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싱 dressing
드레스Dress는 오래전부터 써오던 익숙한 외래어다. 원피스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옷을 통틀어 일컫는다. 여기에 ing를 붙이면 요리용 소스가 되어 야채에 맛을 끼얹는 양념이 되기도 한다. 한편 의학적으로는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덮는 붕대 감기 내지 반창고絆瘡膏 붙이기를 말한다. 나는 하루걸러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인공신장을 이용해 체내 노폐물을 걸러내는 투석透析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그러자면 굵다란 바늘 두 개를 정맥에 꽂아 인공신장기와 연결한다. 치료가 끝나면 바늘 뺀 자리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기 일쑤라서 간호사들이 국소지압 지혈법을 구사한 후 흡수성이 좋은 솜뭉치와 접착력이 강한 반창고로 이중 삼중 눌러 드레싱을 한다.
나도 환자들을 치료하고 드레싱을 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 야전병원에서 군 생활을 하였다. 팔이나 다리 부분은 드레싱이 수월한 편이었고 머리 부분은 지혈도 드레싱도 힘들었다. 그리고 대부분 드레싱 부분이 남의 눈에 띄는 경우가 많아서 군의관은 나더러 ‘치료는 의술이고 드레싱은 예술이다.’ 라고 이르곤 하였다. 그래서 드레싱을 할 때는 시각적 미감을 살리느라 노력하였다.
위생병 역할은 간호사와 비슷했다. 환자가 내원하면 의사 손보다 위생병 손이 더 많이 갔다. 접수에서 퇴원까지 위험한 수술이 아니면 위생병이 자초지종 처치하였다. 군대라는 특성상 총상환자가 많았다. 60년대는 비무장지대에서의 돌발사고가 50%, 안전사고가 30% 쯤 이었다. 나머지는 비뇨기과 환자가 10%, 유행성 질환자가 10%, 내과 또는 피부과 환자가 소수 있었다. 월남 파병이 한창이던 그 시절 북의 도발이 잦았다. 내가 속했던 동부전선에서는 매주 1~2회 북측의 도발과 북한병사들의 월남越南이 있었다. 수류탄 사고와 건드리면 폭발하는 부비트랩buby-trap 사고가 잇달았다. 그로 인해 발목이 절단되는 중형급 응급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당시 전방에 배치된 사병들의 평균 학력은 약간의 국졸, 50%정도 중졸이었는데 고졸이면 고학력이었고 대재나 대졸은 희소하였다. 학력이 높으면 후방에 배치되거나 전방이라도 사무직으로 뽑아 앉혔으므로 학력이 낮으면 보병으로 수색업무나 초병으로 근무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사고가 있었다. 근무 교대를 하던 일등병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총을 발사하여 한 명이 즉사하였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사고였지만 경위를 조사한 헌병의 보고는 오발이라며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요즘 같으면 순직처리가 가능한 근무 중 사고였지만 군의관의 진단서 또한 총상으로 인한 심정지였다. 당시에는 이와 유사한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훈련소에서는 생존훈련과 살인훈련을 받았다. 체력단련, 팀워크훈련, 제식훈련, 사격훈련, 침투훈련, 화생방훈련 등이었다. 위생병이 되려면 훈련소 퇴소 후에도 군의학교에서 각종 의료관련 처치술을 6주간 이수하여야 했다. 환자 이송, 응급처치, 마취, 인공호흡, 지혈법, 드레싱을 배웠다. 병원 현장에서는 진료실 관리에 관한 전반적 업무를 보조하였다. 환자의 혈압과 맥박, 혈당 등을 체크 기록하고 투약, 처치, 시술에 이르기까지 치료 업무도 병행하였다. 특히 군에서는 군의관의 처방보다 병명에 따른 기본 처방이 있어서 소화기계통 환자에게 소화제를 처방하거나 외상환자의 응급처치를 위해 군의관이 동원되지는 않았다.
나는 군 생활 3년 동안 12명의 새 생명을 조산助産하였다. 하사관 대부분이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였고 사택이 외진 곳이라 의원은커녕 보건소와도 거리가 멀었다. 친정도 시댁도 없이 산모 혼자 출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첫 아이는 매우 조심스러웠으나 회를 거듭하면서 탄생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감탄하였다. 탯줄을 묶어 자르고 코와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목욕을 시켜 물기를 닦은 후 옷을 입히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생아의 울음은 경악驚愕이 아닌 환희歡喜였고 출산을 도왔다는 기쁨보다 생명의 탄생이 청춘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고의성은 없었지만 제대할 때 손을 꼽아보니 그동안 내가 염습殮襲한 시신이 12구였다. 12명 새 생명을 받아내고 12구 시신을 보냈다니 공교로운 일치였다. 염습은 알코올 목욕을 시키고 귀, 코, 입 등 구멍을 솜으로 막는 일이 우선이다. 이 또한 반창고를 쓰지않는 드레싱이었다. 경직이 오기 전 새 옷으로 갈아입혀야 하기에 상당한 숙련을 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편안해 보이는 표정에서 죽음의 경건함을 보았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 외에 생자와 사자의 차이는 없었다. 그들의 침묵은 차라리 함성이었다. 체온에서 느끼는 싸늘함은 생자를 향한 냉소 같았다. 죽어서 숨을 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결론도 얻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들이쉬는 공기 한 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투석치료를 받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숨 쉬는 일뿐이다. 가급적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치료실의 냉난방이 우수하고 간호사들의 정성 또한 지극하여 불편은 없다. 그래도 치료용 침대에서 꼼짝없이 4시간을 버티기란 등이 배기는 일이기도 하다. 매시간 혈압을 점검하면서 투석이 원만히 진행되는지 살핀다. 투석을 전후하여 체중을 소숫점 두 자리까지 확인한다. 부작용이 없을 만큼만 불순물을 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약을 매주 점검하고 처방한다. 치료비의 상당부분을 의료보험에서 지원한다. 중증장애인으로 간주하여 노동력이 제한된다는 이유로 전기, 수도, 도시가스 사용료를 할인해준다. 차량 구입 시 소득세도 할인 받고 주차비도 반값이다. 간호사는 반창고로 드레싱을 하고 정부는 복지로 드레싱을 해 준다.