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금’이 정기산행일이다. 그래서 이름도 월금산악회(회장 이원발)다. 가장 많이 찾는 산이 북한산인데 밤골을 들머리로 숨은벽 언저리를 주로 다닌다. “그나마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한적한 산길을 거닐며 방송일과 무대를 오르며 지친 심신을 달래고 싶은 이들은 이른바 연예인산악회. 한갓진 산행을 선호한다.
연예인도 사람이다. 연극계 선후배들로 하나둘 연결되어 산악회를 꾸린 이들은 산을 매개로 그들끼리 어울려 같이 걷고 운동을 한다. 밥도 먹고 정보도 나누고 안부도 물으며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런 공식적인 만남인 동호회는 비(非)연예인들이 궁금해하고 엿보고 싶어하는 영역. 늘 숨은벽 능선 주변을 맴돌던 그들이 창립 3주년을 맞아 서울등산학교의 협조로 첫 리지등반에 나섰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등반실력? 일단 연예인이니까.
무대에 오르는 열정으로 바위에 처음 오르다
10월 넷째주 금요일, 숨은벽리지 스타트 지점에 서자 단풍이 절정에 달했다. 이름난 배우들이 여럿 모였지만 타들어가는 단풍에 홀린 눈은 그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헬멧을 단단히 눌러썼으니 알아보는 이들도 없다. 표정 또한 난생 처음 하네스를 차고 쇠붙이를 몇 개 붙이니 환하던 얼굴이 곧 긴장모드가 된다. 서울등산학교 서성식 교감과 김인호 대표가 앞뒤에서 줄을 보고,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고려무신 유방역으로 거란군을 물리쳤던 이원발 회장이 맨 앞에 섰다.
“수도 없이 이 근처로 산행했지만 그때마다 바라보기만 했죠. 우리 회원들도 언젠가는 저 숨은벽을 타는 날이 있겠지 했는데 그게 오늘이네요.”
다소 상기된 이 회장은 백두대간 구간 종주중인데 완주를 눈앞에 둘 만큼 열정적으로 산을 다닌다. 이런 왕성한 활동 덕에 서울등산학교와 연이 닿았고 2006년 10월 창립, 3주년 기념 산행을 그들의 ‘로망’이었던 숨은벽리지를 하게 된 것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번갈아 리지교실을 운영하는 서울등산학교는 ‘월금’의 특수성을 감안, 기꺼이 금요일 등반지원에 나섰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회원 10여명이 이때를 놓칠세라 밤골 ‘무명집’에 모였는데 전체 회원 중 3분의 1이다. 연극, 뮤지컬, TV,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기자들, 보면 웬만큼 알만한 이들이다. 스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출연한 작품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데 상당한 뒷받침을 하는 실력파 배우들이다.
20년 베테랑 연기경력에 탄탄한 조연으로 친숙한 박용수씨(‘효자동 이발사’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고문을 가할 때는 섬뜩할 정도로 실감났다). ‘연애의 목적’에서 조 선생을 연기했던 이대연씨는 영화로 보나 직접 보나 매한가지다. 물 흐르듯 스크린에서 흘러나와 관객 속으로 스며든다고 할까? 진짜 동네아저씨 같다. 자신의 이름보다 ‘추상미 오빠’로 통하는 추상록씨도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이 안부를 묻는데, “요즘, 상미는 잘 있냐?”
이밖에 최근작 ‘신기전’에 출연했던 연극배우 최승일씨와 2006, 07년에 이어 올해로 세 번째 올리는 스릴러 연극 ‘날 보러와요’의 김 반장 손종학씨,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주인공 비서로 나왔던 김미라씨 등 회원 대부분이 극단에 적을 두고 있는 선후배 지간이다.
그리고 누가 그랬든 스타는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말, 맞는 얘기다. 문성근이다. 월금산악회를 만든 장본인이 뒤늦게 합류했다. 참여정부가 끝날 무렵 그는 모든 걸 접고 홀가분하게 산을 찾았다. 처음엔 극작가 김운경씨를 따라 다녔다가 거기서 홀로 떨어져 자기 ‘계보’를 꾸렸고 연극계 지인들이 중심이 돼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산을 오르내렸다. 열심히 산을 다닌 때문인지 얼굴 볼 살이 홀쭉했다.
“땀을 무지 많이 흘리는 편이예요. 수건을 아예 목에 두르고 다니잖아요. 쉬면서는 맥주도 한 모금씩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이게 아닌 것 같아요. 아, 산에서는 정치얘기 하지 맙시다.”
잠시 쉬는 사이 기자를 보자 말을 아낀다. 음영이 깊게 떨어진 그가 가뜩이나 외로워 보이는데 더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바위에 붙고 나서는 아무래도 달라지겠지.
그들만의 모임? 산에서는 산 좋아하는 등산객일 뿐
“어, 어, 어, 안돼! 안돼! 계속 미끄러져! 안되겠어. 신발을 잘못 산 거 같애. 어휴 미치겠네.”
무대에서 내뿜던 ‘김 반장’의 카리스마는 온 데 간 데 없다. 벌벌 떤 손종학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괜한 신발탓을 한다며 동료가 퉁을 놓는데, 최근 산 것이지만 바위하고는 애초에 궁합이 안 맞는 걸 신었다. 초대회장인 문성근 또한 생각대로 안 되는지 신발창을 들여다본다.
“이거 바위에도 좋다고 했는데 아니구나! 수입하는 업체 사장님이 직접 추천했는데….”
아마 워킹하다 나타나는 암반에는 좋을지 몰라도 암릉이 이어지는 리지에서는 좀 달리는 어프로치화를 문제 삼는 중인데, 연장 탓 해봐야 이미 늦었다. 10여명이 넘는 인원이 등반중이라 한 피치 끝나면 곧 다음 피치가 기다린다.
“잠시만, 내가 먼저 갈께. 조금만 기다려!”
어느새 탤런트 이효정씨가 올라왔다. 최근 ‘태양을 삼켜라’에서 검사로 출연했던 그는 몇 해 전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했다.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다. 취미삼아 영상을 찍는다고 하는데 회원들의 몸짓은 카메라를 들이대도 전혀 동요가 없다. 익숙한 때문이기도 하고 그보다 바위에 매달려 있기 바빠서다.
“다들 처음인데, 우리 회원들 이 정도면 잘 하는 거 아닙니까? 등반 마치고 나면 서울등산학교에 정식으로 등록해 교육 받자고 할 거 같은데요?”
등반 경험이 있는 이 회장은 흐뭇한 눈치다. 먼 발치에서 쳐다만 보던 바위능선을 직접 만지작거리고 있고, 그 순간이 고되지만 회원들의 즐거운 표정이 ‘재밌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3주년 이벤트가 성공적이다.
“원발아! 어디쯤이냐? 다 올라갔어? 뒤풀이 준비해 놓을테니 얼른 내려와!”
‘서울의 달’로 유명한 김운경 작가가 무명집에 도착해 전화를 했다. 방송사
곳곳에 산 타는 맛을 퍼트린 산 선배가 손수 챙기는 모양이다.
무대를 벗어나 산을 오른 배우들. 이들 역시 몸을 맞대고 함께 땀 흘리는 것만큼 쉽고 빠르게 친해진다. 평소 눈에 잘 띄지 않고 숨어있던 선후배들도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산악회를 통해 얼굴을 보이고, 백주대낮에 그들만의 산 열정을 펼치며 우의를 다진다.
“성근이형, 지난번에 노적봉 탔다면서 오늘은 많이 힘들었나보네?”
“내 나이 되어 봐. 자세가 나오나.”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 문성근(56세)도 바위 위에서는 모양새가 빠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