 |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 |
역대 보건사회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5, 16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 장관, 보사부 장관 |
13 |
김태동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조선총독부 전매국 총무과 사무관 |
보사부 장관 |
14 |
이경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보사부 장관, 한일회담 대표 |
15 |
고재필 |
만주 고등문관 만주 대동학원(11기) |
보사부 장관, 무임소 장관 |
18 |
진의종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북해도청 농무과장 |
국무총리, 보사부 장관 |
역대 교통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8 |
김일환 |
봉천무관학교(5기), 만주군경리학교 만주군 장교 |
국방부 장관, 상공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 |
20 |
장성환 |
항공학교 장교 |
공군 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
22 |
최경록 |
육군 지원병, 일본 예비사관학교 |
헌병사령관, 육군 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
역대 체신부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4 |
조주영 |
일본 변호사시험 합격 |
체신부 장관 |
7 |
이응준 |
일본 육사(26기), 일본군 장교 |
육군 참모총장, 체신부 장관 |
8 |
곽의영 |
괴산, 청원군수 |
체신부 장관 |
13 |
한통숙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체신부 장관 |
16, 17 |
홍헌표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강서 군수 평남도이사관, 함북도사무관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함북지부 감리관 함북 농상부장 |
체신부 장관, 성균관대 부총장 |
18 |
김홍식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행정과 양덕 군수 |
충남 도지사,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
21 |
황종률 |
만주 대동학원(3기) 졸 |
충북 도지사, 재무부 장관,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
24 |
신상철 |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졸 |
육군헌병 사령관, 체신부 장관 |
31 |
김기철 |
강원도공립보통학교장, 神仙공립교장 |
체신부 장관 |
역대 무임소 장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5 |
김선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무임소 장관 |
6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흥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12, 13 |
김홍식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행정과 양덕 군수 |
충남 도지사,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
17 |
황종률 |
만주 대동학원(3기) |
충북 도지사, 재무부 장관,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
18 |
김원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무임소 장관 |
27 |
장경순 |
일본군 장교 |
농림부 장관, 무임소 장관 |
28 |
고재필 |
대동학원(11기), 만주고등문관시험 합격 |
보사부 장관, 무임소 장관 |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
서울특별시장 |
1 |
김창영 |
전남 경농부장 |
| |
2 |
이범승 |
경북 이사관, 양주경찰서장 |
| ||
12 |
윤태일 |
일본 육사(7기), 만주군관학교 만주군 장교 |
36사단장 | ||
13 |
윤치영 |
미영타도대좌담회(1941)에서 대동아 성 전을 호소하는 연설. 임전대책협의회(1941) 임원 |
내무부 장관 | ||
부산직할시장 |
2 |
정종철 |
진주부윤 |
경남도지사 | |
6 |
배상갑 |
김해읍회의원 |
| ||
경기도지사 |
2 |
이해익 |
강원도청 지방과장, 개성군수 |
농림부 장관 | |
4 |
이익흥 |
박천경찰서장 |
헌병사령관, 내무부 장관 | ||
8 |
신광균 |
개풍군수 |
| ||
10 |
이흥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 ||
강원도지사 |
7 |
홍창섭 |
삼포군수 |
| |
충북도지사 |
2 |
이명구 |
충북도평의원, 중추원 참의원 |
| |
5 |
김학응 |
보은 군수 |
| ||
7 |
황종률 |
만주 대동학원(3기) |
재무부 장관,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 ||
충남도지사 |
6 |
김학응 |
보은 군수 |
충북도지사 | |
7 |
김홍식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행정과 양덕군수 |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 ||
전북도지사 |
1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 장관 | |
6 |
신용우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
전남도지사 | ||
7 |
김규진 |
일본 보통문관 |
경남도지사 | ||
11 |
임춘성 |
전주부 재무과장 김제, 남원, 익산 군수 및 부윤 |
전주시장 | ||
전남도지사 |
8 |
이하영 |
위원 경찰서장 |
| |
14 |
신용우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
전북도지사 | ||
경북도지사 |
1 |
김대우 |
평북 박천군수, 중추원 서기관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장 전북․경남 도지사 |
| |
6 |
조재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판사 |
내무부 장관 | ||
7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상공성(이후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 장관 | ||
8 |
이근직 |
원주 군수 |
내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 | ||
경남도지사 |
9 |
정종철 |
진주부윤 |
부산직할시장 | |
제주도지사 |
9 |
강성익 |
전남도평의원 |
|
역대 대법원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2 |
조용순 |
판사임용시험 |
대구고법원장, 대법관 |
3, 4 |
조진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해주지법 판사 대구지법 부장판사, 대구복심법원 판사 |
법무부 장관, 대구지법 지방판사 |
5, 6 |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대검찰 총장, 대법원 판사,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 |
7 |
이영섭 |
경성지법 판사 |
대법원 판사, 대법원장 |
역대 대법관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
김찬영 |
판사 |
대법관 |
|
김두일 |
청진, 광주, 함흥, 해주지법 판사 |
서울지검 인천지청장, 대법관 |
|
김익진 |
평양복심법원 판사 |
대법관, 검찰청장 |
|
노진설 |
변호사 |
대법관 |
|
최병주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대법관 |
|
백한성 |
평양, 청진, 광주, 대전지법 판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내무부장관 |
|
이우식 |
전주지법원장 |
대법관 |
|
김동현 |
대구지검 검사 |
대법관 |
|
한격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서울지법원장, 대법관, 대검찰총장 |
|
김갑수 |
평양복심법원 판사 |
대법관 |
|
김세원 |
경성지법 판사 |
대법관, 제주지법원장 |
|
고재호 |
판사 |
대구고등법원장, 대법관 |
|
허 진 |
판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
|
오필선 |
광주지법 목포지청 검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
역대 합동참모회의 의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1 |
이형근 |
일본 육사(56기),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2 |
정일권 |
일본육사,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 |
3 |
유재흥 |
일본 육사,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4 |
백선엽 |
만주 봉천군관학교(9기), 간도특설대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
5 |
최영희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6, 7, 8 |
김종오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9 |
장창국 |
일본 육사(59기),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
10 |
임충식 |
지원병, 일본군 장교, 간도특설대 |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차장, 합참의장 |
11 |
문형태 |
지원병,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
12 |
심흥선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
13 |
한 신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내무부 장관 |
14 |
노재현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
역대 육군참모총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1 |
이응준 |
일본 육사(26기),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체신부 장관 |
2, 4 |
채병덕 |
일본 육사(49)기,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3 |
신태영 |
일본 육사(26기), 일본군 장교 |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
5, 8 |
정일권 |
일본육사,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 |
6 |
이종찬 |
일본 육사(49기),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7, 10 |
백선엽 |
만주 봉천군관학교(9기), 간도특설대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
9 |
이형근 |
일본 육사(56기),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11 |
송요찬 |
지원병,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2 |
최영희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3 |
최경록 |
지원병, 일본 도요하시 예비사관학교 |
헌병사령관, 육군참모총장 |
14 |
장도영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5 |
김종오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16 |
민기식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17 |
김용배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18 |
김계원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19 |
서종철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20 |
노재현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21 |
이세호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역대 공군참모총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1, 3 |
김정렬 |
일본 육사(54기), 일본군 장교 |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5 |
김창규 |
일본 육사(55기), 일본군 장교 |
공군참모총장 |
7 |
장성환 |
일본 항공학교, 일본군 장교 |
공군참모총장 |
8 |
박원석 |
일본 육사(58기), 일본군 장교 |
공군참모총장 |
9 |
장지량 |
일본 육사(60기), 일본군 장교 |
공군참모총장 |
11 |
김두만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
12 |
옥만호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
13 |
주영복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역대 치안국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1 |
이 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검․고검 검사 |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치안국장 |
2, 4 |
김태선 |
조선총독부 경무국 수사부 국장 |
내무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치안국장 |
5 |
이익흥 |
박천경찰서장 |
내무부 장관, 경기도지사, 헌병사령관 |
6 |
홍순봉 |
만주국 행정참사관 |
치안국장, 헌병학교장 |
7 |
윤우경 |
황해도 송화경찰서장 |
서울경찰국장, 헌병사령부 수사과장 치안본부장 |
11 |
김종원 |
군 |
|
17 |
박주식 |
일본 고등문관, 전남도경찰부 경부 서울 성동경찰서장 |
치안국장 |
역대 서울특별시 경찰국장
임기(대) |
이 름 |
식민지 시기 경력 |
해방 이후 경력 |
2 |
김태선 |
조선총독부 경무국 수사국장 |
내무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치안국장 |
3 |
이익흥 |
박천경찰서장 |
내무부 장관, 경기도지사, 헌병사령관 치안국장 |
4 |
윤우경 |
황해도 송화경찰서장 |
서울경찰국장, 헌병사령부 수사과장 치안본부장 |
5 |
윤명운 |
종로경찰서 경부 |
서울경찰국장, 내무부 차관 |
6 |
윤기병 |
수원경찰서장 |
서울경찰국장, 동대문 경찰서장 |
7 |
변종현 |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 동대문 경찰서 경부보 |
서울경찰국장 |
해방공간 남북한의 친일청산 실태와 문제점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1. 머리말
올해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정동영 상임고문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부친이 창씨를 개명하고, 독립투사를 구금하고 고문했던 조선총독부의 검사보를 거쳐서 검사임용시험에 합격한 것은 명백한 친일행위"라며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이 총재는 솔직하게 고백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대변인은 “김 대통령은 일제시대 학예회서 일본군인 역을 자임했고 대통령이 돼서도 일제 때 은사를 찾아 자신을 도요타라고 하지 않았느냐”면서 "도요타 정권의 중상모략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있는 영역인 정치권에서 이렇듯 첨예한 파장을 몰고 왔듯이 언론계 등 기타영역에서도 그 충격은 마찬가지였다. 심사위원장이었던 서상섭 의원은 "조선일보는 나를 취조하듯 다그친다"면서 “해방 후 5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파와 그들이 심어놓은 세력의 힘이 막강함을 피부로 느꼈다. 그들은 55년을 버티며 지낸 것이다”라고 실토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친일문제는 그 옛날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 당시의 과거사이거니와 동시에 오늘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현장과 현재의 문제임을 분명히 확인시켜준다. 반민특위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의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고는 새로운 나라의 기강을 세울 수 없다”라는 ‘역사바로세우기’가 이승만의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사 덮어두기’보다 역사의 진리임이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이라는 역사추상을(historical projection) 해 본다면, 현직 대통령이 식민지당시의 스승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찾아갈 수 없었을 테고 또 부친의 친일시비에 말리는 야당총재가 대통령후보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 글은 이러한 역사의 전도현상을 중심으로, 첫째 해방공간 친일청산의 역사적 자리 매김을 시도하고, 둘째 친일청산 방향과 이에 대한 해방공간 당시의 조선 사회의 내재적 역량을 살펴보고, 셋째 친일청산의 좌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을 원초적으로 형성해 이후 친일청산을 불가능하게 한 미군정의 친일파 및 친일구조 회생정책을 살펴본다. 특히 강조할 것은 대부분의 친일파 연구들이 친일파 청산의 실패를 우리 탓으로만, 곧 이승만 정권에게만 귀착시키는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현상의 설명에서 최종 시점의 행위에만 주목하는 행위론적 설명에만 매달리고, 그러한 행위가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든 구조적 요인을, 곧 구조론적 설명을 등한히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어떠한 우익정권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거의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점을 기존의 연구는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을 살펴보면 필리핀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친일 및 친식민 민족반역자의 청산은 실패했고, 그 요인은 바로 미국의 반동적인 점령정책에 기인됨을 알 수 있다.
넷째 이러한 구조적 제약 하에서 이 친일구조를 더욱 확대 재생산시켜 이후 남한 땅을 친일파와 그 후예의 세상으로 만든 이승만 초대정권의 친일파관련 정책을 살펴보고, 다섯째 한 나라 한 땅덩어리 한 민족이면서도 대조적으로 거의 완벽한 친일청산을 이룩한 북한의 친일청산 현황을 살펴보고, 여섯째 친일 未청산으로 인한 문제점을 몇 가지에 한정하여 살펴 볼 것이다.
2. 해방공간과 친일청산
지금부터 57년 전인 1945년 8월 조선은 35년간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해방공간을 맞았다. 해방은 두 가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일제의 직접적인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남을 확보하는 해방이고 둘째는 조선인 스스로 조선인을 위한 새로운 조선사회를 창건하는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방 후 3년 동안은 미군정의 점령통치를 받아 두 가지 해방가운데 한가지의 해방도 성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또 이승만 정권이 창출되었지만 이 역시 첫째의 해방은 그런 대로 이룩했지만 둘째의 해방은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까지도 왜곡된 해방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해방이 된지 57년이 되는 이 시점까지 우리는 ‘해방은 되었으되 진정한 해방은 아직도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두 가지 의미의 해방을 전제로 한 해방공간을 특징화 해보겠다. 첫째 과거사와의 단호한 단절과 새로운 역사창조를 의미하는 사회구조적 혁명공간의 도래를 의미했다. 둘째 민족사적 전환기, 곧 ‘역사의 갈림길’이었다. 역사갈림길 또는 전환기란 역사궤적 앞에 펼쳐진 여러 가지 역사행로 가운데 이 시점에서 취한 어떤 특정한 역사행로가 그 이후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어 역사의 궤적이 상당히 고정되어버리게 되는 결정적인 시기라는 의미이다. 셋째 바로 위의 의미에서 해방공간은 Perry Anderson의 발생적 결정론(genesis determinism)의 시기였다. 이는 기원적(또는 발생적) 특성이 현재의 구조적 특성보다 더 규정력이 높아 그 이후의 역사구조에 투영되어 현재의 구조적 특성으로 잔존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넷째, 과거사와의 단호한 단절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 역사를 주조 및 고형(固形)화한 식민잔재 청산, 곧 친일청산과 분단극복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시기인 해방공간에서 조선사회는 조선 고유의 내재적 역사행로인 친일청산이 차단되고, 분단과 전쟁의 역사행로를 외세에 의해 강요당했다. 이 결과 해방공간 당시 조선인의 염원이던 민족사적 핵심과제인 친일청산이 좌초되고 이후의 조선사회 전체의 역사진전에 끊임없이 제약을 가하는 태생적 한계로 작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친일청산의 지향
1) 구조 속의 친일파와 친일행위
대부분의 친일파는 자연인으로서보다는 어떤 조직과 집단 및 구조 속의 특정인으로서 친일행위를 했다. 그래서 친일청산은 구조 속의 친일파라는 사람중심의 청산과 구조 자체의 청산을 함께 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박흥식처럼 친일지주 및 친일매판자본가라는 지배계급 구조 속에서, 김성수처럼 조선총독부 중추원 등 여러 종류의 위원회 자문위원으로서, 최규하처럼 총독부관련 관리로서, 노덕술처럼 악랄한 고등계 형사로서, 박정희처럼 ‘성전’을 수행하는 황군의 사도로서 반민족행위나 친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식민지배의 서식처인 구조에 대한 청산작업과 더불어 그 서식처에서 서식해 오면서 자기방어의 한계를 넘어서 친일행위를 해 온 사람중심의 청산이 한꺼번에 요구되는 것이다.
2) 구조청산
구조청산은 35년간의 일제 식민지통치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우리 조선사회에 구축한 사회, 경제, 정치 등 제반 영역의 구조, 법, 제도 등을 청산하는 것이다. 이 구조들 대부분은 조선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과 일본 식민통치의 편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옛 구조와 법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조선인을 위한 새로운 조선사회의 건설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 독점자본과 조선인 매판자본에 의한 독점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청산하고, 국가억압기구인 경찰을 핵으로 하는 조선총독부 통치구조를 전면 폐지하고, 식민지의 반민족적이고 비민주적인 법과 제도를 전면 개편하고, 민족 허무주의나 패배주의를 일소하여 민족자긍심과 민족자주성을 고양하는 것과 같은 구조청산이 요구되었다.
3) 사람(인적)청산
사람청산은 기존의 식민지 통치구조에 서식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일본의 조선지배에 영합하고 민족을 배반했던 자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친일파에 대한 사람청산은 무엇보다 조선인 스스로에 의한 새로운 조선역사를 창출시키고 민족사의 전진에 야기될 수 있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네 가지 요인 때문에 이 인적청산이 긴요하게 요구된다. 첫째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다. 외세에 빌붙어 반민족행위를 자행한 무리들이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잘 먹고 잘 살 경우 민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사랑하는 기풍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친미예속사대주의가 창궐하는 것도 바로 해방공간 당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둘째, 친일파들이 다시 새로운 외세를 끌어들여 역사 되짚기가 이루어질 화근을 가지게 된다. 셋째 새로운 조선사회를 위한 구조바꿈이 무산되거나 설령 구조바꿈이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이들 친일파에 의해 옛것으로 부활될 위험성을 갖게된다. 넷째, 역사의 진실과 사회정의가 근본적으로 훼손된다.
4) 친일청산의 내재적 역량
우리는 앞에서 해방공간에 대한 첫째의 역사적 특징을 과거사와의 단호한 단절과 새로운 역사창조를 의미하는 사회구조적 혁명공간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해방공간의 역사구조적 조건은 친일청산을 할 수 있는 사회변혁을 담보하고 있었고, 만약에 米점령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조선전체가 사회주의화하는 사회변혁이 필연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는 척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강정구, 1990).
그 역사구조적 요인은 첫째, 식민지 통치기간 조선인 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서의 계급위치는 일본인과 공유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지배계급의 역할은 부여받지 못했으므로 해방과 더불어 폭력수단의 독점이라는 국가억압기구의 통제력을 상실했다. 따라서 조선인 경찰관의 90%가 이탈하여 이미 기존의 사회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국가억압기구가 와해되어버리는 현상이 해방공간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선의 전통적 지배계급은 더 이상 식민지하의 지배계급의 위치를 점유할 수 없고 와해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다.
둘째, 식민지로부터 전수 받은 경제토대가 급격한 사회변혁에 적합한 토대를 갖추었으므로 기존의 식민구조는 와해되기 쉬운 조건에 처했다는 점이다. 곧 주요 산업자본의 93%(공칭자본금 기준)와 농지의 18%가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이들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나 관리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기존의 식민지반봉건사회 잔재를 유지․존속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셋째, 해방공간과 동시에 초래된 계급구조의 불균형, 곧 일본인 통치기구의 와해와 조선 지배계급의 통치기구의 미형성 및 일본인 자본가의 귀환으로 인해 자본가 없는 노동자 형성이라는 계급구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극소수의 조선인 자본가계급이 상대적으로 비대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상실했다. 해방공간에 시행되었던 노동자 자주관리와 소작제의 실질적 와해는 이러한 조건에서 생성될 수 있었다.
넷째, 토착지배계급인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 친일관료 등은 대부분 친일행위로 인해 지배계급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하여 계급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헤게모니 없는 지배계급이 국가억압기구의 강제력을 상실한 조건하에서 사회변혁은 거의 필연적이다.
다섯째,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활성화되었던 노동․농민운동을 통하여 노동자․농민의 계급역량이 성숙하고 급진화했다. 1924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김경일, 1992), 1930년대의 적색농조 및 노조운동을 통해 활성화되었던 이들의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투쟁은 해방공간에서 자생적 지방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적 자산으로 되었다. 이들이 미군정의 방해 없이 세력화 되었을 경우 대중투쟁의 활성화에 의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청산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이러한 제반의 역사구조적 조건 때문에 외세의 개입이 배제된 순수해방공간이라는 상상적 조건(mental construction) 하에서는 조선사회는 일제식민지 잔재의 철저한 청산에 의한 구조변혁과 친일파 청산에 의한 사람바꿈이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4. 미군정과 친일청산
1) 구조청산의 좌절: 식민지 통치구조와의 구조적 동맹
미국은 해방이 되자마자 자기들 멋대로 조선을 38도선에서 양단해 지리적 분단을 강요했다. 이미 조선의 북단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소련의 조선전체 점령을 막아 조선을 미국의 영향권 하에 두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이에 따라 북한을 점령한 소련과는 달리 미국은 남쪽에 군사정부를 세워 그들이 직접통치하는 미군정을 실시했다. 소련의 경우 북쪽에 소련군정을 실시해 조선인의 내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더라도 조선은 스스로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간섭해 조선인의 원성과 높은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가운데 80% 정도가 사회주의를 원하고 단지 14%정도가 자본주의를 원하는 해방공간의 역사적 상황에서 미국이 조선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키기 위해서는 이 사회주의 지향적 조선사회의 내재적 역사행로를 무력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력에 의한 강제력을 행사할 물적토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은 남한에 군정을 실시해 직접적인 군정통치를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군정의 점령정책 기조는 첫째, 자본주의를 조선에 강제시키기 위해 반공산주의를, 둘째 소련의 사회주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反소련주의를, 셋째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대로 미․소 공위에 따른 조선임시정부가 실시되면 미국이 남쪽에 실시하고있는 군정을 철폐할 수밖에 없고, 이 경우 조선이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자기들이 합의한 모스크바3상협정을 스스로 되짚는 反신탁을 추구했다. 넷째, 기존의 식민지 반봉건사회의 지배구조를 전면적으로 혁파하여 사회주의 지배의 사회구성체로 이행하려는 급진 사회혁명을 봉쇄하기 위한 반혁명주의 정책기조를 띠었다.
이러한 미국의 이해관계와 정책기조를 구현시키는 데 있어 조선인의 염원인 친일청산이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내재적 역사지향은 米점령에 심대한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조선의 내재적 역사방향을 타파하고 바꾸기 위해 등장한 물적토대가 남쪽에 대한 米점령군의 직접적인 군사정부 통치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일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구조의 존속을 통한 기틀을 닦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군정의 점령정책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의 기존 통치구조를 변혁시키는 것보다 유지 및 강화시키는 것이, 곧 구조적 동맹을 맺는 것이 유용했다. 이로써 식민지 조선 지배의 골격을 이루었던 경제, 정치, 사회 등 전 영역의 구조, 법, 제도 등에 대한 청산인 구조청산은 기본적으로 미군정의 폭력과 강제에 의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미군정기간에 이미 친일청산이 불가능한 구조를 미국은 남쪽에 구축했던 것이다.
이 같이 미군정에 의한 친일청산 불가능의 핵심적 기본구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이승만 정권이 잘 만 했더라면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룩될 수 있었다고 이승만 정권과 한민당 귀착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미국에 전적으로 면죄부를 안겨 주는 역사해석이다. 특히 해방공간은 위에서 특징화한 것처럼 민족사적 전환기였고 발생적 결정론 시기였다. 곧, 이 시점에서 구축된 사회구조는 그 이후의 조선사회에 상당기간 동안 기원적 특성으로 작용해 역사궤도가 거의 고착화되는 기본 구도를 확정짓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첫 단추가 잘 못 끼워 진 것이다. 바로 그 단추를 낀 장본인은 이승만이기 보다 바로 미국이라는 점을 역사학자들은 직시해야 한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실중주의 과학철학에 매몰되어 양시양비론적으로 아주 낮은 미시적 수준까지 대상동태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역사에서 비난받을 대상이 사라져 버린다. 미시적 연구나 개인행위자 중심의 기억과 구술사에 기반한 역사연구는 아주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전체와의 구도 속에서 접목을 이루지 못하면 이러한 연구는 거대한 흐름이나 총체성을 방기하게 되어 역사의 큰 줄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가늠하지 못하게 된다. 사회현상을 전체 속에서, 전체의 한 계기로 파악하며, 개개의 사실이나 현상을 본질적 관계 속에서 고찰하는 방법 곧, 현상을 근저에서 지배하는 본질적 관계를 밝혀내고 그 본질적 관계로부터 다시 현상을 설명하는 총체적 방법론이야말로 최근 미시사, 기억의 역사, 구술사의 유행 속에 매몰된 한국 사학계의 젊은 학도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방법론이다. 곧, 총체성 속의, 또는 총체성과 함께 하는, 총체성과 접목된 미시사, 구술사, 기억의 역사를 추구하는 방법론적 성찰이 요구된다. 친일파 연구 역시 이러한 방법론적 성찰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2) 인적청산의 좌절: 친일파와의 인적동맹
반공‧반소‧반혁명․반탁을 정책기조로 삼은 米점령군은 일반명령 1호에 의해 주로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인을 동원해 조선인 대중투쟁으로 와해 직전인 식민지 통치구조를 긴급 구출하여 친일 구조청산을 가로막으면서 미군정을 실시했다. 이제 미군정은 기존의 일제 식민통치구조를 강화하면서 점령정책 기조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친일조선인들과의 인적 동맹을 결성하여 그 구조 속에 배치했다.
미군정은 크게 나누어 두개의 조선인 집단과 인적 동맹관계를 맺었다. 하나는 조선인 구래의 지주계급과 지주‧자본가계급이다. 이 집단은 직접적인 친일파와 간접적 친일파로 주로 구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경찰과 군을 중심으로 한 관료집단이다. 이 집단은 거의 전부가 직접적인 친일파 집단이다. 미국은 이들 직‧간접적인 친일파 집단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식민지 잔재의 철저한 청산과 친일파 숙청을 제창하는 급진세력과 민중세력을 제압하여 남한을 반소‧반공․반혁명의 보루로 삼으려 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전자와의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기존의 일본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식민지 구조를 유지시켜 식민지질서를 강화‧온존하려는 것이었다. 또 후자와의 동맹은 전자와의 동맹으로 설정된 사회적 목표, 곧 식민지구조의 온존‧강화를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충실한 도구와 수단을 확보한 셈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전자와 더불어 정책목표를 공유하고 후자와 더불어 정책수단을 공유하는 공생관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동맹과 공생관계를 통해 친일파는 그들의 옛집 구조 속에서 새로운 친미 서식처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전자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구체적으로 몇 가지 보겠다. 가장 먼저 동맹관계가 맺어진 곳은 미군이 45년 9월 인천에 상륙하여 조선을 본격적으로 점령한 직후인 10월에 임명한 11인의 행정고문 임명에서이다. 조선인 행정고문 11명 가운데 보수세력이 10명, 급진세력이 1명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실질적인 이데올로기 지형과는 전혀 상반된 10:1 비율로 식민지 시대 지배계급 집단을 행정고문으로 선정했다. 실재로 남쪽에 있는 고문 10명 가운데 6명이 주로 친일파와 옛 지배계급 정당인 한민당 당원으로 충원되었다.
또한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생긴 민주대표회에서도 그 구성비율이 45:4로 식민지시대 지배계급과의 동맹을 유지했다. 1946년 12월 개원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구성 또한 식민지 지배계급지향의 보수세력이 압도했다. 민선의원 45명은 선거명분 및 절차 등이 한민당과 독촉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우익세력의 당선을 보장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거의 전부 우익세력이 장악했다. 이에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 관선의원 45명 가운데 중도계나 급진세력을 포함시켰지만 전체 구성원 중 최소한 50/90은 친일우익으로 채워졌다.
이러한 한민당 중심의 친일우익 편향의 동맹관계는 미군정의 집행부에서 정책결정의 고위직 (주로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 곧 정책결정의 직위임) 임명에서 두드러진다. 46년 1월에 임명된 중요정책 직무의 조선인 구성에서 친일파 편향은 가장 중요한 국가억압기구 분야에 확연히 드러난다.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대법원장 김용무, 사법부장 김병로, 검찰총장 이인 등은 전부 친일파 정당인 한민당 출신이다. 다른 부처에도 이와 유사한 인적 구성을 형성해 한민당은 자타가 공인하듯이 미군정의 실질적 여당으로 군림했다. 이들 친일파들은 일제시대에는 단지 경제적 지배계급의 수준에 머물렀으나 미군정에서는 경제적 지배계급에다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성장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이 결과 과거 일제시대의 친일‧반미파가 현재 미군정시대의 친미파로 카멜레온적 변신을 꾀했다.
이러한 동맹관계를 기반으로 친일 지배계급을 소생시키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식민지 관료와 동맹‧밀월관계를 맺었는바 대표적인 경우가 군과 경찰이었다. 미군정 하의 경찰은 식민지의 중앙집권적 구조, 일제 식민지 경찰인력, 일제의 악랄한 법률과 범죄적 관행 등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언제라도 필요한 경우 米점령군의 무장병력이 경찰무력을 지원하고 있었고, 규모 또한 엄청나게 팽창했다. 이 경찰력 외에도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백의사와 같은 비밀 테러조직 등 극우 사조직 청년단체가 경찰의 하수인 노릇을 수행해 왔었고, 또 5․10단독선거의 경우 조병옥의 주도에 의해 향보단이라는 준 경찰조직이 만들어져 경찰권을 행사했다.
전직 식민지 경찰 중 미군정에 약 5천명이 재기용되었다. 물론 경찰 간부만을 보면 약 80%가 일본경찰 또는 일본군대 출신으로서 일본 식민지의 첨병으로서 민족반역행위, 친일행위 및 범죄행위를 자행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미군정은 자기들의 정책목표인 반공‧반소‧반탁‧반혁명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십분 활용했다.
남한군대 또한 경찰 못지 않게 친일속성을 띤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임관된 110명이 남한군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 가운데 이응준이 추천한 일본군 출신이 87명, 원용덕이 추천한 만주군 출신이 21명, 중국군 출신이 2명으로 군대는 친일파 일색이었다. 또 미군정 하 9개 연대의 연대장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극소수 광복군 출신이 군에 참여했으나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제되고 한직으로 따돌림당했다. 이후 이승만 시대에는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낀 친일파 군인들이 경찰에서(서울시내 서장급 간부들이었던 윤우경, 김정채, 전봉덕--김구암살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헌병사령관이 됨) 군으로, 사회에서(2관구청장을 지낸 이익흥) 군으로 피신하여 보신을 취했기 때문에 남한군은 더욱 친일색채를 띠게 되어 철저히 ‘일본군이 남한군화’한 셈이다.
이러한 친일‧민족반역자의 보호‧강화는 통치구조, 사회구조, 인적구조의 모든 측면에서 시도 및 시행되었다. 커밍스의 분석은 이를 확인해준다.
1947년 미군정 고위 관료가운데 115명을 임의 추출 표본조사를 한 결과 70명이 일제 치하에서 관직을 가졌고, 23명은 일제시대 공기업이나 사기업 소유주들, 지배인, 혹은 관리직 등이었다. 표본조사에서 경찰관 10명 가운데 북에서 복무하였던 3명과 만주에서 복무했던 1명을 포함하여 7명이 일본 군대에 복무했다. 법무부 관료 4명 가운데 3명은 식민지시대 경찰이나 사법기관에서 일했다. 도지사 9명 가운데 8명은 식민지시대 지사나 군 고위관리로 일했다. 단 11명의 관리만 망명, 투옥, 반일운동을 약간 한 기미가 보인다. 우파들과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국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Cumings, 1981: 263).
이렇게 친일청산을 구조적 차원과 인적 차원에서 좌절시킨 미국의 조선정책은 조선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후식민지처리에 일관되게 적용한 미국의 보편적 정책이었다.
순수하고 대중적인 혁명이 전쟁 직후의 중국, 인도, 미얀마, 인도차이나, 조선, 말레이지아에서 격동했다... 이들 혁명적 상황의 특징으로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내인성이라는 점,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사회적 혁명이란 것이다...그러나... 미국인들은 인도차이나에서는 정통 독립 운동가들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난봉꾼 황제 바오 다이(Bao Dai)를 지지하는 책략을 썼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파괴될지도 모를 자본주의 독재체재를 구해 내기 위하여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또한 서울에 진주하여 이미 조선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있던 갓 태어난 사회주의(비공산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이승만을 데려와서 경찰국가를 세웠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토착독립정권을 전복하고 네덜란드 여왕의 복귀를 꿈꾸는 네덜란드에 금융 지원과 무기 지원을 수행했고, 태국에서는 전시에 침략군 편에 서도록 이끈 아시아계 지도자(Pibul Songrram)를 지지했다. 스페인과 필리핀에서는 침략국에 협력했던 자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연합군은 무장 해제된 일본군을 광범하게 이용했다(Snow, 1958).
필리핀의 경우를 살펴보자. 미국이 해방 후 필리핀에서 취한 동맹관계를 검토하면 왜 미군정이 친일파를 선호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지배하의 필리핀에는 크게 나누어 네 세력이 존재했다. 첫째는 주로 중부 루손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후크(Huk) 중심의 무장농민․민중주체의 급진무장세력이었다. 둘째는 퀘손(Quezon), 오스메나(Osmena)가 이끄는 워싱턴으로 망명한 기존의 필리핀 자치정부 세력이었다. 이는 미국에 있던 망명정부로 철저한 친미파였으나 동시에 철저한 반일파였다. 셋째는 미국의 식민지 통치하에서는 철저한 친미파였으나 일본 점령하에서는 철저한 친일파였고 동시에 반미파로 카멜레온적 변신을 꾀한 로하스(Roxas)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다. 넷째는 구지배계급의 일원으로 주로 미국 극동주둔군의 통솔 하에 게릴라세력을 형성해 반일투쟁을 하던 소장세력이었다. 물론 이 세력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벌인 세력은 첫째세력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필리핀을 재탈환한 후에 동맹관계를 맺은 집단은 친미에서 친일로 카멜레온적 변신을 꾀한 세 번째 세력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민족적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을 경우 미국의 의향대로 정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철저한 미국의 괴뢰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강정구, 1989, 제7장).
이렇듯이 전후 미국의 점령정책은 오히려 적국이었던 일본과의 굳건한 동맹을 중심으로 기존의 피지배식민국가를 하위차원에 묶어 두는 신대동아공영권 부활이었다. 이로써 미국이 점령하거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에서는 친일청산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보편성을 방기하고 우리 역사학자들이 우리만 잘 했더라면 친일청산을 마치 완벽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책론으로 일관하는 설명은 의도하지 않게 역사에 대한 오도이고 이의 원흉인 미국에 면죄부를 안겨 주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인 책임론으로서 이승만 정권이나 우리 자신을 거론하는 것의 타당성은 인정하고 수용해야겠지만 미군정의 구조적이고 태생적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결코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3) 미군정의 친일파 보호‧육성책
이러한 동맹‧유착관계를 통해서 미군정은 친일청산을 저지하는 방벽을 굳건히 쌓았고, 이 방벽을 통해 米점령정책 목표인 반공‧반소‧반혁명․반탁을 성취시켜 나가면서 직접적인 친일파 보호·육성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보호·육성정책의 대표적 보기를 들어보자.
1946년 10월 대구 및 경북지역에서 ‘10월 인민항쟁’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항쟁요인 규명과 대책을 米점령사령관 하지에게 건의하게 했다. 위원회 의장인 미국 측의 브라운소장과 여운형‧김규식 조선 측 의장은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보고서’에서 항쟁발생 중요 요인가운데 하나가 경찰이라고 보고 경찰의 정화를 요구했다. 곧, 일제시대 경찰의 대거 충원, 일제 경찰의 관행이었던 고문과 잔인성의 상존, 경찰의 정치적 개입, 우익 청년단체의 경찰 업무동원 등의 이유로 당시 대표적 친일파 후견역할을 맡았던 수도 경찰청장인 장택상과 경무부장인 조병옥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미군정이 끝날 때까지 해임하지 않았고,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친일파 권력구도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또한 1차 미․소공위에서 채택한 임시정부 정강에 관한 임시 의제 중, “2. 어떤 방법으로 조선에서 일본지배의 사악한 결과와 친일적 요소를 제거하느냐 하는 문제, 3. 어떻게 반동적이고 반민주적인 요소와 임시정부를 와해시키려는 요소들의 활동을 방지하느냐 하는 문제”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2차 미․소공위에서 이미 1차공위에서 미·소간에 합의한 위의 조항 가운데 둘째 항의 ‘친일적 요소’와 셋째항의 ‘반동적이고 반민주적 요소들과 임시정부를 와해시키려고 시도하는 요소들의 활동’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지만 이 사건은 친일파 청산과 일제 잔재 청산을 명백히 거절하는 미국의 친일청산 반대정책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라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해방된 지 2년 만이지만 민족정기를 되찾고 민족적 과제를 실현시키기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그러나 경찰을 비롯해서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조병옥은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일색인 경찰에 이 법이 적용되는 것을 저지시키지 위해 경찰규제조항의 수정을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종로경찰서장 김형진은 공공연한 무력행사를 역설했다.
이 특별조례 제정 움직임에 대해 1947년 4월 20일자 민중신문은 “공산당의 간계에 넘어가 민족진영에까지 동족상잔의 큰 화근이 될 친일파 숙청 운운하는 정당․정객이 대다수”라고 매도하면서 친일민족반역자의 문제를 반공과 결부시켜 금기 시 하려 했다. 또한 만주지역에서 민족해방세력들을 토벌하는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약했던 악명 높은 이종형은 1947년 5월 5일 부일협력법안 검토대회에서 괴변으로 민족반역자 처벌에 반대하는 등 활개를 치고 다녔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논리는 반공제일주의론, 불가피론, 건국공헌론, 능률성 제고론, 국민 총화합론, 인재 부족론, 민족분열경계론 등이었다.
미군정은 ‘친일파 문제는 조선인 자신의 문제’라고 입법의원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이 특별법을 4개월 동안 유보하여 끝내 11월 27일 인준보류 통지를 함으로써 특별법을 사문화 시켰다. 이로써 미군정 하 친일파 청산문제는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군정기간 동안에 국한하여 친일청산을 좌절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독립 이후까지도 친일청산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도를 전승시켜 이 남한 땅을 친일파 중심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곧, 그들이 남조선에 강요한 타율적 역사를, 일제식민지 통치구조와 친일·민족반역자 무리를 온존 및 강화시켜 그대로 이승만 정권에 전승시킨 것이다.
그 과정은 5․10선거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5․10선거에서 미군정은 중앙선거관리위원을 15명 가운데 13명을 한민당 요인으로 구성했다. 새로 창건될 남한정부에 이들 친일‧친미파인 한민당과 이승만의 독촉세력을 굳건히 심어 놓아 미군철군 후에도 미국의 터전을 굳건히 닦아 놓겠다는 사후관리의 일환이었다.
5․10선거는 기본적으로 남한주민의 자유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선거였고, 미군정에 의한 관권선거였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모든 좌익,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모든 중도파,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진영의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5․10선거를 분단선거로 규정짓고 선거참여를 거절했다는 점이다. 단지 극우 친일진영인 이승만의 독촉, 친일파가 주축을 이룬 한국민주당, 서북청년단․대동청년단 등 테러집단들만 5․10선거에 참여했다. 당시 남한의 400여 정당․사회단체가운데 불과 10% 정도만 참여한 셈이었다. 그래서 5․10선거는 투표 이전에 이미 극우분단친일세력이 집권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강정구 1993a).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김규식에 의해서 예견되었다. 당시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친일파가 미군정을 장악하고 있는 통치구조 등에 대한 전반적 개혁을 수행하지 않고 전조선 총선을 통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친일극우세력이 선거를 지배하게 되고 권력을 잡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그는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한 미국 측의 총선거 방식보다는 지명에 의한 내각선출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947년 4월 당시 국민의회의 의장 조소앙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안은 정통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상해임정 측의 정부수립계획안, 이승만의 단정안, 미군정안의 과도정부안 등이 지향하는 노선은 각기 통일독립국, 국부적 독립국, 국부적 비독립 지방정부라고 보았다(경향신문』1947. 4. 2).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5․10선거를 통해 독립된 남한사회가 지향하는 정책목표 설정의 대표체인 국회에 친일․친미파를 확보하여 미군정이 추구한 정책목표와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그 뿐 아니라 주어진 정책목표를 실현시키는 수단을 맡고 있는 행정부내의 행정실무 관료 또한 미군정의 관료를 고스란히 이양해 집행부서 내에도 친일세력을 그대로 전승 및 재생산시켰다.
이와 같은 친일구조와의 동맹, 친일 인적동맹, 친일파 보호육성 시책을 통해 미국은 조선의 내재적 역사궤도나 이데올로기적 지향이 무엇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최소한 남한만이라도 그들의 영향권으로 확보하여 대소반공보루 삼겠다는 정책을 흔들림 없이 진행시켰다. 이러한 동북아 이해관계에 입각해 미국은 남쪽에 일제식민지 구조와 친일파의 서식처를 복원·강화시켰다. 바로 그 결과물이 이승만 정권이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가진 이승만 정권에 친일청산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연목구어와 같이 허망한 바램이었다.
5. 이승만 정권과 친일청산
이승만 정권의 미군정 연속성을 보면, 첫째는 미국점령정책의 기조인 반공, 반소 또는 反북한, 반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지향, 둘째, 일제식민지 사회‧통치구조를 전승하여 확대강화한 미군정의 신식민지적 사회구조 전반을 유지 강화한 점, 셋째는 국가의 목표와 지향을 좌우하는 제헌국회가 친일‧친미의 극우 세력권화 한 점, 넷째는 정부의 최고통치권자를 비롯해 장‧차관 등 정책고위직을 친미‧친일‧극우분자들이 장악한 점, 다섯째, 국가전반의 행정실무 직위를 친일관료들이 세력권화 한 점등이다.
미군정에서 전승․강화된 친일 인적․물적인 구조적 제약 때문에 친일파 청산은 이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수반하지 않는 한, 곧 사회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제헌의회에서 소장파의원들의 반민족행위처리법 제정 및 반민특위활동 또한 이러한 구조적 제약 하에서 이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힘든 투쟁이었지만 결국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결정적 제약 하에서도 국회 소장파의원들에 의한 반민특위 활동은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민족사에 우뚝 솟는 빛나는 투쟁이었다. 제헌의회의 구성은 극우친일세력의 압도적 진출로 요약될 수 있다. 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 등 극우친일‧친미세력을 제외한 김구의 한독계, 김규식의 중도파, 남로당이나 민전 등 모든 좌익정치세력은 조국을 분단시키는 5‧10선거 자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극우세력들이 압도적으로 의회에 진출할 것이라는 것은 투표 이전에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85석에 달하는 무소속의 경우도 대부분 극우세력이다.
이들 무소속 85명중 주류는 한민당 등 친일극우세력에 소속되었다가 공천에 탈락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거나, 친일파 한민당이 미군정 하 실제적인 여당으로서 한 역할에 대해 국민의 부정적인 평가를 회피하기 위하여 무소속으로 위장하였거나, 또 일부는 한독당 등 남북협상파 단체에 속하면서도 선거 참여 거부라는 단체의 방침에 상관없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진보 및 중도파의 제한적인 진출에도 불구하고 이들 무소속 당선자 85명의 경우 주류는 진보적이거나 남북협상파라고 보기 힘들고 극우분단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강정구, 1993a).
이렇게 국회가 지주와 지주‧자본가인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극우세력의 계급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101조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와 그 이후 반민법이 재석 141명중 103명의 찬성으로 제정되었다. 반민법이 비록 지배계급에게는 계급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의 제정이 가능했던 점은 무엇보다 친일파 청산의 범 민족적 당위성에 있었다. 다음은 성인회 및 동인회 중심으로 진보세력과 한독당 세력들이 비록 적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무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한 점, 의정활동의 정당 귀속성이 느슨한 점, 시민사회의 압력, 젊은 소장의원들의 탈 정당성 등이라고 볼 수 있다.
국회라는 관문을 통과한 반민특위는 국회 밖의, 특히 집행부의 최고정책결정자인 이승만을 비롯해 정책고위직, 행정실무자 등의 조직적인 저지투쟁을 받게 되었다. 응당 이 반대투쟁에는 위에서 지적된 반공제일주의론, 건국 공헌론, 국민 총화합론, 유능 인재 부족론, 민족분열주의 경계론, 시기상조론, 안보제일주의론 등의 논리가 겉포장 되었다. 반민법 심의 중에 국회에 살포된 전단은 이러한 논리를 잘 보여준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의회는 여기에 속지말고 가면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위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에 뭉쳐야 한다(김진학, 한철영, 1954: 118).
또한 이종형의 주도로 열린 ‘반공구국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국민대회’에서 “이런 민족분열을 만든 것은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프락치의 소행이다”라는 구호, 이 대회에서 결의한 제1원칙 “현재 대한민국을 지지 보위하는 자는 애국자로 규정하고, 따라서 8.15 이전 행동에 구애하지 말고 포섭할 것”, 또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에서 “진정한 민족반역의 현행범인”인 “공산매국노의 처단을 전혀 도외시”한 채 “극단 광범위에 소급 적용하여 동포이간과 동족 상잔할 화근을 남긴” 반민법이라는 매도, 대통령의 2.15담화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문제가 첫째로 치안에 대한 관련성이므로 이것이 상당한 법안일지라도 전국치안에 관련될 때에는 임시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언급, “인재가 부족하니 너무 과도한 배제는 건국을 위해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라는 1948년 8월 2일자 한민당 김준연의 담화 등이다.
이러한 논리 하에 친일파세력은 구조적 차원에서 조직적인 저지투쟁(구조적 규정력)을 벌여 나갔다. 최고통치자인 대통령의 잇따른 성명 발표(“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오. ... 백방으로 손해가 될 뿐이니... 먼저 정권을 회복하여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가장 힘쓸 일이다” 등), 대통령의 노덕술 석방 종용, 국무회의의 반민법 반송기도, 정부 내 친일파 숙청의 정부측 조사위원으로 직접적 친일파인 유진오 임명, 정부의 반민법의 위헌성 제기,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에 대한 회유와 협박, 경찰간부들이 백민태를 통해 반민특위 요원의 암살을 음모한 점, 경찰음모의 ‘국민계몽협회’ 관제데모, ‘2․15특별담화’, 정부의 반민법 개정 법률안 제안, 김상돈 의원 해임 동의안, 6․6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이다.
반민특위 와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가지 대표적 사건은 6․6특위습격사건과 국회프락치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반미 또는 미국의 입김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위 습격사건은 이승만대통령이 미국대사 장면으로부터 반민특위가 양주삼 목사를 반민족행위자로 구속한데 대해 미국 감리교 측의 웰치 씨로부터 항의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 즉석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에게 특경대 해체지시를 내렸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조작의 의혹이 짙은 사건으로 소장파의원들이 한국내의 동산, 부동산, 유체, 무체를 막론하고 미국이 관심을 가진 재산의 매도요구에 응해야 하는 신식민지적 한미경제협정을 주권침해로 규정짓고 맹렬히 반대했으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결의안’ 등 대미자주권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드디어 ‘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을 통하여 국회내의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이 제거됨으로써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반민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채 그 효력을 상실했다. 이로써 남한 내 친일파 청산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로써 미군정이 남겨 둔 구조적 제약 하에서 국회 내 소장파들의 범 계급적, 범 민족적 투쟁을 통한 친일청산의 시도는 완전히 끝을 맺었다. 비록 의회라는 국가기구에서는 소장파들이 구조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행정부와 관변적 시민사회에서 부하 되는 구조적 제약을 뛰어 넘을 수 없었다. 이 구조적 제약은 해방공간 당시의 조선사회의 내재적 특성이나 이승만 정권의 고유한 특성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바로 미국이라는 신제국주의의 패권주의 점령정책이 우리 민족에 강요한 타율과 왜곡의 역사행로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6. 북한과 친일청산
북한의 친일청산은 남한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인적청산과 구조청산이라는 친일청산에 머무르지 않고 북한의 권력핵심체가 항일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종사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친일 및 親외세가 재생되거나 복원될 수 있는 구도를 원천적으로 배제시킨 데 있다.
1) 인적청산
북한에서의 친일 인적청산은 자치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 46년 2월 이전부터 시작되어 남한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미국은 남한을 점령하기 이전에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와해되어 가는 일본군을 부활시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게 하고, 조선총독부를 존속시켰다. 비록 미국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 때문에 조선총독부를 곧 해체하긴 했지만 총독부 전직 고위관리들을 고문으로 삼아 米점령군의 남한 지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했다. 곧, 미국은 다른 동아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친일청산을 첫 단추부터 봉쇄하는 반동적인 점령정책을 펼쳤다.
대조적으로 소련은 첫 단추부터 친일청산을 분명히 했고 촉진변수 역할을 했으며, 이 지침은 점령사령관인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문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은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 오직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그의 행복을 원한다고 용감스럽고 충직한 조선사람들을 수많이도 왜놈들이 죽여버렸습니다. 자유와 행복에 대한 갈망과 증오스런 왜놈들을 구축하기를 기다리던 갈망은 조선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 일차적인 인적청산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기 이전에 자생적으로 출현한 급진조직인 각 지방인민위원회와 소련점령군에 의해 이뤄졌다. 아주 두드러진 일제총독부 관리, 경찰, 관료, 친일지식인 등이 공직에서 추방되거나 남쪽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친일청산은 자치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1개조 긴급 당면과업에 대한 결정서 1, 2항과 이어 46년 3월 23일 미․소 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20개조정강에서 친일청산을 확정하고 그 시행에 들어갔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당시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은 김일성을 비롯해 급진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1>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며....
2> 최단기간 내에 일본 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에게서 몰수한 토지와 산림을 국유화시키며..(11개조 당면과업).
1> 조선의 정치 경제생활에서 과거 일본통치의 일체잔여를 철저히 숙청할 것.
7> 일본통치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법률과 재판기관을 폐지하며,
9> 일본인 국가 매국노 및 계속적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20개조 정강)
이 결과 북한에서 친일청산은 해방된 지 일년만에 철저하게 완료될 수 있었다. 실제 이러한 철저한 친일청산의 결과는 북한을 이끌어 가는 핵심정치세력인 북조선 로동당의 당대표자의 인적 구성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946년 8월 29일 열린 북조선 로동당 창립대회 당 대표자 801명에 대한 심사위원회의 심사결과를 보면 북한권력 핵심인 노동당의 인적 구성이 얼마나 친일파를 배제하고 항일민족해방투쟁세력 중심으로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전에 일제에게 체포당한 동지들 중 감금자수 291명 36%, 1~5년 징역자수 149명 18%, 6~10년 징역자수 71명 7%, 10년 이상 징역자수 26명 3%, 최고 징역자 년수 18년인데 그 수는 1명이고 옥중생활 한 동지들의 총수 263명이며 그 징역의 총연장 년수는 1,087년이었습니다. … 반일투쟁으로 혹은 지하운동 혹은 무장폭동 등 망명으로 외국에서 혁명사업하던 동지들의 수는 427명 53%이었습니다.
위의 박일우의 보고에 의하면 해외에서 항일혁명사업을 전개한 대표자와 국내 항일투쟁에서 감금을 경험한 당대표자 수는 무려 718명으로 전체 당대표의 89.6%가 된다. 이러한 북로당의 통계는 친일파의 인적청산과 권력기반의 와해가 북한에서는 거의 완벽히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친일인적청산의 마무리는 1946년 11월 도‧시‧군 인민위원회인민위원 선거에서 친일파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여 그들이 새로운 조선사회의 중추적 권력을 행사할 터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이 당시 숙청대상 친일파의 범주에는 아래의 적극적 친일분자만 귀속시켰다. 특히 합법적 자주정부를 구성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총선에서 아래의 범주 외에도 리총회에서 후보에 대한 후보자격 심사를 하게되어 친일파를 숙청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철저한 친일파 청산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 밖의 소극적 친일행위자에게는 주로 교화를 시키는 방식으로 인적청산을 마무리지었다. 이 결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계급별 구성비는 농민 22%, 노동자 26%로 전체의 거의 과반수를 기층민중이 차지함으로써 민중정권의 성격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제 식민지 당시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던 친일파들은 완전 몰락과 숙청의 길을 걷게 되었다.
1.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고문 전부
2.도회의원 부회의원이었던 조선인 전부
3.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및 도의 책임자로서 근무한 조선인 전부
4.일제시대 경찰‧검사국‧재판소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5.자발적으로 또는 일본을 방조할 목적으로 일본주권에 군수품 생산, 기타의 경제자원을 제공한 자
6.친일단체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제를 방조하거나 동조한 자
2) 구조청산
일제식민통치가 남겨 놓은, 그래서 조선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경제, 사회, 정치 등의 전 영역에 대한 법, 제도, 구조, 관행 등을 조선인을 위한 법, 제도, 구조, 관행으로 바꾸는 구조바꿈을 통한 친일청산의 지침은 20개조정강에서 출발한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전 영역에서 “과거 일본통치의 일체잔여를 철저히 숙청”하고 “일본통치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법률과 재판기관을 폐지”를 규정했다.
이러한 정책기조에 따라 일제잔재의 구조청산은 토지개혁에서부터 철저히 구현된다. 토지개혁법령 제2조는 몰수토지의 대상을 “일본국가,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의 소유지와 조선민중의 반역자, 조선민중의 이익에 손해를 주며 일본제국주의의 정권기관에 적극 협력한 자의 소유지”로 설정했다.
이어서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중요 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친일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다. 1946년 8월 10일 공포․발효된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은 “일본국가와 일본인 개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로 되어있는 일체의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관계 등은 전부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 즉 국유화한다”에 따른 구조청산이었다.
북한의 친일 구조청산은 1946년 2월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에서 비롯되어, 중요산업국유화, 노동법과 남녀차별금지법 등 법과 제도의 정비, 민족허무주의나 패배주의를 일소하고 민족자긍심을 일깨우고 정체성을 확보하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이르기까지의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의 추진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로써 북한은 식민지반봉건사회라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사회구성체에서 사회주의, 자본주의, 소상품생산양식 등이 혼재하는 인민경제체제로 이행하여 친일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잔재를 거의 일소했다.
3) 북한 친일청산의 역사적 의의
이 같이 북한은 해방공간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였던 친일의 인적 및 구조적 청산을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사회를 일구어나갔다. 이를 위한 인적 및 물적 자원을 1947년 초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는 시점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후 북한의 역사에서 친일이나 친 외세 세력이 발붙일 터전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장치를 취했다. 곧,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사적 핵심과제의 역사적 이행이 이후 민족정기정신으로 이어지면서 민족자주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게 만든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남한에서는 친일청산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히려 친일파들이 일제 당시보다 더 많은 권력과 세력을 모든 영역에서 구축하여 온통 친일세력이 득세하는 반역사적인 행로를 걸었다. 이 결과 해방 57년이 되는 올해에야 겨우 국회의원의 개인적 차원에서(공식적인 국회차원이 아니라)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 주류사회는 민족공조보다 한미공조 우선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주권의 상징인 군작전권마저 50년 이상 미국에 빼앗긴 채 절름발이 주권국의 행세를 하고 있다.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해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소련점령군의 역할이다. 소련점령군의 역할은 점령사령관의 포고령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대하다. 그 세부적 역할은 첫째 남한을 점령한 米점령군과는 정반대로 곧바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토착자생국가기관인 인민위원회로 행정권 및 치안권의 이양을 기했다. 둘째, 조선 토착혁명세력의 세력화와 대중투쟁에 의한 반제‧반봉건혁명에 일본인의 개입이나 반혁명 행위를 철저히 차단시켰다. 셋째, 미국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합의한대로 일제잔재의 청산을 점령정책의 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넷째, 인민위원회 등 자생기구에 행정․통치권 등의 자주적 행사를 승인 및 지원해 주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역사의 창출을 방조했다. 결론적으로 북한 친일청산에 대한 소련 점령군의 역할은 독립변수라기보다 가속제 및 촉진변수였다.
이미 앞에서 살펴 본대로 해방공간의 조선사회는 친일청산에 대한 내재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단지 소련점령은 이를 보다 신속하게 또 효율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던 것이다. 1947년 여름 북한을 방문했던 안나 스트롱(Anna L. Strong)에 의해서도 이것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나는 조선인민의 힘에 대한 거의 신비할 만큼의 신념을 볼 수 있었다. 한 농부는 지주들이 토지몰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은 붉은 군대 때문이 아니라 ‘정당한 법과 조선인민의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공장노동자는 ‘친일반역자들이 남쪽으로 달아난 것’은 러시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인민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북한은 단순한 친일청산에 그치지 않고 항일민족자주세력이 북한권력주체가 되었으며, 여기에다 만경대학원과 같은 교육기관으로 친일이나 사대주의가 이후라도 기생할 수 없도록 민족정기정신을 길렀던 점이다. 만경대학원은 1947년 가을에 세워진 특수엘리트 학교로 민족독립을 위해 직접 희생 및 헌신하거나, 돈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여한 사람들을 보상하고 그 명예를 기리고, 그 자녀들에게까지 보상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확립하자는 학원이었다. 이 학원에는 사회주의자 뿐 아니라 만주 용정의 부잣집 아들과 같이 독립군에 돈을 지원했던 민족주의자의 자녀도 입학했고, 또 남한에 있던 애국자의 자녀들에까지 입학 추천이 주어졌다. 이 엘리트학원 출신이 오늘날 북한의 권력핵심을 구성하고 있어 이들에게 내재화된 민족정기정신 등이 작동되어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심한 시련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상층권력엘리트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친일청산과 민족정기정신의 함양 및 전승이라는 북한의 역사야말로 오늘날 시련과 위기에 처한 북한정권을 그나마 지탱해주는 밑바탕이 아닌가 여겨진다.
7. 친일청산의 실패와 민족앞길 가로막기
해방공간의 민족사적 핵심과제였던 친일청산이 비록 조선사회의 내재적 역량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외세에 의해 원초적으로 좌절되었다. 이 역사적 결과는 당대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사회의 전 영역에 수많은 파행과 왜곡을 불러 왔다. 이로써 통일성취시대에서도 평화와 통일을 향하는 민족앞길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즐비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앞길 가로막기가 수 없이 허다하지만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를 세 가지만 들도록 하겠다. 곧, 학문사대주의, 과거청산의 실종, 통일성취시대의 민족앞길 가로막기이다.
첫째는 학문사대주의이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사회에서 친일 인적청산이 완전히 실패했고, 더 나아가 친일파가 대학총장을 석권하여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학문의 토양을 근원적으로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대학은 무엇보다 그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생산 및 재생산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그 사회가 나아갈 역사지향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곳이 친일파의 아성이었으니까 친일청산 실패의 후과가 우리 사회에 끼칠 부정적 영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대학을 좌지우지하는 총장과 친일파의 관계를 살펴보면 곧바로 우리 학계가 해방 후 처음부터 왜 학문사대주의에 매몰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서울대학을 보자. 서울대 설립이후 조선인으로 초대총장을 역임한 이춘호는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의 보조를 맞추자”고 외치며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경성기독교연합회 회원이었다.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고 ‘고려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진오는 조선문인보국회의 간부를 지내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의의 전쟁이고 미국 등은 악마라고 부르짖는 등 친일 족적의 거목이었다. 이러한 반민족행위에도 불구하고 뉘우침 없이 헌법기초위원, 초대 법제처장, 신민당 총재, 한일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다.
연세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백낙준은 친미에서 친일·반미로 다시 숭미주의로 변신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드디어는 친일분자인 유억겸 등을 애국자로 평하는 역사의 왜곡도 서슴지 않았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까지 승승장구했다. 자신의 친일을 사죄하기는커녕 독립운동으로 둔갑시키는 해방 후 권세를 잡은 친일파의 전형적인 행위유형을 보였다. 이화여대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김활란의 친일행각은 가장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경우였지만 그녀는 해방이 되자 과거에 대한 속죄 한마디 없이 유엔총회대표, 공보처장, 순회대사, 아시아반공연맹이사 등을 역임하고 남한 여성계의 대모로 자리잡았다.
이들 4개 대학 외에도 성신여대의 이숙종, 덕성여대의 송금선,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들이 한결같이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가입하여 친일행위를 행한 대부들이었다. 이들의 세력권에 놓인 대학이 민족학문이나 민족지성을 길러내기에는 너무나도 일제잔재의 위력이 막강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올해 3․1절을 기해 국회에서 이들 대부분을 친일파로 분류하자 일부에서는 이들이 건국대업완성에 기여했으므로 친일파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아무리 공헌이 높다하더라도 친일파는 친일파일 수밖에 없지만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대부분 남한사회의 극우분단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첨병의 역할을 해 와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건국대업기여론 등은 남북을 넘어서서 전체민족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성격이다.
다음은 과거청산의 실종이다. 우리 현대사는 분단체제, 냉전독재, 개발독재, 냉전개발독재 등의 연속이면서 이에 대한 시민과 민중의 항쟁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이 결과 이들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청산보다는 이승만 되살리기, 박정희 되살리기가 되풀이되고, 5․16, 12․12, 5․18에 대한 과거청산의 실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에 대한 과거청산은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승만, “불행했던 우리 역사가 언제까지나 우리의 전진을 막는 족쇄가 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며, 따라서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라는 김영삼, 박정희 기념관 설립의 명예회장을 맡는 김대중 등과 친일파와 그 후예들에 의해 실종되었다. 우리는 오늘의 시점에서 만약 해방공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이러한 과거청산의 실종이 가능했을까? 또는 이러한 반역사적인 행태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친일청산이라는 첫 단추를 제대로 꿰매지 못한 기원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2, 제3의 박정희와 전두환을 막기 위해서도 늦게나마 친일청산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셋째는 통일시대 민족앞길 가로막기이다. 우리 민족사의 대장전이라는 6․15남북공동선언이후 우리는 통일성취시대에 접어들었다.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을 극복하고 자주적으로 평화와 통일을 일구려는 원대한 민족사의 흐름이 미국의 부시정권이 등장함으로써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부시정권은 야만적인 신패권주의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주범이 되어 한반도평화선언 등을 무산시키고 ‘악의 축’ 전쟁위협과 2003년 한반도전쟁위기를 몰아오고 있어 우리 민족이 공멸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앞길 가로막기는 미국 등 외세에 국한되지 않고 민족 내부에서도 발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바로 해방공간의 친일파와 같은 부류의 친미예속사대주의 수구냉전세력이다. 2001년 초 한․러 및 한․미 정상회담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던 이정빈이 말했듯이 “한국언론은 미국언론이 동으로 가면 동, 서로 가면 서로 간다.” 또 한미정상회담 직후 우리의 언론들이나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 및 정치지도자들의 사대주의와 냉전적 작태가 난무했다. 이를 정치평론가인 김민웅은 아래와 같이 통탄했다.
00일보를 필두로, 대부분의 국내언론들과 특히 야당인 한나라당 그리고 이00는 미국의 이러한 패권적 내정간섭을 비판과 항의의 도마 위에 올려놓기보다는, 미국의 비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외교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그 책임을 김대중정부에게 따져들고 있다.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언론이며, 어느 나라 정치집단이며 어느 나라 지도자인가?
이렇듯 친미예속수구냉전세력들은 부시정권의 민족앞길 가로막기에 부화뇌동하고 또 이정빈의 개탄보다 훨씬 더 나아가 극동 혹은 극서로 나가면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기승을 부렸다. 미국이 부르짖는 냉전적인 대북한정책의 ‘일방적 양보불가론’과 ‘철저한 검증론’ 따위를 앵무새처럼 외쳐댔고, 남북공조보다는 한미공조를 우선해야 한다는 숭미예속주의 찬양론까지 들먹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 주류언론과 주류정치세력들은 경상도 냉전지역주의와 야합하여 본격적으로 6․15공동선언 죽이기를 시도해 남북관계를 과거로 환원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이렇게 反평화적이면서 反통일적인 ‘북한불변론’, ‘속도조절론’, ‘북한 퍼주기론’, ‘과거사 사죄론’, ‘엄격한 상호주의론’ 등의 수구냉전 논리와 주장을 펼치면서도 정작 친미예속사대주의의 표본을 이루고 있다.
이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 경상남도 지역 출신 국회의원인 김00이다. 그는 그야말로 반공반북이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는 냉전의 최첨단에 서서 마녀사냥을 전개하는 수구 냉전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철저한 친미예속사대주의자이다. 그는 “김대중정권은 친북좌파적 시각에 따라 김정일 수령체제의 강화를 앞장서 돕고 있습니다. … 친북적 사고로 북한 김정일 정권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들, 더 나아가 북한의 김정일 정권 자체가 이 정권에게는 누구보다 가까운 동지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이승만 냉전독재의 언술로 일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01년 12월 12일 주한미군의 용산기지 내 아파트건설추진 반대움직임에 대한 성명에서 “이것을 빌미로 반미감정을 확산시키고 국가의 안보까지 위협하려는 일부 세력들의 움직임은 분명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직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같은 당 김원웅 의원은 “우리 나라의 수구세력들은 국적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분별을 못하겠다”고 비난하면서 “주한미군이 용산기지에 아파트를 짓는 행위는 용산을 미국영토로 착각하는 것”이라며 “미국은 용산이 미국영토가 아니라 한국영토라는 인식을 분명히 해주기 바란다”고 이들의 친미예속주의를 질타했다.
통일성취시대를 맞은 오늘의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시민․민중 사회는 이러한 무리들에 대해 ‘제2의 친일파청산’ 차원에서 청산운동을 맹렬히 벌여나가 민족앞길 헤쳐나가기와 민족앞길 바로 세우기를 일구어야 할 것이다.
1948년에 간행된 친일파 군상은 “이 범행을[친일 및 반민족행위] 불문코 용서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개인으로서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는 그 피해가 어느 한 개인 자기인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 전체이며 정의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엄정히 규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했던 역사가 전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불행했던 역사의 책임자에 대한 철저한 사법적 처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이제 민족앞길 헤쳐나가기를 위해서도 또 민족앞길 바로세우기를 위해서도 늦게나마 친일청산을 일구어 나가야 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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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친일파 청산운동의 재개와 과제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친일인명사전편찬위 사무국장)
- 올바른 자(의인)가 흥한다는 신화가 있다. 그리고 악인이 흥한다는 현실이 있다 -
1. 친일인사 명단 공개를 둘러싸고 우리는 무엇을 확인했는가
지난 2002년 2월 28일 여야를 포함한 소장 국회의원들은 관련 전문 인사와 함께 광복회가 조사, 선정한 7백여명에 이르는 친일파 명단을 심의를 거쳐 발표했다(3월 1일 각 신문에 명단 발표). 국회의 특별법에 의해 발족한 반민특위가 1949년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연합에 의해 사실상 강제 해체된 이후 국회의원들이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기는 처음이다. 더욱이 이 명단이 독립운동가들의 대표 단체라 할 수 있는 광복회가 조사 작업을 벌인 성과에 기초했다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그러나 광복회는 이후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회피했다.) 친일문제를 거론하면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야 했던 저간의 사정을 비추어 볼 때 국회의원과 독립운동가들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금기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친일파 청산문제가 결코 모른 채 지나갈 수 없는 현안임을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또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실천문학사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식민지 강점기 ‘문필보국’이란 명목으로 친일에 앞장섰던 대표 문인 42명의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8월 9일 경향신문에 명단이 게재됨). 이는 지난 3월 1일 명단 발표의 후속격이라 할 수 있으나, 1) 친일 인사들을 그 활동 영역을 세분화해 관련 전문기관들이 직접 그들의 행적과 작품을 검토했다는 점에서, 2) 친일문인에 대한 규탄보다는 그러한 풍토를 낳았고 이를 감추거나 옹호했던 과거 관행과 무책임에 대한 자체의 자성과 반성의 한 형식을 갖고자 했다는 점에서 좀 더 진전된 측면이 있다.
1, 2차에 걸친 명단 발표 과정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는 친일 인사로 공개된 이들의 해방 후 이력을 보면, 대다수가 이른바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층’이나 ‘저명 인사’로, 또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기득권을 방어하고 힘을 펼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권력을 지닌 우리 사회의 ‘특권·기득권층’이라는 사실이다. 해방 후 친일 세력들이 청산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이들이 대한민국의 이른바 ‘주류main-trend’를 형성해왔다는 사실을 통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설명해주는 자료였다.
둘째는 대중의 충격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보도를 접하고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애국자 또는 민족의 지도자 또는 원로로 숭앙하던(당사자들이 자처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대중의 반응은 일단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이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전시한 그들의 친일행적 활동 자료를 직접 접하고서는 비로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수십 년간 제도 교육이나 이들이 구축한 각종 언론 등을 통해 존경받는 지도자로 숭앙하기를 강요당한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정반대의 생각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문제는 친일세력들이 해방 후 자신이 구축한 다양한 방어벽을 통해 대중을 얼마나 기만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실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라도 진실의 빛은 바늘구멍만큼의 틈이 있어도 찬란하게 빛난다.
세 번째로는 친일파 논쟁의 대중적 확산과 그 배후의 의미이다. 논쟁은 크게 정리하면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이들이 친일파냐 아니냐 하는 사실에 대한 확인 문제와 친일파의 기준 설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제 와서 친일파 청산문제를 거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에 극도의 반감과 공격 그리고 친일세력에 대한 옹호라는 참으로 예상되면서도 뜻밖의 반박논리를 둘러싼 대중적 공박이었다. 특히 방응모·김성수·모윤숙·김활란·서정주·박정희 등이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뒤의 4인은 그보다 먼저 논쟁이 전개되어 한풀 꺾인 감은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들이 논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은 그들의 친일 행위가 애매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구축해놓은 방어조직의 ‘사운을 건’ 반격에 의해 촉발된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한편 이러한 논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여야의 소장파 의원들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일제잔재(특히 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 법안을 추진 중이다. 또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을 3년 내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계의 바깥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박정희 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의 소속원 등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대중적 실천에 나서고 있다. 반세기도 지난 친일 문제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화두로 본격 개화하고 있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친일 청산은 친일세력과 그 후신들의 희망과는 달리 흘러간 옛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과제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진지한 참여가 배제된 채(사실 배제라기 보다는 우리 학계의 뿌리 깊은 ‘상아탑 전통’과 오늘날 학계 인맥의 연원이 갖는 구조적 한계), 대중적 공간에서 감정적으로 또는 언론간의 힘겨루기나 정치권의 권력 암투와 결합되면서 제대로 친일청산운동이 왜 필요한지, 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인지 충분하게 정리되지 못했음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친일파 청산 반대 또는 친일 옹호논리가 갖는 ‘현재와 미래의 위험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지적되지 못했음 또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새삼 다시 친일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친일의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하며 그 출발로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힘을 모아야 할 필요성은 무엇 때문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친일세력의 대한민국 장악과 ‘친일의 알까기’
일제는 한반도를 영구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일부 조선인을 식민지 지배 구조 내에 포섭해, 이들을 통해 조선 민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지배가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어 오면서 친일세력은 조선총독부의 상층 지배기구에서 말단 기구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서 구조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독 아래 길들여진 지극히 ‘식민지 체제순응’ 집단으로서 합리적, 과학적, 시민적, 민주적 역량을 강조하는 근대적 특성 대신 예속성, 사대성, 열등의식, 체념 등 전근대적 식민지근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이들은 일제 파시즘의 선전대 또는 행동대로서 이들의 사고 저변에는 일제의 파시즘적 사고와 행동 양식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범죄행위도 꺼리지 않는 기회주의적 인간형의 표본이기도 했다. 자의든 타의든 이와 같은 의식과 행동 원리를 가진 채 성장한 일제 친일엘리트 및 말단 주구들은 우리가 자력으로 해방을 성취하지 못함으로써 그대로 해방 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친일파 처단은 타율적인 해방을 주체적인 해방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고, 우리가 민족 공동체로서 거듭나기 위한 절대적 요청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친일파 숙청을 통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만 했다.
첫째는 친일파를 중핵으로 하는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통해 역사의 상식과 도덕적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이는 잘못을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는다는 상식의 재확인이며, 아울러 이들의 죄상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범죄자 당사자가 자신의 죄과에 대해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이들이 건국 과정에서 민족의 성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반성과 화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일제의 식민지 장기 지배로 인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사회의 온갖 분야에 뿌리박고 있는 파시즘적 요소를 뿌리뽑고 민주적 시민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 시작은 일제 잔재의 핵심 요소라 할 인적 요소 즉 친일세력에 대한 청산이다. 친일 세력이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도하는 한 건전한 시민사회의 출발이라는 과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한 사회가 공유해야 할 도덕적 기초마저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걸친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친일파, 해방 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이승만의 권력욕, 친일파의 생존 전략, 그리고 분단과 좌우 대결이라는 다양한 요인이 반민특위의 와해 또는 친일파 청산 실패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친일파 미청산 문제는 단순히 안타까운 과거의 역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친일파들은 친미와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일제 군국주의의 파쇼적 사고방식을 새로운 생존의 무기로 삼고 지금껏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먼저 친일파들은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친일문제가 흐지부지되자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함으로써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추었다.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한 주력으로는 주로 경찰과 군 계통의 친일 세력 그리고 월남한 친일 세력들이었다. 군, 경찰 계통의 친일세력들은 자신의 친일 행적을 감추거나 아니면 6·25 당시의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괴뢰도당의 마수로부터‘ 지켜낸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했다. 심지어 일제시기 민족해방 운동자들을 탄압한 사실이 드러난 경우, 이를 친일 행위가 아닌 반공애국투쟁의 하나라고 강변했다.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상당 부분 좌익이 주도했고 따라서 일제의 독립 운동자에 대한 탄압도 좌익 민족혁명가에 대한 검거·체포·살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 가담한 친일행위자들은 6·25전쟁 이후 맹목화한 반공주의를 억지로 과거의 친일행적에 꿰 맞춘 것이다. 이들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생존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지금도 친일세력들이 반공과 북한 타도를 내세우는 냉전세력의 전우들이며, 친일청산을 주창하는 이들을 끊임없이 용공세력으로 몰아넣는 역사적 연원을 파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반공주의는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일체의 가치 위에 군림하면서 친일행위마저 면죄부를 주었다. 그 면죄부 위에 만주군을 주력으로 한 5·16쿠데타가 가능했고 친일세력은 자신의 모습대로 대한민국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한편 일부 친일 세력은 한때 자신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실만 내세우고 그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이후의 행적을 감춤으로써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고 독립투사로 행세해 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금도 국립묘지에는 일제 밀정의 의혹을 싸고 있는 이갑성, 일제의 침략 전쟁 동원에 열렬하게 앞장섰던 서춘 등 이십 여명 가까운 친일파가 독립투사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버젓이 안치되어 있다. 심지어 3·1절 기념식장에서 어느 노 독립운동가가 훈장을 받을 때 그 훈장을 준 이가 바로 자신을 고문한 자였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한편 친일파의 거물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지식인 출신들이나 관료 또는 부호들이 많았다. 이들은 해방 이후 정계, 법조계·재계, 관료집단, 문화, 언론, 학술, 교육계 등 재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실력자·원로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금력과 권력 또는 언론 및 교육 분야를 장악해 자신의 친위세력이나 방어조직을 구축하고 기득권의 재생산 기반을 마련했다. 나아가 이들은 이를 이용해 친일문제를 거론조차 못하게 했다. 특히 일본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상황 아래에서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여야가 사사건건 반대의 길을 가면서도 유일하게 당론이 일치하고 있는 부분이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의 원뿌리가 어디서 비롯했는지 잘 보여준다. 1995년 이완용 손자가 대한민국 국민이 뻔히 보는 앞에서 할애비의 땅을 당당하게 되찾아 20억원의 땅값을 챙겨 유유히 외국으로 떠난 사실에서, 그리고 친일 행적보다는 사유권 보호가 더 우선이라고 외치며 땅을 되찾아준 당시 대법원의 판례에서 한국 법조계의 근본 체질이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근안 고문경찰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주범들의 상관들을 캐어보면 이들의 맥은 해방 직후 친일 경찰에 닿아있다. 반민특위 조사 또는 검거 대상들이 고문경찰의 대부들이며 이들이 일제시기 민족 해방가들을 고문하던 수법을 해방 이후 대공계통을 매개로 전수해주었고, 그 후신들이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민주투사 탄압의 주범이 되었던 것이다. 군 계통은 언급하지도 말자. 신성한 교육의 현장은 어떠한가. 덕성여대 등 사립학교 분규 이면을 들춰보면 상당수가 설립자가 유명한 친일인사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학교마저 빼앗아 자신의 사유물로 만든 경우도 있다. 국립대학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국립대학교의 젊은 교수가 미술계 원로의 친일행각을 비판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사학계에서 친일문제를 다룬 공식적인 학위논문이 거의 없는 까닭도 친일행위에 연루된 재단설립자와 스승 그리고 주위의 압력이 작용한 바 크다. 우리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반성조차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한 철퇴를 맞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이었다. 조선-동아 양대 일간지 사주들의 친일 행위는 명백하지만 여전히 민족 언론·민주언론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친일세력이 대한민국에 자신의 기득권을 어떤 시스템으로 구축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김성수이다.(비록 그 위력은 지금 조선일보보다 못하지만) 김성수를 정점으로 한 동아일보(언론)-고려대학교(학계)-경성방직(경제계)-한민당(정계)의 사각 체제가 그것이다. 예의 이들은 동아일보를 민족언론으로, 고려대학교의 설립과 운영을(학생이 아닌 재단을 말한다) 민족교육의 육성으로, 경방을 민족기업으로, 한민당을 반이승만 민주정당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설립 취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동아일보는 일제 말 스스로 고백하듯 “매일신보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훼절의 길을 걸었고, 김성수는 학생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찬양해 학원을 더럽혔으며, 경성방직(사장 김연수)은 일제의 만주침략과 함께 일본제국과 운명을 같이하고자했던 대표적인 친일기업이며, 한민당은 친일반공정당의 온상이었지 않은가. 더구나 동아일보와 한민당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를 의도적으로 오보하여 민족이냐 반민족이냐 하던 당시 구도를 찬반탁 국면을 전환시키면서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사자결합의 시스템을 장악하고 거대한 지원세력을 재생산하면서 김성수를 이 땅의 이상적인 지도자 상으로 분식시키고 있다.
친일세력은 기득권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았다. 친일파는(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지위만 유지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우리 사회의 반드시 청산해야 할 식민지적 정치·경제·사회·문화구조를 그대로 유지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그 총괄적 완성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일제 파시즘시기 체화한 것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체제화한 것이 바로 ‘총화유신체제’였다.
유신체제는 1930년대 일본 파시즘의 지배원리와 ‘근대화론’을 접합시킨 ‘일본파시즘의 한국적 변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신(維新)이란 용어 자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 소화유신에서 따온 것이며,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구조와 통치체제의 국가주의 원리 그리고 수많은 정책들이 일본 파시즘의 그것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실제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통해 우리 사회를 통치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병영국가로 재편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아의 확립 대신 국가(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오로지 요구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이어주는 명령계통의 국가기구와 어용단체만 존재했을 뿐,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없는 박해만 따를 뿐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시민’아닌 ‘재야’라는 독특한 저항진영이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4.19 이후 막 피어나던 우리의 시민사회는 태어나기도 전에 박정희 국가주의에 의해 태아 살해된 것이다. 친일세력은 반공주의와 독재를 연결시켜주었다.
최근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친일행위를 감추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나 그 후손, 때로는 지연과 학연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고 있다.
문화 예술계에서는 이미 월탄문학상, 미당문학상, 모윤숙 시비 건립, 홍난파기념관 등이 제정되었거나 설립 논의중이다. 교육계는 더욱 심하다. 인촌 기념관, 김활란 기념상, 황신덕 흉상제막 등 도처에 친일파 현양사업이 진행 중이다. 국회는 헌정 질서의 파괴 주범인 이승만의 흉상을 세웠고, 정부는 국민의 혈세로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박정희가 집권한 시대는 민족과 반민족, 민주와 독재, 그리고 통일과 반통일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치관이 투쟁하던 시대였다. 이 빛과 그림자의 투쟁에서 박정희는 언제나 반민족으로, 독재로 그리고 반통일의 화신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이 암흑의 지배 아래 수많은 친일잔재와 파쇼 세력이 기만적인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박쥐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정희 집권기 구축된 권력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21세기까지 연장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상징화 작업이 바로 박정희 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은 자신의 허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보수세력을 끌어들이고자 이 기념사업에 적극 뛰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은 박정희 시기 그의 ‘공범’들과 박정희가 남겨놓은 관변 시스템에 유착한 세력 그리고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현 집권층의 권력욕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의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 엉키어 진행되는 추악한 권력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이른바 ‘문제가 된 16인 명단’을 둘러 싼 일부 언론의 사주 감싸기는 참혹할 지경이다. 자신의 사주의 친일 행위는 감춘 채 오로지 민족지도자로 기념하다가 친일 행각이 드러나자 이를 민족언론을 지키기 위한 ‘수난’ 정도로 치부하며 오히려 일제의 식민정책의 희생자였음을 강조하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친일행위를 한 것이 수난이라면 독립운동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 친일을 해서 그들이 일제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거나 탄압을 받았다는 말인가?
이러한 친일파의 양지를 향한 끝없는 변신을 두고 ‘친일파 기념사업자’들은 일제시기의 이들의 친일행위를 문명개화와 계몽운동의 선구로 옹호하고, 해방 후 이승만 독재정권에 빌붙은 행적에 대해서는 반공애국투사, 건국의 공로자로 높이 평가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 어용지식인으로 활약한 이들에 대해서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친일파에서 친미파 또는 지일파로 변한 것을 두고 개방화시대의 선각자로 추켜세우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각종 기념사업과 숭조사업을 통해 친일파를 21세기 민족의 지도자상으로 치장하고 우리 후세들을 세뇌시키려 하고 있다. 친일파의 21세기가 화려하게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친일파 후손들의 “숭조정신”과 학연, 지연 등을 매개로 성장한 친일파의 분신들의 알량한 “기득권 지키기”가 숨어 있다. 결코 친일 문제는 과거의 것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친일파 청산운동의 재개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친일 청산운동은 오랜 기간 잠복기에 들어섰다. 반민특위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권력을 잡은 친일파의 눈을 피해 숨어살아야 했다. 경남도 조사요원이었던 김철호는 6·25 때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김상덕 위원장의 비서관이자 조사관이었던 송지홍은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쓰고 감옥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 특위 위원(조사관) 출신으로 이후 공직생활을 한 사람으로는 심윤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손들 또한 죄인 아닌 죄인으로 큰 숨 한번 못 쉬고 살아왔다. 단적인 냉전 풍토에서 친일문제를 거론하면 용공분자로 몰아 박해를 가하는 상황 아래서 친일 청산은 심연에 맴돌았다.
친일파 청산문제가 심연의 늪을 빠져 나온 것은 4·19혁명과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전후해서였다. 자유당의 폭정 주범들은 거개가 일제시기 친일파였다. 4·19 이후 이들에 대한 부정축재 환수와 공민권 제한 논의가 불거지면서 이들의 친일 행위는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5·16쿠데타는 이 모든 논의를 다시 잠복시켰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교사직도 팽개친 채 일제의 침략 전쟁이 무르익자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던 전직 일제 장교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당선은 친일문제를 직접 거론하기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굴욕적인 한일회담 이후 일본의 한반도 재진출이 가속화하면서 반일내셔널리즘이 강화되었고, 특히 일본의 한반도 재진출의 기회를 열어준 장본인이 과거 일제의 하수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일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각성을 주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규탄에 앞서 우리 내부의 친일 행위자들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 절실하다는 반성 속에서 나온 첫 친일문제 연구가 바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었다. 당시 친일 세력이 생존하고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잊혀진 친일 죄악상을 문학 분야를 매개로 다시 들춰낸 그는 촉망받는 문학도에서 재야친일연구가라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민주인사들 속에서 청산되지 못한 친일문제가 간간이 거론되었다. 특히 장준하는 박정희를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자신의 민주화·통일운동을 광복군 출신 대 일본군 출신의 대결의 연장 선 속에서 파악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긴급조치라는 극도의 공포체제 아래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이 때문에 친일문제는 구체적인 사람을 매개로 거론되기보다는 역으로 해방 후 민족·민주·통일세력이 남한에서 배제되고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결탁으로 반공·독재·외세추종세력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가를 해부하는 방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전히 친일문제는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지식 사회의 일각에서만 친일 문제(청산이라기보다)가 조심스레 다루어졌다.
1980년대는 친일문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조금씩 자리잡아가던 시대이다. 일본에 있던 강동진의 연구를 필두로 국내 학계에서도 친일파 문제가 간접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친일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거의 임종국 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직 친일분야가 하나의 연구 분야로 정착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보적인 소장 연구자들과 이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두었던 민중민족주의적 분위기의 선배학자들이 조심스레 친일문제의 실상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었다. 한편 친일문학론은 이 시기부터 민주투쟁으로 수감된 학생들의 옥중 필독서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들 민주화세대는 1990년대 이후 친일문제를 지식사회로부터 대중사회로 연결시키는 데 있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1990년대는 친일파 청산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과 연구의 활성화 그리고 친일청산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2년 출범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국내 유일의 친일문제 전문연구소로 등장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전문연구자들이 아닌 평소 임종국 선생의 뜻을 따르던 시민들이 주도하면서 설립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학계가 아니라 시민이 먼저 설립을 주도하면서 연구자와 일반 시민의 결합, 즉 전문연구기관과 대중조직의 공고한 결합이라는 새로운 조직원리가 나온 것이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는 연구진을 중심으로 친일문제를 연구 진작하는 한편 이를 대중화하고 회원들은 직접적인 친일청산운동의 주역으로 10년의 강고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 이후 양산된 진보적 연구자들 상당수가 우리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친일문제를 하나의 연구 영역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친일문제는 학문적 기반 없이 대중운동으로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학계의 연구자 일부가 친일청산문제에 대한 학문적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였다. 그러나 이 분야의 주력이 될 역사학계의 연구가 아직은 일천하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보기를 들어 일본의 조선사연구회가 간행한 (신) 조선사연구입문은 친일파문제를 하나의 독자 항목으로 설정해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있다. 문학에서는 친일문학론이 하나의 연구 분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한국사학계에서 펴낸 한국사연구입문이나 한국역사입문 등 각종 연구사 정리서에는 친일문제가 하나의 연구 영역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 학계의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셈이다.
오히려 시민들의 자발적 실천이 돋보였다. 대구 달성공원의 박중양 송덕비와 청주 정춘수 동상의 철거 등 시민들의 다양한 실천 활동이 학계의 지원이 거의 없이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들의 경우 친일파 청산 문제에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만 우리 역사 전체에 대한 폭넓은 조망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파의 죄상을 넘어서 이들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 그리고 친일파 청산이 이 시대의 고민들과 함께 미래지향적으로 해결되는 방안을 도출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이들의 실천을 의미 있게 뒷받침할 수 있는 연구성과의 미미함과 대중화 과정의 부족 그리고 연구자의 실천 풍토의 미약함에 더 큰 원인이 있다 하겠다.
2000년대는 친일청산운동의 대중적 실천 국면에 들어선 시기라 하겠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사회 각계 각층의 참여를 모아 만든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2001년 12월 창립)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출발은 학계와 시민이 동시 참여하는 친일청산운동의 본격적 출발이라 하겠다. 1999년의 친일인명사전편찬을 지지하는 교수 1만인 서명과 재단 설립과정에서 보여 준 시민들의 참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지원과 참여는 친일청산운동이 새로운 궤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한편 김활란상 제정, 미당문학상 제정 등을 둘러싼 치열한 대중적 논쟁과 실천,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운동과 안티조선운동이 친일 청산운동과 공동 행동으로 나아간 사실, 국회의 친일파 명단 발표, 친일문제연구에 대한 국회의원 일부의 지지와 예산 지원과 친일청산 관련법 제정 추진,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파동을 계기로 일어난 친일문제에 대한 내부의 반성 분위기 등은 전체적으로 친일청산운동이 대중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친일 문제가 우리 사회의 온갖 부정적 요소들의 청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문제와 한계도 적지 않다. 친일문제에 대한 자료의 수집 정리나 연구의 집적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 편찬사업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지니고 있다. 여전히 정치권이나 친일세력이 장악한 언론 등 기득권 세력의 외면, 반대, 방해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또 50년 이상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진 사회적 조건과 새로운 현안의 파생, 탈민족 담론의 친일문제에 대한 비판 등은 친일 청산문제가 단순히 과거의 연장선 속에 있을 때 낡은 담론이 될 위험성을 예고해준다. 한마디로 오래된 옛날의 일로 만드는 물리적인 시간의 화살과 우리 시대의 핵심 현안이라는 시대의 고뇌가 x자처럼 교차하고 있는 지점이 2002년의 현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친일 청산을 반대하거나 친일파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궤변은 오히려 친일문제가 우리 시대의 핵심 현안의 하나일 뿐 아니라 올바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통과과정이라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4. 친일파를 옹호하거나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궤변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친일파를 변호(옹호)하거나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궤변들은 많다. 그들의 주장은 오히려 친일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역사의 후과가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면상 이들의 주장과 문제점을 짤막하게 늘어보겠다.
* 과거는 흘러갔다는 망각론이다. 50년이 지난 이 시점 당사자들도 다 죽었는데 친일파 청산은 궤변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해방 직후 반민특위의 해체로 친일파 청산 재론은 일사부재리에 해당한다는 ‘법리적 주장’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친일 당사자들에 대한 법적 제재(체형)는 불가능해도 이들이 저지른 행위와 그 피해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속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사실 실정법 이전에 양심의 문제이지만, 법리를 동원한다면 이들 가운데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부류들은 ‘인륜에 반한 범죄’로서 공소시효가 없다는 것마저 들어야 하겠다. 더구나 해방 후 이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숙했으면 친일문제는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한 단면으로 역사의 연구 대상으로만 존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친일파(후신)들이 기득권 유지를 넘어 온갖 기념사업까지 전개하면서 또 한번 역사 왜곡을 저지르는 한 친일문제는 잊혀진 과거사가 될 수 없다.
* 그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공범론이다. 이들이 곧잘 드는 예가 창씨개명이다. 창씨개명은 대부분 했으니 이들도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기는 한가지라는 주장이다. 다 친일했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냐는 주장이다. 당신도 그 때 태어났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협박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창씨개명이나 말단 생계유지형 소극적 친일을 우리가 친일파라 한 적이 없다. 자의든 타의든 지속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민중에 대해 해악을 끼친 적극적 부분을 우리는 친일파라 규정하고 있음을 이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우리 또한 일제시기 태어났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100% 보장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은 누구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따라서 살인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기막힌 논법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가정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부지깽이라도 들고” 황국에 충성하자던 외친 이들의 글을 단순호구책으로 보아야 할까.
* ‘권력의 강제에 의해 친일을 했기 때문에 연약한 개인(범부)이 이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는 ‘범부피해론’, ‘호구책론’이다. 서정주는 이를 해를 따라 살아가는 무지랭이인 ’종천순일파“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당시 친일은 강요도 있었지만 본인의 의지도 매우 중요했다. 또 백번을 양보해 범부로서 불가항력이었다 할지라도 그에 따른 타인(민중)의 피해에 대한 속죄는 상식이다. 가난하다고 도둑질하면 용서를 빌지 않아도 되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제시기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서 공인적 성격이 강했다. 그들이 해방 후 반성하고 범부로서의 삶으로 자숙했으면 이 주장은 성립된다. 그러나 해방 후 이들은 범부의 삶보다 ‘민족지도자’의 화려한 영광을 그대로 누리고자 했다. 다른 모든 행위는 민족지도자로서의 비범함에서 나오고 친일행위만은 범부의 것으로 자신을 분해시키는 몰염치성이 더 큰 문제라 하겠다.
* 당시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민족의 선각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의 희생자(순교자)’라는 주장이다. 3·1절 명단 발표 후 이른바 문제의 16인을 월간조선을 통해 적극 옹호한 김동길 교수의 발언을 빌려보자.
나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김활란, 모윤숙, 송금선, 황신덕, 심형구는 물론 김성수, 방응모를 존경한다. 어제도 존경했고 오늘도 존경한다. 내일도 존경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민족을 반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겨레를 살리기 위해 일제下에 엄청난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 사실을 내가 안다. 모르면 물어보라. 독단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민족반역자가 아닌 사람들을 민족반역자로 모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민족을 반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번에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내 입에서 더 험한 욕이 나오지 않도록 자성해 주기를 바란다.
(가운데 줄임)
그들에게는 죽고 싶은 때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일제下에 누구 못지 않게 민족을 사랑했고 독립을 갈망했다. 망명하여 중국 땅에서 혹은 미국 땅에서 일제下 36년을 참고 견디어야 했던 애국지사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던 국내의 민족지도자들을(아래 줄임)
김동길은 이들의 친일을 일종의 순교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에 대한 멸시와 국내 친일파에 대한 순교자적 숭배를 통해 우리는 뒤바뀐 역사관을 확인한다. 따라서 친일파에 배한 비판은 민족반역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나온다.
* 다음으로 이들이 비록 한때 친일을 했더라도 민족에게 끼친 공로가 많으니, 한 때의 친일로 한 인간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공과론’이 있다. 이들이 공로로 드는 것은 식민지 시기 교육, 언론, 학술, 문화 다방면에서 선각자로서의 활동이나, 한때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 반공활동이나 기득권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이들이 부분적으로 끼친 공이 있다 하더라도 민족 전체에 대한 범죄행위가 심각할진대 정상참작이 아닌 면죄부로서 공을 격상시키는 것은 주와 종이 바뀐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이들의 공과론에는 ‘공’은 내세울지언정 ‘과’는 결코 스스로 언급한 적이 없다. 모 언론의 사주처럼 친일 행적은 감춘 재 민족운동가로 묘사하는 것은 공과론을 넘어서는 기만행위다. 김동길이 말하는 16인의 각 분야의 업적이란 것도 일제시기 그들이 친일의 대가로 보존해 온, 그리고 해방 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고스란히 유지된 그들의 사회적 기득권을 말한다. 우리가 제대로 친일세력을 청산했으면 이런 기득권이 그들에게 남았겠는가? 지금의 조선일보, 동아일보처럼 언론의 위세를 빌어 이렇게 설칠 수 있었겠는가?
* 직분충실(희생)론이 있다. ‘박정희는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다녔다. (어느 시민)’, ‘민족언론(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다. (김활란, 언론 사주)’는 주장 따위이다. 관료나 기업인 또는 전문직 종사 친일파 옹호론이다. 이 같은 직업의 탈윤리화 속에는 기득권의 영속화와 역사의 면책 욕구가 숨어 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친일의 핵심이다. 일제가 추구한 친일세력의 구조화는 바로 문필보국, 언론보국, 황도예술 등 '직업봉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 언론을 살리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논리 아닌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이제 와서 친일파 명단을 거론하는 것은, 죄 없는 후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며 연좌제의 부활이라는 주장도 있다. 연좌제를 잘못 해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친일파 청산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의 의도는 친일파의 후손을 벌주고 보복하려는 데 있지 않다. 친일문제의 역사적 해악을 객관화함으로써 반성의 기초를 제공하여 민족의 성원으로 거듭 나게 하려는 데 있다. 이 문제를 50년 가까이 방조함으로써 역사의 퇴행을 가져오는 데 일조했음을 반성하고 정의와 상식이 기반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승적 입장임을 이들은 외면하고 있다. 이들은 행여 조상의 친일 문제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친일청산은 양육강식의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담론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친일만이 아니라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논쟁은 민족 통합의 적이 되는 셈이다.
* 가장 강력한 반론은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집단은 빨갱이라는 주장이다. ‘해방 직후에도 친일파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산당 사람들이거나 이들과 가까웠다. 친일파 비난하는 것은 북한의 단골 주장이다. 지금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들은 죄다 빨갱이다’ 라는 주장은 민족연구소나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홈페이지에 가장 자주 올라오는 친일 청산 반론 중의 하나이다. 대체로 이들의 조상에는 전직 친일 경찰·군인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은 6·25 때 자신들의 부친이 ‘북괴의 남침’을 막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애국자(founder)인데, 빨갱이들이 이를 미워해 친일청산 명분을 들고 나온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이 결코 아니다. 독립국가 건설을 막기 위해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이들의 반공은 생존 본능이었으며,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가장 충실하게 과거 친일파의 논리를 순혈주의로 이어받고 있다 하겠다.
* 마지막으로 정치권에서 종종 나오는 특정 정당의 총재를 음해하기 위한 정치적 모략과 결합된 음해론이다. 물론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의해 친일문제가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음해론을 빌미삼아 친일청산 그 자체의 필요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롭고 검증된 민간단체에 친일문제를 위임함으로써 민족 성원 모두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적극적 대안일 것이다.
이상 친일파 옹호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반대 논리 속에 친일파 추종세력들은 과거 역사의 은폐를 넘어서 왜곡과 미화를 통해 또 한번 역사의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친일파 청산론은 퇴행적 민족주의 담론이며, 국제화시대, 탈민족국가 시대에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 논리라는 주장이나, 해방 후 한국 사회를 해명하는 데는 친일파문제보다는 친미파가 더 중요하다는 또 다른 입장에서의 반론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여성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여성운동에 대한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탄압이라고 논박하는 해괴한 견해도 있다.
5. 친일파 청산운동의 현재적 의의와 과제
우리가 4·19민주혁명을 설명하자면 이승만 독재의 실상을 아울러 설명해야 하듯이,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의 역사 또한 그 반대편에 서있던 친일세력의 책동을 한 눈 속에 넣고 파악해야 한다. 반세기 가까운 일제 지배 속에서 민중을 고통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친일 세력들이 해방 후 단 한 명도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총체적 구조적 후진성을 만들어 낸 장본임에랴!
해방 후 친일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식민지 시기보다 더 굳건한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으며, 분단과 독재체제를 심화시켰다. 이들은 일제에 부역한 것을 ‘민족의 선각자’가 겪어야 했던 수난이라고 미화하고, 이승만 분단독재정권에 빌붙은 것을 반공애국투사의 건국 활동으로 자화자찬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동조한 부류들은 박정희를 ‘근대화혁명가’로 분식하고 자신을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포장했다. 친일에서 친미로 끝없이 외세에 빌붙은 것을 두고 개방화시대의 선각자라 조만간 떠들지도 모른다. 파시즘적 기반의 온존과 강화 반공과 독재 그리고 분단의 핵심 세력의 뿌리는 바로 이들이다.
이로 인해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존의식과 도덕적 뿌리마저 무너지게 만들었고, 잘못을 했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한다는 상식조차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50여 년 넘게 지나면서 일반대중에게까지 일상화됨에 따라 정의는 칼을 쥔 자의 것이며 역사는 언제나 권력자의 편이라는 자조 섞인 역사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마침내 잘못을 잘못으로서 인정할 능력조차 상실한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번 첫 단추를 잘못 맞추면 다음 단추도 마찬가지이다. 작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시끄러웠다. 우리가 이를 비판한 근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일본 극우파들이 과거 일제가 저지른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전쟁을 미화해 역사를 왜곡한 점,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공교육의 현장에서 어린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미래의 파시즘 전사를 양성하려는 예비범죄라는 점, 나아가 이는 동아시아 21세기 평화의 근본 위협요소라는 점이었다. 일본 역사 교과서 규탄에 온 시민이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 한국의 지배 세력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대외 침략의 첨병을 활약한 최후의 일본 제국 군인 박정희를 비롯한 수많은 친일파들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우리의 세금을 걷어서 진행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전도된 가치관이 21세기 우리 후손에게 교육되고 학습되어질진대 과연 친일은 과거의 문제인가?
우리가 친일 청산을 주창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나선 것도 이러한 절박한 현실 때문이다. 친일파는 어제는 친일 오늘은 친미로 옮겨다니며, 반공을 기득권의 온상으로 삼고 끝없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권력의 양지만을 추구하는 카멜레온 족속이다. 이들의 친일파 선양사업은 친일세력이 온존하면서 물려준 기득권을 지키려는 알량한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친일 세력의 몸바꾸기와 기득권 추구 그리고 이에서 비롯하는 온갖 부조리를 타파하는 출발로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을 민중의 힘으로 완수해 우리 스스로 역사를 자정할 수 있는 저력을 확인하고, 연구자와 시민이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대중적으로 확보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1985년 5월 8일 종전 40주년을 맞아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이 국회에서 한 연설 가운데 일부로 글을 맺고자 한다.
"지나간 일은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참회와 속죄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과거를 기억함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증언이다. 그것은 속죄의 원천이다.……이 증거를 망각하는 자는 내일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친일파 보다 더 못한 인간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걱정입니다.
첫댓글 저 위의 홍진기는 아마 이건희의 처인 홍라희의 부친 일 것입니다. 홍진기 집안이 중앙일보 사주 집안일 것이구요 현재의 대한민국은 홍진기와 이병철 두 집안을 위한 나라가 된 듯 합니다.
저 위의 홍진기는 아마 이건희의 처인 홍라희의 부친 일 것입니다. 홍진기 집안이 중앙일보 사주 집안일 것이구요 현재의 대한민국은 홍진기와 이병철 두 집안을 위한 나라가 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