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ppening-Event-Performance and on Korean Temper
퍼포먼스가 1960년 이후의 행위미술을 일컫는다는 견해는 전문서적 뿐 아니라, 위키피디아Wikipedia 사전을 위시한 많은 사전적인 자료들이 공감하지만 기념비적인 사건이나 행사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어쩌면 그것이 퍼포먼스 아트의 성격 혹은 진면목일 수 있다. 왜냐하면 퍼포먼스는 어원적으로 혹은 발생학적으로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퍼포먼스performance는 성능-수행 정도의 뜻을 지니는 명사이다. 퍼포먼스Performance를 대문자로 표기하거나 아트를 덧붙여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라고 부르면 비교적 1970년대 이후 행위미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대표작이라는 개념도 없는 포괄적인 미술사조 그것이 퍼포먼스 아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오늘날 퍼포먼스 아트는 해프닝-이벤트-바디 아트 등 신체를 표현매체로 삼는 행위미술 뿐 아니라 20세기초의 실험적인 시도들까지 포용하는 경향이다.
이미지
이명환의 행위 및 기록
한국의 행위미술
한국의 행위미술은 세계미술사와 대략 10년에서 20년의 시차를 두고 경향과 개념과 형식을 따라 진행되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앵포르멜Informel이라는 뜨거운 추상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된 한국의 행위미술은 전위미술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대중들의 인식 역시 초기의 몰이해에서 보다 세계적인 행위미술에의 진입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후 한국의 행위미술은 다각적인 주제와 관심을 보여준다. 행위의 시지각화 및 의식화-행위의 시공간화 및 구조화 그리고 행위의 미디어화 및 네트워크화라는 다원적인 접근방식에 의한 상징성-설화성-원형성의 주제가 한국 행위미술에서 보편적으로 검출된다.
해괴한 짓거리-한국의 해프닝Happening
한국최초의 행위미술은 1967년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으로 기록된다. 1957년 카프로의 행위에서 비롯하는 바 서구의 해프닝이 지닌 고차원적인 논리나 사상은 한국적 상징성과 현실고발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해프닝은 엉뚱한-해괴한 혹은 웃지 못할 행위나 처신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1967년 12월 14일 16:00 평론가 오광수의 기획으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의해 소개되었다. 비닐우산을 펴들고 의자에 앉은 무동인의 김영자 주변을 무동인-신전동인의 강국진-김인환-심선희-정강자-정찬승 등이 촛불을 들고 빙글빙글 돌면서 녹두장군 전봉준의 전래동요를 부른다.
관객 중 여학생이 참여하여 관객참여의 형식이 완성된다. 우산을 촛불로 녹여 구멍을 내고 초를 꽂는다. 촛불 꽂힌 비닐우산을 포함한 행진이 계속되다가, 의자에 비끌어 맨 촛불을 불어 끄고 비닐을 뜯어낸다. 우산을 내동댕이치고 소리를 지르며 짓밟는다.
경향신문은 이 행위가 끝난 후 출연자 중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한다.
이르되
‘해프닝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미적사건美的事件이며 그 자체가 표현행위인 것입니다。우리들이 행한 해프닝은 단순한 제작행위이며 미술현실의 무위無爲와 관념적 질서에서 벗어난 의식의 표백입니다。당신들은 이 해프닝에서 현실과의 어떤 연상작용을 얻을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입니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적인 해설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녹두장군 노래 즉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는 노래는 외세를 몰아내고 한국의 정체성을 찾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우산에 초를 꽂고, 촛불로 비닐을 태우고, 비닐우산을 짓밟는 행위는 미국의 핵우산을 추방하자는 상징을 담고 있다. 이렇게 주제를 내세운 단막상징극의 형식은 비논리-비연극-비상업을 내세운 서구의 해프닝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결과로서의 흔적을 무대화한 일본의 구타이具體Gutai 그룹과 같은 비현실화한 사건과도 무관하다.
1967년 최초의 해프닝 이후 1970년대 초까지 몇몇 한국적인 해프닝은 현실고발적-퇴폐적이라는 비난과 표현의 자유 및 의식의 무한확장이라는 변명이 맞물렸던 시대라 할 수 있다.
1968년 5월 30일 「투명풍선과 누드」는 케이지John Cage의 음악, 청적황의 조명 속에서 정강자의 상반신 누드에 한국청년작가연립회원인 강국진 정찬승이 관객과 함께 투명한 풍선들을 만들어 붙이는 작품이다. 투명풍선은 터지고 작품은 사라진다.
이어 한국의 해프닝 혹은 행위미술은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 밑 100미터 지점에서 「한강변의 해프닝 I.II」1968 혹은 「한강변의 타살」로 이어졌다.
1강국진-정찬승-정강자가 머리만 남기고 구덩이에 묻힌다. 2관중과 기자들이 물을 붇는다. 3구덩이에서 나온 행위자들이 서로 문화보따리장사-문화사기꾼-관념론자-문화사이비대가-새로운 문화 무조건 배척하는 자-19세기적 현대인-문화정치작가-근시안적 비평론자 등의 글을 색색 비닐에 쓴다.
4구덩이에서 나온 행위자들은 관객의 고발문을 읽는다. 5비닐과 고발장을 태운다. 6“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라고 외친다. 이 행위에 대해 당시의 신문은 미친 짓: 경향신문10.19, 예술깡패: 한국일보10.22-거의 발광: 서울신문10 등의 비 우호적인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
1969년에는 정강자와 정찬승의 행위가 있었다. 정강자가 조각전시장 바닥에 거울을 깐다. 정찬승은 전시장 가득 풍선을 채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포함한 관객들의 비명과 깨지는 거울-풍선들이 깨진 거울에 의해 터진다.
1969년 7.21에는 아카데미음악실에서 김미경에 의해 ‘한국 최초의 전위 흑백필름’으로 묘사되는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가 제작된다.
1969년 명동국립극장에서 열린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이 작곡한 컴포지션을 정찬승과 차명희가 행위했다. 「피아노 위의 정사」라는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에 의해 우발적으로 연주되는 소음이 주제가 된다.
1969년 김구림과 김차섭의 「매스 미디어의 유물」 우편물 발송 행위가 있었다.
1970.5.16 신세계백화점 앞 「육교 위에서의 해프닝」은 김구림-정찬승-방태수에 의한 육교위 풍선-찢어진 콘돔-순차적 메시지 전달-의식의 무한확장을 통한 무한예술에 대한 시도를 목표로 했다
1970년 8.15 제4집단의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김구림-정찬승-정강자 외 연극인-디자이너-작곡가-영화작가 등이 참여했다. 광복절 선언대회 후, 백기를 든 김구림에 이어 백기와 태극기를 든 정강자가 따르고 그 뒤에 기성문화의 모순을 상징하는 관에 가식을 상징하는 꽃으로 장식한 관이 사직공원을 출발한다.
국회의사당앞까지 왔을 때 시민들의 신고에 따라 통행방해와 도로교통법위반으로 파출소로 연행된 정찬승- 손일광-정강자는 구류 후 즉심 처리된다.
서구의 해프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1960년대 말 한국의 해프닝은 현실고발의 편리한 시각적 메시지로 이해되었고, 자유와 방종의 개념이 모호한 표현의 방식으로 탈바꿈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탈서구적 혹은 한국적 행위미술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의 의지는 주목할 만 하다.
이벤트의 한국적 연착륙
한국의 해프닝이 카프로Allen?? Kaprow 류의 해프닝이라는 틀을 빌어 현실고발과 표현자유를 실험했다면 이벤트는 케이지 류의 비논리 이벤트를 단순화한 설화적 사건으로 번안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벤트Event라는 용어는 케이지의 1952년 이벤트로부터 18년 후에 등장했다. 1970년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0회 한국미술협회전에서 김구림의 이벤트 「道」라는 표현과 함께 한양대학 건너편 언덕의 잔디를 태워 기하적인 문양을 만들었던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김구림의 이벤트는 행위미술이라기보다는 대지미술의 범주에 속할 뿐 아니라 ‘사건’이라는 뜻이 강하다.
1974년 제3회 S.T전에서는 성능경이 「신문: 1974.6.1 이후」 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기사를 낭독한 후에 사진과 광고와 만화를 뺀 기사를 면도날로 오려내어 아크릴 통에 넣는 반복적인 행위 이후에 행간 만 남은 신문을 들고 있는 「행위작업」을 보여준다.
그러나 1975년의 제4회 S.T.전에서 이건용이 자신의 행위에 이벤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 이벤트의 한 양상으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한국의 이벤트 행위는 1975년 이건용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이건용은 제5회 S.T.전에서 「건빵먹기」 그리고 AG4인전에서 「장소의 논리」 「바늘구멍잇기」 「내가 보이냐」 「이리오너라」 등의 행위에 논리적 이벤트Logical Event 혹은 Event Logical라는 이름을 붙인다.
1975년 백록화랑 개관전 ‘75 오늘의 방법전에서는 뭉쳐진 테이프를 풀면서 대각선의 길이를 잰 후에 모자라는 길이를 오각형 전시장의 길이를 재고 난 다음 테이프로 보충하는 「테이프 자르고 잇기」-접은 한지를 편 후 임의의 크기로 잘라 화랑 공간을 채운 후 빗자루로 쓸어내는 「동일면적」 이벤트를 보여준다.
이후 「오늘의 방법전」1975-「중성화의 논리」1975-신체드로잉1976-「이어진 삶-77」 등이 이벤트의 연장선상에서 실연된다.
논리적 이벤트 계열의 작품으로는 김용민이 분필로 원을 그리면 이건용이 걸레로 지우는 「긋는 것과 지우는 것」-샌드페이퍼에 흰색을 칠하면 붓이 닳는 과정을 보여주는 「샌드페이퍼에 칠하기」-장석원의 시계를 화랑바닥에 놓은 시간과 돌아와 확인한 후 시간을 큰 소리로 고하는 「시계보기」의 3인 이벤트1975 그리고 미술이 사회 속에 개입하여 삶과 동행했던 사건으로 기록되는 1977년 장석원의 「혼인이벤트」가 있었다.
1979년 이건용의 「달팽이걸음」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백묵을 맨발로 기어가는 발 앞에 무수히 긋고 그 그어진 선들의 띠를 맨발이 지우며 지나간 두 개의 선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이벤트이다. 1979년 이건용은 LIS'79 리스본 국제전에서 신체와 우주의 관계항을 행위로 표현한다는 신체드로잉The method of Drawing으로 대상을 수상한다.
이건용에 의하면 사건과 행위를 통해 논리와 신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 논리적 이벤트의 의미이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일어난다는 논리적 문맥과 일어나고 있는 그 신체적 행위는 양의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고 그것 두 개가 전혀 분리되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 그 자체이다. 논리적 이벤트Logical Event는 이러한 양의적 의미 속에 논리와 신체를 하나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벤트에 이르러 행위미술은 작가의 논리적 발언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국제 무대에 공식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퍼포먼스Performance
서구의 패스트푸드Fast food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연행되었던 퍼포먼스는 한국에서 빠르고 쉽게 수용되었다. 빠르다는 이야기는 서구의 양상이 한국에 전파되는 속도가 예전의 해프닝이나 이벤트 등에 비하여 주기가 빨라졌다는 뜻이고, 쉽다는 것은 해프닝 등 해괴한 양상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관객에게 ‘저게 행위미술이라는 것’이라는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한국의 관객 수준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뜻이다.
1980년대에 한국의 많은 행위미술들은 퍼포먼스라는 틀을 빌어와 행위하면서도 본격적인 퍼포먼스라는 용어와 범주에서 작업하지는 않는 경향이었다. 행위미술 자체가 한국적인 양상으로 자리잡았으니 굳이 퍼포먼스라는 말을 빌어올 이유가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오히려 퍼포먼스라는 이름이 부제로 따라붙었다.
1987년 2월 바탕골미술관에서 열린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에서는 총체예술지향적인 행위미술에 대하여 퍼포먼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강용대-고상준-김영화-남순추-문정규-박창수-방효성-안치인-윤진섭, 이두한-조충연 등이 참가, 복합매체나 총체예술 지향적 성격의 퍼포먼스를 발표한다.
1989년에는 디자인저널과 아트센터 스쿨이 주관하는 「’89 한일 퍼포먼스 페스티벌」이 있었다. 퍼포먼스라는 말이 보편화하던 시절이었다.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청년작가전」에서 이두한-이불-안치인-윤진섭의 행위는 행위미술이 국가적인 대표성을 띌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두한은 관중이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와 생선 타는 연기 속에서 춤추는 무희, 애완견처럼 끌고 다니는 미이라 인간이라는 상황을 설정한 후 자신을 경광등이 달린 석고로 감싸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불은 헐리웃Hooywood의 에일리언 영화처럼 낙태에 의해 버려진 생명들의 형상을 주렁주렁 달고 행위한다. 안치인은 천을 감싼 행위자가 계단을 거슬러 올라간 행위자가와 계단 아래 관에서 나온 다른 행위자가 다른 색의 종이를 뿌리는 행위를 벌인다.
윤진섭은 보이스Joseph Beuys류의 지팡이를 들고 까만 선글래스를 끼고 “Stop Terrorism"이라는 전단을 뿌린 후 전시장 바깥에서 유리창에 계란을 던진다. 세계 행위미술의 양상들과 유사하거나 연극적 공연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황과 함께 장소와 관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반응양상과 역동적인 해석이 가능한 기획이었다.
1980년대에 퍼포먼스를 내걸거나 묵시적으로 퍼포먼스라는 범주 내에서 행위한 개인 작업으로는 육근병-김용문-이상현-홍오봉-김석환-조현재-유도화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그룹 행위로는 「1986년, 여기는 한국전」, 1989년의 「행위미술제」,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서울전|도쿄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청년작가전」 등 단발성 행위와, 자연 또는 인문환경을 업고 정기적으로 발표활동을 벌였던 야투, 교감예술제-겨울대성리 등에서의 행위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가 퍼포먼스의 시대라는 일률적인 규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세 가지 예외적인 양상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행위이다. 1985년 8월 15일 21:00에서 22:00까지 김재권의 레이저를 활용한 이벤트가 남산타워 63빌딩 및 5.16광장과 KBS사옥을 기점으로 하는 서울상공에서 있었다.
두 번째는 환상과 설화성의 극대화이다. 1988년 이상현은 「잊혀진 전사의 여행」, 「지진시계」 등을 통해 안드로메다의 여왕-안개여왕과 네모 함장의 만남 등의 소재에서 읽을 수 있듯이 기상천외의 발상에 의한 동화적인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세 번째는 삶과 예술의 정서 및 현실고발의 메시지이다. 1989년 나우갤러리의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소통」에서는 18작가의 행위를 분석하여 문정규-육근병-조충연 등이 보여주는 삶이나 예술의 정서, 이건용-김재권-방효성 등이 보여준 물 고문 등의 현실고발의 메시지 그리고 윤진섭-김준수 등이 보여주는 가학과 피학의 극한을 추구하기 위하여 원초적 무대와 소도구를 이용한 일인극 형태의 행위라는 개념을 도출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행위미술은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서구의 퍼포먼스가 표방했던 비논리-비상업-비극장의 개념은 한국에서 상징성-설화성-원형성이라는 세 가지 지향성을 보여주면서 한국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룹단위의 집단 행위는 1990년부터 수원성이라는 절대장소와 인문환경으로 확산되는 자연과 자연으로 환원하는 인간의 소통을 다룬 컴아트 그룹이 있었다.
대형 프로젝트에서의 대형 행위로는 1990년 「남북명산 남남북녀」는 남북교류의 상징으로서 모래로 쌓은 설악산과 금강산-남북의 장벽을 상징하는 700마의 거대한 천을 찢고 관객과 함께 통일의 장을 이루자는 주제의 작품이다.
1991년 「금강에서의 국제 자연미술전」에서 유도화의 「탈출-벽속의 다른 벽들」은 500마의 흰천-100마의 빨간 천 등이 말해주듯 거대 프로젝트였다. 현대인의 익명성과 단절의 상징으로 설정된 벽과 그 벽을 허물고자 하는 번데기같은 행위자들의 절망을 점-선-면의 확장과 환원의 몸짓 후에 벗은 허물을 관객들과 거두는 행위이다. 유도화의 행위는 철학적-명상적 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시각적-미술적 문맥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조화를 보여준다.
1991년 「비무장지대 예술작업전-DMZ Art Project」에서 보여준 안봉규 기획에 따라 여대생들이 손발을 묶고서 「조국은 하나」라는 글씨를 입으로 쓰는 행위를 통해 서구행위의 틀 안에서 모방과 답습이 아니라 주제에 유연하게 대처할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징성은 1967년 한국 최초의 행위미술로 기록되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서부터 60년대의 현실고발적 상징행위를 거쳐 소극장 형태로 보여지는 행위미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1989년 나우갤러리의 「행위미술제」에서 상징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신영성의 행위는 행위자와 보조자를 동비중으로 설정하므로서 케이지가 말하는 초점의 확산Unfocussing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물통 속에 반복적으로 잠기던 행위자가 구멍난 모래자루를 지고 가면 포대 속의 보조 행위자가 「돈, 돈, 돈...」을 외치고, 다른 통 속의 보조행위자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등의 상징적 행위는 한국행위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설화성은 이건용의 행위에서 보여준 사설에서 극대화한다. 1989년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서울전」 및 1990년 도쿄 전에서 이치 이케다池田一의 시간차 발굴과 발견-방효성의 관객의 소지품을 석고로 굳히는 과정-김재권의 현장음의 전자음악화 및 현실 오브제의 미디어 오브제화 행위와 함께 이건용의 한국적 원형을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건용은 커다란 장독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족이야기-민간요법-한국문화의 뿌리 등을 음유시인처럼 사설화하므로써 오천년 농업국가의 아키타입과 신화를 배경으로 성숙되는 원형지향적인 미술의 한 분야를 정초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원형성은 한국적 원형을 세계화한다는 의미에서 백남준의 보이스 추모 퍼포먼스가 거론될만 하다. 1990년 7월 20일 현대화랑의 뒤뜰에서 백남준의 보이스Joseph Beuys 추모 퍼포먼스가 있었다.
백남준은 매장의 형식으로 껍질만 남은 「TV 수상기」와 「자빠진 피아노」라는 자신의 식별표지 위에 수의를 덮고 흙을 뿌리고, 초혼의 의식으로 보이스의 영정에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 바르고 쌀을 뿌리며, 갓 위에 마요네스와 케첩 및 쌀을 뿌리고 얼굴을 박는 행위, 두 개의 장죽에 불을 붙여 국악기의 하나인 편종처럼 놋향로를 매달고 대야에 혼 부르기 장단을 맞추다가 머리를 놋대야에 부딪치는 상징적 행위를 보여준다.
한국적인 매장과 초혼의 의식을 통해 한국적 원형과 한국의 정신이 세계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행위미술의 저력
오늘날 한국의 행위미술은 미술적, 혹은 회화적 문맥을 중심으로 많은 퍼포머와 이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은 1989년의 「청년작가전」 2007년의 「퍼포먼스 40년」 등 전시와 행사를 기획할 뿐 아니라 이상현의 「안드로메다에서 운명의 여신과의 만남」과 같은 행위 및 설치미술의 작품을 소장하는 등 호의적인 지원을 베풀고 있다.
이것이 주류라면, 비록 미술사의 취재 및 기록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비전공자나 미술외적인 동기와 목적을 가진 개인 혹은 단체들이 퍼포먼스라는 이름 아래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나아가 퍼포먼스라는 용어는 한국사회에서 ‘작은 깜짝 쇼’ 정도의 뜻으로 통할만큼 보편화되어 있다.
국내외에서 괄목할만한 발전과 아울러 세계미술과 착실히 교류하고 있다. 백남준은 한국인으로서 세계의 예술가로 명성을 떨쳤다. 이건용에 의하면 1986년 아르꼬스모의 「86 행위설치미술제」에서 신영성의 전기톱으로 가구 등의 껍질을 벗기는 격렬한 퍼포먼스는 백남준의 ‘바이 바이 키플링’을 통해 세계에 소개되었다.
1993년 카셀 도쿠멘타9Kassel Dokumneta9에서 육근병은 100일간의 전시를 위해 100일간 만들어지고 설치된 무대에서 「랑데부」라는 주제와 구호로 동양과 서양 나아가 한국과 독일의 만남을 의미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1990년 이불의 「수난유감,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낀 줄 아나?」에서 김포공항, 나리타공항, 도쿄시내에 이르는 광대역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외 만하임Manheim 국제퍼포먼스 페스티벌에서 보여준 홍오봉의 「알프스의 새2000」, 변영환의 유럽 순회 퍼포먼스 등의 국제적 활동이 보고되고 있다. 그 바탕에 한국적 감수성과 자생성에 대한 신념이 있다.
2000년대에는 국가차원의 문화행사 지원이 확장되고, 로또Lotto 기금 및 문화관광부 등의 문화지원에 의한 활성화되고 있다.
다원적 실험적 방향에 따라 연극적-상업적-논리적 행위를 추구하는 코파스KoPAS, 예술성-실험성-전위적인 공연 실험 등을 내세운 파몽Performance Art Dream PA 夢」 등의 단체에 의한 활발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이상현의 「소금사막... 그리고 전자유목민Telematic Nomad의 역사기2000」, 신용구의 인간과 자연의 조화 및 자아의 근원적 회귀를 표현한 「바람을 안고 가다 Go Against the Wind1989」, 미디어와 IT를 활용한 성백의 인터넷 생중계 「1st Internet Live Performance-Remember the Butterfly2000」, 성적인 주제를 다루는 김은미의 「Eve의 반란2002」, 이혁발의 「영혼의 자유로움 1996」 등이 있었다.
성능경의 1992년 「망친 영화가 아름답다」 등에서 보여주는 비논리의 논리화, 소녕철의 「실재-매우 황홀한 꽃1995」에서 볼 수 있는 동양적 혹은 선적인 창조적 실체추구과정이 있었다.
이벤트의 문맥에서 섬세한 감성을 테마화하는 박이창식의 「들숨과 날숨 Inhalation X=Inhalation =Exhalation의 복합어2004」가 기록된다.
세계 퍼포먼스의 맥을 자기화 혹은 한국화한 한젬마의 「MC 퍼포먼스-22005」와 박건의 「옷1982」과 같은 일상행위 그리고 반연극적인 퍼포먼스를 주장했던 김재권의 「퍼포먼스는 연극의 도치현상이다1989」 등이 보여주는 다양한 분야의 퍼포먼스를 통해 한국행위미술의 다양성을 신장하고 있다.
세계행위미술과의 배려로는 다국적 예술가연대모임인 콩그레Congress 2004년의 제10회 국제퍼포먼스아트 서울 콩그레 등이 보고되고 있다.
교육적인 배려도 있다. 문정규는 1999년 이래 원광대학교 환경조각과에 「퍼포먼스」과목을 신설하여 강의를 하고 있으며, 홍오봉은 1999년 「홍오봉 선생님과 함께 하는 퍼포먼스」를 ODPAF 청소년 퍼포먼스 여름학교에서 강의한다.
한국의 해프닝은 카프로의 해프닝에서 10년-이벤트는 20년-퍼포먼스는 30년이 걸려 이 땅에 자리 잡았다. 그 시간은 비논리-비상업-비연극의 서구적 행위미술의 문맥을 수용하되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천년 농경사회의 감수성은 신명과 끼라는 이름으로 행위미술에 스며들었다.
신명은 말릴 수 없는 한국인의 끼를 의미한다. 마당극이나 판소리처럼 보는 사람이 저절로 어깨춤을 출 수 있는 호흡이다. 오천년 농경사회에서 형성된 이 땅의 감수성이기도 하다.
한국 행위미술의 무대는 기본적으로 소극장의 형태를 띈다. 그리고 그 소극장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한 마당과도 소통될 수 있다. 마당은 한국인에게 다목적 공간이었다. 울타리와 생활소품들이 에워싼 마당에서 무당은 굿판을 벌였고, 마당극이 펼쳐졌고, 판소리 한마당이 구성지게 벌어졌다. 한국의 행위미술가들에게 행위미술의 무대는 마당이었고 편한 판이었다.
그래서 한국인은 행위미술의 자생성을 주장한다. 문화 문물과 정보가 공유되는 글로벌 시대에 한국인은 행위예술이라는 매트릭스Matrix를 서구에서 빌어 왔다. 그러면서 행위미술은 한국에서 육화하고 자기화하면서 자생적인 문맥을 형성해나간다. 그리고 한국인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감수성의 이름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나가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200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