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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093-9140 2011.0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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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울연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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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Theater In Seoul 제10호 2011.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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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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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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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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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의 글 | 오세곤
1부 Review
- 고등어 | 이주영 - 도시야경 | 김태희 - 못생긴 남자 | 김민승 - 산불 | 강양은 - 유실물 보관소와 바람개비 | 장청옥 - 호랑이를 부탁해 | 예서희
2부 재수록
- 유년의 뜰 | 박연숙 - 연변엄마 | 박정기 - 우르따인 | 박정기 - 저승 | 박정기
정책기록실
-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10)
편집 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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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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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정말 길고 지루한 장마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연극을 향한 열정은 식을 줄 모릅니다. 특히 여름철 곳곳에서는 서서히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어갑니다. 아마 다음 달이면 그 잔치의 흥이 절정에 이르겠죠. 혹자들은 축제가 많다고도 하고 다 비슷하여 특성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잔치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빈도와 어느 정도의 규모와 어느 정도의 밀도일 때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연극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잔치입니다. 일상에 찌든 때를 벗겨버리는, 그래서 새로 시작할 힘을 얻는, 즉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연극이라는 작은 잔치일 것입니다. 그 작은 잔치를 모아 놓은 좀 더 큰 잔치가 바로 연극제이고 말입니다. 그 큰 잔치는 연극인에게나 일반 시민에게나 모두 대단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너무 많다거나 특성이 없다거나 하는 정도의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는 한층 확실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연극계에서는 막연하고 포괄적인 정도에 그치는 것을 마치 미덕인양 여기는지 늘 그 정도의 생산성 없는 말들만 오고갑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행해지는 평가마저도 현실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 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지표들을 들이대기는 하지만, 그 복잡함이 정확함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연극에 대해서고 연극제에 대해서고 가차 없는 발언들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서울연극은 바로 그 가차 없는 발언을 위한 장으로서 그 존재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좀 더 생산적인,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현실에 약이 되는 발언이 일상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연극의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 모든 악조건을 감내하며 예술혼을 불사르는 우리 연극 동지들의 노력이 저 하늘의 태양처럼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7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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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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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울연극' 제 9-1호의 <디 오써 The Author> 성유경필자님의 글 본문내용 원고중에 오류가 있어 바로잡습니다.
"연극은 작품을 넘어서서(ber) 위치시키는(Setzung) 것으로서의 번역(bersetzung)으로 해석된다."의 문구에 독어글자 모양이 빠져 발송되었습니다. 웹상의 인식 문제지만 찾아 내서 수정하지 못한점 사과말씀드립니다.
"연극은 작품을 넘어서서(ber) 위치시키는(Setzung) 것으로서의 번역(bersetzung)으로 해석된다."는 왼쪽의 글과 같이 수정됩니다. 성유경 필자님과 오늘의 서울연극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2011.7.18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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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함을 인정한다는 것, <고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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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고려대 박사과정)
작/연출 김유진 극단 동숭무대 관람일시 2011년 6월 11일 4시(토) 관람장소 동숭무대 소극장
<고등어>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가족 구성들의 국적과 핏줄, 그리고 문화는 각기 다르다. 아니 ‘다르다’라는 말보다 ‘다양하다’라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르겠다. 이들은 한국인, 몽골인, 흑인 혼혈, 베트남인이지만 한 형제이며 가족이다. <고등어>는 100페스티벌2011 참가작이다. 이 페스티벌은 올해로 7회째를 맞이했으며, 금년 주제는 ‘다문화, 소통 그리고 열린사회’이다. <고등어>는 올해의 주제 가운데에서 ‘다문화 가정’을 키워드로 삼고 있다. 북한에서 탈북하다 아들과 딸을 잃고 혼자가 된 할머니는 고등어 행상을 하며 오갈 데 없는 아이들-국적과 핏줄이 같지 않은 아이들-을 데려다 기른다. 극은 이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3년 째 되는 제삿날부터 시작한다. 무대는 할머니와 형제들이 살던 한옥집이다. 무대 한가운데 제사상이 놓여있고, 무대 상수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통로가, 하수에는 현관문이 있다. 무대는 깔끔하다. 무대공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 배우들의 등퇴장이 잦은 극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상수와 하수에 등퇴장 공간을 배치했기 때문에 산만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극의 내용은 어떠한가. 이 극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고등어>는 이들의 이야기를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다양한 국적과 핏줄의 형제들은 상처투성이다. 이 상처로 인해 때로 이들은 서로를 멀리하기도 한다. 할머니의 제삿날, 흩어진 이들은 한 공간에 모였다. 집안의 문제아인 흑인 혼혈인 둘째 진우도, 군대에 간 뒤 2년 동안 한 번도 가족을 찾아오지 않은 베트남인 막내 민혁이도 집으로 돌아왔다. 상처로 인해 흩어진 이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는 것은 어쩌면 이들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음을 극 초반부에 암시해 주는 것은 아닐까. 이 치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상처 원인부터 알아야 하겠다. 한 가지 아이러니 한 점은 한 가족의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하고 해체시킨 상처의 결정적인 원인이 가족 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극에서는 가족 구성원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만 이들의 상처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 상처의 원인은 바깥에 있다. 흑인 혼혈인 둘째 진우는 집안의 문제아로 모든 형제한테 으르렁 거린다. 그는 항상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 또한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매사가 불평불만이다. 큰형인 성태는 그를 혼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해 보지만 늘 그는 삐딱하게 반응한다. 막내 민혁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족을 벗어나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며, 윤지는 자신의 상처로 인해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상실해 버렸다. 이들의 상처는 이들을 같지 않고 다르다고 보는 사회의 차별적 시선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진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프리카 사람도 아니게 보는 그 시선에 상처를 받았다. 그는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받아 사회부적응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검은 피부 색깔로 인해 사회부적응자가 되기 전부터 사회부적응자가 되어 있었다. 즉 그의 사회부적응은 강제적이다. 민혁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그의 자원입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타인종으로 차별 받은 것에 대한 저항적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의무는 자원입대라는 점에서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행한 의무는 의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진우는 민혁에게 “군대 갔다 오면 진짜 한국 사람 대접 해줄 것 같으”냐며 비아냥거린다. 민혁은 진우의 비아냥거림에 “나 원래 한국 사람이야.”라고 맞받아친다. 그는 의무 앞에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원래’ 한국 사람은 무엇일까. 원래라는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의 주위에 차별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의무는 다했지만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윤지 또한 인신매매를 당하고도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 그녀의 상처는 치료 자체부터 차단당한다. 그녀의 상처는 치료되지 못한 상태로 은폐된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고아인 성태와 건영도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은 모두 한국인이고 자신의 직장에서 특별한 차별 없이 지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나름의 차별을 받고 있지만(건영의 경우에는 차별 받는 모습이 특별히 나타나지 않지만) 나머지 셋과 비교해 그 차별의 정도는 덜하다.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긍정하기에도,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도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고등어>는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과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할머니가 키운 다섯 명의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태와 윤지는 부부가 되었다. 할머니는 이들에게 유서와 많은 돈을 남겼다. 극은 후반부에 가서 다문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지울 수 있는 방법 내지 제안을 슬며시 던진다. 이들 형제는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한 할머니 유언의 뜻을 알고 있다. 할머니는 자신이 남긴 돈을 불쌍한 애들에게 전부 쓰기를 원했다. 애가 없는 성태와 윤지는 진우와 같은 혼혈아를 입양했다. 이 같은 행동이 차별을 지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다소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맥이 빠진다. 행복한 동화 속 모습이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극이 말하는 차별지우기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가족을 형성하는 논리에 이미 다양한 국적과 문화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지울 수 있는 나름의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다. 이들은 혈연관계로서의 가족은 아니다. 이 같은 자명한 사실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개념은 혈연관계 너머에 있다. 이들은 서로에게 열려 있으며, 같고 다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할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한 가족인 것이다. 같고 다름이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다면, 누군가와 구분하기를 멈춘다면 우리는 주변의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아름다운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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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떨림을 지키기 위해서 - <도시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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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고려대 석사과정)
연출: 임지혜 작 : 임지혜 극단: 명작옥수수밭 공연기간: 2011.5.13~6.19 공연장소: 우석레퍼토리극장 관람일시: 2011.6.12
사랑.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던가. 그 사랑이 얼마나 많이 웃게 하는가. 한 사람을 알게 되고, 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아주 작은 인연이 계기가 되어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축복받아야 할 고마운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하는 두 커플이 있다. 게이 커플인 민준과 규현, 레즈 커플인 진경과 성은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의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전혀 모른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저 결혼 못하는 노처녀, 노총각 자식들이며 아직 독립하지 못해 도움이 필요한 철없는 대학원생, 연기 지망생일 뿐이다. 문제는 그래서 시작된다. 당연히 이해 받지 못할 사랑이기에, 그들은 부모님께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고 마음이 급한 민준의 부모님은 아들의 가게와 집을 무기 삼아 아들에게 대전으로 내려와 선을 볼 것을 강요한다. 진경 역시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 서른 네 번째 선을 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망 속에 편입되지 않은 채 그들만의 생활을 유지하던 이들의 공동체가, 비로소 위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적인 부담과 부모님의 기대에 대한 부담 때문에 결국 규현과 성은은 민준과 진경에게 가짜 결혼 생활을 하도록 설득한다. TV 예능에서 가상결혼생활을 하듯이, 그렇게 부모님에게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들에게는 집도 생기고 그들의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던 민준과 진경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결혼식을 올리고야 만다. 이들의 결혼으로 인해 공동체는 기존에 편입되어 있지 않던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혼을 하고 그들의 공동체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민준과 진경은 보여주기 위한 행사참여를 시작한다. 돌잔치, 칠순잔치를 비롯한 부부 동반 모임까지 주말이면 밀려드는 스케줄 때문에 쉴 시간이 없다. 그러는 사이 점점 규현과 성은은 유령처럼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일들이 점점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들의 사랑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절망하고 궁지에 몰릴수록,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물들을 이렇게까지 내몬 것은 ‘다름’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와 우리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은 너무 컸고, 그들의 사랑마저 흔들리게 하는 위험한 도박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의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존 관계망 안에 속한 이들의 기준을 어느 정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준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관계망 속으로 무사히 들어가기 위해 희생을 해야 할지,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인물들은 결국 희생을 선택했고, 그 선택의 결과로 자기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기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님의 강요에 시달리고,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 이것은 엄연한 폭력이다.
그리고 이들의 공동체에 수시로 놀러오는, 또 하나의 구성원은 '니나'라고 하는 여장남자 게이이다. 필리핀에서 가수를 꿈꾸며 한국으로 온 니나는 약혼녀의 한국 방문에 노심초사하며 그녀를 쫓아낼 궁리를 하고 있다. 사실 이런 여장게이의 캐릭터는 게이가 등장하는 연극에서 어느 정도 유형화된 인물 구성으로 보인다. 능청스럽게 여자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동작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니나의 첫 등장은 조금 식상하고 뻔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니나는 약혼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헌신적인 그녀에게 감동받아 그녀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녀에게 모든 걸 도둑맞는 니나의 모습은, 결국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공동체의 모습과 다름없다. 한없이 너그러워서 그녀를 받아들일 것 같았던 약혼녀도, 결국은 니나를 거부하고 그녀와의 관계를 차단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물들은 밤이 되면 산책을 나온다. 그들이 있는 곳 저편에는 거대한 아파트가 있지만 그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따금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만 저 무리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날 때가 있다. 결국, 인간은 모두 똑같다. 모든 관계 망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면, 남는 건 외로운 자신뿐이다. 그런데도 타인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기존의 관계망을 무기 삼는 건, 사랑이라는 귀한 인연 앞에서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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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 논의의 흥미로운 귀환, <못생긴 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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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승(연극평론가)
제작 : 공연제작센터 (브레히트±하이너 뮐러 기획전) 작 : 마리우스 폰 마이엔부르크 연출 : 윤광진 공연기간 : 2011. 6. 15 ~ 7. 10 공연장소 : 게릴라 극장 관람일시 : 2011. 6. 26
주체성 논의의 귀환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 그리고 나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 사실 자아 정체성을 문제 삼는 것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많은 작품의 주제들이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 역시 새로운 논의거리는 아니다. 독일의 동시대적 작가 마리우스 폰 마리엔부르크의 <못생긴 남자>는 이른바 근대철학적인 주제로서 서구 사회가 주목해온 주체성의 개념을 문제 삼는 데서 출발한다. 즉 우리가 ‘나’로서 인식하고 있는 주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나를 나로서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루고자 하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코기토적 인식론에 대하여 기존의 방식과 ‘어떻게’ 차별화된 방식으로 접근하느냐가 이 작품의 관건이 될 것이다. 주인공 레테는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외모가 못생겼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형수술을 통해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그의 삶 자체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완벽하게 잘생긴 외모를 가지게 된 그는 거울을 보며 “난 이게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게 나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잘생긴 외모로 변한 레테를 보며 흥분하여 침대로 끌어들이려는 아내를 향해서도 그는 “질투가 나네. 그게 정말 나야? 나인 게 확실해?”라며 자신의 외모와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바뀐 그의 외모에 점차 적응해 나감에 따라 외모에 의해 바뀐 그의 삶의 여건과 상황들에도 적응해 나간다. 외면의 변화는 내면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욕망의 아이콘이 되어감에 따라 너도 나도 그의 얼굴과 똑같이 성형수술을 하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이 지닌 특수성, 즉 잘생긴 얼굴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간다. 레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부하 직원 칼만도, 레테의 거래처 회사 회장의 아들 칼만도 모두 그의 얼굴과 똑같이 수술한다. 그가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로 받았던 수많은 혜택들이 사라졌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 때문에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와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할 생각도 없다. 그의 부하 직원 칼만과 바람을 피우게 된 레테의 아내는 “칼만이 당신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와 자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정작 원하는 것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레테는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자체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 주체성 논의와 만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외면과 내면의 이분법을 통해 나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이 작품에서는 얼굴로 대표되는 외면적 요소가 ‘나’의 본질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레테는 성형수술 후에 바뀐 그의 얼굴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그 얼굴 때문에 그의 삶 및 타인과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외면적 조건들은 내면의 조건들을 규정짓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나로 느끼게 하는, 나의 유일무이성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테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들이 대량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하면서 스스로가 원본임을 입증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가 그 사실을 강조하려 할수록 그 자신도 사본 중의 하나임을 역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체성 논의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지점은 존재의 단수(單數)성 문제, 즉 내가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의 문제이다. <못생긴 남자>에서 개인 단위의 개성이라는 개념은 이미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겉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같은 모습을 지닌 개체들은 자신의 모습을 타자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혼란에 빠지게 된다. 혼란에 빠진 레테는 건물 위에 올라서고, 그의 분열된 시선은 자신의 외모 혹은 자신의 내면과 맞선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매혹당한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어한다. 레테의 나르키소스적 분열은, 레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가지게 된 칼만과의 만남으로 더욱 가시화된다.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스스로를, 혹은 마주 보고 있는 상대를 ‘나’라고 인식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끊임없이 잃어버린 나를 찾아헤매던 주체는 결국 상대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역할의 오버랩과 장면의 오버랩
이 작품이 주체성 논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와 관련하여 형식적으로 찾아낸 돌파구 중의 하나는 오버랩의 구조에 있다. 그리고 이 구조적 특징은 크게 장면의 오버랩과 역할의 오버랩에 의해 드러난다. 레테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각각 두 역할씩 담당하고 있다. 레테의 아내는 동시에 거래 회사의 회장이기도 하고, 부하 직원 칼만은 회장의 아들 칼만이기도 하며, 레테의 상사는 동시에 레테의 성형수술을 담당한 의사이기도 하다. 레테 역시 수술 이전의 그와 수술 이후의 그의 모습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역할이다. 아울러 <못생긴 남자>에서는 역할의 오버랩뿐만 아니라 장면의 오버랩 역시 극이 가진 주제 의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하나의 장면은 배우들의 등퇴장, 혹은 암전 등에 의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보다는 장면 오버랩, 혹은 장면 걸치기의 기법으로 넘어간다. 대사 혹은 행동을 통해 전 장면의 마지막과 다음 장면의 시작을 오버랩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세상이 달리 보이지 않나요?”라는 아내의 말에 대해 레테가 “아니, 피부가 당깁니다.”라고 의사에게 대답함으로써 두 장면이 교묘하게 연결된다든지, 회장의 아들 칼만이 고통스럽게 “아파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곧 부하 직원 칼만이 아내와 나누는 대화로 편입된다. 결국 이러한 장면의 오버랩은 각각의 배우들이 역할의 오버랩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낼 수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두 가지 오버랩은 상호보완적이다. 역할 오버랩은 장면 오버랩에 의해, 그리고 장면 오버랩은 역할 오버랩에 의해 기능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어떻게’의 문제로 돌아가 이야기할 때, 이 오버랩의 구조는 단순히 새로운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공연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결코 무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 안에서 장면들은 이행보다는 순환의 느낌으로 돌고 돌면서 인물들의 관계도 중첩과 혼란의 연속을 보여준다. 기존의 주체성 담론들이 너와 나, 나와 세상 사이의 차별화의 공식을 통해 명료성을 획득하려 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너와 나의 경계를 흐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모든 것들을 오히려 허공으로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체성 논의의 새로운 지점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두 마리 토끼?
사실, 주체성 논의가 성형수술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맞물리는 것은 너무나 직설적이고 뻔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설정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들어 버린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에 레테와 레테로 수술한 칼만이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장면은 타인이 되어 버린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린 타인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고정적인 주체성 개념에 함몰되어 있는 서구 정신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을 그와 같은 가능성의 탐색, 혹은 주체성 논의의 새로운 국면으로만 보기에는 몇 가지 제약이 남아 있다. 우선, 내용 전개상의 비약이 심하다. 물론 이 마지막 장면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아에 대한 조롱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내용상의 비약이라는 약점은 해결될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한 바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전개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러한 한계의 이면에는 이 작품이 지닌 뛰어난 희극성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못생긴 남자>의 희극성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활용하는 희극적 요소들이 지닌 문제는 성형수술을 둘러싼 상황 및 외면 내면의 이분법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러한 방식의 희극성은 비단 연극뿐만이 아니라 성형을 소재로 삼은 다양한 작품들에서 이미 비슷한 방식들로 시도된 바가 있기 때문에 작품의 전체 방향 자체를 성형 사회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으로만 오해하게 만들 여지도 있다. 아울러 주체성 논의를 바깥의 시선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안의 논리에서만 다루게 될 수도 있다. 즉, 제대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을 감추게 되는 희극성이 아닌 다른 방식의 희극성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못생긴 남자>에서 희극성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유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의 희극성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더욱 심도 깊은 고민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이 주체성에 대한 고민 자체에 함몰되어 있는 데서 나아가, 주체성 탐구의 나르시스적 역사에 대한 문제 제기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면, 작가가 움켜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슬쩍 내려놓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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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영화처럼 무대 위해 펼쳐진 연극 <산불> 사실주의의 진면목을 보여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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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은(연기전공교수)
연출: 임영웅 작 : 차범석 공연기간: 2011.6.5-6.26 공연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람일시: 2011.6.15 8시
극작가 차범석(1924-2006)의 5주기 기념 특별공연으로 연극 <산불>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6월5일부터 26일까지 국립극장, 신시컴퍼니, SBS 주최, 극단 ‘산울림’을 창단한 임영웅(1934-) 연출과 강부자, 이인철, 조민기, 장영남 등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들과 함께 힘차게 올라갔다.
1962년에 씌어진 <산불>은 그해 국립극단에 의해 초연되었고, 임영웅 연출로는 1970년 명동국립극장에서, 2005년, 2007년 그리고 2011년 국립극장에서 4차례 공연되었다. 한국 현대희곡의 하나인 <산불>은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국립극단과 수많은 극단들 그리고 대학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재창조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극작가 유치진(1905-1974)을 시작으로, 1930년대 한국 근대극의 바람이 불면서 사실주의 희곡이 문단에 나왔고, 차범석은 리얼리즘을 이어간 작가로서 작품들을 통해 당시 사회적 현실의 시대적 거울의 역할을 감당했다. 더불어서 그는 각 상황마다 드러나는 인간 존재와 본성을 진솔하게 그려내므로, 현재까지도 사랑받으며 한국 현대극의 전환점을 이끈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산불>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1951년 소백산맥 속에 묻힌 작은 두메산골 이야기이다. 그 산골 마을의 노인들, 아낙네들, 아이들만의 존재는 전쟁 중 징집된 아들과 남편의 사망이나 실종을 암시, 가족의 그리움과 아픔을 말한다. 빨치산에 숨어 지내는 공비들은 주민들의 한 끼 해결도 힘든 상황에서 협박과 위협으로 주민의 식량을 약탈해가고, 야경의 의무감을 부여하는 등은 그 당시 소시민들의 심적, 육체적 비극을 잘 나타낸다. 2대째 과부집안이 된 최씨네와 양씨네의 갈등이 주를 이루는데, 인민군의 등장에 공출을 피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비방하는 모습에서 한민족의 인덕애 대신 생존 위협의 공포 안에서 일차적 인간 생존 본능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그려낸다. 전직 교사였던 규복은 친구를 따라 빨치산으로 숨은 공비가 되었다가, 남북 냉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후회로 도망쳐 내려오나 자수는 못하고, 점례의 도움을 받아 숨어 지내게 된다. 사랑에 목말랐던 그들은 밀회를 나누게 되고, 2년 동안의 과부병에 남자를 그리워하는 사월은 그것을 알고 폭로하는 것 대신 규복을 공유하자고 협박하는데, 이는 동물적 성적 욕망의 인간 본성을 작품 속에 진솔하게 표현한다. 공비 소탕 위해 양씨의 소유인 배 밭을 태워야 한다는 군인들의 말에 양씨는 조상으로부터 복으로 지켜 내려오던 땅을 지키지 못한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산산히 조각나고 버려지고 포기되어져야 하는 삶을 통해,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이 말해진다. 한편 대나무 숲에 숨어있던 규복이 빨치산 수복 작전으로 사살이 되나 사월이 안에 숨쉬는 새 생명은, 죽음과 삶의 공존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강한 생존력을 드러낸다.
임영웅은 '연출자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이나 이데올로기가 싸움에 인간이 무참히 무너져 내리는 상황 속에서 본능과 욕망에 몸부림치는 인간군상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산불>은 6.25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우리 역사의 산 증언이기도하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지 50여년, 아직도 이 나라에는 민족상쟁의 상흔이 남아 있지만, 이즈음 젊은이들에게는 급변하는 세계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비극은 이미 역사의 피안으로 사라진 과거인양 무감각해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번 무대가 보는 우리 모두에게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 역사적 현실에 대한 뜻 깊은 재발견의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작업을 했다.”
해오름극장에 우리나라 1950년대 두메산골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나 풍경화처럼 무대위에 펼쳐진다. 무성한 대나무들로 이뤄진 대숲, 이와 더불어 회색빛의 자연의 돌계단, 푸르른 나무들, 그 숲 속에 황토빛 초가집, 벽에 걸린 켜와 누런 지푸라기, 다양한 파스텔 빛깔의 아낙네의 낡은 한복들은 섬세함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며 시대적 상황과 빈곤 속에서도 시골의 정취를 잘 드러낸다. 돌계단은 초점의 입체화를 주고 있고, 그 주변은 계절의 변화를 드러내는데 쓰인다. 돌계단을 따라 갈대와 잡초들이, 다음엔 철쭉꽃 같은 분홍꽃들이 장식되고 있다. 겨울의 계절 변화에 나리는 눈발과 눈에 반사되는 듯한 볕,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 초가집, 스산한 푸르른 빛의 겨울 늦은 밤, 보리밭의 은신처, 샤막으로 만들어진 초가집 창호지 문 속의 방안이 선명하게 보이고 아낙네들의 비밀 얘기를 엿듣는 듯한 느낌 등 무대 위 보이는 모습들은 생동감과 정겨움을 준다.
음악은 라이브로 진행이 되는데, 장면의 전환, 시간과 계절의 변화 또는 극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피아노 반주와 모음/의성어로 이뤄진 노래를 부르는 여성 보컬로 신선하게 표현된다. 까마귀 소리, 스산한 겨울 바람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며 흔들리는 소리, 전투기 소리, 총소리 등의 음향 효과는 관객의 오감을 깨우기 충분하게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양씨역을 한 강부자 분을 비롯해 모든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표현되는 화술과 에너지 있는 호흡, 살아있는 무대위의 동작과 심리적 제스처, 그들에게 녹아져 있는 인물화 등으로 서로서로 잘 어우러져 리얼리즘 극으로 조화를 이끌어낸다. 강부자 분의 맛깔스럽고 구수한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극장의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과부들의 섬세한 연기는 여성의 심리를 잘 드러내며 매력을 발산한다. 양씨, 점례, 공비 등 배우들의 순간적 긴박함을 주는 호흡은 관객의 호흡을 붙잡으며 극의 긴장을 살려내고, 모든 배우들의 오감은 극의 시공간에서 생동감 있게 반응한다. 할아버지와 사월이, 귀덕이, 끝순이 등의 넘치는 에너지와 순간순간의 코믹적 연기는 웃음의 코드를 잘 살려낸다. 노망난 노인 역을 한 이인철 분이 대사를 뱉을 때마다 관객들은 웃음을 짓는다. 사월이 역의 장영남 분이 과부로서 남자에 대한 욕망을 뼈 속에서부터 나오는 듯한 말투로 진심 어리게 뱉을 때 코믹은 한층 더해지고, 그녀의 절실함은 더 강하게 와닿는다. 보리밭에서 점례의 서은경 분와 규복의 조민기 분이 서로를 의지하며 피운 사랑의 장면은 한편의 영화와 같다. 배우들간에 확립된 관계성과 에너지 있는 소리들 그리고 편하고 자연스럽게 주고 받는 대사들은 사실주의 연기로 잘 표현된다.
이 연극의 절정은 산불의 모습일 것이다. 불길이 하얀색, 노란색, 주황과 빨강의 붉은 빛, 선홍빛으로 함께 섞이어 변해가고, 산불이 강해지면서 타닥타닥 숲의 나무들이 타는 소리가 커지고, 연기가 자욱해지며 검은 그을음까지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무대 왼쪽의 배 밭을 태울 때 타는 연기와 불꽃으로 대나무들이 흔들림 등은 사실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무대, 의상, 조명, 음향, 분장, 소품 등 모든 스텝들은 리얼리즘의 극을 한층 더 살려냈다.
극이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즉 타들어 가는 배 밭과 죽은 규복의 시체 앞에서, 노망난 할아버지는 고음의 맑고 순수한 목소리로 그의 마지막 대사를 뱉는다: “저녁 멀었냐?” 죽음과 손실, 피폐되어져 가는 삶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한민족의 질기고 강한 생존력과 회생은 관객의 맘속에 눈물과 웃음으로 되새겨진다. 또한 사월이는 자살 대신 규복의 아이를 낳는 선택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이어져가는 인생의 경주를, 새 삶의 희망을 생각하게 한다. <산불>은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비극, 가난이라는 우리의 과거, 역사적 현실을 현장감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주면서,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꺼지지 않는 소망이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 공연 <산불>은 새로움이나 기이함, 특별하고 대단한 뭔가가 있는 연극이 아니라, 관객들도 모르게 극 속에 빠져서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관객으로서 그리고 그 일루전의 과거 두메산골의 한 인물, 한 이웃으로서 우리네 역사의 한 장이었을 그 현실 속에 몸을 담그고 현대적 시점에서의 시대적 인식과 인간의 본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느끼고, 드러내고 극장을 빠져나오게 하는 연극이라고 필자는 말해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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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를 만나다 -<유실물 보관소와 바람개비>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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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청옥(nero4221@hanmail.net)
작 :유실물 보관소와 바람개비 연출 : 이성구 예술감독 : 송형종 작가 : 이여진 출연 : 김용진, 이승현, 김정현, 홍상용, 박혜영, 권오준, 정청림 장소 : 동숭무대소극장 공연기간 : 2011 6월 21(화)~6월 26일(일) 관람일시 : 2011년 6월 25일 7시
1. 그녀의 증상이 말을 걸다
이지(박혜영 분)는 암기왕에 도전하기 위해 머릿속을 지식으로 채우고 또 채운다. 머릿속을 채우는 내용들은 자신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은 암기왕이 목표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쏟아 부음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잊거나 혹은 밀어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애써 눌러왔던 고통스러운 과거는 초록색 지도책이 찢겨 바람에 휘날리는 반복되는 꿈과 언니의 ‘갈기갈기’라는 단어로 자극받아 호기심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억눌린 것은 다른 어딘가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이므로,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은 그녀에게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그녀의 강박증적인 암기 노력과 감기 탓이 되고 마는 그녀의 예민함은 그녀의 증상이다. 열심히 머릿속을 채우고 스카프를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불쑥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녀의 몸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애써 외면했던 그녀의 일부가, 잊고 싶던 그녀의 과거가 피할 새 없이 그녀를 엄습한다. 몸은 증상을 호소하며 반복되는 꿈은 무의식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꿈은 의식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지는 벚꽃 휘날리듯 갈기갈기 찢겨나간 지도책 꿈을 꾸고 그 책을 헌책방에 갖다 줬다는 언니의 말에 통증을 느낀다. 헌책방에 연락을 해보지만 초록색 지도책은 이미 외국인이 사갔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가 유실물 보관소에 가방을 놓고 왔다며 전화번호 검색을 부탁했다는 말에 무작정 외국인을 찾아 나선다.
2. 유실물 보관소에서 출발하다
하필 지하철 유실물 보관소다. 지하철은 이지를 극도로 불안하게 하는 곳이다. 유실물 보관소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분실한 것들로 가득하며 찾아가는 물건은 드물다. 망각의 강에 던져진 이지의 견딜 수 없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폐기처분된 물건들이기가 쉽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북소리와 겹쳐지며 과거의 기억을 끌어낸다. 이곳에서 지하철 선로에서 투신자살한 남편 우제(홍상용 분)를 꿈속에서 보던 모습으로 조우한다. 남편은 친구 택수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이 그리던 지도책의 행방을 묻는다. 이십대에 배회하던 골목길을 회상하며 친구들의 이름을 부른다. 대답이 없는 그 우제의 부름은 사실 자신을 향한 것이며 골목길 대장정 프로젝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채우려는 의도이며 조금은 행복해지기 위한 제스처다. 우제는 ‘그때의 넌 아련하게 볕이 드는 골목길 같았어’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지도책을 사갔다는 재키(권오준 분)는, 백팩의 소재여부와 보관기간만 묻고 찾아오지 않는다. 이지는 재키의 가방에서 초록색 지도책 대신, 메모장과 바람개비를 발견한다. 재키는 불법 노동자 단속에 대비해 지키고 싶은 소중한 물건을 맡긴다. 자신의 과거를 일기와 시놉시스 형식으로 적어놓은 메모장과 바람개비다. 이지가 절실하게 잊고자했던 것을 결국 찾아 나서게 된 그곳에 재키는 잃고 싶지 않은 보물을 맡긴 것이다. 지도책과 메모, 바람개비, 골목길을 누비는 여정은 환상과 현실을,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놓음으로써 시간적 순서와 논리에서 벗어나게 하며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무의식으로의 탐구로 이끈다.
3. 타인을 따라가다 ‘나’를 만나다
재키의 메모를 적힌 대로 재키가 거처했던 공간을 찾아 나선다. 초록색 지도책을 찾기 위한 여정은 이지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화해해가는 과정이자 시나리오인지 일기인지 모를 재키의 존재에 다가다는 과정이기도 하다. 재키가 살던 첫 번째 옥탑방과 두 번째 거처인 반지층을 거쳐 시멘트 공장의 컨테이너까지 재키를 추적하면서, 이지는 결국 우제가 쓰던 지도책에서 묘사하던 골목길 묘사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재키에게도 기록은 결국 조금이나마 행복해지기 위한, 혹은 현실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재키의 메모에 나오는 시놉시스는 환상적이고 상징적이다. 모순적 요소들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등장인물인 소년과 소녀는 모래사막에서 국경을 찾아 헤맨다. 소년은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을 위해 갖다놓은 생수병에 독을 타는 사람들이 있다고 의심하고, 사막에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한다. 소년 자신이 만들어준 바람개비를 몰래 가지고 다니는 소녀에게 그 옛 애인은 죽었다고 매정하게 선언하기까지 한다. 그는 국경을 넘으면 행복이 있다고 믿고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인다. 소녀는 바람개비를 소중히 간직하고 초록색 책 주변에 나타나는 나비를 본다. 지도책에서 발견한 좋은 장소에 바람개비 숲을 만들고 싶다는 소녀를 향해 소년은 바람개비가 정신을 빼놓고 미치게 한다며 바람개비의 추억을 부정하고 바람개비를 밟아버린다. 소년의 과대망상에 화를 내는 소녀는 정말로 독이 든 물에 희생당한다. 소년은 소녀의 몸을 바람개비로 덮는다. 소녀가 죽고 나서야 소년은 거센 바람을 느끼고 그 바람에 미소를 짓는다. 그때 모래사막은 도심으로 바뀌게 된다. 재키가 적어놓은 창작물보다 조금 더 불편한 현실이 있다. 재키는 영화감독도 아니고 한 쪽 팔이 불편한 불법노동자이다. 이지가 찾아간 시멘트 공장의 컨테이너의 뜯겨진 방범창은 그가 단속을 피해 도망간 흔적이다. 재키와 사업주의 대화는 불법 이민자들이 겪어야 할 불편한 현실들을 조명한다. 죽어나가는 직원들보다는 올라가는 재해보험료와 사업주의 손해가 더 우선이다. 그런데도 안전장치를 달 수 없는 게 사업주의 현실이고 실정이라며 생존이 현실인 외국인 노동자에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인의식과 책임감이다. 위험한 환경에서 불안하게 일하면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재키가 자신을 시멘트알갱이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과대망상은 불안과 부당함 속에서 강요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재키의 작품에서 소년은 소녀의 죽음을 통해 과대망상에서 현실로 발을 옮겨놓는다. 중요한 건, 소년이기도 한 재키가 분노와 불안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종이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사실이다. 우제가 불안하고 우울한 20대를 지도책을 완성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재키는 쓰는 행위를 통해 동료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고백이든 일기이든 새로운 창작품이든 그의 글이 갖는 중요성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기록은 이지의 손을 통해 재키의 삶, 불법노동자의 삶에 대한 이해의 창구를 열어주었고 이지 역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자기 자신을 찾게 만든다. 이지와 재키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스럽게 저항했다. ‘몰라서 묻는 거니, 모르는 척하는 거니’라는 언니, 수연(김정현 분)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초록색 지도책을 작성한 우제에게 그 골목길을 가르쳐준 장본인이 이지 자신임을 깨닫는 것처럼, 오로지 순수한 별개의 경험은 없다. 지도책을 찾기 위해, 재키의 메모를 따라 추억을 거슬러 올라간 이지가 찾게 되는 게 20대에 일어났던 따스한 골목길 같은 추억과 아픈 상처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그녀가 정말로 만나고 싶었고, 정말로 사랑했고, 그러면서도 그녀를 가장 많이 아프게 했던, 바로 자기 자신을 찾은 것이다. 그 순간은 타인으로 정의했던 그들이, 나 아니었던 것이 아니요, 언제나 나였던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4.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
우리에게 곁에 있었으나 늘 없는 듯이 대했던 우리 이웃, 우리 민족에 대해 털어놓을 때가 됐다. 사실 한참을 지났는지도 모른다. 종종 회자되는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여성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들먹이면 따라 나오는 백의민족의 신화를 벗겨내고, 다양성, 다문화의 세련된 포장을 걷어낼 때가 됐다. 하지만 이여진 작가는 거시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개인의 차원에서 시작해 결국 개인의 문제로 끝맺는다. 연극은 이지가 잠들어 있는 꽤 긴 장면부터 시작한다. 관객들은 연극이 정확히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한참 잠을 자던 이지가 우제의 꿈을 꾸는 것은 수분이 흐른 뒤이다. 이지의 집 밖에는 하얀 모래가 쌓여있다. 이것은 눈이 되기도 하고 사막의 모래가 되기도 한다. 옥탑방이 되기도 하고 반지층이 되기도 하고 컨테이너가 되기도 하는 중앙의 평상 무대는 현실의 무대가 된다. 그 경계선 밖은 꿈이 되도 하고 환상이 되기도 하고 재키의 작품이 재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실을 나타내는 무대는 제한적이지만 바깥 무대는 제한이 없다. 배우들은 관객이 사용하는 입구와 계단까지 무대로 활용한다. 환상과 꿈이 주를 이루는 이 무대는 죽은 우제와 소녀가 등장하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창문은 이지의 집과 바깥세상을 확실하게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며 가슴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지를 외부와, 과거와, 자꾸만 침입을 감행하는 그녀의 무의식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한다. 무대 장치는 이렇듯 안과 밖,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을 가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중으로 구조화된 이 공간은 골목길의 구석구석을 나타내며, 인물들의 주름잡힌 무의식과 의식이 연상작업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연과 이지가 초록색 지도책을 찾아 이동하는 경로는 현실적인 무대이자 주요 플롯이다. 그 과정에 발견한 재키의 메모는 사실 그 정체가 모호하다. 일기인지, 영화 시놉인지 알 수가 없다. 재키의 일지이자 창작물인 메모장에 초록색 지도책이 나오는 부분에서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다. 이 부분에서는, 양피지이론과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연대기적인 특성과 논리를 따지지 못하게 무력화시키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효과와 만난다. 이렇듯 재키의 메모장은, 더 확대해, 이여진의 <유실물 보관소와 바람개비>는 이중적이고 모호한, 해석되기를 요구하는 기표들로 가득하다. 이중의 무대 구조, 작품 속의 작품은 액자구조의 형식을 닮았기도 하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지와 재키가 지하철에서 만나는 장면은 음향과 무대장치로 관객에게 제대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관객들은 미소가 퍼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희망적인 기대를 해보지만 지하철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이 많이 희석되는 부분이다. 재키가 불법이민자인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재탄생시킨 글을 통해서 동료들의 실정을 소개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 바로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소수자들의 문제 역시도 개인들이 경험하는 총체적인 경험 안에서 풀어야 할 과제이고, 이지와 재키가 만나는 장면은 환상이나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란 무대에서 이뤄져야 할 테니까 말이다. 이지가 몇 번을 읊조리는 주문과도 같은 ‘그래, 그럴 수도 있지’로 글을 맺어야겠다. 바람개비를 사이에 두고 이지와 재키가 미소를 주고받는 엔딩은 자신의 증상에 관심을 갖고 좀 더 견딜만하게 자신의 증상을 즐기며, 자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았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정을 통해 자신을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말이다. 좀 더 나가간다면 다문화의 긍정적 요소들과 혼종의 가치를 제시하는 일이 남아있지 않을까. 우리의 비참하고 힘든 현실을 우리가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하겠는가? 정작 너무 고통스러워 외면을 모면하기 어렵다면 조금 더 참을만하고 즐길만한 증상으로 바꿔주고 타자를 포함한 ‘나’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의 힘을 믿고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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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의 가죽을 벗고 무대의 옷을 입다 - <호랑이를 부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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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희(공연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연출: 이기쁨 극단: 창작집단 LAS 공연기간: 2011.6.23. ~ 2011.7.3. 공연장소: 마방진소극장 관람일시: 2011.6.28.
우리 설화에서, 동물이 사람으로 환신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동물이 사람과 같은 영혼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든 사람의 주위에서 사람으로 변신해 살아갈 수 있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이야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동물과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대체로 비극적 결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인간의 우월감이 만들어낸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리 동물이 인간과 같은 영혼을 지닌 존재라 해도 ‘경계’는 존재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움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삼국유사> 권5에 등장하는 ‘김현감호’ 설화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보다 극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즉, 호랑이 여자에게 난폭한 오라버니가 셋 있어 그들이 사람을 해친다는 장애물이 설정되고, 그 오빠들 대신 호녀가 목숨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신분을 높인다는 속죄양 모티프가 더해진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이렇게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이야기는 보기드물고, 더구나 이렇게 극적이면서도 다양한 모티프를 가진 사랑 이야기는 여타 설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면모가 ‘김현감호’ 설화가 다른 설화들을 제치고 무대화되는 영광(?)을 누리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이전에 ‘김현감호’ 설화를 무대화한 작품은 뮤지컬 <송산야화-호랑이처녀 바람났네>였다. <송산야화>는 ‘김현감호’ 설화의 예스러운 맛을 살리면서도 깊은 산과, 그 속의 절이라는 고립된 공간을 두 남녀의 비밀스런 사랑의 장소로 재탄생시켰다. 연극 <호랑이를 부탁해!>는 <송산야화>와 달리 ‘김현감호’ 설화가 가진 사원연기설화의 특징을 깨고 무대를 도시 한복판으로 끌어내렸다. 탑돌이를 하며 사랑을 찾던 설화 속의 ‘김현’은 사방군데 빚을 지다 못해 담뱃값 400원을 낯선 여자에게 빌리는 말단 조폭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난폭한 오라버니들 대신 목숨을 버린 ‘호녀’는 호랑이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가 섞인 유전자 실험 프로젝트의 산물 ‘윤원호’로 변신했다. 이렇듯 <호랑이를 부탁해!>는 ‘김현감호’가 입고 있는 설화라는 이름의 털가죽을 벗겨내고 그 고기를 새롭게 요리해 보려 한 시도가 발견된다. 또한 재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각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보려 한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 흔적은 김현이 윤원호의 정체를 알아가고 극복하는 과정을 극의 곳곳에 배치한 데서 찾게 된다. 빚 받으러 온 일수 아줌마를 쫓아낼 때 윤원호가 호랑이의 본성을 슬쩍 드러낸 것, 북한산에서 야생동물에게 찢긴 듯한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 멘트의 반복, 김현이 우연히 목격한 유치원 꼬마들의 대화에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비밀을 말해주겠다며 호랑이의 본성을 보여준 것, 김현이 빚을 진 친구의 직업이 연구원으로 그가 호랑이인간 프로젝트의 연구를 맡고 있다는 설정 등은 설화를 무대화하는 데 있어서 이 젊은 창작집단이 거쳐온 고민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은 좁은 무대공간을 극복하는 아이디어로 무대화되었다. 두 개의 벽체를 열고 닫고 옮기면서 김현의 방-윤원호의 집-공원-거리 등으로 공간을 바꿔나가고, 멀티남과 멀티녀를 이용해 다양한 캐릭터를 무대 위에 재빠르게 구현한 점은 창작집단 LAS가 가진 자생력을 증명해냈다. 또한 ‘김현감호’ 설화의 호녀가 보여준 속죄양 모티프를 거꾸로 뒤집어 가족의 죽음으로 분노하여 호랑이의 파괴적인 본성을 드러낸다는 캐릭터 설정 역시 이들이 설화를 재해석하는 데 있어 안이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이어서 기억을 잃은 윤원호가 폐기당한 프로젝트 실험체로서 동물원에 갇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김현은 동물원 청소부가 되어 윤원호의 곁을 지키는 결말은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한 설화들이 가진 경계성을 두 사람의 영역을 구분지은 동물원 철창을 매개삼아 구현해냈다. 이 결말이, 자칫 재해석이 가져올 수 있는 원 이야기와의 괴리감을 극복하고 ‘김현감호’ 설화가 보여준 비극적 사랑을 현대 연극의 무대로 재생시키는 힘이었다. 그런데, 설화의 재해석에 있어서 창작집단 LAS가 보여준 균형감과 진지함은 세 가지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빛을 발할 것이라는 숙제를 남긴다. 무엇보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여자와 아무 생각없는 백수 청년이 감정이 상승되는 극적인 계기 없이 윤원호의 부모 앞에서 열정적인 연인으로 변신하고, 남자가 호랑이 유전자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여자를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인다는 설정이 설득력이 없다. 설화에서야 단 한순간에도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김현감호’ 설화의 산 속 공간을 현대의 도시로 끌어내렸을 때는 그에 걸맞게 새로운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두 남녀가 ‘필요’에 의해 만나게 된다는 설정을 선택했다면, ‘필요’에 의한 만남이 어떻게 해서 목숨을 거는 사랑, 자포자기한 윤원호의 파괴적 본능까지도 감싸안는 사랑이 되는가에 대한 브릿지를 걸어두었어야 했다. 또,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멀티맨들이 필요 이상의 존재감으로 무대를 채우면서 아마추어 연극 이상의 수준으로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의아한 것은 멀티맨의 캐릭터들은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하게 구성되지 않았는데 그들의 역할 하나하나가 드라마에 장애가 되는 점이었다. 이러한 장애들을 품은 채 멀티맨들이 김현과 윤원호의 사랑을 노래로 부르면서, 이 연극이 가진 장르적 정체성을 의심하게 한다. 과연 이것이 연극인지, 뮤지컬로 변신하기 이전의 과도기를 보여주는 데 그쳤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호랑이를 부탁해!>는 단순히 소재의 빈곤함을 쉽게 땜질해 보려는 편리한 선택에서 벗어나, ‘김현감호’ 설화의 공간, 인물, 시대라는 큰 틀을 바꾸어 무대화하는 공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공력이 현재 이들이 가진 현실적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고 장르의 모호함이나 드라마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힘이 되려면, 또다른 고민에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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