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안씨 대종회 회장은 죽산안씨 대종회가 수원에다 그들의 시조 등의 설단비석(숭덕비 등)을 세웠는데
그 비석에 광주안씨 시조와 선대 선인. 대종회장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 잘못이니 삭제하라 하였더니,
죽산안씨 대종회장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근거로 주장하는데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고 나에게 물어왔다. (2010. 4. 27. 10:10 에 전화로)
이를 전화로 설명해 주었으나 다시 여기서 자세히 설명글을 게시한다.
그러면 《증보문헌비고》라는 책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인지 그 변화과정을 알아본다.
1770년(영조 46)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 간행한 바 있는데 이 편찬사업은 서명응(徐命膺)•
채제공(蔡濟恭)•서호수(徐浩修)•신경준(申景濬) 등이 주도하여, 반년여만에 상위(象緯)•여지(輿地)•예(禮)•
악(樂)•병(兵)•형(刑)•전부(田賦)•시적(市糴)•선거(選擧)•재용(財用)•호구(戶口)•학교(學校)•직관(職官) 등
총 13고 100권으로 인쇄까지 되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져 잘못된 부분이 많아, 1782년(정조 6) 이만운(李萬運) 등이 재편찬에 착수하여
1790년 일단락되었으나 정조 즉위 후의 사실이 많이 빠져 계속 보완•증보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증보사업은 1797년에 이만운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서명응의 손자 서유구(徐有榘)도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이만운의 아들 이유준(李儒準)의 보완작업이 따랐으나, 기본 골격은 앞에서 이미 갖추어진 대로였다.
≪증정동국문헌비고(增訂東國文獻備考)≫ 또는 ≪증보동국문헌비고≫로 불리는 이 책은 앞의 13고에
물이(物異)•궁실(宮室)•왕계(王系)•씨족(氏族)•조빙(朝聘)•시호(諡號)•예문(藝文) 등 7고를 더하여 총 20고
146권을 이루었으나 간행은 되지 못하였다.
≪증보문헌비고≫는 갑오경장으로 문물제도가 크게 바뀌자 이를 반영시키기 위해 ≪증정동국문헌비고≫를
개찬한 것으로, 1903년 홍문관 안에 찬집소(纂輯所)를 두고 박용대(朴容大) 등 33명이 찬집을, 박제순(朴齊純) 등
17명이 교정을, 한창수(韓昌洙) 등 9명이 감인(監印)을, 김영한(金榮漢) 등 3명이 각각 인쇄를 맡아 5년만에 완성하였다.
즉,1908년에 간행되었다.
요약하면,
1770년 영조(영조46년) 때 간행한 《동국문헌비고》에는 제계고(帝系考) 또는 왕계고(王系考)는 없고
씨족(氏族)에 관한 사항이 권38 예고(禮考) 16 잡편(雜編)에 있다.
여기에는 각 성씨별 내용은 없고, 사성(賜姓) 기록만 약간 나오는데, 애장왕 때 사성기록으로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아래 기록은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기록되어있다.
["哀莊王六年 唐封太后叔氏爲大妃 太后奈勿王十三世孫金叔明女也 嫌於同姓 以父名叔爲氏"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16책의 권38 예고 16 잡편 p.108]
《증보문헌비고》는 《증보동국문헌비고》(1780.정조4.)와 《동국문헌비고》를 보충하며 王系考를 帝系考로 바꾸고
氏族을 附로하여 기록하였다.
★. 삼국사기는 역사서(正史)이고.증보문헌비고 등은 문물제도를 기록한 종합도서이다.
그중에 安씨에 관한 기록이 아래 두개가 기록되어있다.
(11) 권46 [補] 帝系考 7 [附] 氏族 (p.9)
경문왕 4년 왜란을 평정한 공으로 이지춘등 3형제에게 안씨(安氏)를 사성(賜姓)함.
[景文王四年 以平倭亂功 賜李枝春等 三兄弟 姓安氏]
★.위 기록은 신라 때의 일인데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기록이 없다.동국문헌비고에도 없다.
(12) 권49 [補] 帝系考 10 [附] 氏族 4 (p.57)
안씨의 본성은 이씨로 시조 안원은 중국인이다.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8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정착했다.
세 아들이 있어 장남은 지춘, 차남은 엽춘, 그 다음은 화춘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864년) 갑신왜란 때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안씨를 사성받았다.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에, 엽춘은 방걸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안씨 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원문:
[安氏]本姓李氏 始祖安瑗中國人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艹+柰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平亂 故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 封竹山君 艹+柰春改名邦傑 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 封廣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원문에는 次艹+柰春 春의 葉입사귀엽자가 아닌 艹+柰로 기록하고있다. 즉, 초두艹 밑에 능금나무내柰로 되어 있다.
漢字를 常用하는 대한제국 1900년초에 葉자를 쓰지 않고 艹+柰로 기록한 것이 두번이니 의문이다.
★.위 기록도 [삼국사기(신라본기)]. 동국문헌비고. 증보동국문헌비고에도 없다.
이어서 순흥. 광주. 죽산안씨 시조를 기록하고있다.
○. 順興安氏始祖 子美 保勝別將 追封神虎衛上護軍 ○廣州君 邦傑 十世孫
○. 廣州安氏始祖 綏 門下侍中○廣州君 邦傑 以縣吏起家 爲大將軍封廣州君 十四世孫綏
광주안씨 기록중에 시어사공(휘 綏)의 관직을 전중시어사가 아닌 門下侍中으로 한 것은
趙從耘(1607-1683)의 氏族源流에서 나온 듯 하다.
서울 강동구 지역역사 자료에서도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氏族源流 저자의 착오일 것이다.
○. 竹山安氏始祖 令儀 追封尙書左僕射 ○竹山君 邦俊 七世孫
(이후 죽산안씨로 安濬 少監爲一派, 安元衡 侍中 竹城君 爲一派,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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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하여 설명하면,
광주안씨 시조는 분명하고 일관하게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 경문왕때의 일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없는 것이니 날조이다.
또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와 1797년의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없는 기록이
1908년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는 것은 떠도는 낭설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죽산안씨 족보기록에 이원(李瑗)이 안씨(安氏)로 성을 받았다는데 증보문헌비고에 없다.
기록의 근원은 이유원의 임하필기(1884)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죽산안씨 시조는 令儀. 濬.이 죽산안씨 두 문중시조이고, 安邦俊은 없다.
광주안씨 대종회장은 확실하게 알고. 죽산안씨 대종회장의 말에 현혹되지 말기 바란다.
※.글자를 찾기위하여 1982년 10월에 간행한 [동아 漢韓大辭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이 사전은 한학의 거장인 李家源.權五惇.任昌淳선생이 감수한 사전으로 2만6천여자. 13만5천여의 例語가 수록된 것으로 略字. 俗字. 同字. 通字가 수록된 지금 가장 자세한 사전을 본 결과이에도 艹+柰 로 기록된 글자는 찾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